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일본에는 재일교포가 많다. 해방 전에는 최대 230만 명까지도 있었다. 일제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도 있었고, 43 제주사건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피난으로 옮겨간 분들도 많다. 이들 제주도 출신은 해방 후 건너간 사람들로 전체 동포의 30%를 차지하며 주로 오사카에 거주한다. 이들 외에도 지금은 '뉴커머'라 해서 유학이나 취업 또는 불법체류 등의 형태로 10여 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럼으로 전체 동포 수는 귀화한 30만 명을 포함하면 근 130만 명 가까운 인구이다.
필자는 3차에 걸쳐 일본속의 코리언파워를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의 우경화로 코리언들의 삶이 조금은 위축되고 고달파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려웠던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은 열도에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지난 세월의 영웅들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영웅탄생을 기대하면서 이 글을 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인들의 일본 진출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파도처럼 이어져왔다. 동북아에서의 인구이동은 북에서 남으로 남으로 이루어졌고 그 반대의 역 이주는 매우 그 수가 적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시 일본에서 귀화한 유명한 김충선(金忠善 본명- 사야가[沙也可])과 같은 사람도 있으나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한 때 인위적으로 한반도, 만주 지역으로 많은 일본인이 이주하던 일제 때를 제외하면 거의 전무하다.
며칠 전 도쿄[東京]대학 의학부 인류유전학교실 토쿠나가 가쓰시 교수와 돗토리대 의학부 이노우에 타카오 교수팀이 밝힌 것처럼 일본인들의 유전인자가 한반도인과 가장 흡사하다고 한다. 벼농사 도입과 청동기 전래로 상징되는 일본의 야요이 시대(기원전 3세기 - 기원후 3세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전자(DNA)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결과라고 <교도통신>이 6월 23일 전했다.
어찌되었건 일본 내에는 해방 이후 많은 한반도인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남을 수밖에 없던 사정이 있었다. 비록 일본 인구 1억2천5백만 명의 0.5%로 200인에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수이지만 그 활약상은 대단했다.
격투기로 표현된 민족의 자긍심
특히 격정적인 우리 민족의 특성상 격투기에서의 두각은 어쩌면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도 역도산(力刀山)의 활약은 대단하다 못해 아직도 그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많이 있을 정도이다.
그는 북한 함경도 출신으로 본명은 김신락(金信洛)이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대부격인 그는 처음에는 스모선수였다. 북한에서 생활하던 16세 때 일본 스모계 인사에 의해 스카우트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일본 스모계에 외국인 선수로는 1호였던 셈이다.
이후 스모계에서 씨름 기술을 접목시키며 승승장구하며 천사장사(요코즈나)의 바로 밑 단계인 오오제키(大關)까지 승급하였다. 그러나 천하장사가 되기에는 당시의 풍토에서 외국인으로서 한계가 있음을 역도산은 깨닫고 있었다. 회의를 느낀 역도산은 새로운 운동으로 눈을 돌렸으며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레슬링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여기서 잠시 영웅 역도산이 있기까지 기술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동포가 있었으니 그들은 카라테의 고수였다. 그에게 카라테(空手)를 가르친 사람은 바로 평양 출신으로 최영의보다 10세 연상이었던 나카무라 히데오[中村日出夫](한국명 강창수)란 인물이다. 그는 권도회총사(拳道會總師)로서 카라테계의 세계적 중진으로서 김신락에게 카라테를 전수하고 '역도산'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준 인물이다. 결국 역도산은 스모 기술과 카라테 기술을 레슬링에 접목하여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영의 또한 대단한 인기와 유명세를 탔던 재일한국인이었다. 그는 일본명 오오야마 하이다쯔[大山倍達]라고 할 정도로 민족주의적이었다. 성씨로 불리던 ‘배달’은 ‘배달민족’에서 이름 지은 것으로 한시도 자신이 배달민족임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전라북도 출신으로 일본에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카라테 바카 1대기>라는 만화로도 그려져 어린이들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최영의의 제자 송장규(일본명 마츠이[松井章圭]) 또한 일본 카라테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오랫동안 군림했다.
역도산은 살아있는 신으로서 숭앙되며 그의 제자로서는 긴 턱으로 유명한 안토니오 이노키와 16문 킥으로 유명한 자이언츠 바바(몇 년 전 사망)가 있었고 재일한국인으로서 대동산우도(大同山又道). 백두산(白頭山). 김일(일본명 오오키 킨타로오[大木金太郞])등이 유명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2세 3세 레슬러도 많았고 그 중에서도 98년 은퇴한 쵸오슈우리키[長州力]는 2세로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그는 1974년의 제20회 뮌헨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요시다 미츠오(吉田光雄)라는 이름으로 일본대표 선발전에 나갔으나,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국적조항에 걸려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은 한국대표로 뮌헨 올림픽에 참가하여 입상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명 곽광웅(郭光雄)으로서 앞으로도 일본인으로의 귀화는 절대 없을 것이라 한다.
일본인들에게 전후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던 영웅 역도산도 결국은 민족이라는 장벽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외국인으로 인기가 하늘같이 높음을 시기 질투하던 한 일본 우익 청년에 의해 칼을 맞고 운명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재계 코리언 파워
정치인으로서는 일찍이 일제시대에도 중의원으로서 두 번이나 당선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박춘금으로 당시에는 재일동포들도 피선거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 후 이중 잣대로 재일동포들을 대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정치인으로서 출세하기가 힘들었다. 중의원 박춘금도 1945년 11월 제89회 제국의회에서 가결된 중의원 선거법에 의하여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오랫동안 정치인이 없었으나 천재로 알려진 아라이 쇼케이([新井將敬]·한국명 박장경)씨가 중의원 동경 제4구 선거구에서 자민당 의원으로 그 맥을 이었다. 도쿄대 출신으로 일본 관료중의 꽃이라는 대장성 출신 정치인이었다.
선거 때 박 의원 벽보에는 빨간글씨로 ‘조센징’이라 씌어졌다. 이러한 악의적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뽑혔던 것이다. 지역구민들이 재일한국인임을 알면서도 그의 똑똑함과 성실함을 인정해 준 것이다.
그러나 하시모토 총리 시절 증권거래에 대한 부정의혹 사건으로 희생양이 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결국 그는 1998년 2월 자살하고 말았으니 그 충격은 엄청났다. 아직도 그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국회연설에서 자신이 한국계 일본인이었음을 울면서 얘기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물론 총리선까지 수사가 미칠 것이라던 일본 검찰의 엄포는 유야뮤야 없어지고 말았다. 참으로 묘한 사건이었다.
일본인 논픽션 작가 이시카와 요시미씨가 <아사히 신문>에 추도문을 기고했다. 그는 그 추도문에서 "일본의 전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崇]같은 사람은 록히드 부정 사건으로 옥중에 수감 중이었는데도 선거에 나오자 고향 사람들이 20만 표나 몰아주었지만, ‘품어 안아줄 고향이 없었던 아라이 씨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었다"라며, "아라이 씨의 고향은 피를 이어받은 한국도 자신이 태어나 자란 일본도 아니었다. 그의 고향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미래였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고향일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것은 근대 일본이다"라고 강렬히 비판했다.
현재에도 일본 열도 내의 많은 한국계 지방의원들은 내놓고 얘기를 못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에는 성장에 한계가 있고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에게 모국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본 사회가 그렇게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경제계에서는 두 거인이 있으니 롯데의 신격호(시게미츠)씨와 MK의 유봉식 회장이 그들이다. 두 사람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귀화하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신격호씨는 일본과 한국에 사업을 키워 온 경제인으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인물이다.
경남 남해도 출신의 유봉식씨는 아오키 사다오[靑木定雄]라는 통성명을 쓰고 있지만 조국애도 대단하다. 그의 지론은 항상 “친절하라”와 함께“일본을 욕하지 마라, 욕하려면 일본인을 따라잡고 추월한 다음에 말하라”라고 강조한다. 싸움에 진 개가 메아리치듯 공허하게 크게 짖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결국 우리가 일본을 추월하거나 극복하면 일본과 대등한 외교도 가능하고 일본인도 한국인을 존경하게 된다는 역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현재는 동생되는 유태식(兪台植)씨가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이밖에 재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금융업계와 건설업계의 큰 회사도 많이 운영하고 있다. 특히 일본 건설업의 하부구조인 함바(노동자 기숙사)운영자의 상당수도 재일동포들이다. 또한 2만여 개에 이르는 파칭코 점의 60%가 재일동포 소유라 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며, 야키니쿠와 김치제조 공장도 대부분 재일동포나 귀화한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다.
학계
일본의 학계에도 많은 동포들이 활약하고 있다. 작년도 7월1일에 일본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국립대학 내 한국적 교수는 교수 26명, 조교수 75명, 전임강사 34명 등 135명이다. 금년 6월25일 민단신문에 따르면, 공립대에도 교수 15명, 조교수 15명, 전임강사 9명 등 39명이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국공립 대학에서 재일동포 교수가 임용된 것은 1984년의 일로 쓰쿠바[筑波]대 물리학과의 이상무 조교수, 오오사카[大阪]대학 세포공학센터의 김재만(金在萬) 조교수가 처음이었다 한다.
사립대학 교수는 일일이 밝힐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한일 고대사학자인 하나조노[花園] 대학의 이진희 교수로부터 인권운동가로 알려진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의 서승 교수 등 무수히 많다.
1편에서는 여기서 갈무리를 하고 제2편에서는 격투기 이외의 스포츠계와 연예계에 대해서 소개하기로 한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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