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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노래 / 유자효
잃을 줄 알게 하소서./ 가짐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잃음인 것을,/ 이 가을/ 뚝뚝 지는/ 낙과의 지혜로/ 은혜로이/ 베푸소서./ 떠날 줄 알게 하소서./ 머무름보다/ 더 빛나는 것이/ 떠남인 것을,/ 이 저문 들녘/ 철새들이 남겨둔/ 보금자리가/ 약속의/ 훈장이 되게 하소서.//
가을 햇볕 / 유자효
가을 햇볕은 여름에 남은 마지막 정情마저도 태워 버린다/ 모든 미련을 끊고 찬바람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그럼으로써 가을 햇볕은 여름이 남긴 수분을/ 알곡이 모두 빨아들이고/ 과육果肉을 더욱 단단하게 여물게 한다/ 아, 다행하게도/ 병든 대지가 서서히 제 몸을 치유한다/ 다친 곳이 많았다/ 아픈 곳이 많았다/ 천천히 천천히 몸을 뒤채이며/ 온몸에 업고 안고 있는/ 잘디잔 무수한 목숨들이/ 그 입으로, 그 촉수로, 손과 발로, 전신으로/ 상처를 아물게 하고/ 드디어 편히 숨 쉬게 한다/ 아직 끝은 아니었구나/ 이 계절이 주는 은혜/ 축복/ 부활/ 생명이시여//
추석 / 유자효
나이 쉰이 되어도/ 어린 시절 부끄러운 기억으로 잠 못 이루고// 철들 때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어머니, 아버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깊은 밤.//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달빛의 손길./ 모든 것을 용서하는 넉넉한 얼굴.// 아, 추석이구나.//
추석의 추억 / 유자효
성묘를 끝내면 아버지는/ 우리들을 근처의/ 선암사로 데리고 갔다// 할아버지는 선암사 시주셨고/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내가 부처님을 처음 뵙고/ 절을 한 곳이 선암사이다.// 선암사 근처 폭포에서/ 차가운 물을 맞고/ 개울에서 가제를 잡았다//
감 / 유자효
이 가을 푸른 하늘/ 수놓은 붉은 점들// 반짝/ 눈물 끝에/ 흘린 피 몇 방울// 아직은/ 끝이 아니다/ 보여주는/ 신호등//
소나무 / 유자효
생각이 바르면 말이 바르다/ 말이 바르면 행동이 바르다/ 매운 찬바람/ 찬 눈에도 거침이 없다// 늙어 한갓 장작이 될 때까지/ 잃지 않은 푸르름// 영혼이 젊기에/ 그는 늘 청춘이다/ 오늘도 가슴 설레며/ 산등성에 그는 있다.//
꽃길 / 유자효
당신을 만난 것에 감사합니다/ 함게 해온 시간들에 감사합니다/ 당신을 만남으로서 탄생한 생명들에 감사합니다/ 당신이 곁에 있어서 나의 눈이 트였고/ 세상이 보였습니다/ 밤길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함께 걸어온 길은 꽃길/ 가시밭길도 때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당신에 감사합니다/ 앞으로 걸어갈 길도/ 마지막 떠날 그 길도/ 당신과 함께하면 언제나 꽃길/ 멀리 있어도/ 홀로 있어도/ 당신의 마음과 함께 있으면/ 그것은 또 언제나 꽃길.//
떠날 줄 알게 하소서 / 유자효 잃을 줄 알게 하소서/ 가짐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잃음인 것을/ 이 가을 뚝뚝 지는 낙과의 지혜로/ 은혜로이 베푸소서 떠날줄 알게 하소서/ 머무름 보다 더 빛나는 것은/ 떠남인 것을// 이 가을 뚝뚝 지는 낙과의 지혜로/ 은혜로이 베푸소서 떠날줄 알게 하소서/ 이 저문 들녘에 철새들이 남겨 둔 보금자리가/ 훈장의 약속이 되게 하소서// |
인생 / 유자효
늦가을 청량리/ 할머니 둘/ 버스를 기다리며 속삭인다// “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인생 / 유자효
신은 사람들에게 웬만큼의 시간을 베풀어 주었다./ 웬만큼 조심하면은 6, 70년은 살 수 있다./ 6, 70년./ 긴 시간이다./ 큰 욕심만 내지 않으면 세상도 웬만큼 구경하고/ 삶도 어지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이다./ 신은 거기까지 배려했었다./ 웬만큼 조심하면은/ 큰 욕심만 내지 않으면/ 인생은 눈물겹도록 행복할 수도 있는 거였다.//
여름 강 / 유자효
한여름/ 푸른 밤에/ 보름달은/ 강에 지고// 도롱이/ 늙은 어부/ 검은 강을/ 저어가고// 와스스/ 대바람 소리/ 흩날리는/ 빗방울//
이태석 신부 / 유자효
지금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남 수단 나환자가 본/ 그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 떠나야 깨치게 되는/ 우리 곁의 하느님//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 유자효
아기 새끼 손가락만한 참새 새끼가/ 모이를 주워먹다가/ 무엇에 놀랐는지/ 어미에게 쪼르르 달려가/ 날개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기 주먹만한 어미/ 새끼를 품으니/ 어른 주먹만해졌다//
사랑하는 아들아 / 유자효
아들아/ 네 아픔이 내게로 전해오니/ 사시사철 자욱한 물안개 뿐이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일랑 묻어두면 어떨까// 좋으면 갖고 싶지/ 그것이 당연하지/ 그러나 안되는 게 더 많은 세상에서/ 참아라/ 이 말만 거듭 피 토하듯 뇌인다// 끊일 것 같아도 세상은 이어가고/ 없을 것 같아도 내일은 다시 밝고/ 마음의 주인 되는 법 배웠다고 여기렴//
인생의 봄을 맞은 아들에게 / 유자효
네 어미에게 들었다/ “엄마, 왜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지?/ 미칠 것만 같아”/ 얘야/ 봄은 그런 것이다/ 미어질 것 같은 가슴으로 삶은 망울을 맺는 것이지/ 엄마에게 물었다지/ “엄마도 그래?”/ 엄마도 그랬었지/ 그러나 이제 엄마는 봄에 가슴이 미어지지는 않지/ 엄마는 여름을 사랑하지/ 그 더위의 왕성한 생명력과 푸름을 그리워하지/ 엄마는 오히려 가을에 가슴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지/ 싸늘한 바람이 대지를 적실 때/ 엄마의 가슴은 낙엽 한 올에도/ “덜컹”/ 떨어지는 무게를 체중 가득히 느끼는 것이다/ 얘야/ 봄에 가슴이 미어지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을 청춘(靑春)이라고 이름했겠니/ 계절에서 밀려나는 엄마가 보는/ 계절의 시작인 네가/ 너무나 사랑스럽다고/ 잠 안 오는 밤에 내게/ 말하더구나//
가족사진 / 유자효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옷을 잘 차려입고/ 한껏 멋을 내고는/ 마치 아무 근심 걱정 없다는 듯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아들은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말을 잃고/ 어머니는 깊은 잠에 못 든 지 오래됐지만/ 사진 속의 세 가족은 언제나 똑같이 웃고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은 그래서 더욱 슬프다//
아침 식사 / 유자효
아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송곳니로 무 조각을 씹고 있는데/ 사각사각사각사각/ 아버지의 음식 씹는 소리가 들린다/ 아 그때 아버지도 어금니를 뽑으셨구나// 씹어야 하는 슬픔/ 더 잘 씹어야 하는 아픔//
아버지의 힘 / 유자효
아직은 잠들 때가 아닙니다/ 아버님/ 가실 길이 남았습니다/ 깨어나십시오/ 그 용기와 힘을 보여 주시고/ 담대함과 거침없음/ 사내다움을 보여주소서/ 너무나 약해빠져/ 실패를 겁내며/ 속으로만 욕을 하면서/ 계집애처럼/ 한만 쌓아가는 약골들에게/ 벼락을 내리소서/ 아버님/ 깨어나소서//
할아버지 시계 / 유자효
할아버지의 시계는 늦은 가을이다/ 낮은 소리로 일정한 속도로 간다/ 이낀 낀 돌담을 울리는 소리/ 깊고 잔잔한 그 소리는/ 이슬이 되어 돌에 스민다/ 할아버지의 시계는 저녁 어스름이다/ 잠들 시간이 멀지 않아서/ 온화하고 사랑이 많다/ 그소리는 깊이 울려서/ 벽난로에 잠시 머물다 쓸쓸하게 돌아선다/ 하루가 끝나는 고요와 평화로움/ 호롱불에 펄럭이다 사라지는 그 그림자에서/ 보았느냐/ 천사와 같은 아기의 모습/ 늦은 가을 저녁 어스름/ 할아버지의 시계는/ 연약하고 순수한 은빛으로 가고 있다//
늙은 아들 / 유자효
이제는 부모님보다 더 늙어버렸습니다/ 그래도 답답하면 찾습니다/ 그 품을/ 아무리 늙어보아도 자식입니다/ 늘 어린//
똥 / 유자효
손자가 응가를 한다/ 술렁술렁 빠쳐나온 노란 똥 몇 덩이/ 건강하고 예쁘다// 끊임없이 변의에 시달리는 장모는 대변을 보는 것이 큰 고통이다/ 천신만고/ 갖은 고생 끝에 빠져나온 딱딱한 검은 똥 몇 덩이 가끔 피도 섞인다// 손자의똥을 누이고/ 장모의똥을 누이며/ 인생이란 결국/ 예쁜 노란 똥에서 힘든 검은 똥 사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주먹 / 유자효
아기 새끼손가락만 한 참새 새끼가/ 모이를 주워 먹다가/ 무엇에 놀랐는지/ 어미에게 쪼르르 달려가/ 날개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기 주먹만 한 어미/ 새끼를 품으니/ 어른 주먹만 해졌다//
사랑은 / 유자효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 이루어지지 않아야/ 그리움이 보석이 되고/ 슬픔은 승천하여 별이 된다//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완성 없는 완성을 탐한 죄과로/ 추락하여 지상을 기는 영성靈性의 사체//
성스러운 뼈 / 유자효
불에도 타지 않았다/ 돌로 짙어도 깨어지지 않았다// 고운 뼈 하나를 발라내어/ 구멍을 뚫었다// 입을 대고부니 묘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번뇌를 달래는 힘이 있었다/ 사랑을 복돋아 주진 못하지만// 고통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힘/ 오직 사람의 뼈이어야만 했다// 평생을 괴로워하면서 살아/ 그 괴로움이 뭉치고 뭉쳐// 단단하고 단단하게 굳어진 것이야만 했다/ 그 어떤 불로도 태우지 못하고// 그 어떤 돌로도 깨지 못하는/ 견고한 피리 하나가 되기 위해선//
잔소리 / 유자효
오늘도 아내는 잔소리를 합니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아내의 잔소리가 따라옵니다/ 잔소리 뿐이 아닙니다/ 나가려는 나를 붙들고 잔소리와 함께 뒷머리를 빗겨줍니다/ 40여 년 아내의 잔소리를 들어온 나는 아직도 그것에 익숙하지 못하여 가끔 불쑥 짜증을 냅니다/ 화는 아닙니다/ 화를 내면 그때는 잔소리가 아닌 폭탄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내의 눈물 방울입니다/ 저를 꼼짝 못하고 무릎 꿇게 하는 눈물 폭탄에 두들겨 맞지 않으려면/ 오늘도 나는 아내의 잔소리를 다소곳이 듣고 있어야 합니다/ 착한 아들처럼 되어야만 합니다.//
한들거림 / 유자효
한들거리다 낮아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여/ 때로는 홀씨처럼 떠돌다/ 계곡물에 실려 가기도 하고/ 불운하여라/ 더러는 차도 위에 떨어지고/ 타이어에 밟혀 흔적 없이 사라진다/ 끊임없는 가벼움/ 가벼움이여/ 한들거리다 낮아지는/ 세상의 모든 것이여//
여적 / 유자효
내 평생 많은 사람 만났다고 여겼는데/ 외로워서 돌아보니 세상은 적막강산/ 무너진 가슴을 안고 홀로 넘는 등성이//
슬픔 / 유자효
슬픔은/ 힘이 세다/ 살과 뼈를/ 다 녹인다// 목숨을/ 태운 끝에/ 보이느냐/ 한 줄기 빛// 영혼이/ 먹고 자라는/ 식량이다/ 슬픔은//
속도 / 유자효
속도를 늦추었다/ 세상이 넓어졌다// 속도를 더 늦추었다/ 세상이 더 넓어졌다/ 아예 서 버렸다/ 세상이 환해졌다//
굳이 / 유자효
우리는 안될 곳을 굳이 찾아 가려고 한다/ 동주가 죽을, 중섭이 쫓겨날 일본으로 굳이 가려 했듯이/ 그것도 죽을둥 살둥/ 온갖 힘을 다해서//
적선 / 유자효
큰돈을 못 드려서 당신께 부끄럽소/ 가진 것 못다 드리고 떠날까 봐 무섭소/ 당초에 내 것 아닌 것 몰랐다니 우습소//
지도 / 유자효
내 나라 방방곡곡/ 사랑스런 이름들// 풍세 국수 구리 원통/ 웅진 나주 욕지 사량// 말 설고 물도 설으니/ 작으나 큰 내 나라.//
아름다운 세상 / 유자효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에서는 살육이 저질러지고 있겠지만은/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운 곳/ 지금 이 순간에도 모두가 떠나버린 고독에 몸을 떠는/ 사람들이 있겠지만은/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운 곳/ 지금 이 순간에도 파멸을 위한 악의 씨가 뿌려지고 악의 꽃들이/ 재배되고 있겠지만은/ 그래도 세상은 아름다운 곳/ 당신이 있는 곳은 어디나 세상의 중심/ 당신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당신은 세상의 유일한 선택/ 세상은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으니/ 당신이 떠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운 곳//
홀로 가는 길 / 유자효
빈 들판에 홀로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동행도 친구도 있었지만/ 끝내는 홀로 되어/ 먼 길을 갔습니다// 어디로 그가 가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따금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아도/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홀로였기에// 어느 날 들판에 그가 보이지 않았을 때도/ 사람들은 그가 홀로 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없어도 변하지 않는 세상/ 모두가 홀로였습니다//
개 / 유자효
의정부에서 열린 전국 시낭송 경연대회 경기도 예선/ 눈 먼 여인이 누런 개의 인도를 받으며 건물로 들어섰다/ 대회장의 밖에 개는 공손하게 앉았다/ 여인은 화장실로 가서 짊어지고 온 가방을 풀어 한복으로 갈아 입었다/ 여인의 차례는 마지막이었다/ 몇 번을 맨발로 연습한 대회장 바닥의 감각을/ 맨발로 확인하며 단상에 올랐다/ 아무도 그녀가 눈이 먼 줄 몰랐다/ 여인은 창과 함께 시를 낭송했다/ 낭송은 다소 서툴렀지만 절절한 한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여인의 차례가 끝나고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개는 눈을 끔벅이며 구석에 묵묵히 엎드려 있었다/ 누가 바라보면 개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진 눈/ 어진 눈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마치 어느 착한 사람이 개의 형상을 하고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듯했다/ 여인은 장려상을 타고/ 개는 다시 여인을 인도해 건널목을 건넜다/ 아무도 그 개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묵묵히 엎드려 있던 누런 등과/ 천천히 끔벅이던 어진 눈/ 이름 없는 무수한 성자 중의 하나가/ 개가 되어 여인을 인도하고 있었다/ 저 흔한 우리 누렁이 중의 하나가 되어//
마스크 / 유자효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전철 안이 조용해졌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입맞춤이 사라졌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표정들이 사라졌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예쁜 눈만 남았다/ 비로소 공평해졌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詩 / 유자효
詩란 참 하잘 것 없는 것이다/ 별 볼일 없는 것이다/ 삶을 돕기는 커녕 방해만 한다/ 허영이며 사치며/ 한갓 장식품이 되기도 한다/ 못생긴 얼굴에 분을 바르고/ 모델인 양 으스대면서/ 세상의 말을 오염시킨다/ 조심하라/ 네 주술에 네가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시인 / 유자효
몇 십 년 시를 쓰다가 죽고/ 다시 태어나 몇 십 년 시를 쓰다가 죽고/ 다시 태어났는데/ 왜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온갖 것 다 해보겠다고 쫓아다니다/ 죽을 때 즈음해// “아하! 이게 나의 현생이었구나”// 시 쓰려고 목숨 받아 다시 세상 나왔던 것을//
강릉에 와서 / 유자효
초희楚姬ㆍ균筠의 집에는/ 낙엽만이 날리고// 울음도 아쉬움도/ 고통도 다시 없는// 신선이 되셨는가요/ 한숨 소리/ 갈대숲//
그 여인 / 유자효
모처럼/ 양복이며/ 넥타이며/ 차려 입고/ 광화문 네거리를 내려가는데/ 문득 눈에 띄는/ 그 여인/ 삼십년 만인가/ 사십년 만인가/ 양장에/ 손가방을 들고/ 신호를 기다리던/ 그 모습은/ 아직도 예전과 다를 바 없고/ 고생은 없었는지/ 화장기 없는 얼굴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신호가 바뀌자/ 황황히 길을 건너던/ 가냘픈 어깨 뒤로/ 내리던 노을/ 어떻게 살았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신산했던 그 세월/ 옛날과 똑같은 걸음걸이로/ 인파 속에 묻혀 가던/ 삼십년 만인가/ 사십년 만인가/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아무런 기약도 없이/ 멀리/ 힘없이 무너져 가던/ 작은 그림자/ 그 여인//
주머니 속의 여자 / 유자효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주머니 속 여자가 외친다// 좋은 조건의 대출상품 있다고/ 동창모임 있다고/ 심지어는 벗은 여자 사진 있다고/ 시도 때도 없이 외쳐댄다// 버튼을 눌러 말문을 막아버리자/ 마침내는 온몸을 부르르 떤다// 참 성질 대단한 여자/ 주머니 속의 여자//
세한도 / 유자효
뼈가 시리다/ 넋도 벗어나지 못하는/ 고도의 위리안치/ 찾는 사람 없으니/ 고여있고/ 흐르지 않는/ 절대 고독의 시간/ 원수 같은 사람이 그립고/ 누굴 미워라도 해야 살겠다/ 무얼 찾아 냈는지/ 까마귀 한쌍이 진종일 울어/ 금부도사 행차가 당도할지 모르겠다/ 삶은 어차피/ 한바탕 꿈이라고 치부해도/ 귓가에 스치는 금관조복의 쏠림 소리/ 아내의 보드라운 살결 내음새/ 아이들의 자지러진 울음소리가/ 끝내 잊히지 않는 지독한 형벌/ 무슨 겨울이 눈도 없는가/ 내일 없는 적소에/ 무릎 꿇고 앉으니/ 아직도 버리지 못했구나/ 질긴 목숨의 끈/ 소나무는 추위에 더욱 푸르니/ 붓을 들어 허망한 꿈을 그린다//
눈이 오다 / 유자효
누가 왔나/ 이 밤중에/ 하얀 등불 들고서// 화드득/ 방문 열고/ 마당으로 내려서니// 세상이 이렇게 밝아 몸 숨길 곳 없어라//
섣달 / 유자효
정리해야 합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원통하다 하더라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시간을 다 썼습니다//
회상 / 유자효
잠깐/ 보지 못했는데/ 저승에 가 있습니다// 지척이라 여겼는데/ 아득한 시간입니다// 걸어온 날들이 모두/ 꽃길처럼 뵙니다//
아침송 / 유자효
자작나무 잎은 푸른 숨을 내뿜으며/ 달리는 마차를 휘감는다/ 보라/ 젊음은 넘쳐나는 생명으로 용솟음치고/ 오솔길은 긴 미래를 향하여 굽어 있다/ 아무도 모른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길의 끝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여행에서 돌아온 자는 아직 없다/ 두려워 말라/ 젊은이여/ 그 길은 너의 것이다/ 비온 뒤의 풋풋한 숲속에서/ 새들은 미지의 울음을 울고/ 은빛 순수함으로 달리는//
아직 / 유자효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 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것이다/ 보라/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그들의 사랑을 함빡 주고 가지 않느냐/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 재처럼 사그라져 사라지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다/ 너는 내 사랑을 함빡 받지 못했으니//
노래 2 / 유자효
말 못하는 아기의 마음을 어머니가 알 듯/ 어른의 마음을 아기가 알 듯/ 어린 강아지가 사람의 마음을 알 듯/ 저 짐승들의 마음을 사람이 알 듯/ 뿐이랴/ 사람들의 마음을 나무가 알 듯/ 꽃들의 마음을 벌들이 알 듯/ 사랑하면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사람만이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니고/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마음을 타고났나니/ 네가 부르면/ 나도 부르고/ 내가 부르면/ 너도 부르고//
마라토너 / 유자효
그는 달린다/ 가슴이 터질듯한 고통/ 숨이 끊어질듯한 공포/ 포기하고 싶다/ 걷고 싶다/ 쉬고 싶다/ 눕고 싶다/ 시시각각/ 끊임없이 밀려오는/ 강렬한 유혹을 억누르며/ 그는 달린다// 우리의 인생을 위해/ 그는 달린다//
염려 / 유자효
무섭지/ 가슴을 빠개는 고통/ 심장을 세우는 공포/ 혈관을 자르는 두려움/ 그러나/ 혼자가 아냐/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 이 자리를 거쳐 간 사람들/ 거쳐 가는 사람들/ 거쳐 갈 사람들이 무수하단다/ 너를 살리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제 맡겨둬/ 염려하지마//
아픔 / 유자효
만지지 말아다오/ 스치는 바람결에도/ 자지러지게 아프니/ 손대지 말아다오/ 세상은 아픔 투성이/ 아픔은 무섭지만/ 정말 싫지만/ 아픔을 모르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하니/ 아픔과 함께 가야할 밖에// 쳐다보지 말아다오/ 이제는 눈길에도 참 아프구나//
윤회 / 유자효
신령한 기운이 있어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 두뇌를 그대로 갖고 나지 않으니 부질없는 일입니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 아닌 내가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난다 하더라도 지금의 나와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조상의 그늘을 내가 입고 내가 하는 일이 나의 미래와 내 후손의 그늘이 된다는 것이 설득력 있는 말이겠지요/ 설령 윤회의 바퀴 위에 얹힌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다른 세상의 질서인고로 지금의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이 시간만이 나에게는 오로지 알파이자 오메가/ 그래서 지금 이 삶이 윤회의 전체를 아우르는 무게를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난산 / 유자효
어린 암소가 난산이라는 전갈을 받고 수의사가 달려왔다/ 암소는 탈진 상태이고 새끼는 대가리를 반만 바깥에 드러내고 있었다/ 어미의 골반이 작은 것이 원인이라고 했다/ 수의사는 새끼를 다시 밀어 넣어 위치를 잡고 강제분만을 시도했으나 되지 않았다/ 어미라도 살리기 위해 새끼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 순간 천신만고 끝에 새끼가 밖으로 끌려 나왔다/ 숨을 쉬지 않는 새끼의 입에 숨을 불어넣는데 탈진해 있던 어미가 고개를 돌려 혀로 새끼의 젖은 몸을 핥았다/ 그러자 새끼는 비칠거리며 일어서려고 했다/ 몇 번을 자빠지다가 마침내 일어서는 새끼/ 그날 몽골 초원은 새 가족을 맞아 더욱 푸르렀다//
부활절 아침 / 유자효
그렇게 떠나신 후 2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에도 세상이 평화롭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살육이, 공포가, 고통이 넘쳐납니다/ 무섭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소서/ 주님/ 다시 오소서//
무섭다 / 유자효
나는 고모부와 이복형을 죽인 30대 청년이 무섭다/ 사람들을 예사로 죽인다는 그가 무섭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잘 만난 행운아/ 그의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분장한 청년 말에 굽실거리는 노인들이 무섭다/ 일이 잘못되자 돌아가는 열차 그 청년의 문간에서 무릎 꿇고 빌었다는 노인의 석고대죄가 무섭다/ 그 청년이 나타나면 땅에서건 들에서건 껑충껑충 뛰며 열광하는 군중들이 무섭다/ 왕조가, 독재가, 독선이 무섭다/ 먹고살기 어렵다면서 쏘아 올리는 미사일이 무섭다/ 지축을 흔드는 핵무기가 무섭다/ 같은 말을 쓰는 타인들/ 나는 그들이 몸서리치게 무섭다/ 그들을 좋다고 하는 이들도 무섭다//
염려 / 유자효
무섭지/ 가슴을 빠개는 고통/ 심장을 세우는 공포/ 혈관을 자르는 두려움/ 그러나/ 혼자가 아냐/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 이 자리를 거쳐 간 사람들/ 거쳐가는 사람들/ 거쳐 갈 사람들이 무수하단다/ 너를 살리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제 맡겨둬/ 염려하지마//
하말라야 사람들 / 유자효
큰 눈이 오기 전/ 하말라야에서 소금을 캐어/ 하말라야를 넘어 소금을 풀고/ 그곳에서 겨울을 지내고 봄이 오면/ 다시 하말라야를 넘어/ 처자가 있는 마을로 돌아가는 하말라야 사람들/ 그들은 서른 번 하말라야를 넘으면/ 다시는 마을에 돌아오지 않는다//
부처님 / 유자효
기다리지 마/ 다음이란 없어/ 탁발 스님을 보았을 때 시주를 하고/ 걸인을 만났을 때 동전 하나라도 던져야 해/ 부처님은 다시는 오지 않아/ 오직 한 번/ 네 앞에 모습을 나타내신/ 그 때를 놓치지 마/ 다음이란 없는 게야/ 다음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