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부동(仙府洞)
-선부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 선부1동, 선부2동, 선부3동이 속해있다.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대월면 선부리(安山郡 大月面 仙府里)와 달산리(達山里)였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始興郡 君子面 仙府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1986년 1월 1일 법률 제3798호에 따라 안산시 선부동(安山市 仙府洞)이 되었다. 선부동은 ‘선녀들이 놀다간 선녀골’이라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
선부동은 조선 시대에는 안산군 관내에서 최초로 장시(산대장)가 섰을 만큼 북적대던 곳이었다. 특히 안산의 관적성씨 중 안산 김씨 후손 중에 김맹전(金孟銓;사재감정 역임)의 묘를 석수골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안산에 안산 성씨의 뿌리를 내렸다 한다. 또한 이곳은 안산의 인맥 중 가장 번성했던 파평 윤씨 소정공파 후손들의 주세거지이기도 하다.
• 배다리
옛날 화정천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던 때에 고깃배들이 배를 대고 물을 싣던 곳을 배다리라고 하였다.
• 거미울
모골 북쪽으로, 남양 홍씨를 비롯하여 동복 오씨, 전주 이씨, 풍양 조씨 등 9가구가 살았으나 1985년에 폐동되어 원주민 대부분이 원곡동으로 이주하였다. 마을이 있던 지역은 시화지구 이주민단지로 조성되었다.
이곳은 물이 풍부할 뿐 아니라 농토 또한 비옥해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거미울[居美谷]’이라 칭했다고 한다.
• 관모산
관산초등학교 뒷산이 관모산인데, 관모(冠帽;관리가 쓰는 제모)처럼 생겼다 하여 관모산(冠帽山)이라 불렀다. 이 산 서쪽 기슭에 마을이 형성되자 산 이름을 취해 마을 이름을 ‘관모산(冠帽山)’이라 칭했다.
이 마을에는 원주 이씨를 비롯하여 피씨, 진주 강씨 등이 세거해 24가구가 살았는데, 1983년 폐동된 후 원주민 대부분이 원곡동으로 이주하였다. 현재는 선부동 6단지 아파트단지(주공아파트 4~5단지 주변)로 변모되었다.
관모산은 마을 중앙에 있던 대동우물을 중심으로 북쪽지역(현 주공아파트 5단지 지역)은 아랫말, 남쪽지역(현 주공아파트 4단지 지역)은 웃말이라 불렀는데, 폐동 전만 해도 해마다 음력 7월 7일에 대동우물에서 정제(井祭)를 지냈다.
• 달미[達美, 達山]
오봉산 남쪽, 비누지 북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대월면 달산리(安山郡 大月面 達山里)였다. 1914년 시흥군 군자면 선부리 달미마을이 되었다, 예부터 달미 마을에는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며 ‘달미’의 유래는 지형이 달月자 형이며, 마을 건너에 반달형으로 생긴 작은 산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워서 달미라는 설과, 선녀들이 내려와 석수골 우물물을 먹고 그 물로 목욕을 하면 미인된다고 하여 달미라는 설이 있다. 또 교통의 요충지로 동쪽은 수암면 화정리, 서쪽은 군자면 거모리, 남쪽은 수암면 와리, 북쪽은 수암면 능곡리 등을 왕래하는 사통팔달(四通八達)된 곳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달미라는 설도 있다
달미골에는 건너말, 웃골, 자박골, 큰골, 도룡골, 항아리고개, 배다리, 삼신우물 등의 지명이 있었다, 단양피씨가 처음 세거한 이래 진주유씨, 진주강씨, 경주김씨, 전주이씨, 안산김씨, 경주최씨, 밀양박씨. 교하노씨, 나주나씨 등 여러 성씨들이 정착하여 44호가 살다가 1076년부터 시작된 반월국가공단 조성과 안산 신도시 건설로 1985년 주민들은 원곡동을 비롯한 이웃도시로 모두 이주하고 주택지와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2016년 10월 8일 달미마을 유래비가 달미공원에 세워졌다.
• 대쟁이
대쟁이는 예전 군자 주민들이 서울·인천·안양 등지로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므로 왕래하는 행려자가 많아 주막이 번성하였다. 소금을 싣고 가는 소의 편자를 갈아 끼우는 대장간이 있어 대장쟁이가 살고 있는 곳이라고 하여 대쟁이라고 하였다. 남평 문씨 등이 오랫동안 살아왔다.
• 모골[池谷]
관모산 북쪽에 있었으며 함양 박씨의 오랜 세거지였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시대에 어느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는데 그 집 앞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 부자가 패가(敗家)하자 연못이 논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 연못을 못배미라 불렀고, 마을 이름 또한 연못 이름을 따서 ‘모골[池谷]’이라 하였다.
이 마을 동남쪽지역은 안산모래이, 남쪽지역을 샛터, 서쪽지역을 모골이라 각각 칭했는데, 선부동에서는 예부터 모골·석수골·거미울·정지막골을 북촌(北村), 관모산을 남촌(南村)이라 하였다.
모골은 예부터 마을 전체의 호수가 10호를 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 어쩌다 외지에서 한 가구가 이주해 오면, 다른 한 가구가 마을을 떠나곤 해 폐동 때(1985년)도 9호에 지나지 않았다. 현재는 이곳은 선부동 이주단지로 조성되었다.
• 비누지
정지막골 동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이 마을은 풍수로 보아 선비가 태어날 땅이라 하여 빈유지[빛날斌넉넉할裕땅地]라 칭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빈유지’가 ‘비누지’로 변음되었다.
비누지는 1985년 폐동(廢洞)전까지 안산김씨 4가구, 진주강씨 4가구, 파평윤씨 3가구, 김해김씨2가구, 안동권씨 1가구 순흥안씨 1가구, 풍천노씨 1가구, 여흥민씨 1가구 등 17가구가 세거했으며, 남쪽지역은 ‘저너머’라 불렀다. 원주민 대부분이 원곡동으로 이주하였고 마을이 있었던 지역은 새로운 아파트단지와 상가 및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 새젓골
대쟁이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 새우젓을 실은 배가 이곳에 닿았다 하여 ‘새젓골’이라 불렀다. 마을의 형성은 1960년대에 대쟁이 출신 남평 문씨가 처음 세거하면서부터이다. 현재는 순흥안씨 참찬공파 장사랑공 안산종중 묘역이 되었다
• 석수골
거미울 동쪽 마을로 안산 김씨(또는 연성 김씨)의 세거지이다. 석수골[石手谷]은 조선왕조 태종 때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진 김정경(金定卿;1345~1419년)의 손자인 김맹전(金孟銓;사재감정을 역임)의 묘를 쓸 때, 묘 앞에 설치할 빗돌[碑石]을 배에 싣고 와 이곳에서 직접 석수장이들이 돌을 깎아 석물(石物)을 세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후 그의 후손(안산 김씨)이 묘하에 살면서부터 촌락이 이루어졌다.
폐동 때(1985년)에는 12호가 있었는데, 이들 원주민 대부분은 원곡동으로 이주했으며, 그후 석수골은 택지로 조성되어 1988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현재 김맹전 묘 서쪽은 석수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석수골에는 김맹전의 묘를 비롯해 김건수(金乾壽;부사과 역임), 홍처윤(洪處尹;황해도 관찰사) 등의 묘가 있다.
• 소바위너머, 소바리고개
일제 때 시흥시 거모동·군자동·죽률동·정왕동 주민들이 군자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을 소길마에 싣고 군자 구준물과 대쟁이 사이 마루턱에 있는 바위에다 짐을 내려놓고 쉬어 갔다 하여 ‘소바위너머’라고 하였고 고개이름을 ‘소바리고개’ 라고 하였다. 광복 후 한집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직후 폐동되었다.
• 쑥께
달미와 화정동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조선 말엽에 최참봉(崔參奉)이란 사람이 처음 살았다고 한다. 최참봉이 살던 집은 일제 중엽에 시흥시 수암동-거모동 간 도로확장공사 때 헐렸으며 현재의 민가(5가구)는 일제 말엽에 생긴 것이다. 이곳은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쑥 들어간 갯고랑 가장자리에 있는 취락이란 의미로 ‘쑥께’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85년전까지 대장간, 기름집, 주막, 목공소(장재이) 등이 밀집해 있었다.
• 우산이[위이산 (逶迤山)]
두보(杜甫)의 시(詩) 구일기잠삼(九日奇岑參)에 나오는 구절 ‘군자는 수레로 위이처럼 구불구불 갈 수 있지만 소인은 피곤하게 돌아다니기만 하는구나‘에서 위(逶 구불구불할 위) 이(迤 비스듬할 이)를 따서 ’위이산‘인데 ’우산이‘로 변음되었다. 안산신도시 개발 이전 군자면 관내에서는 제일 높은 지대에 자리잡은 마을이었다. 이곳은 동쪽에는 오봉산, 남쪽에는 안산(案山)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제주 고씨를 비롯하여 남평 문씨, 경주 김씨, 전주 이씨, 파평 윤씨 등이 세거해 왔는데, 예전에는 대쟁이를 아랫말, 우산이를 웃말이라 부를 만큼 대쟁이와 한 마을로 통칭되었다. 대쟁이 동북쪽에 위치한 우산이에는 안산시 향토유적 제15호 윤강 선생 묘와 신도비가 있다.
• 장터
조선 시대 안산군 관내에서 최초로 장시가 형성된 곳으로, 주로 해산물과 농산물의 거래가 많았고, 장날(5일, 10일)이면 씨름이 유명했다고 한다.
구전에 따르면 장터 서쪽에 있는 산은 전쟁이 나면 적을 물리치는 형국이고 동쪽에 있는 산은 패잔병을 쫓아가는 형국인 데다가, 장시가 바닷가에 위치해 주민들이 거세어 번성하지 못하고 일제 초에 폐장되었다고 한다.
장터는 장시[山垈場이라 칭함]와 함께 생긴 마을로, 1985년 폐동되어 현재는 안산전철역과 연계되는 도로로 바뀌었다. 석수골 서쪽으로 시흥시 거모동과 경계를 이루었던 마을이다. 폐동전까지 대장간, 솜틀집, 기름집 등이 있었다.
• 정지막골•점막골
비누지와 거미울 사이로, 현재 선부동 은행나무 주변에 있었던 마을이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말엽 마을 중앙에서 오지그릇을 구워 처음에는 ‘점막골[店幕谷]’이라 칭했다가, 그후 민가가 생기면서 취락이 형성되자 ‘정지막골[正芝村]’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정지막골은 함양 박씨의 오랜 세거지로 10여 호 있었으나 1985년 폐동되어 원주민 대부분이 원곡동으로 이주하였다. 현재는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이곳엔 일제 말엽에 와동 출신 장성두(張聖斗;1918년생) 씨에 의해 흑연광(명칭;시흥흑연광업소)이 발견되어 인천 출신 이영태 씨가 첫 채광을 실시했다.
• 태을마을
대쟁이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태을산(太乙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태을마을’이라 칭했으며, 창원 황씨가 처음 세거했다. 현재 민가 2집이 있다.
• 큰골
골짜기가 크다고 해서 큰골이다 석수골 너머에 있다
• 도룡골[道龍谷]
선부3동행정복지센터를 좌측으로 끼고 돌아 막다른 곳에 있는 골짜기로 용(龍)이 지나간 골짜기라고 한다.
• 절골
대쟁이 앞에 예전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 곳이다. 황학수라는 사람이 집을 짓기 위해 가래질로 흙을 퍼내는데 절의 주춧돌이 나와서 그냥 그 주춧돌 위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군부대가 들어서 있다.
• 돌산
절골과 마주보고 있는 대쟁이의 산 이름이다. 1991년 정수장 공사중에 지석묘 11기를 발굴하였는데, 남방식 10기와 북방식 1기가 동시에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되었다. 미발굴 지석묘 5기는 안산시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많은 지석묘가 있어서 돌산이라고 하였는데 발굴전에는 그 돌들이 지석묘인줄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