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겨레의 스승 외솔 최현배 박사님 일화
제자 오동춘: 짚신문학회 회장
남북 팔천만 짚신겨레 스승 외솔 최현배 박사님은 울산이 낳은
애국지사요 한글학자요 교육자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일제시대 “한글이 목숨이다” 외치며 우리 말글얼을 지키시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감옥에서 3년 옥고를 치루고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 하셨습니다 1926년부터 연희전문교수가 되시어
광복후 연세대 교수로 부총장을 지내시며 원리 원칙만 알고
융통성이 없는 연세대 오석두의 한분이 되셨습니다 곧 최현배
김윤경 정석해 장기원 백낙준 다섯분 교수가 오석두 교수입니다
최현배 박사님은 일제시대 불후의 3대 명저 <조선민족 갱생의 도>,
<우리말본>,<한글갈>를 비롯하여 저서가 지게로 한짐됩니다
청렴한 공직생활, 연구 깊은 교수 생활, 학문활동 하시며 남긴
일화가 많습니다 제자로서 내가 아는 일화 몇가지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1.장남 최영해 사장님의 함흘감옥 면회 때 이야기
최영해 아드님이 함흥감옥에서 옥살이 하시는 아버지 최현배 박사님 위해
마른 북어 한떼를 준비하여 사식으로 드시게 해 드렸다 날마다 북어 아가리의
하얀 뼈만 남기고 북어 꽁지까지 한 마리씩 잡수셨다고 한다 그리고 면회 온 최영해 아드님에게 신문지 조각에 한글풀어쓰기,가로쓰기 등 한글연구로 적은 기초를 건네 주며 내가 살아 나갈지? 죽어 나갈지? 모르니 이 신문조각을 집에 잘 보관해 두라 말씀하셨다 젊은 나이로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감옥에 함께 고난을 겪은 후배 김선기 박사님 말씀에 의하면 고등계 형사들의
사정없는 모진 고문을 당하시고도 신음소리 한마디 없이 모진 몽둥이 세례를
다 이겨내시는 것을 보며 더욱 나라사랑의 애국자로 존경감이 앞섰다고 하셨다
2.세째 아드님 최철해 사장님 이야기
경기중학 졸업하고 치과의사가 되고자 경성제대 치과대학에 응시했더니
정원 미달이라 합격은 틀림 없다고 기대 했으나 뜻밖에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고 하셨다 부친 최현배 박사가 한글사랑 조선민족주의자로 항일운동에 앞장선
함흥감옥의 죄수였기 때문에 경성치대 불합격이 되었다고 최철해 사장님이
정음사 사장실에서 말씀 하셨다
3.정신과 의사 최신해 박사님 말씀
외솔 최현배 아버지께서 1970년 3월 23일 77세로 하늘나라 가실 때 마지막 말씀 유언도“힌글을!”이었다 세종 주시경 은사를 이어 한글의 큰빛을 이루신 대한글학자가 외솔 최현배 박사이다 사회장으로 장례를 마친 그 때 77세
연세로는 장수였다 어느 방송국에서 최신해 박사님을 초청하여 최현배 박사님
장수비결과 최신해 박사님이 정신의학계 선구자가 되신데 대한 질문이 있었다
최신해 박사님은 부친 최현배 박사님은 항싱 쉬지 않으시고 글을 쓰시고
일찍 일어나시어 마당을 쓸기도 하셨다고 했다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 일하신 것이 부친 최현배 박사님 장수비결이라 하셨다 그리고 최신해 박사가 의사가 된 것은 최현배 박사깨서 3형제 중에 의사가 하나 있어야 한다고 하시며
둘째 아들 최신해 박사를 지명하여 아버지 뜻에 따라 세브란스의과대학에
진학 하셨다고 말씀했다
4.스승 최현배 박사와 제자 허웅 박사 관계
일본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 학교를 피해 동래고보 교사로
학문과 인격적 큰 교훈을 남기고 최현배 선생님은 연희전문 교수로 가셨다
허웅 박사는 그때 경성제대 갈 실력이 되었으나 일본이 세운 대학이 싫어 민족주의대학 존경하는 최현배 교수님 계시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것이다 그런데 최현배 박사가 비밀 애국단체 흥업구락부사건으로 학교를 물러나게
되고 학교 이름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바뀌어 왜놈이 싫고 최현배 교수를 흠모하여 연희전문에 왔는데 최현배 교수님도 안 계시는데 왜놈 교장 밑에 뭘 배우겠노! 치와부라 그만 자진 중퇴하고 김해 고향에 내려가 광복 때까지 독학으로 국어학을 전공하셨다 광복과 더불어 부산대학교 교수가 되셨다 6.25 사변으로 연세대학교가 부산 영도에 임시로 개교하고 있을 때 최현배 스승은 제자 허웅을 연세대 교수로 오게 하셨다 연세대 조교수로 계시다가 선배 김선기 교수 후임으로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가 되시고 외솔 최현배 스승 일하시던 한글학회 이사장 자리를 물려 받아 외솔 스승이 <우리말본> 명저를 내셨는데 허웅 제자는 <우리 옛말본> 명저를 남겼다 외솔 선생님 국어학 제자로 허웅,박창해, 문효근,김석득,남기심 등의 연세출신 제자가 나오고 허웅 박사 제자로 김계곤,이현복,김차균,권재일,김정수,김주원 교수 등이 배출되었다
5.제자 모기윤 교수가 말씀한 외솔 선생님 일화
외솔찬가를 지은 모기윤 교수가 연희전문 학생 때 과대표가 오늘 최현배 교수 강의는 휴강이라 하여 “최교수 휴강도 있나!”하며 학생들이 기뻐하며
백양로 길을 걸어 갈 때 쏜살같이 인력거 한 대가 학교로 들어 갔다 백양로 길을 다 가기 전에 “최교수님 강의 휴강 아니야,빨리 돌아와” 소리 질러 부르더라고 모기윤 교수님이 말씀했다 연희전문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 자리를 부탁 드렸을 때 전라도 고창중학으로 내려가라고 하시어 시골이라 싫다고 말씀 드리니 “모군,고창은 조선이 아니야,3년만 있다 와” 강하게 꾸짖듯 말씀하시어 모기윤 교수는 고창중학 교사로 가서 생각보다 학교가 좋고 학생들과 정이 들어 5년을 근무하고 상경했다고 한다 외솔 선생님을 찾아 뵙고 선생님께서 3년만 있다 오라 하셨으나 기쁨이 넘쳐 5년 있다 왔습니다 제가 잘한 거죠! 말씀 드리니 “수고 했네”하시며 격려해 주셨다고 했다 모기윤 교수님은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외솔 무덤 앞에서 외솔 일화로 말씀하셨다
6.정일권 국무총리를 찾아가 한글전용을 강조하신 외솔 선생님
외솔 선생님이 제자 최상덕 한글학회 총무를 데리고 국무총리실을 찾아가
한글정용정책을 잘 펼 것을 강조하고 당시 홍종철 문교장관에게 외솔 선생님 말씀대로 한글정용정책을 잘 펴도록 정일권 국무총리가 외솔 선생님 앞에서
직접 전화 걸도록 하시고 국무총리실을 나오신 일화는 나중에 배재고교 교감을 지낸 최상덕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다 @연세대 이가원 교수는 연세전교수회의에서 이승만 정권을 강한 비판 발언했는데 사회를 본 외솔 교수가 모든 교수 발언 다 책임질테니 걱정 말라하시어 그릇이 큰 어른임을 알았다고 하셨다
7.성내운 교수와 외솔 선생 선물 밤 한말 이야기
성내운 교수를 대신고교 김한수 교장 초청으로 서울지방 경찰청 근처 진주비빔밥집에서 만났을 때 성 교수가 문교부 정책실장이 되었을 때 어느 밤에 느닷없이 밤 한말을 사가지고 성 교수댁을 방문한 외솔 선생은 “내가 나를 위해 한글전용 하자는 것이 아니요 다 나라를 위해 한글전용을 하자는 것이니 성실장이 한글전용정책을 잘 세워 한글나라를 사랑해 주시오“ 당부하시고 미처 대답드릴 사이도 없이 대문밖으로 나가셨다고 했다 그날 성 교수는 문교부에서 나와 쉴 때 외솔 선생이 연세대학 교수로 불러 주시어 고맙기 그지없고 자기가 글을 쓸 때 이름을 한글로 써 주었는데 신문이나 잡지사에서 이름을 한자로 써서 안타까웠다고 했다 그리고 서울사대 재학생일 때 고학한 이야기,가정교사 자리 구하면서 어려움을 겪은 이야기도 했다
8.금수현 음악가 자칭 국보 양주동 교수 이야기
금수현 음악가는 아들 금난새가 부모가 결혼 반대한다고 저들끼리 부모 몰래
결혼식을 올려 용서가 되지 않았는데 존경하는 외솔 스승님 나라사랑 정신이 담긴 10회 실천부문 외솔상을 받으니 오늘부로 아들 금난새 잘못을 용서하겠다고 답사에서 말씀하셨다 금난새 이름도 금같이 나는 새가 되라고 한글로 이름 지어 구청 호적계에서 출생신고 할 때 한글 이름 반대가 있었으나 외솔 선생 모시고 가서 거뜬히 호적에 올린 이름이 금난새라 하셨다
양주동 박사는 이병도 박사가 서울대에서 박사학위 준다했으나 자기 논문 심사할 사람이 없어 거절 했는데 자신은 맥주 잘 먹는 교수로 알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대학인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를 주는 것은 양 박사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고 주는 학위이니 받기로 했다고 했다 그련데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할 때 백낙준 박사가 “양교수 술을 삼가 하시오” 하신 말씀과
최현배 박사가 순우리말 한글로 쓰신“명예문학박사를 드리는 글”내용이 인상적이었다고 강의시간에 말씀하셨다
9.고대한테 지네,진리가 다수결로 결정되나 말씀하신 외솔 스승 말씀
4.19 직후 연세대학교 민주화 과정에서 학원 민주화 과정에 앞장 선 국문과
장덕순 교수와 박두진 시인에게 연세재단이사회에서 파면 처분을 내렸다 이 사실 경위와 취소처분을 건의해 보기 위하여 신촌 대흥동에 있는 최현배 부총장댁을 나와 송준호 두 국문과 학생이 대표로 갔다 “학생들이 존경하는 국문과 두분 교수를 파면 처분한 재단 이사회 조치는 가혹하고 부당하니 부총장께서 취소처분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씀 드렸다 최 교수님은 ”이사회에서 밤샘을 하여 결정한 일이니 부총장이 무슨 힘으로 취소 시키겠나”재단이사회서 취소 하지 않으면 우리 학생들은 시위 실력행사로 들어 갈 것이라 말씀 드리니 최현배 교수님은 “이 사람들아 공부 안 하고 데모만 하면 고대한테 지네 져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하게! 외솔 연세대 부총장님 시원한 해결 말씀도 듣지 못하고 돌아온 나와 송준호는 외솔 교수님 말씀을 국문과 학생들에게 전했다 교수의 신분을 보장하라는 국문과 시위가 도화선이 되어 연세대는 학원민주화의 교내분규가 길게 이어졌다 재단이사진을 규탄하기 위한 학원민주화투쟁위원회가 조직되어 학교 당국과 1년 내내 투쟁했다
내가 해병대 병역 의무를 마치고 인사차 외솔 선생댁을 방문했다 “학교문법에서 <잡음씨>가 제외 되어 마음이 아프시겠습니다”이렇게 말씀 드리니 "오군,진리가 다수결로 결정 될 수 있나,동쪽에서 뜨는 해를 서쪽에서 뜨게 하자고 다수로 결정하면 해가 서쪽에서 뜨겠는가“ 하시는 말씀에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우리 제자들도 <우리말본>의 <잡음씨> 바로잡기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리고 나왔다 나는 생존의 외솔 스승 마지막 모습은 외솔 선생 집근처 대흥목용탕에 세 살 아들 데리고 가니 목욕을 마치고 나가시려는 중이었다 ”목욕 오셨습니까“”오군도 목욕 왔는가 집이 요 근천가” 물으셨다 “네” 내 대답 들으시고 나가신 외솔 스승 얼굴 그날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한글나무 고등학생들 데리고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외솔 무덤에 25년간 참배했다 외솔 선생은 옛시조 가운데 사육신 섬삼문의 시조 충의가를 사랑하신다 옥중시조<임생각>을 비롯 9수가 있다 나는 <외솔선생 시조에 담긴 나라사랑>제목의 외솔 시조 평론을 썼다 1990년도 세종호텔에서 국어순화추진위원회 조찬모임에서 외솔시조 평론을 발표했다 외솔 최현배 스승께서 지은신 한글날 노래말처럼 우리는 한글로 나라의 힘을 크게 길러야 하겠다 <2019.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