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진(直進)
심 영 희
승용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갑자기 재치기가 나왔다. 기침을 심하게 하거나 재치기를 할 때는 차가 흔들린다. 크게 웃을 때도 마찬가지다. 역시 운전할 때는 자세가 중요하다. 재치기나 기침, 웃음은 모두 가슴을 움직이게 하기 때문에 운전대를 잡은 양팔이 그 영향을 받아 차가 흔들리게 된다.
그런데 또 웃음이 나온다. 혼자 타고 가는 중이라 큰 웃음이 아닌 게 다행이다. 웃음이 나온 이유는 조금 전 집에서 보았던 텔레비전에 나온 어린아이 말 때문이다. 도시 아이들이 벼를 보고 쌀나무라 한다는 말은 많이 들어온 얘기라 요즈음은 아예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없다.
텔레비전 화면에 농촌체험을 하던 사람들 틈에 초등학교 일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감자 한 포기를 뽑아 들고는 ‘어머 한 나무에 이렇게 많이 달렸네’하면서 신기해서 이리저리 돌려보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던 나는 감자나무라는 말에 깔깔 웃고 있었다.
그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서인지 운전을 하면서 그 앙증맞고 귀여운 아이의 감자나무가 떠오른 것이다. 쌀나무와 감자나무를 접목시키자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아니 어린 시절이 아니라 여고 졸업 때까지 몰랐던 일이다.
지금 오십 세를 넘은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육칠십 년대에는 웬만한 신작로는 중앙선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냥 양쪽 차가 적당히 비켜 지나가고 진부령 고개는 아예 일방통행이어서 상행선과 하행선이 적당히 교대로 운행되기도 했다.
교통사정이 이렇게 열악한 시대에 시골에서 자란 나는 자동차는 언제나 직진만 하는 줄 알았다. 언제 보아도 차는 앞으로 가지 뒤로 가거나 옆으로 가지 않았다. 대관령을 넘어온 차들은 진부를 향해 직진하고 진부를 지나온 차량들은 대관령을 향해 직진을 했다.
중학생이 되어 강릉에서 유학을 하는 덕분에 버스를 주말마다 타고 다녔는데 이 버스 역시 강릉터미널에서 출발하면 직진해서 횡계에서 내리고 횡계에서 타면 강릉까지 직진했다. 중학교 삼학년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그때는 주로 기차를 타고 다녔는데 기차 역시 앞으로 직진만 했다.
늘 걸어서 다니다가 비가 오거나 추운 날이나 짐이 있는 날은 등교시 택시를 탔는데 그때도 집 근처에서 택시를 타면 학교까지 직진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에도 좌회전이나 우회전이 있었을 텐데 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차는 직진으로만 간다고 생각했을까.
지금은 춘천과 동서울 시외버스터미널을 가끔 이용하는데 출발할 때는 버스가 후진을 해서 차를 뺀 다음 직진을 한다. 그런데 그 옛날 강릉에 있던 강원여객과 동해상사가 함께 쓰던 강릉차부는 시간 맞춰 버스가 앞을 보고 서 있다가 승객이 다 타면 직진으로 달렸다. 학창시절 다른 사람보다 차를 많이 타고 다녔는데 그때마다 늘 직진만했으니 자동차는 항상 직진만 있는 줄 알았고 또 늘 직진으로 다녔다. 횡계에서 춘천 오는 길도 언제나 직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 태어난 지 이십 년이 넘어 춘천에서 춘천여고 앞을 걸어가게 되었다. 춘천여고 앞은 지금도 오거리의 교통정리가 잘 안 되는 곳이다. 그때 걸어서 길을 건너야 하는데 자동차가 어느쪽 길로 가는 차인지 몰라 길을 건너지 못하고 차가 모두 지나가고 없을 때 길을 건너갔다.
차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다행이지 지금 같으면 하루 종일 춘천여고 앞에 서있어야 할 것이다.
그후 강릉이나 춘천시내에서 자세히 보니 차가 앞으로도 가고 왼쪽으로 또는 오른쪽으로도 가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저 버스나 택시는 다른 차가 어느 쪽으로 가는 줄 알고 서로 비켜가서 충돌하는 사고 없이 다닐 수 있는가 하는 신기함이었다.
그 의문점은 택시기사로 하여금 풀렸다. 차 앞에 번쩍번쩍 들어오는 불을 보라는 것이다. 내 상식으로 방향지시등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나는 왜 그때까지 차량 깜박이를 본적이 없을까. 차만 타면 무조건 직진으로 가는 길만 다녔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자동차가 어디로 가든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차 타고 수없이 다니던 신작로는 직진뿐이었다는 결론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자기집 자가용안에서 장난감 삼아 방향지시등을 켜며 왼쪽 오른쪽하고 재잘거린다. 시골아이들이 쌀나무가 아닌 벼를 잘 알고 감자나무가 아닌 감자줄기와 뿌리를 잘 알고 있듯이 보고 자란 환경을 지식과 상식과도 결부된다.
일요일마다 ‘퀴즈대한민국’을 즐겨보는데 퀴즈영웅으로 가는 마지막 단계에서 겨울에 먹을 소 먹이를 저장하는 ‘싸이로’와 나비모양을 닮아 붙여진 꽃 이름 ‘호접란’ 초가지붕을 덮을 때 사용하는 ‘이엉’ 등을 모를 때 저 사람이 시내에서만 살았구나 하고 안타까워 한적이 있다. 시골에서 자랐다면 지식이나 상식으로 싸이로나 이엉을 알 수 있는 문제였고 꽃을 좋아하고 많이 키워본 사람이라면 호접란도 쉬운 문제였는데, 특히 호접란을 틀린 사람은 그 문제만 맞췄으면 퀴즈영웅이 되어 몇 천만 원의 상금을 탈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내일처럼 아쉬웠다.
직진은 좋은 것이다. 자동차는 막힘 없이 달리니까 좋고 사람들은 좌절이나 후퇴 없이 승승장구하니 인생에 있어 최상의 꽃이 아닐까. 하지만 어찌 인생이 직진만 있겠는가 불운으로 좌회전으로 빠지기도 하고 우회하는가 하면 후진하여 늪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하지만 우리들은 오늘도 직진을 위해 노력하며 지는 해와 함께 휴식을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