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제 45대 신무왕(神武王 / ?~839)
▶구 분 : 능/묘 - 사적 제 185 호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위 치 : 경상북도 경주시 동방동(東方洞) 660
▶관리소 : 사적공원관리사무소 (0561-748-9225)
신라 제45대 왕. 성 김(金). 휘 우징(祐徵). 할아버지는 혜강대왕 (惠康大王)으로 추봉된 원성왕(元聖王)의 아들 예영 (禮英)이며, 아버지는 성덕대왕 (成德大王)으로 봉해진 균정(均貞), 어머니는 헌목태후 (憲穆太后)로 봉해진 진교부인 (眞橋夫人) 박씨(朴氏)이다. 비는 진종부인(眞從夫人). 그가 아버지 균정과 함께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부상하게 되는 것은 헌덕왕 때였다. 812년에 균정은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며, 김헌창 (金憲昌)의 난이 일어나자 우징 부자는 왕을 도와 반란군을 평정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828년(흥덕왕 3) 에 우징은 대아찬으로 시중(侍中)이 되었다가 831년 면직, 834년에 균정이 상대등에 피임되자 우징은 아버지가 재상(宰相)이 되었다는 이유로 시중직을 사퇴하고 대신 김명 (金明: 민애왕)이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균정과 김명간의 대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836년(희강왕 1)흥덕왕이 죽자 그 사촌동생인 균정과 오촌 조카인 제륭 (悌隆: 희강왕)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김명과 아찬(阿飡)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고 우징과 조카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워 균정은 전사하고, 우징은 김양 등과 더불어 청해진(淸海鎭)으로 도망하여 장보고(張保皐)에게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여 희강왕이 되었으나, 838년에 김명이 이홍 등과 함께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목숨을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였다. 김명은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뒤 균정계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 청해진에 의탁해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 염장(閻長), 장변(張弁), 정년(鄭年),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 (金敏周) 등을 파견하여 무주 (武州: 지금의 光州) 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벌 (達伐: 지금의 大邱지역) 에서 왕군과 토벌군이 맞부닥치게 되었다. 이때 민애왕을 대신하여 왕군을 이끈 자는 대흔(大昕), 윤린(允璘) 등이었는데, 토벌군에게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난중에 월유댁 (月遊宅) 으로 도망갔으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고, 우징이 왕이 되었다.
『신무왕은 격전 끝에 민애왕을 타도한 승리자로서 그가 패자측에 취한 아량과 관대한 조치는 그의 왕자로서의 자질을 잘 보여준다. 우선 시해된 민애왕을 예로써 장사지냈으며 또한 달구벌전투에서 민애왕의 10만 군을 지휘한 바 있는 장군 이찬 대흔(大昕), 대아찬 의훈(?勛) 등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조치를 취했다. 』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계 (仁謙系)와 균정계세력의 대립에서 균정계가 승리하였음을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 (金周元系)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으며, 신무왕이 즉위한지 반년이 못 되어 죽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륜을 펴지 못하였으나, 다만 그는 장보고나 김양에 대하여 배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839년에 장보고를 감의군사 (感義軍使)로 삼아 2,000호 (戶)의 실봉(實封)을 내렸다. 반면 장보고도 이에 그치지 않고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이것은 청해진세력이 강대해졌음을 알려준다. 신무왕은 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하여야 하는 과업을 앞두고 죽었다. 능은 제형산(弟兄山) 서북에 있다.(참고문헌 :三國史記,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 (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