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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순성길#전구간#일시종주(완)
서울역에서 숭례문으로 이동하여 서울의 내사산인 좌청룡 낙산 우백호인 인왕산 남주작인 목멱산 북주작인 백악과 사대문인 인인 흥인지문(동대문) 례인 숭례문(남대문) 의인 돈의문(서대문)터 지인 숙정문(북대문)과 오소문인 소의문터 창의문(자하문) 혜화문 광희문 남소문터를 연결하는 약22km 둘레길을 연습산행으로 쉬는시간 포함 10시간30분 걸려 성공적으로 완주를 하다
답사에 필요한 5만분의1 지형도 도엽명 : 서울
영진5만지도 : 96, 97쪽
언제 : 2023. 03. 18(토) 흐림 맑음
누가 : 신경수 홀로
왜 : 그동안 이런저런 사유로 부분적으로 답사를 했던 한양도성 순성길을 한번에 연결해서 답사를 해본적이 없어 이중 삼중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단한번에 완주를 하고 싶은 열망과 과연 정부에서 발표한 도상거리가 어느 정도 정확한지 알고 싶어 연습산행을 멀리갈 필요없이 한양도성길로 정하고 답사를 한다
어디를 : 경의중앙선 전철 서울역에서 숭례문으로 걸어가 이후 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 시계방향을 한바퀴 돌아 다시 숭례문까지
한양도성 순성길 전체구간 궤적
한양도성 순성길 궤적1
한양도성 순성길 궤적2
답사경로
내가 답사한 경로로 보았을 때 가장 합리적으로 구간을 구분하였다
걸린시간은 휴식시간 포함된 시간이라 변수가 많음
제1구간 #인왕산구간 약5.9km 약3시간
#숭례문(남대문, 20)-#소의문터(서소문고가고개, 30, 0.6)-#정동교회사거리(30, 0.8/1.4)-#돈의문(서대문)터(정동고개, 강북삼성병원사거리, 40, 0.6/2)-#사직터널위(70, 0.8/2.8)-#선바위무악재갈림길(190, 0.9/3.7)-#범바위(250, 0.2/3.9)-#인왕산(△339.9, 0.5/4.4)-#기차바위갈림길(311.7, 0.2/4.6)-#자하문터널위 도로(120, 0.9/5.5)-창의문(자하문 110, 0.4/5.9)
제2구간 #백악구간 약4.8km 약3시간
#창의문(자하문, 110, 0.4/5.9)-#백악(342.5, 0.7/6.6)-#청운대(290, 0.3/6.9)-#곡성봉(곡장봉, 310.9, 0.4/7.3)-#숙정문(210, 0.6/7.9)-#말바위봉(△207.8, 0.5/8.4)-#와룡공원(160, 0.6/9)-#혜화초교갈림길(60, 0.9/9.9)-2차선도로고개(50, 0.7/10.6)-혜화문(50, 0.1/10.7)
제3구간 #낙산구간 약4.5km 약2시간
#혜화문(50, 0.1/10.7)-#낙산(124.4, 1.2/11.9)-#흥인지문(동대문, ▣20.6, 1.1/13)-#광희문(40. 1.4/14.4)-장충단고개(60, 0.8/15.2)
제4구간 #남산구간 약5.5km 약3시간
#장충단고개(60, 0.8/15.2)-#성곽마루봉(110, 1.2/16.4)-#국립국악원사거리(90, 0.6/17)-#남산둘레길삼거리(110, 0.5/17.5)-#남소문터(120, 0.1/17.6)-#267.5봉(군부대)어깨(230, 0.4/18)-#목멱산(남산, 270.9, 0.8/18.8)-#잠두지전망대(210, 0.4/19.2)-#회현사거리(50, 0.7/19.9)-#회현고가 남산육교(40, 0.3/20.2)-숭례문(20, 0.5/20.7)
구간거리 : 21.7km 접근거리 : 0.5, 도성거리 : 20.7 하산거리 : 0.5
구간시간 10:30 접근시간 0:10 도성시간 6:10 하산시간 0:10 휴식시간 4:00
51463보 절대보폭으로 36km 8시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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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병치레 때문에 산신령님을 뵌지도 1달이 넘어가고 있다
아직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샌달을 신고는 다닐만 해져
그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연습산행지로 고른 것이
조그만 모임의 인문산행지인 한양도성순성길을 한번에 완주를 하기로 했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로 여기저기 하다가 보니
부분적으로는 모두다 답사를 끝낸적이 한두번도 아니지만
단 한방에 끝낸 자료는 없기 때문에 자료를 만들 욕심도 있기 때문이다
하다가 정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하면 아무데서나 탈출할수 있고
걸음이 느려졌다면 야간산행을 해서라도 끝낼 욕심으로 랜턴까지 챙겼다
물론 쓸일은 없을 것이다
한양도성 순성길은
좌청룡인 낙산 우백호인 인왕산 남주작인 목멱산 북주작인 백악과
인인 흥인지문 의인 돈의문터 예인 숭례문 지인 숙정문과
그 사이 사이를 잇는 숭례문과 돈의문터 사이 소의문터
돈의문터에서 숙정문 사이 창의문(자하문)
숙정문에서 흥인지문 사이 혜화문
흥인지문에서 숭례문 사이 광희문과 남소문터
즉 내사산과 4대문 그리고 5소문을 이어주는 성곽길이다
중간중간 멸실된 구간도 있지만 대부분이 지금도 그대로 보존이 되고 있는
조선500년의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탐방길이다
18.6km라고 하지만
정부에서 약간씩 돌아가는 길을 계산에 안넣은 것 같다
그래서 실제로 지하철역사를 빠져나온다던지 건널목을 빙돌아서 나온다던지
길이 없어 빙돌아서 성곽길을 찾아가던지 하는 구간이 있으므로
실제로는 20km정도 거리이며
교통편으로 접근하는 경로를 계산하면 나같은 경우 1~2km정도 가하면
한양도성순성길 완주거리는 약21.5km가 된다고 보아야한다
너무나 설명이 길어지고
한번에 SNS에 올릴수도 없으므로
작년에 다녀온 안산 인왕산 백악 답사기와
안산 인왕산(우백호) 백악산(북현무) 곡장봉 말바위봉-어느 화사한 봄날에 후배들과 서울산 나드리
말바위 낙산 흥인지문 답사기와
제2회 인문산행-#백악#말바위봉에서 #한양도성#순성길을 따라 #흥인지문까지
흥인지문 남산 숭례문 답사기를 링크로 걸고
인문산행-#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 #흥인지문에서 #남산을 넘어 #숭례문까지
거기에 누락된 내용이나 강조할 내용들을 중점으로 다루고
거기에 나타나지 않은 숭례문 선바위갈림길 까지는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기로 한다
보통 4구간으로 진행을 하기도 하지만
조금 걸을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침 일찍 나처럼 시작하면 쉬는시간 포함 10시간 정도면 완주할수 있다
집에서 6시에 출발하여 전철을 타고 서울역에 6시30분에 내려
지하도를 건너 약500m 정도 가면
숭례문 좌쪽 길건너편에 이른다
접근거리 약0.5km 5분 걸렸으나
진행방향을 찾느라 둘레둘레 하다가 보니 한 10분 걸린 것 같다
20
숭례문(남대문) : 6:40 6:45출(5분 휴)
잘 찾으면 높은 이정주에 샛길로 들어가면 순성길이라고 하고
땅바닥에도 순성길 동판이 하나 박혀있다
여기 요 짧은 성곽은 옛성벽의 흔적을 재현하고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복원 정비한 구간이라고 한다
어마어마한 빌딩 담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곽이 몇M 나오다가 없어지고
#한양도성#순성길#동판은 잘 찾으면 가는내내 찾아볼수 있을 것이다
가칭 내가 삼각지맥(?단맥?)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산줄기를 다시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일보빌딩 앞 2호선전철이 지나는 서소문고가도로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우쪽 길가에 있는 #소의문터#안내석에 따르면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일제가 철거를 했다고 한다
이정판에 지나온 숭레문0.6, 갈길 돈의문터1.35
1980년도 이곳 모일보 주차장에서 세금을 탈루한 체납차량을 발견하고
번호판을 영치하려고 번호판을 떼다가 관리인한테 붙잡히고
담당과장에게 항의를 하고 난리가 났었을 때
내편이 되어주어야할 과장이상 모든 공무원들이
언론기관 담당자한테 말한마디도 못하고
요샛말로 깩소리 한번 못해보고 절절기며
일만들지말고 당장 들어오라는 말을 듣고 너무나 허망해서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같이 나간 동료후배(구0완 전0빈 등이었던 같다?)에게 너무 미안해
술 한병 사들고 안산으로 기어 올라가 신세타령을 한 것 같다
너무나 오래전 이야기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이 스친다
드런 그런 시절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슬프다
30, 0.6
서소문고가도로 끝지점 소의문터 : 6:50 6:55출(5분 휴)
좌로 내려가 고가도로밑 사거리에 이르고 우로 건너가
다시 시청쪽으로 올라가 소의문터 건너편에 이른다
골목길로 가다가 순화어린이집공원에 이르면
무심코 길따라가면 안되고
공원앞에서 우쪽 큰건물 주차장간다고 들어가보면
1차선 길이 죽이어진다
#배재공원동판이 나오고
1895년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의사(1860~1935)가 지은
안사람 의병가 동판과
#안사람#의병가
아무리 왜넘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넘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소냐
아무리 남여가 유별한들 나라없이 소용있나
우리도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금수에게 붙잡히면 왜넘 시정 받들소냐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만세로다
가리방인쇄를 하고 있는 안사람동상을 뜻깊게 보고
#덕수궁돌담을 만나는 정동교회 사거리에 이른다
이정주에 따라 좌쪽길로 가다가 보니
오늘이 토요일 촛불집회를 하는 날이라 그런지
경찰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마음이 조금은 불안해진다
고등시절 젠센기념관이 있던 곳이다
그곳에서 젊은날 시와 수필 등 글을 쓰고 낭독하는
속칭 서우회 서클이라는 활동을 하던 곳이다
잘난척 하느라 그랬는지 전통이
남녀 공히 속칭 일류고등학교 다니는 학생이 아니면
들어갈수도 없는 콧대센 모임이었던 것 같았다
그때는 그게 유유상종이라고 일류병이 단단히 들었는지
그런 것 느낄새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일년에 한번인가 두번인가 서우회의밤이란 낭독회를 열고
요즘 와서 친일파로 분류가 된
그대 당시엔 가장 존경받던 미당 서정주님이 발표회 평을 해주시곤 하던
쾌나 유명한 모임이었다
경력도 내가 10회니 생긴지 10년이나 되었고
장학사사건 등 몇년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났지만
선배중에 한사람이 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모임이 해체되고 전회원 수배령이 내려졌고
잡힌넘은 지독한 고문 등을 당했고
하루 아침에 군대 끌려가고 난리였다
아마도 그 사건이 제일 컸던 사건으로 기억이 난다
간첩은 무슨 개뿔 나중에 전원 무죄가 났지만
이미 몸과 마음 가족 모임 등 모든 것은 망가질대로 망가진 후였다
30, 1.4
대한민국의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정동교회 사거리 : 7:10
오후에 촛불집회가 큰 불상사없이 잘 끝나기를 바라며
좌로 가다보면 서우회모임 끝나고 잠간 여운을 즐기던
서울우유협동조합 시음장은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아
감개가 무량하다 벌써 55년이 넘던 그시절 이야기들
#덕수궁#중명전 을사늑약이 강제로 맺어지던 치욕의 장소 안내판
왜 다른 전각들은 전부 없어졌는데 중명전은 그대로 있을까?
정동극장도 그대로 있고
이화여고정문옆에 한옥문이 있는데 옛날 #이화여고사주문이다
즉 이화여고 정문인데 1923년 일제가 철거하고 일본풍으로 만들었던 것을
1999년 옛모습으로 복원한 모습이다
하여간 일번넘들 손을 안댄곳이 없다
시상에 학교 대문까지 바꿔치기를 했으니 말이다
그때는 여기서부터는 사람이 많든 적든 벼슬이 높던 낮던 다 말에서 내리라는 즉 말을 타면 안된다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비는 그대로 있다
#근대유산1번지정동 동판
#정동회화나무
2003년 캐나다대사관 신축시 상태가 안좋았지만 뿌리의 위치를 감안하여 설계를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대사관의 노력으로 건강을 되찾아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캐나다 그래서 그런지 선진국치고는 세계적으로 욕을 안먹는 나라인 것만은 사실이다 고맙습니다 자만 캐나다인디언들 문제는 어찌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520살 잡수신 회화나무 할배인지 할멈인지
세맨으로 수술을 하고 지지대로 지탱하고 계시는
회화나무 어른신도 그대로라 그때가 그립습니다
잠시 가면 사거리 교차로가 나오고
정동고개 강북삼성병원사거리 돈의문(서대문)터(40, 2) : 7:15 7:20출(5분 휴)
강북삼성병원 옆길로 오르다보면
잎이 나오기전 꽃이 먼저 나오는 꽃의 한종류인
바라보고 있으면 걱정 근심이 사라진다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한국토종식물
향기 은은한 미선나무 하얀꽃이 청초하게 청순하게 정갈하게도 피었다
보통 개나리 진달래 벚꽃보다 일직 핀다
돈의문박물관 너무 일찍 도착해
도장찍는 것을 물어볼 사람이 없어 그냥지나가
드디어 성곽이 나오고
우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 가보니
무슨 도예방인지 한옥들만 청사초롱을 달고 있고
문은 잠겨있어 도성은 올라갈수 없다
다시 내려와 성곽 좌쪽으로 조성된 공원길로 가는데
산수유
백매
홍매가 만발하게 피었으나
개나리 진달래는 아직은 아닌 것 같다
가다가 우쪽으로 올라가는 공원이 보이면 그리로 오르면
#어니스트베델집터(배설가지) 안내판이 있다
32살의 젊은 나이인 1904년에 한국에 온 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 1872~1909)은
이해 7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항일언론활동을 힘껏 지원하였다
이곳은 그가 조선에 와서 정착해 사망할때까지 5년을 가족과 함께 산 한옥터이다
말은 안하고 있지만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배설은
왜 젊으나 젊은 나이인 37살에 죽어야만 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그가 이억만리 한국땅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인류애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저절로 앞섶이 수그러들며 경건해진다
잠시 그가 살다간 그때 치열했던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가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대한매일신보는
대한 제국 광무 8년(1904) 7월 18일에 양기탁이 영국인 베델과 함께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한 항일 신문
박은식과 신채호가 주필이 되어 국한문으로 발행되었다
1910년 국권 강탈과 더불어 일본 통감부에 넘어가 매일신보로 이름이 바뀌고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었다
신민회 新民會
1907년에 안창호가 양기탁(梁起鐸), 이동녕(李東寧), 이갑(李甲) 등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항일 비밀 결사 단체.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우고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는 등 꾸준히 항일 활동...
신채호 申采浩
사학자ㆍ독립운동가ㆍ언론인(1880~1936). 호는 단재(丹齋)ㆍ단생(丹生)ㆍ일편단생(一片丹生). 성균관 박사를 거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에 강직한 논설을 실어 독립 정신을 북돋우고, 국권 강탈 후에는 중국에 ...
양기탁 梁起鐸
독립운동가ㆍ언론인(1871~1938). 호는 우강(雩岡).
1905년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주필에 취임하였다.
신민회를 조직하고 미국 의회 의원단에 독립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항일 운동에 헌신하였다.
무궁화가 無窮花歌
대한 제국 융희 원년(1907) 10월 30일에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애국가.
영국의 언론인(1872~1909). 런던 데일리 뉴스의 특파원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여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였다.
출처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을 보면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1910년 8월 16일, 통감은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이후 한국은 일제강점기 36년을 겪으며 치열한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정의
1910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역사적 배경
경술국치조약(庚戌國恥條約)·한일병탄조약(韓日倂呑條約)이라고도 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한국의 주권을 침탈하기 위해 러일강화조약(포츠머스조약)에서 일본측 전권위원의 결의 표명으로, ‘일본국 전권위원은 일본국이 장래 한국에 있어서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조치가 동국의 주권을 침해하게 될 경우 한국 정부와 합의한 뒤 이를 집행할 것을 여기에 서명한다.’는 내용을 회의록에 넣었다.
이는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침탈할 경우 반드시 한국 정부의 동의를 얻고 집행하겠다고 국제적 약속을 하면서 열강의 양해를 구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일제는 무력으로 일거에 한국을 집어삼키지 못하고, 국제법상 한국의 황제와 정부의 동의가 있을 때에 한해 합법적 형식을 취하여 완전병탄을 집행할 준비와 절차가 필요하게 되었다.
1. 을사조약의 체결과 고종의 강제 퇴위
일제는 먼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 대한제국의 내정을 지도 감독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제2차 한일협약(을사5조약)’을 작성하여 대한제국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조약을 체결할 것을 강요하고 무력으로 궁궐을 포위, 위협하였다. 결국 1905년 11월 17일 내각의 참정대신(내각수반)이 반대하였으나 5대신의 동의를 받아내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끝까지 이를 비준하지 않고 서명과 옥새 날인도 하지 않아, 이 을사5조약은 체결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체결되지 않았다. 당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제 국가였으므로 전제군주의 승인과 서명날인, 비준은 조약체결의 필수 요건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끝까지 조약비준을 거부하자, 일제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이 서명날인한 조약문을 가지고, 마치 을사5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공포한 다음 이를 무력으로 강제 집행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먼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그 해 1월 17일 대한제국 외부(外部)를 폐지하였으며, 1월 20일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관·공사·영사제를 모두 폐지하였다. 그리고 그 해 2월 1일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문을 열었다.
이후 일제 통감부가 중심이 되어 대한제국의 완전 병탄을 위한 공작과 정책이 강행되기에 이른다. 통감부는 즉각 고문경찰제도(顧問警察制度)를 실시하여 한국의 경찰권을 장악하고, 1907년 5월이완용(李完用) 내각을 수립하여 통감부 밑에 두었다.
그 해 6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고종은 을사5조약을 황제 자신이 승인하거나 서명날인하여 비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조약 체결은 무효이며, 따라서 일제의 국권박탈과 통감부 설치는 불법이란 사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 세 특사를 파견하였다.
이것을 트집 잡아 일제는 1907년 7월 19일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황태자 순종을 즉위시켰다. 그리고 5일 후인 7월 24일 일본인 관리를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으로 임명하고, 통감부가 내정을 직접 지배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둘러 한국을 완전히 빼앗을 목적으로 7월 22일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통감부에 이양하게 하였다.
7월 24일에는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신문지법을, 7월 27일에는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제정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무방비 상태에 두기 위해 7월 31일 대한제국 군부(軍部)를 폐지하고,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2. 항일투쟁의 전개
일제의 완전병탄정책이 강행되던 1904년 여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항일의병무장투쟁은 1907년 8월 1일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급격히 고양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의병운동이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급속히 퍼지자 일제의 한국병탄정책은 심대한 타격을 받고 이에 대응하느라 일정이 지연되었다.
1909년 일제는 완전병탄정책을 다시 강화하기로 하고 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이 속한 일진회로 하여금 한일합방론을 제창토록 교사하였다. 초대 통감 이토(伊藤博文)는 그 해 4월 10일 일본 내각총리 가쓰라(桂太郞), 외무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 등과 함께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합의하였다.
1909년 6월이토가 통감직을 부통감 소네(曾荒助)에게 인계한 뒤 귀국하여 추밀원 의장직을 맡은 직후인 7월 6일, 일본 내각회의는 비밀리에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의결하고 즉시 일본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은 그 해 9월부터 2개월간 이른바 남한대토벌을 실시, 한국 의병들의 항전을 종결시킨 뒤 병탄을 마감 지으려고 획책하였다.
그러나 두 개의 큰 사건이 일어나 일제의 계획은 다시 차질을 빚게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한국 병탄에 대한 러시아의 양해를 얻고 만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극동을 여행 중이던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Kokotseff)와 회담을 하려고 만주 하얼빈에 갔던 이토가, 한국인 의병장 안중근(安重根)에 의해 저격을 당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뒤이어 그 해 12월 2일 한국의 친일파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애국청년 이재명(李在明)의 습격으로 중상을 당해 집무불능 상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제순이 임시내각총리대신서리를 맡았으나 친일내각 구성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일제는 그 해 12월 4일동경(東京)에서 낭인단체인 고쿠류회(黑龍會)가 수상의 지시를 받고 초안을 작성, 수상 가쓰라의 검열을 받은 ‘한일병합에 관한 상주문(上奏文)’과 청원서·성명서를 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한 일진회 간부에게 주어 서울에서 발표하게 하는 등 한일병합 여론을 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애국계몽운동파가 총궐기하여 일진회 일당을 격렬하게 성토하고 일제의 의도를 규탄하여 일제의 한국병탄 기도는 다음해로 넘어가게 되었다.
3. 한국병탄 강행
1910년 3월 26일 일제는 안중근을 처형하여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 사건을 종결지은 다음 서둘러 한국병탄을 강행하였다. 1910년 5월 30일 병약한 소네를 통감에서 퇴임시키고 현역 육군대장으로 육군대신인 데라우치(寺內正毅)를 통감으로 겸직하게 하였다.
또한, 6월 24일박제순 내각에 강요하여 한국 경찰사무를 완전히 위탁하는 협정을 체결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경찰관제는 폐지되고, 통감부가 경무총감부를 설치하여 일반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하였다. 통감부는 헌병경찰제를 채택, 헌병사령관이 경무총장을 겸임하고, 지방의 헌병대장이 각도의 경찰부장을 겸임하게 하며, 헌병경찰수를 대폭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정부에 고용되어 있던 한국인 경찰관 약 3,200명, 일본인 경찰관 약 2,000명, 일본인 헌병 약 2,000명, 한국인 헌병보조원 약 4,000명, 일본군인 2개 사단 등의 무력을 전국 각지에 거미줄같이 배치, 한국인의 어떠한 반항도 탄압할 수 있는 무단 체제를 갖추었다.
7월 23일서울에 온 제3대 통감 데라우치는 일본 수상으로부터 병합조약 초안의 대강은 물론, 병합 후의 대한 통치방침까지 내명받고, 한국에 온 즉시 한국인의 저항 발언을 봉쇄하기 위해 『대한민보(大韓民報)』 발행을 정지시키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판매금지시켰다. 이어서 7월 29일 부상에서 회복된 이완용을 다시 총리대신으로, 박제순은 내부대신으로 하여 이완용 내각을 구성하였다.
8월 16일데라우치는 이완용과 조중응(趙重應, 농상공부대신)을 통감관저로 불러 이른바 병합조약의 초안을 보여 주고는 수락을 얻어서 비밀리에 의논한 뒤, 8월 18일이완용 내각의 내각회의에서 합의를 보게 하였다.
드디어 1910년 8월 22일 서울거리에 15간마다 일본 헌병들을 배치해 놓고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개최, 이른바 한일병합이란 안건을 이완용 내각이 결의하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 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조약체결을 숨긴 채, 사회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 이를 반포하였다.
4. 한일병합조약의 내용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의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 이에 양국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일본국 황제폐하는 통감 자작 데라우치를,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의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전권위원은 합동협의하고 다음의 제조를 협정하였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황태자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 대하여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줄 것이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을 담당하고 같은 뜻의 취지로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 주며, 또 그들의 전체의 복리증진을 도모할 것이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로써 충실하게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을 가진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국 관리로 등용할 것이다.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양국 전권위원은 본조에 기명 조인한다.
융희4년 8월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메이지43년 8월22일 통감 자작 테라우치 마사타케"
● 의의와 평가
한일병합조약은 처음부터 불법이며, 원래부터 무효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첫째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5조약이 황제의 승인과 비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 일제의 통감 및 통감부가 주체가 된 정책과 조약은 모두 효력을 상실하는 게 마땅하다. 둘째 이 한일병합조약이 한국측과 한국 황제 및 정부의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강제하에서 강요되어 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한일병합조약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체결 때 그 제2조에서 ‘1910년 8월 22일 또는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 무효임을 재확인하였다.
[출처] [역사]한일병합조약? 한일병탄조약이다.|작성자 IM02
외국인조차도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그가 죽은 다음해에 한일병탄 경술국치조약을 맺게되는 비운을 맞게 되어
일번넘 입장으로서 수탈과 약탈과 도륙을 일삼는 일제강점기
우리 입장으로서는 목숨걸고 투쟁하는 대일항쟁기 35년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성곽 좌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공원 : 7:30
다시 동네길이 나오고
사직터널위에 이른다(70, 2.8) : 7:35
다시 성곽이 나오고
이정목에 좌쪽은 외부순성길 우쪽은 내부순성길
말은 안하지만
좌로 가면 독립문가는 길이고 우로 내려가면 사직공원 가는 길이다
독립문사직공원고개 사거리 : 7:37
안산둘레길과
인왕산둘레길 안내도가 같이 있는 대형안내판이 나오고
사직근린공원 대형안내판이 있는
암문에 이르면
이정주에 좌로 암문을 통과하면 서대문공원가는 길이란다
직진 갈길은 인왕산1000m고 무악재1.5
우쪽으로 사직공원 전망대가 있으며
사진조망판이 있어 비교해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사직공원전망대 암문 : 7:40 7:45출(5분 휴)
ㅏ자길 단군신전 가는 길 지나
우쪽 드너른 바위위 쉼터지나
ㅏ자길 인왕산둘레길 지나
커다란 철대문으로 나가면 다시 성곽이 나오고
이정목에 좌쪽은 외부순성길 우쪽은 내부순성길
말안해도 좌로 내려가면 무악동 가는 길이고
좌우로 내려가면 둘레길로 가는 길이다
130, 3.4
무악고개 : 7:50 7:55출(5분 휴)
오르다가 좌로 성곽을 넘어가는 목조바닥계단길이 나오면
바로 그리로 가면 선바위 등 여러 굿당들을 지나
무악재하늘다리로 가거나 인왕산둘레길을 이어가는 길이다
여기서부터는 안산 인왕산 백악을 이어갈때
좌쪽 무악재 하늘다리에서 건너온 길이므로
이후는 아래를 클릭하시어 보시도록 하고
작년에 다녀온 안산 인왕산 백악 답사기와
안산 인왕산(우백호) 백악산(북현무) 곡장봉 말바위봉-어느 화사한 봄날에 후배들과 서울산 나드리
대표적인 사진 몇장으로 대체하고 지나간다
190
선바위 무악재하늘다리 갈림길 : 8:05
군부대 지나 거대한 칼날같은 바위봉인 250바위
범바위라고 부르는데 글쎄 범을 닮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다지나가 뒤돌아보니 머리부분에 구멍들이 여러개 보이지만
범으로 보이지 않고 수달처럼 보인다
250
범바위 : 8:15
정면으로 보이는 멋진 인왕산 사진 한 장 남기고 내려가 240안부
ㅏ자길로 내려가면 인왕천약수터 가는 길이다
옥계석 안내판과 전시된 옥개석을 볼 것도 없이
성곽 맨위를 덮고 있는 것이 모두다 옥계석이다
멋진 소나무들을 지나며
이정목에 지나온 사직공원1.3
가야할 창의문1.6은 우쪽 사면으로 지나가야 한다
정상으로 오르면
한가운데 조그만 바위가 하나 있고
올라가면 삼각점이 있다
인증 사진 한 장 부탁하고 내려와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정상판이 그 밑에 있다
백악 구진봉 수락 불암
아차용두 목멱산 우면산 청계산 관악산 삼성산
원미산 덕양산 계양산
안산
백련산 봉산 앵봉
기차바위 문수봉 보현봉 백악 구진봉
족두리봉으로 문수봉으로 이어지는 비봉능선 보현봉 등 등 등
339.9, 4.4
△인왕산 : 8:20 8:40출(20분 휴)
살짝 뒤돌아가 우쪽 사면으로 바위 옆으로 나간다
311.7둔덕으로 올라서면
좌로 성곽을 넘어가는 목조바닥계단이 있고
이정목에 그리로 가는 것이 기차바위로 가는 길이다
이곳이 바로 성곽삼거리길이며 좌 기차바위로 내려가
홍지문이 있는 곳으로 성곽은 삼탕춘대성으로 연결이 된다
311.7, 4.6
기차바위 갈림길 : 8:45 8:50출(5분 휴)
한없는 내림짓을 하며 연리목인 부부소나무 지나
ㅏ자길로 가면 3분초소와 수성동계곡으로 가는 길 안내판이 있고
아름다운 성곽길
우쪽으로 백악을 조망할 수 있는 너러바위를 지나
자하문터널위 2차선도로에 이른다(120, 5.5) : 9:10
도로따라가다 좌우길 다버리고 앞 둔덕으로 오르면
윤동주문학관 시인의언덕비가 나오고 홍매가 만발했고
공연장을 지나 백매 산수유가 만발하였다
고가도로밑에 이르고
길건너 짧은 돌계단 오르면 창의문 한옥 멋진 카페가 있고
옛날 대형 창의문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우로 문을 동과하면 창의문이 나오고
문을 나가면 관리사무소 이런저런 안내판 즐비하다
110, 5.9
창의문(자하문) : 9:15 9:25출(10분 휴)
이제부터는 경쾌한 음악소리 들으며
목조바닥크계단길을 거의 정상까지 한도 끝도없이 올라야한다
숨이 턱에 차고 식식소리만 절로 난다
돌고래쉼터 : 9:35 9:45출(10분 휴)
백악쉼터 : 9:55
ㅜ자길로 올라서면
이정목에 우로20m만 오르면 백악마루 정상이다
약간의 공터로
우쪽으로 치우쳐 큰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위가 백악정상이다
인증샷 하나 건지고
중간에 백악산 정상석과
복원석이 있고
백련산 봉산 앵봉 그 외 조망은 없다
342.5, 6.6
백악산 : 10:05 10:15출(10분 휴)
뒤돌아 ㅜ자길로 가 우쪽으로 성곽따라 내려가다
121사태 총맞은 소나무를 지나
너른 쉼터 청운대에 이른다
좌로 성곽을 넘어 청운안내소 북악하늘길도로로 가는
꼭대기 전망대에 이르면
백련산 봉산 앵봉
비봉능선 구진봉 조망이 좋다
290, 6.9
청운대 : 10:15 10:20출(5분 휴)
곡장봉 도는 곡성봉이라고 부르는 하늘전망대로 올라가면
조망이 환상이다
문수봉 보현봉
그리로 넘어가면 북악산길 팔각정으로 가는 길이다
310.9, 7.3
곡성봉(곡장봉) : 10:30 10:35출(5분 휴)
내려가며 치와 여장 안내판을 보며
한없이 내려가다가 우쪽 목조바닥계단길로
촛대바위를 갔다 온다 : 10:40 10:45출(5분 휴)
복자기 안내판을 지나
소나무보호군락지를 지나 숙정문에 이르고
좌로 나가면 현판을 볼수 있다
210, 7.9
숙정문(북대문) : 10:50
200둔덕으로 올라서니 전망대가 있고
좌로부터 팔각정 보현봉 구진봉 삼청각 수락산 불암산이 조망되는
삼청터널위인 것 같다
한동안 가다가
말바위안내소에서 비로소 도장찍는 용지를 받고
도장인지 아닌지 모를 너무 조그만 도장을 꾹 눌러찍고
내려간다
한동안오름짓을 하다가
좌로 넘어가는 목조데크계단길을 지나
바위정상에 이르면 바위사이에 삼각점이 있고
우로 조금 내려가면 말바위 안내판이 있고
그리로 내려가면 삼청공원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잠깐 뒤돌아 성곽넘어가는 목조바닥계단으로 올라서면
성곽위 전망대로 200봉 전망대와 똑같은 조망을 선사한다
△207.8 8.4
말바위봉 : 11:05 11:10출(5분 휴)
이후 낙산을 지나 흥인지문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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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바위 낙산 흥인지문 답사기와
제2회 인문산행-#백악#말바위봉에서 #한양도성#순성길을 따라 #흥인지문까지
목조바닥계단길로 내려가 높은 성곽 밑으로 우회하는 길을 한동안 따르다가
2차선도로 터널위 전망대를 지나 성곽을 넘어가면
우로 군부대 정문입구에 이르고
좌로 이런저런 안내판들이 즐비한
와룡정이 있는
160, 9
와룡공원 최상단이다 : 11:25
여러길이 있지만 성곽을 따라 내려간다
십자길 암문에 이르고 ㅏ자암문으로 나가는 곳에
그리로 가면 만해한용윤님의 거처였던 심우장으로 가는 길을 지나
110,
심우장갈림길 암문 : 11:30
동네길 2차선 도로만나 우로 잠깐가다
그 도로가 우로 90도각도로 꺾어서 혜화초교쪽으로 내려가는 지점에서
정면 축대밑에 있는 전봇대 높은 곳에
1차선도로를 따르는 것이 순성길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60, 9.9
혜화초교갈림길 : 11:25
경신고교 축대밑으로 가는 1차선도로를 따르며
2차선도로 길건너 철대문 안으로 돌계단을 오른다
50, 10.6
2차선도로 안부 : 11:45
혜화문이 나오고 내려가 좌쪽으로 나가면
혜화문 현판을 볼수 있고
그리로 내려가면 안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우로 내려가다 철대문 밖으로 나가면
건널목 혜화문 담벼락에 안내판이 있고
50 10.7
혜화문 6차선도로 : 11:50 11:55출(5분 휴)
길건너 회오리계단으로 오르면
높은 성곽 밑으로 가는 길이다
369마을 작은 찻집은 오늘도 성업중이다 : 12:00
장수마을 : 12:05
한동안 눈향나무 밭들을 보면서
거의 정상부에 이르면 우쪽 암문으로 가는 사거리가 나오고
이정목에 우로 암문을 통과하면 낙산공원이러고 한다
물론 직진해서 버스종점으로 가서 낙산정상으로 올라도 된다
드너른 광장인 낙산공원에서 좌로 조금 가면
성곽이 끝어진 곳이 나오고
좌로 나가면 낙산공원 대형 안내판 등
이런저런 안내판들이 있고
그 아래로 버스종점에서 마을버스가 수시로 오르내리고 있다
조금 더가다 좌쪽으로 오르면
공터쉼터로 조성된 곳에
야경조망처 안내판이 있고
안산 인왕산 백악 비봉능선 보현봉 백운봉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 등
조망은 지나온 곳과 유사하고
124.4 11.9
낙산 : 12:15 12:20출(5분 휴)
ㅓ자암문위(70, 12.5) : 12:30
누런 수크렁풀이 지천을 갈린 이색적인 개활공원이 나오고
흥인지문이 빤히 내려다보이고
거의 다 내려가서 뽕짝거리는 노래소리가 싫지만은 않은
회개하라 야외예배집회가 수많은 펼침막이 펄럭거리는 가운데
노래소리도 우렁차다
열심히 자기교회 유튜브를 보라는 아주머니들
너무 빨라서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암튼 찬송가와 포도를 안주삼아
배고픈 속을 좀 달래는데
아침에는 역류 때문에 누룽지 끓여준 것 물만 마시고 못먹고 왔는데
지금은 조심스럽게 먹고 마시니 먹을만하다 다행이다
20.4 13
흥인지문(동대문) : 12:40 13:20출(40분 휴)
도로로 내려가 흥인지문 좌로 가 동대문전철역 안으로 들어가
7번출구로 나와서 뒤를 보면
흥인지문
우쪽 흥인지문 둘레 잔디밭에 작은 가건물이 있는데
흥인지문관리사무소다 외부에 도장함이 있고 도장지도 있고
완주자 기념배지도 신청하고 받는 방법도 게시되어있다
길거리표 하얀티도 한 장 사고
오간수교로 청계천을 건너가며
좌로 보는 청계천은 인위적인 모습이라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동대문운동장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한
거대한 공원을 가로질러 나가다
잎이 막나오고 있는 화살나무군락지를 지나
큰도로를 만나고
우로 내려가 삼거리서 길을 건너 좌로 살그머니 오르면
동대문역사문화역2번출구 건너편에 이르면 3번출구 삼거리에 이른다
우로 조금 가다 좌로 건널목을 건너
좌로 조금만 가면 시구문으로 불리워졌던 광희문이다
광희문 현판을 보고 다시 우쪽으로 나가
짧은 성곽을 따라 오른다
40, 14.4
광희문 : 13:50 13:55출(5분 휴)
이후 목멱산(남산)을 지나 숭례문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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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 남산 숭례문 답사기를 링크로 걸고
인문산행-#한양도성 #순성길을 따라 #흥인지문에서 #남산을 넘어 #숭례문까지
조금 오르면 십자길로 앞 오르는 골목길 입구에
성곽멸실구간이라고 벽면에 부착된 인내판이 있으면
그 골목으로 오른다
우쪽으로 비켜서 있는 이정주는 좌로 고개를 넘어가야
순성길 n타워가는 길이라고 하는데 순 거짓말이고
믿으면 절대 안된다
차로는 올라갈수 없는 골목길로 잠시 오르면
삼거리고 우로 내려가는 곳에
구부러진 철전봇대가 있는데
일부러 전봇대를 구부린 것인지 어떠한 압력이 가해져서 구부러진 것인지
당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암튼 처음보는 전봇대다
직진하다가 삼거리에서 좌로 잠깐 내려가다
우로 보면 순성길에 대한 모든 안내판들이
서로 경쟁하듯이 설치되어있다
이러지들 말고 여기저기 안배하서 설치를 하면
안헷갈려서 좋을텐데 조금 아쉬운 장면이다
도성가온성곽마을 안내판들을 지나서
신당동성당을 지나며 저멀리 성곽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내려가면
장충단고개 사거리(60, 15.2) : 14:10 14:15출(5분 휴)
길건너 우로 조금 가다 장충체육관 가기전
좌로 성곽으로 오르는 목책돌계단으로 오른다
신라호텔 높은 건물이 보이고
성곽과 경계는 울타리가 쳐져 있어 들어갈수는 없다
다만 신라호텔 뒷동산에는 활쏘는 동상과 팔각정
한옥들이 내려다보이고 이런저런 꽃들이 만발했는데
그중에 사랑의기쁨을 노래하는 진달래가 제일 반가웠다
신라호텔 : 14:20 14:25출(5분 휴)
암문위 사거리에서 신라호텔은 끝나고
좌로 가면 장충중고교로 가는 길이고
우로 가면 국립극장 북쪽 도로다
암문위 사거리(110, 16) : 14:30
반송길 산수유길로 올라 110봉어깨에 이르고 사거리길이다
좌로 잠깐 오르면 성곽마루 거대한 팔각정이 있는 110봉 정상이다
그리로 넘어가야 버티고개인데 아무리 찾아도 길이 없다
110, 16.4
성곽마루봉 : 14:40 14:45출(5분휴)
뒤돌아 사거리에 이르고 목바닥길로 가야하지만
좌쪽 사길로 가면 버티고개라는 이정목이 있다
다음에 삼각지맥(서울지맥) 답사를 다시 할 날이 오면
바로 그길로 가야할 것이다
각종 체육시설이 들어찬 없어진 성곽능선으로 가다가
거대한 반얀호텔 마당안으로 들어가
우로 내려가 반얀호텡 정문앞으로 내려가 길을 건너면
국립국악원 앞 사거리다
국립국악원 앞에는 무슨 장터가 서고 있어 들어가보니
농산물과 수공예품 전통주 등을 가지고와 파는 장터라
혹시나 막걸리 한잔 마실수 있을까하고 돌아다녀보았으나
음악회 봄이오는 소리를 들어가는 긴줄을 보는 것외에는
그런 곳은 한군데도 없고 장은 파하고 치우는 중이라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시간만 축낸 것 같다
90, 17
국립국악원앞 사거리 : 14:55 15:05출(10분 휴)
도로변으로는 꽃밭들이 잘 가꾸어져 있어
없어진 꽃인줄 알았는데
배신때린 속절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탐스럽고 어여쁘고 고혹적이기까지한
아네모네를 몇 수십년만에 처음 보는 것 같아 너무 반가웠다
수선화 실라 루판 산괴불주머니 등 등 등 구경하며
그저 정신없이 여기저기서 인사하느라
발걸음이 자꾸만 늦어지네
아름다운 우리산하여^^
마라톤석도 지나고 삼거리에 이른다
이정목에 좌우길로 가는 것이 남산둘레길이라고 한다
7.5km라고 하니 언제 만보걷기하러 와서
천천히 2시간 정도하면 끝날 것 같다
110, 17.5
둘레길 삼거리 : 15:10 15:15출(5분 휴)
좌로 방향을 잡고 잠시 돌아가면 성곽 능선길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 바로 세조때 잠시 있다가 없어진 남소문터지만
아무런 안내판 하나 없는 것 같다
성곽밑에 올라가는 목조바닥계단길이 끝없이 올라가고 있고
이정목이 있다
120, 17.6
남소문터 : 15:17
끝없이 높은 성벽 밑으로 오르다가 삼거리길에서
우쪽 목조바닥계단길로오른다
이정목에 그리로 오르는 것이 순성길이라고 한다
망가져서 삐거덕거리는 계단으로 올라
성곽을 넘어가는 곳에 전망대가 있다
백악 비봉능선 보현봉 백운봉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용두산
한강 롯데타워 청계산
조망이 좋지만 날씨가 안받쳐주어 오늘은 그저 그림자로 보인다
220, 17.8
성곽위 전망대 : 15:30 15:35출(5분 휴)
내려가서 이번에는 높은 성곽 우로 조금 멀리 떨어져서
사면으로 가다가 등성이에 이른다
267.5봉(군부대)어깨(230, 18) : 15:40
우로 내려가면 동대방향인 자동차길 같이 너른 길을 만나서
좌로 잠시 오르면
본능선 성곽도로에 이른다(220. 18.2) : 15:45
어디까지 줄을 서있는 버스종점 지나
남산타워 올라가는 입구를 지나
지리중심지 너른 조망처 및 쉼터에 이르러
삼각점은 아무리 찾아도 없고
커다란 팔각정이 있는 드너른 광장
좌쪽 자물쇠 목조바닥길로 용산쪽 조망이 좋은
우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인왕산 백악 그뒤로 비봉능선 백운봉 도봉산
270.9 18.8
목멱산(남산) 정상에 이른다 : 15:50 16:00출발(10분 휴식)
자물쇠길을 지나 봉수대 앞으로 내려가
음식점인 케이블카 타는 곳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배가 고파서 무려 1꼬치에 2000원이나 어묵을 주문했는데
내 바로 앞에서 재료가 동나 결국 못먹고 발길을 돌렸다
케이블카승강장 : 16:05
봉우리가 아닌데도 굳이 잠두봉이라고 부르는 전망대에서
숭례문 일대 조망은 더없이 좋아
숭례문이 태산같은 건물들 사이로 초라하게 내려다보이고
그 외 모든 건물들 이름까지도 알면 다 찾을 정도다
안산 인왕산 백악 그뒤로 비봉능선 조망이 더없이 좋다
210, 19.2
잠두봉전망대 : 16:10
남산3호터널위 너무 배가 고파 운신이 안된다
흥인지문에서 먹다 남긴 포도와 소주로 약간의 힘이지만 보충하고
150,
남산3호터널위 : 16:15 16:35출(20분 휴)
어마어마하게 큰 가설물이 있는 드너른 터에 이른다
일제가 만든 어머어마하게 큰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교회고 국민이고 모두들 참배를 강제로 드리던 신궁터다
해방후에 소실이 되었는데 그터를 발굴하고 안내판을 세우고
길이름을 국치길이라고 지었다
그때의 치욕을 알려 일제의 실상을 깨닫게 하여
민족 자존감과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줄수 있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너른 터를 전부 신궁터로 만드는 것에는 반대를 하는 입장이다
전번주에 진행한 남산구간에서 설명한
케이블카승강장은 잘못 판단한 결과니
신궁터로 수정을 하는 바이다
130, 19.3
신궁터 : 16:40 16:45출(5분 휴)
교육연구정보원 앞마당은
한얼 안중근의사의 기념관과 기념탑
그리고 안중근의사의 어록이 새겨진 거대한 명언비가 널려있어
어린이 및 젊은사람들
그리고 토왜나 전래왜들 교육의 장소로 적합할 것 같다
見利思義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見危授命 위태함을 보거든 목숨을 주라
안중근
225살 잡수신 느티나무 쪽으로 내려가
드너르고 드너른 백범광장을 가로질러(110, 19.8) : 16:50 16:55출(5분 휴)
성곽이 나오고 우로 살짝 올라
아름다운 곡선으로 춤을 추는 성곽위로 내려가
숭례문이 바로 지척으로 내려다보이고
드너른 계단으로 내려가면
회현사거리(90) : 17:00
힐튼호텔 건너편으로 내려가
꼭 점집이나 무당집 같은 붉은색과 금색으로 도배를 한
조계종 용궁사로 내려가는 길입구 남산(회현)육교를 건너간다
좌로 길을 건너 숭례문에 이르고
좌로 대피소 안으로 내려가서 나가도 되고
건물 앞으로 내려가도 숭레문잔디광장에 이르고
도장 받는 곳이 대피소입구에 있다
마지막 인증찰칵
20, 20.7
숭례문(남대문) : 17:05 17:10출(5분 휴)
그후
관악산으로 봄나드리 산행을 가셨던
동선님이 미리와 계셔 반갑게 만났다
산이야기를 마음대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산친구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 아니 좋을손가
모래내로 갈거나
남대문시장으로 갈거나 갈팡질팡하다가
전번주에 이어서 촛불집회 현장을 보게되고
연사들의 격려방송과 촛불친구들의 노랫소리가 울려퍼지니
무슨 소리인지는 못알아들어도 마음이 울렁거린다
그들은 잘했다고 하는 말도 안되는 외교참사에 슬픔이 일어
진담반 농담반 붙여줄지도 모르는데 참석하자고 이야기를 했지만
70노구가 가능한 일인가^^
그 너른 태평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이른 아침에 보았던 그 경찰아저씨들이 진행을 막아서며
더 이상 가지못하게 억압을 하고 있어서
그 군중 가운데로 육탄돌격을 감행하기도 어려워보인다
여기서 어느 한쪽이 폭력이 나오거나 너무 심하게 막는다면
610혁명이나 518혁명 같은 일이 안생길 것이라고는
장담을 못하게 될 것이다
내가 보아서는 집회신고를 하고 나서는 촛불집회일텐데
행진도 못하게 경찰병력으로 육탄방어를 하고 나서는 것은
결국 촛불집회를 하지말라는 이야기 밖에 안되는 것 같아
조금은 서글퍼진다
제발 데모하면서
사고좀 나지 말았으면 원이 없겠다
이런저런 바램을 군중의 소리에 실어서 보내고
옥수역으로 가서 해물탕에 소주한잔하기로 하고
남대문시장을 통과하는데
그 옛날 50여년전 가보았을 때 통로에 장이서는 것은 똑같지만
그때문 그 통로를 따라서 앉아서 먹을수 있는 간이판자의자가 있었는데
이제는 의자가 있는 곳은 한군데도 없고
그러다보니 소주나 막걸리를 파는 포차는 한군데도 없는 것 같다
그때 대비 매상은 형편없이 줄었을 것 같다
회현역으로 가 전철을 갈아타고 그 해물탕집으로 갔는데
복도에서 간이의자 갔다놓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어 물어보니
ㅎㅎ우리가 9번째 기다리는 손님이 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기에 그러는지 기다리고 싶기도 했지만
잘못하면 1시간을 더 기다릴지도 모르는 판이라
포기하고 1층으로 내려가 순대국집으로 스며들었다
순대곱창철판전골을 시켰는데
신림동 그 순대골목집보다는 훨 맛이 있고 가격도 저렴하다
둘이서 먹다먹다 다 못먹고 남기고
찻집으로 이동하여 커피타임을 갖고 헤어졌다
작금의 한심한 정치이야기를 하다간 극심힌 스트레스를 받아
지명에 못살 것 같아 꾹꾹 눌러참고
연식이 오래되어 아작난 몸뚱아리 탓을 하며
중간중간 산이야기를 섞어가며
고달픈 이야기를 하다보니 목소리만 커지고
마치 싸우는 것 같이 되어 주위의 눈총까지 받으니
에구 다 참고 헤어지는 것이 상책이로다 ^^
한양도성 순성길 전구간 일시종주(완)
첫댓글
언제 그 해물찜 예약해놓고
아님
모래내 시장
소주 한잔에
산 이야기를 마저 이어서
저는 오늘
가끔씩 가는 산방
함백산 산신제 갔다가
버스 길 잘못들어
버스 앞에서
에ㅡ고 이나이에
오라이 오라이
스톱 스톱
근 30분을
쇼를 하고 왔습니다 😁
한양도성길 이렇게 보니
또 다릅니다
저는 이렇게 세세히 까진
못 살폈는데
반가웠습니다
선배님
건강 조심하세요 ^-^
고마웠어요
함백산까정 가셔서 고생하셨네요
그래도 지나고나면 다 추억인 것을 그리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혼자서 외길 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행복이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