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y|최은묵
먼지
집을 청소한다. 추억과 미련이 뒤섞인 것들은 쌓일수록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 오래되어 흉터가 흐려진 일기장이나 사진 뒤에 또 한 장의 사진을 숨겨놓은 앨범처럼 몰래 쌓인 것은 무엇이든 아슬하다.
계절이 덮은 두께를 걷어내는 동안 슬그머니 외사랑 같은 볕에 기대 본다. 겉부터 데워지는 기억의 난반사에 눈이 시리다. 보내지 못한 편지를 책꽂이에서 발견하고 거기에 적혀있는 이름을 보며 웃음 짓는 일처럼 멈춰있던 시간의 체취에 잠시 머물러도 좋은 계절의 끝.
손바닥으로 햇살을 담아 서재로 가져간다. 이만큼이 공짜다. 철마다 자리를 바꾸는 옷가지와는 달리 서재 벽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은 건드리기가 쉽지 않다. 읽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꽂아둔 책들도 꽤 많다. 먼지가 덮인 책들을 꺼내 순서 없이 쌓는다. 종이와 종이가 맞닿아 쏟아내는 소란에 귀 기울이는 건 미뤄둘 일이다.
책을 모두 꺼낸 후 책장을 들어낸다. 방바닥과 벽이 만난 모서리에 먼지가 수북하다. 모서리는 어두운 변방이다. 관심과 거리가 먼 몸짓의 조각들이 모여 있다. 대부분의 먼지는 내게서 떨어져 나간 흔적일 것이다. 한때 내 일부였던 머리카락도, 동전도,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검정 볼펜, 전화번호를 적어놓은 메모지도 구석에서 얼마를 보냈는지 알 수 없다.
무언가와 만나고 부딪쳐 생긴 자리에서 우선 크기가 큰 물건들을 골라낸다. 다른 가구와 달리 책꽂이 주변의 먼지는 조용하다. 툭 건드리면 더듬더듬 소설 단락 하나를 완성할 것 같다. 하지만 후미진 곳에 모여 있는 소리는 대개 추레하다. 물끄러미 고개를 든 채 바람에 밀려 구석으로 몰려가는 몸짓들.
책장 먼지는 읽지 않은 책들의 각질이 아닐까? 원래의 이야기를 찾아내기 힘들 정도로 잘게 부서진 소란을 더듬어 분리된 음절을 맞춰본다. 낱말이 되지 못한 채 껍질만 남은 목소리가 힘없이 주저앉는다.
글자에도 무게가 있다면 먼지의 무게는 얼마나 될지. 지하방에서 혼자 죽은 노인은 신문 기사로 나오고서야 비로소 무게를 가졌다. 잉크가 굳은 볼펜으로 가족들 이름을 꾹꾹 눌러쓰느라 골짜기처럼 자국이 생긴 공책에도 먼지가 덮여있었다고 했다. 세상의 맨 구석에서 먼지의 말로 마지막 고백을 남긴 할아버지는 무엇의 부스러기였는지.
세월의 부스러기는 쉽게 멀어지지 못한다. 가볍고 허약한 것들이 모여 있는 구석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귀를 낮춘다. 그러고 보니 계절의 틈마다 가만가만 뭉친 흔적을 잊고 살았다. 털어내도 쉬 가벼워지지 않는 숱한 기억의 흉터들. 그것들은 조각을 분실한 퍼즐처럼 끼워 맞춰도 금세 모습을 갖추지 않는다. 그런 빈자리마다 저린 기억들이 달라붙는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단체 사진 속 짝사랑이나 암호로 적어놓은 일기장이 먼지가 되고, 지하에서 혼자 떠난 할아버지처럼 먼저 떠난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작아질 때면 그 틈으로 볕이 조금 더 진해질지도 모른다.
계절을 걷어낸 자리는 다른 계절이 차지할 것이다. 조금 따뜻하게 흔들려도 조금 오래 햇살에 취해도 괜찮을 오후, 미련은 비슷하게 반복되지만 새로 채우기 위해 옛것을 비우기로 한다.
누적된 시간을 빨아들이기 위해 청소기를 켠다. 오래된 소리가 뒤섞여 사라진다. 책장 뒷면까지 꼼꼼히 닦고 바닥을 걸레질한다. 제 몸을 녹인 채 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때가 벗겨진다. 내 것이라고 믿었던 집착들이다.
비우는 건 지나간 한때를 되짚는 일이다. 다음 청소를 할 때까지 먼지는 깊고 어두운 구석에 모인다는 걸 알지만, 겹으로 쌓였던 아우성을 떠나보내면 구석은 새로운 시간을 준비할 것이다. 흐름이다. 흐름의 마디가 분절되는 순간 뱉어낸 신음의 조각들, 별개가 될 수 없는 옛 분신들, 거기에도 사연을 드러내지 않은 채 바뀐 계절이 찾아올 뿐이다.
책머리에 달라붙어 있던 먼지를 털어내고 장르별로 책을 나눠 꽂는다. 읽지 않은 책은 앞으로 조금 빼어 쉽게 찾을 수 있게 한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튀어나온 책들도 안쪽의 깊이를 지닐 것이다. 그러다 보면 책장 주변에 쌓인 먼지의 말을 알아듣고 먼지의 무게만큼 세상에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철을 덜어낸 자리로 새로운 계절이 들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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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묵|2007년 《월간문학》, 201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수주문학상, 천강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 『괜찮아』, 『키워드』, 『내일은 덜컥 일요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