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추상(追想)
이상준
내가 속한 산악회는 매달 첫째주 일요일이면 산행을 한다. 이번 달 산행은 장마비가 쏟아지는 가운데서 시작되었다. 거추장스러운 우비까지 챙겨야하는 성가신 등반이었는데도 마음 한구석은 왠지 들떠서 두근거린다. 이번 산행지가 바로 내 학창시절 꿈을 키웠던 곳인데다 희비(喜悲)로 얽힌 추억들까지 골고루 담겨져 있는 팔공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구에서 유학하며 혼자 살았던 8년 세월, 나는 팔공산과 어울려 지낸 사연들이 너무나 많아 지금도 간혹 꿈속에서 그 잔영(殘影)들을 보듬으며 울기도 하고 또 웃기도 한다.
고향 장기(포항시 남구 장기면)를 떠나 대구에서 4년 간 공무원생활을 하고 나서 또 4년 간 대학을 다녔다. 공무원이라도 할 때는 그럭저럭 의식주는 해결되었는데, 그것마저 치우고 자취생활 하면서 등록금 비싼 사립대학을 다닐 때 내 형편은 꼴이 아니었다.
그 고달팠던 시절, 추위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틈만 나면 나는 무작정 버스를 타고 팔공산에 갔다. 학교 성적이나 취직시험에 대한 고민 등이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팔공산까지 시골풍경을 즐기며 가는 그 버스 코스도 맘에 들었거니와 승객들로 붐비지 않는 시골버스 그 공간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텅빈 버스에 앉아 나는 취직시험에 대한 고민도 하였고, 성적에 대한 고민도 하였다.
공산면에서 내려 십리길을 걸어 부인사까지 걷거나, 어떨때는 코스를 바꾸어 팔공산 입구에서 내려 파계사까지 걸어갔다 오면서 장차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상념에 잠겨본 적도 있는 것 같다.
그때는 요즘처럼 길이 포장도 안 되었고, 길가에는 천수답들이 아기자기하게 있었다. 허물어져 가는 초가 위에 박꽃이 피어있는 정경도 있었고, 물소리, 소쩍새 소리, 풀벌레 소리, 그리고 참새 쫓는 허수아비도 한 몫 하던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그래서 외로울 때나 집 생각이 나면 줄곧 그곳을 찾곤 했었는데, 그게 두어 해 전으로만 여겨지는데도 벌써 스무 해가 훌쩍 지나 가버린 옛 추억이 되었다.
문득, 그 시절 팔공산에 얽힌 추억 몇 토막이 뇌리를 스쳐간다. 어느 일요일로 기억된다. 당시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즉 집나와 객지에서) 치과대학에 다니던 친구와 둘이서 팔공산에 갔다. 그 친구는 다른 데는 비교적 재주가 있었지만 유독 노래만은 중증 음치였다. 산을 오르면서 나는 그에게 ‘백마강’이란 흘러간 노래를 가르쳤다. 흘러간 노래라면 그때도 자신이 있던 나였다. 그래서 장차 의사가 될 그였지만 내가 되레 음치치료사로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내가 앞에서
ꡒ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ꡓ
라고 선창을 하면 친구는 뒤에서 박자와 음정에 맞춰가며 가사를 따라 불렀다.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우리는 수 십 번 그 노래를 불렀다. 그때부터 서서히 이 친구의 음치 경력이 사라져 갔고, 레크리에이션 석상에서 여럿이 둘러앉아 한 곡조씩 뽑을 때, 제 차례가 되기 전에 슬그머니 사라지던 그 친구의 버릇도 싹없어졌다. 물론 이 친구의 십팔번 곡은 끝까지 지조 있게도 ‘백마강’이었다. 요즘도 회식자리나 모임에 나가면 으레 그 레퍼토리를 고집해서, 그 자초지종 연유를 아는 나를 싱긋 웃게 만든다.
이런 추억도 있었다. 대구에서 공무원 생활 할 때, 어느 해 정월달이라 생각된다. 전직(轉職)을 하려고 국가공무원시험을 여러 번 쳤으나 원하는 시험에는 늘 낙방하였다. 입 소문에 의하면 갓바위 부처님에게 가서 지성으로 기도를 드리면 소원 하나는 들어준다고 했다. 당시 나는 대구근교 화원읍에 살고 있었는데, 하숙집 아들과 같이 날을 잡아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 갓바위에 갔었다. 잿빛 바지 입은 할머니들 사이에 끼어 나는 정말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다. 원하는 시험에 꼭 합격시켜 달라고, 절을 백 번, 이백 번, 한 삼백 번쯤 했다.
그 해 치러진 국가직 7급 공무원시험에서 나는 거짓말처럼 덜컥 합격을 했다. 그 부처님의 영험이 사실이었는지 전국에서 20명 뽑는 바늘구멍 만한 어려운 시험에 용케도 내가 붙었던 것이다. 그것도 최연소합격이라는 영예까지 덤으로 안았으니 실로 이만저만한 경사가 아니었다. 결국 그 직에도 인연이 닿지 않아 수년 후 새로운 시험에 합격하여 오늘에 이르렀지만 그때 내가 부처님께 올린 기원에 대한 영묘한 감응은 너무나 희한해서 지금생각해도 꿈인가 싶다.
또, 이런 슬픈 추억도 숨어있다. 대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객지에서 사귄 형뻘 되는 분이 팔공산 자락에 있는 북지장사 란 절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형 덕에 그 절에서 며칠 간 묵었던 기억이 난다. 한겨울, 새벽 다섯 시면 아침공양을 하는데, 얼음덩이가 둥둥 뜬 동치미 국물에 시커먼 꽁보리밥, 벌벌 떨면서 먹던 그 절 밥이 어찌 그리도 맛있던지.
그때 그 절에는 나이 열두 살 정도의 꼬맹이 행자 승이 있었는데, 인간이 그리워서인지 늘 우리들을 따라다녔다. 얼굴에는 못 먹어 흰 버짐이 피어 보기에 안쓰럽기도 해서, 뭐가 먹고 싶으냐고 물어 보면 돼지고기가 제일 먹고 싶다고 했다. 다음에 올 때는 꼭 고기를 사 가지고 와 스님들 몰래 골짜기에서 구워먹자고 해놓고선 결국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왔는데, 지금도 팔공산 생각을 하면 그 애 생각이 난다. 지금은 아마 서른도 넘었을 것이다.
이제 나이 사십 넘어 다시 찾은 팔공산엔 낯선 네온사인 번득이고 음식점들이 요란할 뿐, 정겹던 그 모습과 그리움 속의 사람들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야-호 야-호 야-호
공허한 메아리만 추억되어 돌아온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