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는 조선의 회화
1.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는 KBS1 TV쇼 진품명품 1380회(2023.7.02.)에서 소개되기도 한 그림이다.
고미술사(古美術史)에서 이 그림은 당(唐)나라때 공신 곽분양(郭汾陽,762-779)의 생일잔치 모습을 그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곽분양의 이름은 곽자의(郭子儀)로 당현종(唐玄宗)때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고 장안(長安)을 수복했던 장수로 또한 회흘(回紇) 회유 및 토번(吐蕃)격퇴로 당(唐)황실을 구해 당대종(唐代宗,762-779)에게 철권(鐵券)을 하사받았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정치군사적인 공로(功勞)로 분양(汾陽)군왕에 봉해져 그 봉호(封號)를 따서 곽분양(郭汾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곽자의(郭子儀,697~781)는 『구당서舊唐書』 권卷120 열전列傳과 『신당서新唐書』 권137 열전 「곽자의전郭子儀傳」에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실존 인물이다.
최치원의 『계원필경桂苑筆耕』에 나오는 곽자의에 대한 기록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가장 빠른 기록으로 되어 있으며 우리 문헌기록에는 곽자의의 행적과 복록(福祿)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남아 있다.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는 조선후기에 유행하여 많은 이들이 소유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조선후기 문인 김정중이 정조15년(1791-1792) 청나라에 다녀온 후 정리한 기유록(奇遊錄)에 보이고 있다.
晴。風甚惡。不得出城。隨松園。訪隔墻林姓人家。此家以甲第名於都下。室凡二百餘間。重樓複道。極其奢麗。東出西入。歸路還迷。雖帝闕,侯第。無以加此。中有一靜室。左右置香木榻。四壁皆古人書畫。琉窓繡戶。玲瓏㶞漾之中。掛郭汾陽行樂圖。其意隱然有自比之心也。
맑음. 바람이 매우 사나왔다.
성 밖에 나가지 못하고, 송원(松園)을 따라 담을 사이에 둔 임성(林姓)인 사람 집을 찾았는데, 이 집은 가장 좋은 저택으로 장안에서 이름났다. 건물이 모두 200여 칸에 중루(重樓)와 복도(複道)가 모두 극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다. 동쪽으로 나갔다가 서쪽으로 들어오게 되면 돌아오는 길을 잃을 지경이니, 비록 황제의 궁궐과 제후 저택도 이보다 더할 수 없겠다. 가운데에 한 정실(靜室)이 있는데, 좌우에 향나무 탑(榻)을 두었고, 사면 벽이 다 옛사람 글씨와 그림이며, 유리창과 수놓은 문이 광채가 찬란하고 윤택이 흐르는 가운데에 곽분양행락도를 걸었으니, 그 뜻은 주인 스스로의 환락을 견주어 보려는 마음이 스며있다.
위 기록을 통해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라는 그림이 청(淸)에서 수입된 후 모사(模寫)되어 두루 퍼졌다라는 것이 현 반도강단사학의 논점이다.
성호사설(星湖僿說) 제4권에서는 곽분양행락도를 “곽영공가경도(郭令公家慶圖)”라 기록하고 있는데, 영공(令公)이라는 말은 이순신 장군이 정걸(丁傑,1516-1597)장군을 호칭할때도 정영공(丁令公)이라 했음을 알 수 있다.
2.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는 미국에 있는 시카고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크기는 187.1×430.8cm의 8폭 병풍으로 비단에 채색한 회화작품이다.
중국 특사로 근무했던 William J. Calhoun(1848-1916)이라는 미국인 변호사의 유족이 1940년4월26일 시카고 미술관에 기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미국 시카고미술관 소장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에 대한 보존처리를 마치고 그 성과를 언론에 공개함으로써 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보존처리 과정에서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다양한 조선시대 행정문서들이 곽분양행락도의 배접지로 사용된 사실도 확인하였는데 이를 통해 곽분양행락도의 제작시기가 1867년 이후라는 사실도 함께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림을 정밀히 살펴보면 이 그림이 과연 당(唐)나라 그림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수가 없다. 바로 그림속에 나오는 아이들의 머리모양인 쌍상투 모습 때문이다.
쌍상투는 바로 조선민족만의 고유한 머리장식모양이며 이는 성인이 되어도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쌍상투를 하고 있었던 사실은 조선회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총각무라는 말은 바로 결혼안 한 총각이 머리를 쌍상투로 틀어올린 모양에서 유래한 말로 이런 모습은 김홍도(金弘道)나 정선(鄭歚,1676-1759) 등 조선후기 화가들의 그림에서 많이 등장하고 있다.
명(明)나라 동월(董越,1430-1502)의 《조선부》(朝鮮賦)에 나오는 쌍상투는 조선아이들의 독특한 머리모양이라는 기록은 비록 단 한줄의 문장이지만, 조선회화사를 관통하는 줄기를 찾아내는데 부족함이 없는 엄청난 내용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현재 중국과 대만에 있는 수많은 회화작품을 감상하면서 어느것이 우리 조선민족의 작품인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렛대로 이 쌍상투 기록을 사용할 수 있다.
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라는 역사적인 절대명제를 기준으로 모든 회화작품을 고찰하면, 쌍상투의 모습이 나온 회화그림은 여지없이 조선민족의 찬란한 유산임을 이제는 아무 거리낌없이 노래부를수 있어야 한다. 노래하지 않는 새가 노래하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릴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3.
2024.02.22. 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상투는 조선인들의 풍습이었는데, 정확하게 그려냈네요.
회화들에서 우리 선조들의 옛 모습들을 찾아내는 것도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업 같습니다.
쌍상투를 튼 민족은 조선민족이 유일하다는 말씀에 공감하고 나갑니다.
쌍상투튼 아이들이 너무 귀엽습니다.
대신들이 "쓰고 있는 모자? 특이하내요.. 양쪽에 와이어를 달고 동그란걸 달아매달엇내요.. 그럼 저런 모자도 조선민족꺼내요..
소중한 자료 잘 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