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기계예술의 걸작 < 시트로엥 트랙숑 아방>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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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예술 機械藝術 (machine art):기계의 합리성·기능성에서 나온 조형미를 주장하는 예술.
*1934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기계미 전시회'를 계기로 미술의 한 장르를 이루었다. 본래 기계란 미적인 표현과는 관계없이 설계·제작되었으나, 19세기 말부터 디자이너·건축가·미술가 등이 독자적인 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기계미는 근대 조형세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미래주의·구성주의·퓌리슴 등은 기계를 찬미하고, 그 역동성·질서·합목적성·기능·형태에 큰 관심을 보였다.
20세기 초 H.van de 벨데는 "공학적 고찰의 세계에는 아무런 추한 것이 없다. 모든 기계·기구는 건축이나 공예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다. 정녕 그 진리에 입각한 감동적인 형태는 새로운 미래의 아름다움을 감정적으로 기대하던 사람들을 흥분시키거나 감동시켰다"고 하였다. 이렇듯 많은 건축가들은 기계와 그 미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V.타틀린은 기술적 구조인 공간기능적인 여러 조건을 추상적인 모형으로 전개하여 기계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후 기계예술은 실제적인 사회적 기능을 제공할 목적으로 미술에서 추구하는 분야라고 인식되었다. 기계예술에 대한 초기의 견해는 형식미에 두었으나 점차 기능미를 주목하기에 이르렀고, 건축·공예상의 기능주의나 합리주의는 기계에 대하여 후자의 견해를 취하고 있다.
1968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적 성격의 '기계시대의 종말을 보여 주는 기계(The Machine-as seen at the end of the mechanical age) 전시회'가 다시 열렸다.
* 선전의 귀재로 불리던 프랑스의 유명한 시트로앵자동차회사 사장인 앙드레 시토로앵은 다른 자동차회사들이 흉내낼 수 없는 혁신적이고 특이한 자동차를 만들고 싶었다. 1934년 앙드레는 마침내 앞바퀴굴림차를 실용화시키는 데 성공하여 트락송 아방이라는 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기계적인 결함 때문에 팔려나간 차마다 클레임이 걸려 되돌
아 오는 바람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앙드레는 큰 적자를 안고 파산선고까지 받아 그 충격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엔지니어들의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결함을 해결하여 제2
차 대전 이전까지 프랑스의 최고급차로 인기를 끌었다.전쟁이 끝난 직후 1950년 초 앞바퀴굴림차 트락송 아방은 시트로앵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마치 비행접시가 떠나가는 듯한 환상적인 디자인의 시트로앵은 '달려가는 프랑스예술의 극치'라는 찬사를 받았고 특히 드골대통령이 항상 애용해 더욱 유명한 차가 되었다.
1956년 이집트대통령 낫세르는 수에즈운하를 봉쇄하여 유조선들의 발을 묶어 영국 등 유럽에 석유고갈증을 몰고 왔다. 이때 독일제 휘발유절약형 1인승 차 인 하인켈 메서슈미트가 대량 영국으로 건너가, 소형차 시장을 침투했다.
영국정부는 당시 일급 자동차설계가였던 그리스 태생의 알랙 이시고니에게 이들을 몰아낼 수 있는 경제형 차의 설계를 부탁했다.
1959년 드디어 앞바퀴굴림의 소형차 오스틴 미니가 탄생했다. 길이 3m에 어 른 4명이 탈 수 있다는 이차의 설계를 처음 발표했을 때 전문가들은 도저히 불 가능하다고 믿었다. 850cc에 34마력의 오스틴 미니는 엔진을 가로로 놓고 작 은 네바퀴를 앞뒤 끝으로 몰아부쳐 실내를 최대로 넓게 만들어 어른 2명과 어 린이 3명이 충분히 탈수 있었다. 휘발유 1ℓ로 15km를 달릴 수 있는 혁신적인 오스틴 미니는 오늘날 앞바퀴굴림차의 선두주자였다.
이 차는 작년까지 무려 5백만 대의 생산을 기록하여 영국의 국민차가 됐다. 설 계자 알랙 이시고니는 영국 자동차공업 발전에 큰 공적을 세워 1986년 영국여 왕으로부터 경이라는 작위를 부여받았다.
알랙 이시고니는 앙드레 시트로앵의 트락송 아방에서 힌트를 얻어 오스틴 미니를 탄생시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