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백제 혹은 신라)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현재 한국 국보)
<일본 국보 1호> 일본<고류사> (절)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 이 불상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선물로 보내다.
시간이 없어서 나무로 만들어 보내다.
코벨 박사가 본 일본 <고류사(광륭사,廣隆寺)불상>
서구학자로서는 처음으로 1941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일본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고
20여년 동안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 주립대에서 동양미술사 교수로 재직했던
존 카터 코벨은 <고류사>(절) 미륵불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안치된 <고류사>는
603년 한국에서 이주해 온 직물기술자 진하승(秦何勝·일본명:하타노 가와카쓰)이 건립한 절이다.
그는 한국계 혈통을 지닌 <쇼토쿠 태자>와 절친한 사이였다.
쇼토쿠 태자가 48세에 홍역으로 급사하자
하타노는 자신이 세운 절, 고류사에 자신이 존경했던 쇼토쿠 태자를 기리려는
미륵보살상을 신라에 주문했다.
신라의 장인은 시일이 촉박하여 청동으로 주조하는 대신 적송 통나무 하나에서 걸작 미륵보살상을 깎아내고
그 위에 금을 입혔고, 그 불상이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다.
봄에 서거한 태자를 기린 금부처가 7월(623년)에 도착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서 불상의 일본 도착 시기도 알 수 있다.”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
광륭사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높이 123.5cm 일본의 국보 제1호
교토의 고류사(광륭사,廣隆寺)에 소장
반가사유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자세에서 기원하며,
출가 이전의 이러한 태자 모습은 중생 제도를 기다리는 미륵보살 모습과 비슷하므로
미륵보살상도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실존철학자인 독일의 야스퍼스(1883-1969)는 이 불상을 찬찬히 살펴본 뒤에 크게 감동한 나머지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불상이야말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그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있는 예술미의 극치이다.'
이 불상이 신라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것은 7세기초이다.
서기 603년에 추고천황(推古天皇, 592-628)의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574-622)가 교토 땅의 신라인 지도자였던 진하승 공에게 전해주었고, 진하승 공은, 즉시 봉강사를 창건했다.
이 봉강사가 현재 교토의 우즈마사(太秦)에 위치한 고류사(광륭사, 廣隆寺)의 옛 이름이다.
진 공은 이 신라 불상을 모시고 오늘의 고류사의 전신인 봉강사를 신라인의 씨사(氏寺)로서 창건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의 고대 기록에 전해지는 동시에 현대의 일본 고대사학자들이나, 미술사가들이 한결같이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일부 학자가 이 불상이 '신라'에서 온 것이 아니고,
'백제'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불상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 90Cm)'이 바로 고류사의 목조 신라불상과 똑같은 형태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일본 학자들도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가 백제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어 현재는 삼국 시대의 것으로만 되어있다.
일본 학자들은 광륭사의 이 신라 목조 불상이 일본 고대 다른 불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적송(赤松)으로 만든 불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적송은 일명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경상북도 봉화에서만 나는 나무이다.
즉 적송으로 조각한 것은 한국의 목조 불상의 특징인 것이다.
생각하는 부처님 서양사람의 조각으로 ‘생각하는 사람’ 하면 로댕의 작품을 연상할 것이다. 동양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생각하는 부처님, 곧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드는데, 이는 허리를 약간 숙였을 뿐이지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앞으로 쓰러지는 전신을 건장한 오른팔로 버티고 있다. 어찌나 무겁고 힘든 생각인지 그를 지탱하는 데 온몸의 근육이 부푼 채 굳어있어 사유의 가혹함에 섬뜩해진다. 희랍 이래의 서양 조각들에서 완전히 초극하지 못한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냄새를 벗어날 수 없었다고 말한 것은 철학자 야스퍼스였다. 그 야스퍼스가 반가사유상을 보고 “그것은 지상에 있어 모든 시간적인 것의 속박으로부터 초월해서 얻어지는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하고 가장 원만하며 가장 영원한 사유의 모습이다”라며, 수십년간 철학자로서 볼 것 보고 생각할 것 생각해왔지만 이만큼 인간 실존의 참다운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삼국시대에 한반도에서 건너가 지금 일본 국보 제1호로 교토 고류사(廣隆寺)에 안치된 반가사유상을 보고 남긴 말이다. 이 사유상의 본이 되었던 삼국시대 26체 가운데 금동으로 만든, 가장 사유의 오묘함을 구현한 국보 78호, 83호 두 반가사유상이 옮아가는 중앙박물관의 고별 특별전시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 발을 무릎에 걸치고 한 손가락을 볼에 가볍게 댄 자유로운 사유 자세를 한 이 부처님은 56억7000만년 뒤의 미래에 이 세상에 나타나 석가모니께서 못다 한 중생구제를 자임할, 불교에서 유일한 미래불로, 도솔천(兜率天)에서 그 모습으로 인간 세계의 울고불고 외치고 비명을 지르고 통곡하는 모든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한반도에 건너온 길목인 인도 간다라에 3세기 후반의 사유상이 있고 5세기 후반의 윈강(雲崗) 석굴에 중국 최고(最古)의 사유상이 있는데, 6세기에 들어 이 사유상이 백제에 들어와 미륵신앙의 온상이 되었고 신라에 들어가 화랑사상의 온상으로 한국화했다. 곧 반가사유사상은 한반도에서 곰삭아 우리의 피와 살과 생각이 되어 돌고 있는 것이다. (이규태 3Dkyoutaelee@chosun.com">kyoutaelee@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