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 선생(金喆壽)
김철수는 일제강점기 양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행정 관료로 호는 춘재(春齋)이다. 상북면 상삼리 사람으로 서기 1895년 5월 4일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경유학생 시절 2·8 독립선언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청년 운동에 뛰어들었다. 해방 후 경상남도도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주요 공적은 다음과 같다.
1904년 한일의정서가 교환되어 국내정세가 자못 소연하였다. 이 무렵 양산에도 간혹 의병이 출몰하여 일본수비대와 충돌하는 사태가 계속되는 사회불안의 도가니 속이었다. 그는 외가가 있는 기장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여기서 보통학교 2년을 다니다가 부모님이 이주해 있는 구포로 가서 그 곳 구명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졸업을 했으며 부산 제2상업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졸업을 하고 그 해 7월 동경으로 유학을 했다. 동향 선배인 윤현진이 명치대학에 유학 중이었으므로 한결 마음 든든하고 미더웠다. 그는 경응대학에 입학함과 동시에 유학생의 모임인 재 동경 한국학생 학우회에 가입하고 기관지 학지광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이때 유학생들은 감격에 겨워 부둥켜 안고 울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될 무렵인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선언은 그들에게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고 이를 계기로 우리 민족도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확언하였다. 그들은 구체적인 활동을 위해 비밀조직을 만들고 유학생들의 사기를 높이기로 하여 동경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민족은 이번 기회에 독립을 꼭 성취하여야 한다』라는 연제로 열변을 토하며 만장의 갈채를 받았다. 이에 그들은 독립운동기구로『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재동경유학생의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것을 결의하면서 그 대표위원으로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김철수, 윤창석, 서춘, 이광수, 송계백, 이종근, 김상덕, 최한우 등 11명을 선출하였다.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작성은 이광수에게 일임하고 이를 영문과 일어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의 원수와 외국공관 및 일본조야 각계에 발송하기로 하였다. 선언식을 한 후에는 동경 시가를 시위행진 할 것도 결정하였다. 그리고 국내 연락을 위해 송계백을 서울로 파견하였다. 송계백은 서울로 와서, 최린, 송진우, 최남선, 현상윤 등을 만나 동경유학생 운동계획을 알리고 정노식으로 부터 충분한 운동자금도 얻어 동경으로 돌아왔다. 송계백을 맞이한 유학생들은 감격에 겨워 부등켜 안고 울었다. 그들은 백관수 집에서 밤을 새워 독립선언서와 격문 등을 등사하였다. 이러한 준비 작업이 한창일 무렵 상해에서 장덕수와 미국에서 여운홍이 동경에 왔다.
장덕수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상해에서는 김규식박사를 파견하고 미주에서는 이승만 박사와 민찬호, 정한경 등을 파견하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유학생들은 이들을 민족대표로 인정할 것을 이의 없이 결정하였다.
해가 바뀌어 1919년 1월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식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 경찰의 감시도 점점 날카로워져서 거사 전 탄로될 우려가 있고 본국거사의 촉진을 위해서도 하루빨리 거사함이 좋다고 생각하여 선언식 날짜를 2월8일로 앞당겨 정했다. 독립선언식 모임을 일제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재동경학우회총회라 하고 장소는 기독교 청년회관, 시간은 오후 2시로 하였다. 유학생들은 이심전심으로 대회의 뜻을 알아 차렸는지 당일 정오 경 이미 회장은 만원을 이루었고 사복경찰은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삼엄한 분위기였다. 회의를 주관하는 그들은 전격적으로 회의를 진행키로 작정하고 정각 2시 학우회장 백남규가 개최를 선언하고 최팔용이 재빨리 등단 조선청년독립단이 주동하는『독립선언식』을 거행하겠다고 대회의 성격을 밝힌 후 뒤따라 백관수가 등단하여 준비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뒤이어 김도연이 등단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회의가 진행된 지라 일경도 손 쓸 사이가 없었다. 환호와 박수로 결의문이 채택되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니 장내는 온통 일순간에 흥분의 도가니로 화했다. 장내의 분위기에 혼이 빠진 일경들은 이때부터 호루라기를 불며 해산을 명령하나 들뜬 학생들이 순순히 해산할 리 없고 경찰과 학생들 사이에 육박전이 벌어지고 마침내 회의장은 수라장이 되었다. 학생들은 회의장을 뛰어나와 시위행진을 하면서 영어와 일어로 된 선언문과 결의문을 뿌리고 일부는 일본 의회와 일본 각 기관과 외국 공관에 배부하였다. 이날부터 일경은 주모학생 11명의 검거에 혈안이 되었다. 상해로 간 이광수와 만주로 간 최한우를 제외한 9명은 모두 검거되고 그 외에도 50여명의 학생들이 피검되어 며칠씩 문초를 받고 석방되었으나 주모자 9명은 동경감옥에 수감되었다. 일경의 심문과 고문은 가혹했지만 우리 동포인 고등계 형사 선우갑은 우리 학생들의 동태를 샅샅이 보고하여 그들 학생의 증오의 대상으로 간악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이 같은 동경유학생의 2.8독립선언문을 3.1독립운동의 촉매제로 우리민족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김철수는 동지 8명과 함께 반년 이상이나 미결수로 고생하다가 공판에 회부되어 9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만기 출옥한 그는 옥고에 극도로 쇠약해져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 국내에서는 일제의 악랄한 탄압으로 피비린내 풍기던 3.1운동의 거센 물결이 지나가고 일제도 무단통치만으로는 안되겠음을 알고 그들은 소위 문화정책을 표방하니 전국에는 우후죽순처럼 많은 청년단체가 난립하게 되었다. 그는 이의 정비통합을 위하여 장덕수 등 유지들의 권유로 『조선연합회위원장』으로 추대되어 각 청년단체의 지도와 육성으로 명실공히 민족운동의 구심점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청년운동의 중심인물들을 물산장려운동으로 전환해 국내에서 이를 주도하는 평양의 조만식과 서울의 이종인을 적극 협력하는데 앞장섰다.
1926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유치원을 경영하며 어린 새싹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는 육영사업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일제는 국내 유명 인사들을 위협 또는 회유하여 소위 황민화운동에 앞장 설 것을 강요하였으나 그는 끝내 이를 거부하고 산중에 은거하여 1945년 감격의 8.15를 맞이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 입법의원 제2대 경남도지사 자유민보 사장 등을 역임하였고, 만년에 주위의 권유로 사단법인 3.1동지회 이사장으로 있다가 1977년 5월18일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