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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안원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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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門 비각, 유적지 스크랩 순흥안씨 추원단 비문(順興安氏追遠壇 碑文)
安原君派 추천 0 조회 50 11.11.04 23: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본 비문은 경북 영주에 있는 순흥안씨 추원단비의 비문으로

나의 스승인 우죽 양진니 선생님의 글씨로 여기 참고로 올립니다.

 

 

순흥안씨 추원단 비문(順興安氏追遠壇 碑文)

 

 

 

 

동방(東方)의 대성(大姓)으로 역사가 오래된 명문현벌(名門顯閥)을 꼽는다면 순흥안씨가 으뜸으로 꼽힐 것이다.

 

 

 

 

흥위위(興威衛) 보승별장(保勝別將)이며 신호위(神虎衛) 상호군(上護軍)으로 추봉(追封)된 휘(諱) 자미(子美)가 시조가 된다.

 

묘소가 순흥 소백산(小白山)에 있었다고 하나 표석(表石)이 없어 찾지 못하니 후손들 가슴에 사무치는 한(恨)을 품게 한다.

 

 

옛 택지(宅地)는 순흥성(順興城) 남쪽 수리(數里)되는 평리촌(坪里村) 진향(辰向)에 있었으니 회헌(晦軒)선생께서 일찍이 벼루를 씻으시던 세연지(洗硯池)가 그 아래에 있다.

 

 

 

 

인조(仁祖) 정해년(丁亥年 1647) 봄 17대손 순원군(順原君) 응창(應昌)이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 부임하여 누대 조상이 있는 관향(貫鄕)을 찾아 인근에 사는 제종(諸宗)과 협의하여 효종(孝宗) 갑오(甲午 1645)에 상호군공(上護軍公)과 태사공(太師公)의 세사단(歲祠壇)을 축조하였으며 효종 을미년(乙未年 1655) 봄에 구려 선현(先賢)인 문성공(文成公) 회헌선생의 향려비(鄕閭碑)를 세우니 향려단(鄕閭壇)이라 칭하였다.

 

 

따라서 전토(田土)를 마련하여 나라의 대제(大祭)로 추앙하되 송조유현(宋朝儒賢)의 예(禮)를 본받아 매년 10월 1일(음력) 아침에 회제(會祭)하는 것으로 영원히 규칙을 삼았다.

 

 

 

 

상호군이 3자(三子)를 생하니 장은 희 영유(永儒)로 고려 신종(神宗) 4년(1201) 신유(辛酉)에 생하여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상호군(上護軍)으로 추봉되고 묘는 순흥 부석면(浮石面) 감곡리(甘谷里) 지장산(智藏山) 신좌(辛坐)이다.

 

고종(高宗) 경진(庚辰 1220)에 휘 부(孚)를 생하니 갑진(甲辰 244)에 문과에 올라 관(官)이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으로 추봉되다.

 

 

태사공이 현인(賢人)을 계도(啓導)한 공이 있어 태중(太中) 위재(韋齋) 양현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천추에 짝하였으며 묘는 순흥에 있었다고 하나 실전하니 상호군공단(上護軍公壇)에 종향(宗享)하다.

 

 

고종(高宗) 계묘(癸卯 1243)에 태사공이 향(珦)을 생하니 초휘(初諱)는 유(裕)이라 선생이 젊어서부터 성리학(性理學)을 좋아하여 원종(元宗) 경신(庚申 1260)에 나이 18세로 문과에 급제 기축(己丑 1829)에 충렬왕(忠烈王)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연경(燕京)에 유(留)하여 주자서(朱子書)를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본떠서 귀국하여 성리(性理)를 강구(講究)하고 정사(精舍)를 축조한 뒤 봉안(奉安)하고 조석으로 우러러 배알(拜謁) 경모(敬慕)함으로 해서 회헌(晦軒)이라 호(號)하다.

 

 

공자와 주자를 존숭하여 도학(道學)을 일으키니 우뚝 도방 도학의 조(祖)가 되다.

 

 

관은 삼중대광도첨의중찬(三重大匡都僉議中贊)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요 시(諡)는 문성(文成)이며 충숙왕(忠肅王) 기미(己未 1319)에 문묘에 종사(從祀)하다.

 

 

중종(中宗) 임인(壬寅 1542)에 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선생이 서원(書院)을 순흥 백운동(白雲洞)에 창건하였고 명종(明宗) 기유(己酉 1549)에 문순공(文純公) 퇴계이황(退溪李滉)선생이 백록동고사(白鹿洞故事)에 의하여 조정에 주청(奏請)함으로써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액(額)과 경적(經籍)을 하사받으니 우리나라의 서원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회헌선생이 휘 우기(于器)를 생하니 호는 죽옥(竹屋)이요 문과에 올라 관이 광정대부(匡靖大夫) 검교첨의찬성사(檢校僉議贊成事) 겸 판전의시사(版殿儀寺事)요 순평군(順平君) 시(諡) 문순(文順)이다. 문순공이 2자(二子)를 생하니 장은 휘 목(牧)이니 호는 겸재(謙齋)요 관리 통헌대부(通憲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으로 봉(封) 순흥군(順興君) 시 문숙(文淑)이다. 차(次)는 휘 신(愼)이니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노부도감판관(?簿都監判官)이요 묘 실전하여 융희(隆熙) 후 첫 임술(壬戌 1922) 봄에 후손 종덕(鍾悳), 규용(奎鎔), 승필(承弼) 등 제종이 순흥 평리마을 오산(梧山)에 단을 설(設)하였다.

 

 

순흥군이 3자(三子)를 생하니 장은 휘 원숭(元崇)이니 문과에 올라 관이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봉 순성군(順成君) 시 문혜(文惠)요, 차는 휘 원형(元衡)이니 관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당문학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보국문하시중평장사(輔國門下侍中平章事)요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죽성군(竹城君)을 봉하니 시는 문혜(文惠)요, 차는 휘 원린(元璘)이니 문과에 올라 관리 정당문학 검교중추부사(檢校中樞府事)로 탐진군(耽津君)을 봉하니 시는 문열(文烈)이다.

 

 

판관공(判官公)이 3자(三子)를 생하니 장은 휘 훈(勳)이니 판관전교시사(判官典校寺事)요 차는 휘 정(貞)이니 예빈윤(禮賓尹)이요, 차는 휘 경(璟)이니 문과에 올라 주부(主簿) 동정낭장(同正郎將)의 벼슬을 하나 곧 1파이다.

 

 

 

 

시조공 차자(次子)는 휘 영린(永麟)이니 신기별장(神騎別將)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추봉(追封)되다. 공이 휘 정준(貞俊)을 생하니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추봉되다. 공이 휘 성철(成哲)을 생하니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으로 원종(元宗) 계유(癸酉 1273)에 휘 문개(文凱)를 생하니 초휘(初諱)는 균(鈞)이요 호는 질재(質齋)니 문과에 올라 동한보절진충무극공신(東漢保節盡忠無極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참리찬성사(僉議參里贊成事)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전리판서(典理判書) 영효시관사(領孝思觀事) 삼중대광좌정승(三重大匡左政丞) 봉 순흥부원군(封順興府院君)으로 시는 문의(文懿)이다. 이상 사세묘(四世墓) 실전하여 융희(隆熙)후 첫 무오년(戊午年 1858)에 세사단(歲祠壇)을 순흥 석교리(石橋里) 서쪽 언덕에 축조하고 후손 종묵(鍾?), 재영(載永), 재준(載駿), 상호(相鎬)등 여러 종인들이 협로(協勞)하고 창경(昌慶)이 단기(壇記)를 짓고 군수(郡守) 창렬(昌烈)이 문의공 질재선생 여항비(閭巷碑)를 세우고 지(誌)를 찬하다.

 

 

공이 5자(五子)를 생하니 장은 휘 천재(千載)니 중랑장(中郞將)이요, 차는 휘 천서(千瑞)니 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요 차는 휘 천길(千吉)이니 영랑장(領郞將)이요, 차는 휘 천선(千善)이니 문과에 올라 관이 정당문학(政堂文學)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으로 봉 순성군(順成君) 시 양정(良定)이요, 묘 실전하여 예천(醴泉) 백송동(白松洞) 건지산(巾芝山)에 사단(祠壇)을 설하다.

 

차는 휘 천송(千松)이니 산원(散員)이다. 천서공(千瑞公)이 2자를 생하니 장은 휘 인발(仁發)이니 진사(進士)요, 차는 휘 원기(原起)니 호조전서(戶曹典書)이다.

 

 

양정공(良定公)이 3자를 생하니 장은 휘 손주(孫柱)니 중랑장(中郞將) 문과 찬성(贊成)으로 봉 순성군(封順成君) 시 경혜(景惠)요, 묘 실전하여 양정공과 동단(同壇) 종향(從享)하다.

 

 

차는 휘 천봉(天鳳)이니 예부의랑(禮部議郞)이요, 차는 휘 천보(天保)니 관이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좌의정(左議政) 영돈녕(領敦寧)으로 시 소의(昭懿)이니 곧 2파이다.

 

 

 

 

시조공의 3자는 영화(永和)이니 전리정랑(典理正郞)이다. 공이 2자를 생하니 장은 휘 득재(得財)요 호장(戶長)에서 호부낭중(鎬部郎中)으로 추봉되다. 공이 휘 희서(希?)를 생하니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이다. 위 삼세의 묘 실전하여 순조(純祖) 을유(乙酉 1825)에 후손 기명(其命), 성로(性老) 등 제종(諸宗)이 사단을 사현정 남쪽 대산(臺山)에 설하니 곧 대산단(臺山壇)이다.

 

 

판전객시사공이 휘 석(碩)을 생하니 충렬왕(忠烈王) 8년(1282)에 문과에 올랐으되 은덕불사(隱德不仕)하니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추봉되고 시 문경(文敬)이니 세 아들과 함께 성동(城東) 1리(里)에 동거하였다.

 

 

구거(舊居)하던 집 곁에 옛 우물이 있어 인종(仁宗) 을사(乙巳 1545)에 문민공(文敏公) 주세붕(周世鵬)선생이 사현정비(四賢井碑)를 세워 표징(表徵)하다.

 

 

문경공이 5자를 생하니 장은 휘 현(軒)이니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요, 차는 휘 축(軸)이니 호 근재(謹齋)이다. 칙수장사랑 요양로 개주판관(勅授將仕郞 遼陽路 蓋州判官) 본국 삼중대광 첨의찬성사(本國 三重大匡僉議贊成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시 문정(文貞)이요, 차는 휘 보(輔)니 문과에 올라 전법판서(典法判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시 문경(文敬)이요, 묘 실전하여 융희 후 첫 무오년(戊午年 1918)에 혁중(赫中), 필중(必中) 등 제종이 협로(協勞)하여 대산단에 추설배향(追設配享)하고 동시에 세사단비(歲祠壇碑)를 세우다.

 

 

차는 휘 집(輯)이니 문과에 올라 관이 수충보리공신(輸忠輔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요, 봉 순흥군(封 順興君)이다. 묘 실전하여 순조 을유(乙酉 1825)에 대산단에 동향(同享)하다. 차는 을수(乙壽)니 중랑장(中郞將)이다.

 

 

판전객시사 헌(軒)공이 2자를 생하니 장은 휘 상봉(祥鳳)이니 도사(都事)요, 차는 휘 상은(祥殷)이니 총랑(摠郞)이다.

 

 

문정공이 2자를 생하니 장은 휘 종기(宗基)니 보마배행수별장(寶馬陪行首別將)이다. 차는 휘 종원(宗源)이니 호는 쌍청당(雙淸堂)이요, 문과에 올라 관이 밀직제학(密直提學) 영삼사사(領三司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요,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시조공 3자이신 전리정랑공(典理正郞公)의 차자는 득인(得仁)이니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이다. 검교공이 휘 시필(時弼)을 생하니 국학사성(國學司成)이다. 공이 휘 세문(世文)을 생하니 직장동정(直長同正)이다. 공이 휘 서(瑞)를 생하니 진사요, 공이 휘 주정(周程)을 생하니 통훈대부(通訓大夫) 예빈정(禮賓正)으로 곧 3파이다.

 

 

 

 

초조(初祖)이신 상호군공께서 덕업(德業)을 닦아 여경(餘慶)을 기르심으로써 도학(道學) 문장(文章) 충효(忠孝) 절의(節義)가 뒤를 서로 이어서 대대로 세상에 공헌한 미거(美擧)와 문벌의 융성(隆盛)함은 송나라 하남(河南)의 정씨(程氏), 신안(新安)의 주씨(朱氏)와 더불어 함께 꼽을만하다.

 

 

 

 

과거에 등제한 현인군자(賢人君子)를 요약(要約) 기록하면 문과 180분, 사마(司馬) 325분, 충신 55분, 봉군(封君) 또는 시호(諡號)를 하사받은 분이 30여분이요, 문묘배향(文廟配享)과 서원사향(書院祠享)이 60여분이며 항일투쟁에 이르러서는 애국지사로 중근(重根)의사(義士)와 창호(昌浩) 도산공(島山公)의 수백인이다.

 

 

 

 

추원재(追遠齋)는 옛 그대로 석교리 246번지에 있었던 바 순원군(順原君)이 건립한 것으로 초옥(草屋)의 약간의 가목(架木)이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퇴비(頹?)하고 규모와 제도가 소박(素樸)하고 협소하였으므로 단기 4251년 무오네 후손 종욱(宗昱)외 여러 종원들이 협력하여 향려단(鄕閭壇)을 수축하고 세사단비(歲祠壇碑)를 세우며 또 추원재 초가를 석교리 229번지에 와가(瓦家)로 이건(移建)하여 경신년(庚申年 1920) 봄에 낙성을 고했다.

 

 

무술년(戊戌年 1958) 가을 추원재 증축할 것을 공의(公議)하고 후손 인식(寅植)외 137인이 연명으로 팔도(八道) 동종(同宗)에 통고하여 재물을 모으고 공인(工人)을 불러 경자년(庚子年 1960)에 강당 및 동재(東齋)와 부속건물을 증축하니 마을의 경관(景觀)이개신(改新)되고 누대(累代) 조상이 있는 향토(鄕土)가 광채를 더 하였다.

 

 

임이년(壬寅年 1962) 가을에 종의(宗議)가 향려단을 재실 뒤 181번지 전(田)으로 이설키로 하여 계묘년(癸卯年 1963) 봄에 기공 7월17일에 안석(安石)하니 산파단(山坡壇)은 동시에 완성하고 대산(臺山), 오산(梧山)의 2단은 3년이 지난 병오년(丙午年 1966) 가을에 이안(移安)하니 승규(承奎)의 제종이 노고를 드려 준공하였다.

 

 

그후 을축년(乙丑年 1985) 가을 순흥 소수서원 대강당에서 개최한 전국화수회(全國花樹會) 총회때에 여러 종인들이 모두 논의하기를 추원재 뒤는 사단(祀壇)의 제도(制度)가 박협(撲狹)하여 격증하는 참사자(參祀者)를 수용할 수 없어 제사 드리기가 지극히 어려우며 배열한 질서가 어지럽고 주위 환경의 오손으로 불결하니 성역지(聖域地)로 옮겨 봉안하자는 건의를 의결하고 1,2,3파 종회와 합의하여 순흥안씨시조사단이전중건사업추진위원회(順興安氏始祖祀壇移轉重建事業推進委員會)를 구성하고 규약, 임원, 사업계획을 성안(成案)하여 전국 제종에게 통고하니 보본(報本)하는 성력(誠力)이 답지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986) 봄 비봉산(飛鳳山) 13정보(町步)를 매입하고 정묘(丁卯 1989) 2월2일 기지(基址)를 영산(靈山)의 양지바른 길국(吉局)에 여니 터전의 규모가 정연하여 위는 시조 상호군공단(上護軍公壇)이 되고 아래에 중앙으로부터 좌는 태사공위단(太師公位壇)이니 전일의 향려단(鄕閭壇)이요, 우는 판관공위단(判官公位壇)이니 전일은 오산단(梧山壇)이며 서는 신기별장공위(神騎別將公位) 3위는 전일의 산파단(山坡壇)이며 우동(右東)은 전리정랑공(典理正郞公)외 4위이니 전일의 대산단(臺山壇)이다.

 

 

전례대로 시공하여 무진년(戊辰年 1988) 가을 대공사를 준공하니 전체를 일러 순흥안씨추원단(順興安氏追遠壇)이라 이름한다.

 

 

 

아아! 아름답고 성대하여라, 많고 많은 훌륭한 후예들이 합심협력하여 매진(邁進)하였음이로다.

 

 

만일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열성이 없었다면 어찌 이 대사업을 성취할 수 있었으리오.

 

 

후손 경모(京模)등 제언(諸彦)이 세승(世承)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명(銘)을 지어줄 것을 청하기에 내 후학(後學)으로 아는 것이 어리다 하여 사양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마침내 분수에 넘침을 헤아리지 못하고 삼가 살펴보면서 차례대로 삼가 찬(撰)하고 명(銘)으로서 이으니 명(銘)하여 이르노니,

 

 

순흥땅에 정착하여 터전을 잡고 향기로움을 동방에 뿌렸도다. 덕업(德業)을 심고 여경(餘慶)을 기르셨기에 3형제 모두 훌륭하게 되셨네, 태사공은 현일을 계도(啓導)하신 공이 있어 위재(韋齋)와 함께 짝이 되도다. 하늘이 회헌(晦軒)선생을 내시니 공자와 주자를 존숭하도다. 지난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열어 줌으로 도학(道學)의 조(祖)되셨네, 조정에서 높이 받들어 성무(聖?)에 올려 배향하도다. 훈도(薰陶)의 교화가 미쳐서 대대로 석덕(碩德)이 배출되어 임금을 위해 몸을 바치고 백성에게 혜택을 입혀서 가문과 나라를 진양(振揚)케 하였네, 세대다 오래되어 능곡(陵谷)도 변하니 아무리 찾아도 실전된 묘는 찾을 길 없었네, 단을 세우고 제사 받든지 300여년이로다.

 

 

비봉산 명당(明堂) 언덕에 옮겨 축성(築城) 봉안(奉安)하니 큰 복을 싣고서 거듭 돌아옴이며 여러대 쌓아 온 아름다운 덕화(德化) 더욱더 드날리니 높이는 저 소백산과 같이 하고 그 영원함은 죽계(竹溪)와 함께 하리로다.

 

 

 

 

단기4323년(1990) 경오 봄

 

 

 

후학 성균관장 광산(光山) 김경수(金敬洙) 근찬(謹撰)

 

대한민국 미술대전서예부 심사위원장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 근서(謹書)

 

 

 

순흥안씨전국화수회 시조사단이전중건사업추진위원회 건립(建立)

 

순흥안씨 추원단 [順興安氏追遠壇]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에 있는 순흥안씨 문중의 단소(壇所)이다.

 

 

고려 신종 때 흥위위보승별장을 역임하고 신호위상호군에 추봉된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시조 자미(子美)를 포함하여 묘가 실전된 순흥안씨 선조 12인을 모신 제단(祭壇)으로,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산21번지, 종산(宗山)인 비봉산 기슭에 있다. 순흥안씨 추원단은 1988년 11월 중건되었으며, 종산의 면적은 약 14만 2,148m²이다.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전국의 순흥안씨 후손들이 이곳에 모여 세사(世祀)를 올린다.

 

 

추원단 아래에는 1996년 중건한 재실(齋室)인 약 165m² 규모의 추원재(遣遠齋)가 있어 세사를 받드는 데 필요한 제수 등을 준비하고, 후손들이 회의와 숙식을 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추원단에는 시조 이하 7대에 이르는 이들의 사적과 관향지의 종사 연혁, 추원단 중건내용 등을 기록한 추원단비(追遠壇碑)도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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