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이재기 기자] 메머드 핫 스프링스에 쳤던 텐트를 걷자마자 옐로우스톤 중남부의 또다른 캠핑장으로 향했다.
메머드 핫 스프링스에서 정남쪽으로 60킬로미터가량 내려가면 노리스 가이저배신을 지나 메디슨(Madson)삼거리에 다다른다. 이 삼거리 부근의 빽빽한 침엽수림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캠핑장이 나온다. 주위로 숲이 둘러쳐져 있고 평지에 캠프사이트가 조성돼 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미국의 캠프그라운드는 거의 대부분이 최근 한국에서도 많이 보급된 오토캠핑장이다. 한국보다는 캠핑문화가 더 발달돼 있고 또 넓은 땅덩이에 차 없이는 생활과 이동이 불가능한 탓에 애초부터 차를 옆에 받쳐두고 텐트를 치기 시작한 것 같다.
많은 관광객들이 자리를 잡고 텐트를 치고 있고 입구에는 캠핑을 하려는 사람들의 자동차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옐로우스톤에 있는 12개의 캠프그라운드 가운데 7개는 '선착 선이용 원칙'에 따라 운영되고 나머지 5곳은 젠테라파크란 회사가 1년 전 예약을 받기 때문에 단기예약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운좋게도 자리에 여유가 있어 공원 거의 중심부이면서 화장실과 세면장도 가까운 곳에 텐트를 칠 수 있었다. 가격도 14~20달러 수준으로 만족이다. 그렇게 옐로우스톤에서의 3일째 여정이 시작됐다.
셋째날의 목적지는 파이어홀강(Firehole river)주위로 흩어져 있는 가이저배신(Geyserbasin)과 올드페이스플(Old Faithful)이었다.
메디슨보다 조금 북쪽에 있는 노리스(Norris)에서 이미 간헐천과 온천, 머드팟을 둘러봤기 때문일까? 간헐천 관광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가이저배신 지대를 주마간산 격으로 스쳐보며 지나갔다.
올드페이스플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쯤 그 곳 주변에는 족히 자동차 수백대를 댈 수 있을 만큼 넓고 큰 주차장이 있고 주차구역에서 지척에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간헐천 올드페이스플이 자리잡고 있었다. 간헐천에서 불과 1,2백미터 거리에 호텔 건물들이 간헐천을 둘러싸듯 배치돼 있었고 올드페이스플 주위로는 관람용 나무 데크가 반원형으로 설치돼 있었다.
데크에는 관광객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모두들 올드페이스플이 뿜어 올리는 '자연 분수쇼'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올드페이스플 뒤쪽으로 펼쳐진 업어 가이저 배신(Upper Geyser Basin)에서는 크고 작은 간헐천들이 이따금씩 열수를 뿜어올리고 땅속으로 연결된 분화구들은 쉼없이 희뿌연 화산연기를 피워 올리는 모습이 흡사 원시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올드페이스플이란 간헐천의 이름을 굳이 번역하자면 '오랫동안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이란 의미쯤 되지 않을까, 옐로우스톤 국립공원 당국에 따르면, 공원 경내에만 대략 1만개의 온천이 퍼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 세계 간헐천의 약 60%를 차지하는 엄청난 규모이다.
드넓은 옐로우스톤 여기저기에 온천과 간헐천이 산재해 있지만 주로 옐로우스톤 서남부지역에 집중돼 있고 그 중에서도 올드페이스플은 간헐천의 군계일학이다. 규모가 가장 클 뿐아니라 절대로 관광객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없다.
평균적으로 92분 그러니까 1시간 32분마다 한번씩 분출한다. 5분 동안 약 1~2만 리터의 온천수를 최고 55미터 높이까지 뿜어 올린다. 120년 관측 역사상 이 지상 최대 간헐천이 분출을 빼 먹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올드페이스플이 힘차게 열수를 뿜어 올리는 순간 세계 각지에서 찾아든 관광객들은 탄성을 내지른다. 밋밋하게 2만톤에 가까운 물을 한꺼번에 다 쏟아낸 뒤 곧바로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리듬을 타듯 다양한 패턴으로 물줄기를 쏘아 올린다.
세상사는 물론이려니와 자연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인데 올드페이스플은 날마다 10여번씩 분출하기를 120년 동안 한결같이 지속한다니 조물주의 조화가 신기할 따름이다.
올드페이스플에서 북쪽으로 약 8킬로미터 지점 미드웨이 가이저 배신에 또 한가지 볼거리가 있다. 옐로우스톤에서 가장 큰 온천 '그랜드 프리즈매틱 스프링'으로 온천의 직경이 110미터나 된다. 온천 풀(pool)의 짙푸른 색깔 그리고 노랑과 오렌지 색상의 링들이 아름다운 프리즘효과를 만들어 낸다. 옐로우스톤에 다양한 크기의 간헐천과 온천 분화구, 머드팟이 혼재하는 이유는 마그마가 지표로부터 4~12km 아래에 위치해 있고 연중 적당한 강수량을 유지해 크고 다양한 열수 컬렉션을 갖게 된 것이다.
올드페이스플 관광에 나선 때는 6월 하순으로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따뜻한 계절이었지만 옐로우스톤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잔뜩 끼인데다 간간이 빗방울까지 떨어지는 스산하고 추운 날씨였다. 고산지대의 추위에 대비해 챙겨간 겨울 외투를 꺼내 입고도 추위를 느낄 정도였으니 한기가 만만치 않았다. 전날 캠핑에서 추위와 새소리에 밤잠까지 설친데다 날씨까지 궂어 고향집의 뜨끈한 구들장이 그리워졌다.
또 이미 간헐천과 온천, 각양각색 분화구들을 한번 훑은 뒤여서 여행의 감흥이 크게 떨어졌다. 아늑한 잠자리가 보장되지 않은 조금은 힘겨운 여정이 지속된 탓에 문득 객창감에 빠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족들이 함께한 여행이었기에 고요하게 사색에 빠진다거나 애수를 느낀다는 것은 사치였다. 그럴 틈도 없었을 뿐더러 미국땅 어디를 가든 모든 곳이 새롭고 낯설어 새로운 것에 대한 가벼운 긴장감이 일정하게 유지됐고 그것은 객지를 누비는 동력이 됐다.
그랜드 루프(Grand loop)로 이름 붙여진 옐로우스톤 일주도로(8자형 도로)의 하단 좌측에 올드페이스펄이 위치해 있고 오른쪽에 웨스트 섬(West Thumb)이 있다. 두 관광지 사이의 거리는 약 27km쯤 된다. 웨스트 섬은 옐로우스톤 호수가 서쪽으로 엄지손가락처럼 쑥 불거져 나온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호수 아래에 있는 간헐천과 각종 온천이 이곳의 독특한 구경거리이다. 호수의 수위가 낮아지면 간헐천과 온천이 물밖으로 드러나고 봄 여름 호수의 수위가 높아지면 물속에 잠기지만 온천의 독특한 색깔 때문에 육안으로 간헐천을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피싱콘(Fishing Cone) 간헐천은 초기 옐로우스톤 방문객들이 낚시로 잡은 송어를 바로 끓는 물에 넣어 익혀 먹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칼데라호인 옐로우스톤 호수는 해발 고도가 2357미터로 북미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로 프랭크섬 등 3개의 섬이 중심부에 떠 있다. 호수의 넓이는 340만평방 킬로미터로 호수에 의해 기후변화가 일어날 정도라고 하니 그 넓이를 짐작할 수 있다.
관광객들은 호수에서 카누와 카약 보트를 탈수 있고 낚시 면허를 구입하면 낚시도 자유롭게 할수 있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자연의 원시성 외에도 고산지형과 호수, 화산지대, 캐년 등 지형의 다양성 또한 옐로우스톤의 인기비결이다.
옐로우스톤 자연경관의 백미는 그랜드캐년이다. 옐로우스톤 호수에서 발원해 유명한 3개의 폭포를 빚어내고 깊은 원시협곡을 깎은 뒤 루즈벨트 빌리지와 메머드 핫 스프링스를 굽이돌아 몬태나주에서 미주리강과 합류하는 옐로우스톤강의 일부이다.
업어폴(Upper Fall)에서 타워폴까지 약 20여 킬로미터나 뻗어 나간 그랜드캐년은 뾰족하고 날카롭게 깎여 나간 지형, 엄청난 깊이(300여미터), 노도처럼 흐르는 물살에서 강한 남성미를 느낄 수 있다. 오랜 옛날 녹아내린 빙하가 미끄러져 내리면서 고원이 깊게 패인 지형이지만 톱니 처럼 날카로운 봉우리는 유년기의 젊은 기운을 발산한다.
캐년의 양쪽 경사면은 누런 황금색을 띠고 있고 그 속을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강물은 포말 때문에 한 줄기 하얀색 띠처럼 보인다. 와이오밍의 경치좋은 오지에 '옐로우스톤'이란 이름이 붙은 것도 관광객을 압도하는 누런 황금색 때문이다. 캐년의 사면으로 쉼없이 흘러내린 온천수가 바윗돌과 작용해 누런색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드페이스플과 웨스트섬을 서둘러 구경하고 곧바로 캠핑장이 있는 메디슨 정션으로 돌아갔다. 궂은 날씨 탓이었다. 다행히 메디슨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밤에는 날씨가 완전히 갰다. 또 캠핑장이 아늑한 분지의 가운데 놓여 있는데다 주위로 나무도 많아 바람이 그다지 불지 않았다.
초저녁 마른 나무를 주섬주섬 주워 모아 모닥불을 피워 놓고 느긋하게 여유를 즐겼다. 서부를 세번째 돌아보는 여행이었지만 주어진 시간은 10여일로 짧은 반면 볼 곳은 많다 보니 늘 바쁜 일정에 쫓기기 일쑤였다. 그래서 모처럼의 여유가 더 좋았다.
바로 이웃 캠프사이트에는 미국인 부부가 자리를 잡았는데 픽업 트럭도 모자라 뒤에다 짐싣는 캐리어까지 달고 왔다. 거의 한 살림 옮겨 놓은 것처럼 없는 것이 없었다.
백인 남자와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공원 레인저(관리직원)가 우리쪽 캠프사이트를 가리키며 긴 나무를 치우라고 재촉했다.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둔 파이어 플레이스의 규격보다 큰 나무는 뗄수 없다는 것이었다. 난처해하는 나를 보던 백인 남자가 트렁크를 뒤지더니 커다란 도끼를 빌려줬다.
대부분 캠핑장에서 주위의 나무를 화목으로 쓸수 있지만 사람이 많아서인지 마땅한 땔감이 없어 3,4미터쯤 되는 통나무째로 불을 지른 것이 화근이었다. 레인저가 지켜보는 가운데 통나무를 패느라 진땀을 뺐다.
모처럼 해보는 캠핑은 재미가 쏠쏠하지만 잦아지면 힘이 들기 마련이다. 잠자리 불편하지 먹거리도 손수 해결해야 하고 텐트 설치하고 접으랴, 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주위에 샤워장이 있긴 하지만 호텔방에서 편안히 씻는 것과 비길 바가 못된다. 그러나 그날 그 캠핑은 여러가지로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됐다. 모닥불에 둘러 앉아 나누지 못했던 얘기, 가슴에 묻어둔 얘기까지 끄집어내 오손도손 정겨운 얘기꽃을 피우며 옐로우스톤의 별 총총한 밤 서정을 만끽했다.
옐로우스톤에서의 넷째날 우리 가족은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그랜드캐년 부근 캐빈을 숙소로 잡아둬 편히 씻고 잘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미주리에서 옐로우스톤 행을 준비하던 그 해 4월 중순 5일간의 여정을 잡아뒀지만 숙소는 하나도 구하지 못해 틈만 나면 공원 인터넷 홈페이지를 방문했다. 그러던 어느날 사이트를 클릭해 리프레쉬하자 캐년 빌리지의 캐빈 하나가 떠올라 잽싸게 잡았던 것.
캠핑장을 정리하자 마자 바로 캐빈으로 달렸다. 캐빈의 외관은 말그대로 통나무집이었지만 퀸 사이즈 침대와 욕실, 간이 주방, TV에 에어컨까지 갖춘 꾀 쓸만한 숙소였다.
옐로우스톤에 도착한 이후 줄곧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그 날은 구름 한점없는 날씨에 햇볕이 강렬해 더웠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자 긴장이 풀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랜드캐년으로 출발한 것은 오전시간이 거의 지난 정오쯤이었다. 20km가 넘는 그랜드캐년 구간 중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곳은 캐년 빌리지에 인접한 3.5km구간, 폭포의 낙차가 33미터인 윗폭포(Upper Fall)와 94미터 높이의 아랫폭포(Lower Fall)등 볼거리가 집중돼 있고 캐년 로지(Lodge)에서 불과 1.5km떨어져 접근성이 뛰어나다.
또한, 공원당국이 관광객들을 위해 아티스트, 인스퍼레이션, 그랜드뷰 등 5개의 전망대와 3개의 등산로(Trail)를 정비해 뒀다. 캐년의 사우스림(South Rim)에 차를 세우고 Uncle Tom's Trail을 따라 걸으며 캐년 구석구석을 훑었다. 경치가 뛰어난 아랫폭포에는 철재 계단을 가설해 관광객들이 폭포 바로 옆까지 내려갈 수 있게 했다.
8,90도에 가까운 깎아지른 캐년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현기증이 난다. 경사가 가파르고 워낙 찾는 사람도 많아 아래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데 30-40분은 걸린 것 같다.
폭포의 우렁찬 물소리와 물보라가 만들어 내는 무지개, 계곡을 시원스럽게 흘러가는 강물, 황금계곡 끝에 걸린 잔설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아까운 비경이다. 캐년을 따라 약 2km미터 정도 내려가면 아티스트 전망대가 나오고 그 곳에서 바라보는 '아랫폭포'가 바로 옐로우스톤의 랜드마크 경관이다. 멋있고 장대하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이 필요없다.
미국 여행에서 한 곳에서 나흘이나 체류한 곳은 옐로우스톤이 유일무이했다. 규모도 클 뿐아니라 뛰어난 경치도 부지기수여서 제대로 보려면 10일 정도는 잡아야 한다. 좋았던 만큼 떠나는 아쉬움이 컸던 곳이 옐로우스톤이었다. 굿바이 옐로우스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