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발췌공유]
대부분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소원, 안심, 만족을 채우는 것으로 인생을 살고 있다.
사람들은 샤마니즘에 나오는 이런, '천지신명님께 비나이다, 이 사람의 이 간절한 정성을 받으시사 자식 하나 주시옵소서' 하는 그런 수준에서 산다. 거기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간 게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우리라는 존재의 가치를, 신분을, 운명을 만들고 실현하고 훈련받고 체현해보는 시간으로 가진, 이 기가 막힌 기회가 바로 우리의 인생이다.
명예와 책임과 근심과 걱정과 고민과 용기와 배신과 눈물과 후회로 범벅이 된 이 기가 막힌 우리 인생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기를 우리가 단지 기계가 되고 소모품이 되고 그를 대신하는 일이 되는 그런 방패막이가 아니라, 우리를 만드시는 진실되고 진정한 그 영광과 무게와 권능의 인생이다.
그것을 우리가 놓치고 살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어도, 매우 소극적인 신앙관을 만들어서 그저 죄 안 짓는 게 전부 다이고, 욕 안 먹는 게 다이고, 교만하지 않는 게 다일 뿐이지, 명예롭고 영광된 것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가 명예롭고 영광되다는 것은 뭔가?
반가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이웃 앞에 내가 나하고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경쟁할 필요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나를 보면 살 맛이 나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이고, 너이고, 우리이고, 인생이고, 역사이고, 창주주 하나님의 의도, 뜻인 것이다.
그런 명예, 영광의 자리로 가는 신앙관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더 가지를 않고, 그저 무엇을 안하고 만 거다.
성경에서 요나는 자신의 최고치의 신앙 고백을 하나님께 받쳤는데도, 하나님은 그 요나 보고 니느웨 사람들이라도 '용서라는 자리까지 더 가야 된다' 라고 그를 잡아 끄신다.
그래서 요나는 단지 긍휼을 구하는 자리를 넘어서서 그럴 자격이 없는 데까지 확장하는 데로 끌려간다.
그 일을 뭐가 하는가? 고난이 그 일을 한다.
고난은 뭔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장벽, 한계이다. 이것이 신자들을 괴롭히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보고 '더 가자'고 하시는 거다.
우리더러 안심, 형통에 안주하지 말고 더 가자고 하시는 거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만 와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 보고 거기서 어디까지 '더 가자'고 하시는 건가?
성경의 다윗에서 본 바와 같이, 어떤 진심, 어떤 도덕성, 인간이 가지는 최선, 인간이 할 수 있는 종교적 헌신에서부터 더 가자는 거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수준, 하나님의 의도에까지 더 가자고 하는 거다.
하나님이 우리로 고난을 겪게 해서 우리 안에 뭘 만들려고 하는가?
우리가 자신의 최선에 안주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 수 없는 데까지 우리를 불러내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를 업어 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훈련하시고, 우리 자신이 그의 목적과 내용이 되게 하시는 성실하신 하나님임을 깊고 푸른 역사와 우리의 긴 인생으로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훌륭해질 수 있는 기회가 매일 있고 어디나 있는데, 우리 아무도 그걸 안 한다.
'적당히'에 머물면 안된다. 그건 비겁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해야 된다.
이제는 명예롭고 영광스런 존재, 즉 만나면 반가운 사람이 되고, 이웃이 나를 보면 살 맛이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도저히 용서하기가 싫은 사람들까지도 용서하는 자리까지 가야 한다.
로안 윌리암스에 의하면 이렇게 얘기한다;
"고난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고난이, 우리의 한계가 장벽이, 우리로 하여금 안심과 형통에 머물지 않고 거기서 더 가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
우리는 이제부터 우리의 신앙생활을,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존재를, 우리의 지금의 자리를,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내야 한다.
이제는 그것이 우리의 명예이고, 기쁨이고, 감사이고, 그리고 웃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출처: 박영선 목사 / 깊고 푸른 역사: 사무엘 40(에필로그) / 2018.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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