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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news
장욱진 특별전
2001. 12. 27~2002. 1. 31 현대백화점 울산점 - 현대아트갤러리
한국 현대 미술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던 故 장욱진 화백(1918-1990)의 특별전이 2001년 12월 27일부터 2002년 1월 31일까지 36일간 울산에 위치한 현대아트갤러리에서 열렸다.
장욱진 화백은 평생을 그림 작업에만 전념해온 작가로 해와 달, 까치, 동물, 가족 등 지극히 일상적인 이미지를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군더더기 없이 단순화시킨 작품으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소탈한 인간성과 독특한 삶으로 많은 일화를 남겨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있는 작가 중 한사람이다.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에 김환기, 유영국 등과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활동한 그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대학교에 재직한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작품세계에만 몰두하여 유화, 먹그림, 판화, 매직화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화폭이 커지면 그림이 싱거워진다고 작은 그림만 고집했던 그는 농촌풍경이나 동심의 세계를 단순한 선과 절제된 형태, 그리고 소박하고 간결한 구성으로 그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절대적 정신의 자유를 표출하였다.
서로를 감싸는 가족들의 천진한 모습을 담은 작품, 원근법이 무시된 평면에 마을의 풍경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나열한 작품 등 그의 그림 속에는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한국적인 삶과 꿈이 담겨있다.
욕심이 없는 그림. 기교를 부리지 않는 그림. 삶의 진솔함이 담겨져 있는 그림. 동화적이고 소박한 그림 … 그래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함께 하는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바라보노라면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여유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장욱진 화백의 작품 <마을> <시골마을> <봉황> <관조> <네가족과 동물들> <길> <사찰> <장닭> <싸립문> <강풍경> <자화상> 등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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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화백 미술관 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되다.
그의 고향 충남 연기군에서
글 : 김제영 / 소설가, 미술칼럼니스트
덕소(德沼)시절(1963년~1975년)
"나는 천성적(天性的)으로 서울이 싫다. 서울로 표상(表象)되는 문명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12년전부터 아에 서울을 버리고 이곳 한강의 문턱으로 흐르는 덕소(德沼)에 화실을 잡았다.
나는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덕소의 비를, 덕소의 달을, 덕소의 바람을, 덕소의 모든 것을 얘기해준다.
그만큼 나는 덕소를 사랑한다." (1974년 9월)
<우리는 본다 파란하늘인데 나이를 먹으면서 구름이 되어간다. 세상에는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는 요즈음 저 동진나루 건너 매바위 화실의 장욱진 선생처럼 단순한 그림의 삶을 살고 싶다.>
연기문학 동인회(회장 최광식)가 발간하는 동인지 연기문학(1996년 당시 회장 장시종)에 계재된 김 석(1956~1997) 동인이 장욱진 화백을 추모한 <당산을 내려오며> 제재의 시다.
*당산(唐山) : 연기군 남면 보통리에 위치한 산 동쪽으로 미호천이 흐르고 있음.
*매바위: 연기군 동면 용암리 장욱진 화백의 유골 탑비가 있음.
연기문학 동인들은 조치원 역전에 있는 양지서림(최광식 사장)엘 오며가며 들린다. 주인이 같은 문학동인이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김 석이 김형국 저 <그사람 장욱진>을 발견했다. 저자가 미술인이 아니고 사회과학자라는 게 흥미로워 책을 샀다. 그것을 읽고 장욱진 화백이 동향인임을 비로서 안 김 석은 흥분과 설레임으로 화백의 탑비와 생가 탐방에 나섰다. 그 분의 명성이나 행적으로 미루어 당연히 곧장 당도하려니 생각을 했다. 그런데 헤매고 헤메다가 간신히 찾아냈다. 누구도 장욱진 화백의 탑비에 대해서 알지를 못했다. 안내 표시가 어느 곳에도 없었다. 김 석 시인에게서 이러한 경위를 듣고 나는 적이 놀랐고 부끄러웠다. 장욱진 화백의 탑비나 생가에 대한 소홀함은 단지 연기군민만이 책임을 추궁 당해야 할 문제는 아니지만...
20세기 한국 근대미술에 있어서 그 누구의 추종도 불허한 기이(奇異)하면서도 한국적 풍토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생명체에 대한 작가의 보편적 애정을 간결하게 구체화한 상형적 기법과 독보적 양식의 회화 언어는 미술사에 신기원을 이룬 레전드(Legend)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벌써 국가가 선정하는 문화인물로 지목이 되었어야 했고 그에 관한 모든게 정리(탑비 생가에 대한 홍보 안내판 설치 등) 되있었어야 했다. 일단은 이 고장에 거주하는 우리들 자신이 반성해야 할 사안이라고 여겨저 김 석으로 하여금 군청 공보실에 정식으로 제의를 하게했다. 93년이었다. 한 해가 지나도 함흥차사다. 더 기다려서는 안되겠다싶어 김 석에게 장욱진 화백의 생가와 탑비를 답사하고서의 글을 쓰게하여 문화유적지 진입로에 길 안내 표지판을.... 제목으로 미술세계 95년 2월호에 내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우연찮은 장소에서 서용석 연기군수를 만나게 되었다. 군민의 청원 처리에 요하는 시일이 몇 년씩 걸리느냐로 시작하여 장욱진 화백에 대한 화두가 자연스럽게 열리게 되었다.
수안보(水安堡)시절(1980년~1985년)
"수안보는 이상해. 거기는 이제 가도 타향같지 않아요. 아직도 좋아해.
엄마는 수안보서 눈물도 많이 흘리고 고생했다고 지금도 그러지.
사람은 서로 돕는 건데. 나 서울에서는 그 사람 없이는 꼼짝 딸싹도 못해. 얼이 빠져 가지고.
근데 수안보에서는 나한테 기댔지요." (1987년 7월)
서용석 군수는 금시초문이란다. 예산이 없으니 실무진에서 아예 묻어버렸던 모양이다. 김 석의 글이 실린 잡지와 장욱진 화백의 자료를 받은 서용석 군수는 공보실 식구를 독려 현지 답사를 하고 내판에 안내 표지판을 세우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발의 한지 불과 3개월인 1995년 6월 17일 드디어 장욱진 화백 생가 표석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정부 임명 군수로서는 마지막 임지인 연기군에서 서용석 군수는 문화행정의 재량과 기능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미술의 해의 선물로 장욱진 화백을 기념할 수 있는 작업을 수행하고 떠난 셈이다.
차질없이 임무를 이행한 연기군 고진국 공보실장 성의를 다한 공보실 직원들, 그리고 표석 건립에 절대적 역할인 예산을 지원해 준 문화체육부의 이경문 기획관리실장 이분들에게 늘 감사의 정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장욱진 화백 생가의 표석이 수난에 처해있다는 소식이다. 연기군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연기군 보건소에 근무하는 한현심이 그 안타까움을 호소하고 있다. 장욱진 화백의 간략한 연보와 언론 평론가들이 바라보는 장욱진 화백에 대한 평가 그리고 장욱진 그림 산문집 <강가의 아틀리에>를 엮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김형국 교수가 쓴 표석비문 <장욱진은 어린날의 밝은 기억이 평생의 일로 이어진 경우이다. 화폭 위에 무수한 집을 지었는데 그림의 한옥은 고향 연동의 생가를 닮고 있다. 고향은 화가의 유년을 키웠고 전쟁이 나자 피난지가 되어주었다. 그 모습이 마침내 예술로 태어난 화가의 생가는 고향상실의 시대에 향수를 되살려주는 산 증거로 예대로 여기에 서 있다. 이를 기려 1995년 6월에 화가를 자랑하는 연기 고향 사람들이 이 돌을 세운다> 전문(全文)과 함께
신갈시절(1986년~1990년)
"난 죽음에 대해 두려운게 없어요. 자기 명대로 사는 거예요.
이제 일흔 하난데 어떻게 될지 모르지.
내가 전에 엉터리 같은 소리로 산다는 건 소모하는 것이라고 했다가 구박도 많이 받고 그랬어요.
엉터리지만 사실이예요. … 오래 사는 게 장한 것은 아니나 생명 줄일 수는 없는 거고.
기능 없으면 죽어버리는 게 좋아. 없어지는 게 낫다구.
내 기능은 그림 그리는 거니까 죽는 날까지 그려야죠. 쉬다가 그리다가."
(1987년 7월)
그러나 그 생가 비는 지금 시장 한 모퉁이의 외떨어진 돌 공장에 옮겨져 있다... 下略...
장욱진 화백은 연기군의 자랑이요 지역 주민과 아이들에게 문화적 긍지를 심어주는 향토문화 인물이라고 장욱진 화백을 환기시키려는 그녀의 글은 진솔했다. 오페라 춘희(La Traviata)의 작곡가 베르디(Verdi)의 고향은 시골의 작은 마을이지만 그의 생가, 그의 이름으로 명명된 Verdi의 마을을 찾는 관광객은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음도 예를 들었다.
장욱진 화백의 제자요 서울대학교 조각과 최종태 교수가 제작한 까망 오석에 원으로 구도를 잡고 까치 한 마리로 구심적 균형미를 응축 한 표석은 비문의 내용과 함께 수려하다. 연기처럼 허공으로 나는 탑비의 추상적 새의 형상과 대조되는 사실적 까치의 모습은 친근하고 장욱진 화백의 작품세계를 홍보하는 대변인의 이미지가 느껴져 신비롭기까지 하다.
생가에 안성 맞춤인 표석이 제자리를 떠나 돌공장으로 갔다니 경악을 금치못했으나 옮길 수 밖에 없었던 자초지종을 듣고는 노여움이 가시었다. 이 문제는 연기군민은 물론 문화계가 함께 고민하고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누가 앞에서 수레를 끌고 뱃머리에서 조타를 할 것인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이고 조타수는 있기 마련이다.
김 석이 생존시 그러했듯 군청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을 올린 한현심 부부가 팔을 걷고 나섰다.
한현심의 부군 김동섭(조치원 중학교 도덕교사)은 후배 김 석으로부터 장욱진 화백에 관한 정보를 물려받았다. 김 석이 생존시에는 그를 초청하여 학생들에게 장욱진 화백에 관한 강의도 들려줬다. 장욱진 화백을 흠모하는 정열까지를 물려받았으니 돌공장에 방치된 생가 표석이 어찌 김동섭의 눈에 뜨이지 않았겠는가. 아내 한현심은 글로 군민의 각성을 촉구했고 남편 김동섭은 행동개시의 기치를 올렸다. 그래서 지금 장욱진 화백 고향인 연기군에서는 문화원(원장 장 영)을 주축으로 내 고장 문화인물 모시기 장욱진 화백 재 조명 작업에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
2003년 6월 6일 8시 문화원에서
장욱진 화백 선양 1차 모임이 연기군 의회, 연기 교육청, 종친 문화계 인사들로 개최되었다. 장욱진 화백 유족 즉 장욱진 미술문화재단 측에서 최경한(서울 여자대학 명예교수 미술 전공) 김형국(서울대학교 환경대학 교수 도시계획 전공) 장정순(인하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長男) 장경수(이화대학 강사 長女)가 동참했다. 생가 표석 문제는 장욱진 화백의 미술관 건립과 연계되어 해결할 문제라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일 이차 모임에서 미술관 건립 추진 실무진이 결정되었다. 추진위원장에는 연기군 의회 장래철의장이, 부위원장에는 장욱진 화백의 장녀 장경수, 그리고 기획위원에 연기군 지역사회 연구소 황은식 기획실장, 향토박물관 임영수 관장, 간사에 김동섭 조치원 중학교 교사가 결정되었다. 고문에는 이기봉 연기군수, 교육장 연기
공주 출신 국회의원을 추대하기로 했다.
건축물은 아무리 그 자체가 으리으리하고 고급스럽다해도 환경과 역사적 현장성 기능 등이 고려되지 않으면 공허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채송화, 분꽃, 봉선화, 백일홍, 목단이 만발한 뒤뜰이 없는 남산 기슭의 밋밋한 공간의 한옥 그게 모형이지 한국 마을인가. 인사동의 박영효의 기와집을 그리로 옮긴 것도 문화적 상처이다.
이미 연기군의 도시계획이 완성되어 시민 어린이의 휴식 공간과 관광지가 한 띠로 이어지는 벨트에 미술관을 지음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물론 수입과 편의를 생각해서 이겠지만 한현심이 게시판에 올리지 않았는가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관광객은 일부러 그곳을 찾아간다고...
장욱진 화백 생가를 미술관 영내로 끌어들릴 수 있는 터에 미술관을 세울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 이련만 생가 표석은 생가의 바깥마당 제 자리에 옮기고 장욱진이 거닐던 논뚝길 아내를 기다리던 철로 우물이 있는 동면 송용리를 장욱진 마을로 명명하면 어떨까.
독일 하이델베르그에는 대학 교수들이 산책하던 길을 철학의 길이라고 관광객에게 소개를 한다. 우리도 머지 않아 이곳은 기인 천재 화가 장욱진이 거닐던 논뚝이고 생가이고 이러저러하다고 안내를 할 날이 머지않으리라고 기대를 해 본다. 나이는 먹는 게 아니고 토해내는 것이다. 몸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소모하는 것이다.
음식값을 수표로 내는 것을 보고 장녀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수표를 이런데서도 쓰는 거냐고 물었다는 장욱진 화백의 일화. 아내를 애먹이고 꽤나 고생시켰을 난파선에서 간신히 무인도로 기어올라가 언어조차 잃어버릴 정도로 문명과 단절된 듯한 장욱진의 오염되지 않은 원시성이야말로 노년에 이르러서도 동그라미 네모 세모 작대기 등의 기호언어를 구사하며 병아리와 새와 강아지 그리고 달과 해와 소, 도야지와 더불어 삶을 유락하는 장욱진의 작품세계는 시간과 지면이 허락하면 비전문인 끼리의 토의의 장을 마련하고 싶다. 물론 약속은 아니다.
문 화 탐 방
원효에 버금가는 해탈의 경지
문광부가 2004년 11월 문화인물로 선정한
장욱진 화백의 연기군 특별전
글 : 김제영 / 소설가, 미술 칼럼리스트
사진 : 김규현 ( 연기군청 홍보실 제공)
금년11월 문화관광부에서 장욱진 화백을 2004년 1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을 했다. 연기군민은 쌍수로 환호를 했다. 장욱진 화백 미술관 건립추진에 순풍이 불어오고 있음을 예시한 청신호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2003년 11월 27일(목) ~ 12월 1일(월) 장욱진 화백 선양사업회(회장 장래철)가 주최하고 연기군과 연기교육청이 후원한 장욱진 화백의 특별전시회가 연기문화 예술회관 전시실에서 개최되었다. 박물관 건립추진 과정의 수순이기도 하겠지만 이번 특별전의 개요는 장욱진화백이 문화인물로 선정된 군민의 기쁨을 미술관건립추진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전기의 에너지화로 응집하고자 하는 연기군민전체의 의지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경비를 연기군이 전담한 이번 특별전에 출품된 작품은 아트 프린트의 <독>(캔버스에 유화 45×37.5cm 1949), <자동차 있는 풍경>(캔버스에 유화 40×30cm 1953), <나룻배>(캔버스에 유화 15×30cm 1951), <모기장>(캔버스에 유화 21.6×27.5cm 1956), <집>(캔버스에 유화 13.5×24.5cm 1973), <거목>(캔버스에 유화 29×26.5cm 1954), <수안보 풍경>(캔버스에 유화 30×40cm 1980), <나무>(캔버스에 유화 41×24.5cm 1978), 그리고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판화작품 석판화(Lithography)와 씰크 스크린(Silk Scree) 20점, 한지에 먹으로 그린 병풍 한 점 도합 30여점이었다. 아트 프린트로 선보여진 49년, 50년대의 작품은 장욱진 화백의 초기작업이었음에 감회가 새로웠다.
사여 작품설명을 하고 있다.특히 장욱진 화백의 장녀(전 이화대학교 교수) 장경수가 교사의 인솔로 단체관람을 온 어린이들에게 둘러싸여 작품설명을 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벌레를 물어다가 새끼의 입에 넣어주는 어미새의 본능같은 것이었고 고개를 재끼고 해설자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는 어린들은 영낙없는 새끼 새였다.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어미새의 부리에 집중되어있는 새끼새의 갈망 바로 그런 정경이었다. 그것은 내 고장의 위대한 화가 장욱진에 대한 어린이들의 기대와 호기심이었다.
전시장을 견학하며 아마도 대부분의 어린들은 “애개게 저건 나도 그릴 수 있는 그림아니야. 그런데 어째서 유명하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갖게될 것이다. 작품해설자의 설명을 반추하며 귀가를 했지만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어린이는 친한 친구들을 꼬시어 전시장을 재차 찾는다. 단체 관람에서는 의문을 풀겠다고 걸음을 멈추고 찬찬히 작품을 검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여유있게 전시장을 둘러본다. 그러나 어린이는 여전 고개를 갸웃거린다.
- 어째서 해와 달이 함께 떠 있지. 유명하신 선생님이 낮과 밤을 구별 못하지는 않을 텐데... 한그루 나무의 잎에 앉은 까치가 둥치에 그려넣은 아이보다 왜 더 클까? 해는 하늘이 아니고 땅에 떠있다. 아무리 나뭇잎이 촘촘하고 빽빽하기로 어떻게 나뭇잎 꼭대기에 집을 지을 수 있지...- 그림 한 점 한 점이 다 의문투성이다. 처음보다 더 깊은 회의의 골작이에 빠져든다.
의문은 발명의 모체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의문이 없는 세상에 살고있다. 전자계산기와컴퓨터가 온갖 전자제품이 일상의 제반사를 척척 해결해 준다. 인간은 단지 주어진 21세기의 문명적 기기를 이용할 줄만 알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문이나 회의를 갖게하는 사고의 기능은 점차 퇴화하고 있다. 그것은 비극이다. 인간의 로봇화가 진행중인 것 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도 일류대학에 집착하고 있는 세태이다. 그러기에 떼강도가 단식을 하는 커메디극을 연출해도 그것을 투쟁시하는 정치판의 사기극을 묵인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장욱진 화백의 이번 특별전과 앞으로 건립될 미술관의 문화적 부가가치는 만인(어리이 어른 가릴 것없이) 에게 의문을 던져주고 생각하고 사색하는 인간 본연의 생명체로 유도 환원할 계기의 관건이라는 점이다.
이날 전시회에는 이기봉 군수, 홍종기 연기군, 의회의장 조선평(조치원읍) 군의회 의원, 서면 성기운의원, 전동 황순덕의원, 전의 황우성의원, 그리고 도의회 유한준의원, 후원기관인 교육청의 배영쾌과장(출장중인 교육장을 대신), 장 영 문화원 원장을 비롯 유관 단체의 단체장, 이 지역 유지 등이 참석하여 큰 관심을 보여주었고 전 공주대 총장이요 현재 충남 발전 연구원 오재직 원장의 축사는 미술 관 건립과 직접적인 연관이 언급되어서 솔깃했다.
장욱진 화백의 미술관 건립의 불씨 역할을 한 조치원 중학교 김동섭 선생의 사회로 장욱진 화백 미술관 건립추진위원회 장래철(연기군 의회의원) 위원장의 개막인사에 이어 장욱진 화백 고향 모시기에 발벗고 나선 연기군수의 격려사 겸 축사에 이어 기관장들의 축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이제나 저제나 조각가 최종태 교수(전 서울대)와 도예가 이종수 교수(전 이화대학)의 몇 마디 코멘트가 있으려니 하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으나 이 자리를 함께 하여주신 내빈을 소개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다음 순서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아차 내가 무심했구나” 이 고장에서 최종태가 이종수가 누구인지 그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진행중인 순서를 제지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내 차례가 왔을 때 “지금 이 자리에는 장욱진 화백께서 벌떡 일어나셔서 반기실 가장 소중한 장 화백님의 제자 두 분이 오셨습니다.” 최종태와 이종수를 소개하고 그 분들께 장욱진 화백에게 따라다니는 일화를 듣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를 했고 내 제의가 받아들여져 최종태 교수가 연기군과의 인연과 장화백의 음주에 얽힌 토막담을 얘기했고 이종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 화백의 작품에는
새가 등장하는 장면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늘상 접하는 친근한
새들입니다.
그런데 참새가 질서 정연하게
한 줄로 나르는 작품이 눈에
띄었습니다.”
“선생님, 참새는 이렇게 줄 짓지 않고
흩어져서 나는 새입니다.”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렇게 날으라고 명령을 했지”
였습니다.
“장 화백의 작품에는 새가 등장하는 장면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늘상 접하는 친근한 새들입니다. 그런데 참새가 질서 정연하게 한 줄로 나르는 작품이 눈에 띄었습니다.”
“선생님, 참새는 이렇게 줄 짓지 않고 흩어져서 나는 새입니다.”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렇게 날으라고 명령을 했지”였습니다. 예술 즉, 창조성의 본질을 일깨운 대목이라고 여겨진다.
연기군청 인근인지 문화예술회관과는 좀 거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일본 음식점(본정?)에 서울에서 내려 온 장욱진 화백의 부인, 딸과 사위들, 아들, 며느리 그리고 연기군 동면의 종친들 추진위원장 등 이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였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최종태 교수를 서울로 방문하여 물어볼까도 생각할 정도로 내게는 장욱진 예술탐구에 긴요한 자료가 되는 일화중의 일화다.
1991년 3월 말께였다. 장화백의 백일탈상에 맞춰 화백의 고향 연기군 동면 응암리 선영에 후학들이 유골을 모신 탑비를 건립했다(최종태 구성) 서울에서 화백을 흠모하는 미술인들(제자, 동료, 친지 등)이 대거 내려왔다. 생존시의 추억담이 쏟아져 나왔고 그 때 최종태인지 이만익이인지 어쨌던 장화백이 늘상 신고 다니는 검정고무신으로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마셨다는 기담을 털어놓았다. 번개가 치는 듯한 한 줄기의 빛이 스키고 지나갔다. 잠결에 마신 물이 해골의 물임을 안 연후에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도 없음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길에서 발길을 돌린 원효대사의 대오(大悟)와 장욱진의 검은 고무신 막걸리잔의 대오(大悟)와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원효에 버금가는 장욱진의 준철한 통 찰력, 그것은 작품을 단순화 할수 있는 장욱진 예술의 태생적 본령이기도 한것이다. 사실 이 기담을 본지 지난 8월호에 내보내고 싶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글에 책임을 져야한다. 정확성이 애매하고는 쓸 수가 없다. 그 당시 어째서 캐묻지를 못했는지 발등을 찍고 싶었다. 그런데 최종태를 만났고 바로 내 옆의 옆자리에 앉았다. 얼마나 다행인가.
“최종태 교수님, 저기 왜 그때 말이에요.”
한참 앞사람과 대화를 하기에 열중해 있는 최종태에게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게하자 최교수는 전시장에서 언급했던 연기군과의 인연을 궁금해 하는 줄 알았는지 “내 고모네는 서창동에 있었어요. 고모부가 보도 연맹원 이었습니다. 국군이 후퇴시 경찰에 끌려가 총살을 당했구요. 이모네는 그 너머에 살았는데 인민군에 의해 살해되었어요. 그래서 네 고모네 이모네가 풍지박산이 되었어요.”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요. 요즈음에 그런 죽음의 실체가 속속 들어나고 있어요. 이곳과는 비참한 인연이군요. 그런데 말이에요. 왜 탑비 건립 때 나온 검은 고무신....”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누군가가 최종태에게 술잔을 권하는 바람에 이야기가 끊겼다. 실망스러운 내 얼굴을 바로 내 옆자리의 장화백의 부인 진진묘(眞眞妙)가 본 모양이다.
“그게 그렇게 알고 싶으세요?”
그녀의 웃음이 진정 보살과 같이 은은하다.
“그럼요. 그게 보통 있을 수 있는 에피소드입니까. 장욱진 화백의 일화를 대표하는 뭐라고 할까 그것은 일화가 아니고 종교적 달관이거든요.”
“그게 이런 발상이었어요. 그분이 종로 뒷골목 술집에 잘 다니셨거든요. 그날도 제자들과 몰려가신 모양이에요. 그런데 분위기가 여간 삼엄하지 않드래요. 주인은 얼어붙어있고 왜 그런 것 있지않아요. 조직 깡패들이 자리를 점령하고 손님을 내쫓는… 그분이 눈치를 챘겠지요. 흔연스럽게 양푼에 막걸리를 가져오라 하셨대요. 그리고는 양말을 벗으시고 발을 담그시고는 검은 고무신에 막걸리를 떠 마시고는 ‘자, 제네들도 한잔하게’ 하셨대요. 그렇게 안하무인이던 깡패들이 걸음아 나 살려라고 도망을 치니 놀란 건 주인이래요. 별짓을 다해도 쫓아낼 방도가 없었는데 큰 소리 한번 내시지도 않고 흉악한 그들을 내쫓으셨냐고 수십번 고맙다고 절을 하드래요. 장 화백이라면 그 집에서 껌벅하지 않겠어요. 그분의 타고난 직관력이에요.”
장욱진(張旭鎭) 화백 약력(1917~ )
1938(22세).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2회 전국학생미전에서 특선하고 사장상 받음
1939. 양정고등학교 졸업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입학(현재의 무사시노미술학교)
1944(28세).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후 일제에 징용당함
1945. 국립박물관에 취직하여 진열과에서 도안과 제도일을 담당
1948(32세).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등과 '신사실파'라는 이름으로 제1회전을 화신백화점에서 가짐
1954(38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생활을 시작함
1958(42세). 국전 심사위원 역임
1964(48세). 반도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
1974(58세). 공간화랑에서 제2회 개인전
1976(60세).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과 단상들을 모아 <강가의 이뜨리에> 라는 책을 출간함
1979(63세). 화집 발간 기념으로 현대화랑에서 전시회
1981(65세). 공간화랑에서 개인전
1983(67세). 유럽여행후 연화랑에서 판화집 출간 기념으로 판화전
1986(70세). 국제화랑에서 개인전. 중앙일보가 제정한 예술대상 수상자로 지명됨
1987(71세). 두손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작욱진 화집>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