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 : 32 - 35절
“네 자리를 정돈하라”
사도행전의 구성을 보면 처음에는 베드로에게 집중을 하다가 갑자기 스데반 집사의 순교 장면과 함께 등장한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집중을 하게 됩니다. 지난주까지 우리가 사울의 변화에 대해서 함께 살펴봤는데 그 내용이 너무 함축되어 있어서 사도행전만 봐서는 사울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각 교회에 보낸 편지들과 함께 봐야 사울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보다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쫓겨난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17-19) 사도행전만 보면 다메섹에서 쫓겨 난 후 바로 예루살렘으로 간 것처럼 보이지만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삼 년 동안 머물렀던 것이고 그러고 나서 예루살렘에 갔는데 그곳에서 만난 사도들은 베드로와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 두 사람밖에 만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복음을 증거 하다가 쫓겨나서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그러고 나서는 사울은 사라지고 다시 베드로에게 시선이 집중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부터 몇 주간 동안은 베드로에 대해서 다시 집중을 해서 생각을 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초반부에서 봤던 것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답게 굉장히 능력이 있는 사역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을 믿음으로 일으켜 세웠던 일도 있었고, 평생 어부로 살았던 무식한 사람이 뛰어난 지식과 언변으로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 하게 되자 모든 공회원들이 놀라게 되는데 그 중심에 섰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또 성령님을 속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뜻을 전하게 되자 두 부부가 죽게 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 사건의 중심에도 베드로가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 당시 기독교 역사의 주연급 배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큰 능력을 가졌던 베드로의 모습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데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라는 지역에서 8년 동안 중풍병으로 앓고 있던 사람이 고침을 받게 되는 사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8년이라는 세월은 병자나 그 가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만만치 않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긴병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한 두 달만 앓아도 그 병이 평생 가지 않을까 걱정하고 염려하고 포기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8년 정도면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그런 상태의 환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절망을 느낄만한 숫자들이 있습니다. 사업을 실패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세 번, 네 번 정도 실패를 하면 네 번이라는 숫자가 절망적인 숫자로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말을 통해 보면 칠이라는 숫자가 절망적인 숫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숫자를 통해 절망을 느낄 수 있는 우리들에게 이런 도전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의 아들이자 다윗의 친구였던 요나단이 블레셋 군대와 싸우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14:6) 요나단의 편은 두 명밖에 없었고 상대는 훨씬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숫자의 많고 적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8년 이라는 시간 동안 중풍병을 앓은 기간이 매우 절망적이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었지만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을 믿는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숫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일했던 베드로이기 때문에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을 세울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을 했던 것이고, 오늘 말씀에도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야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이렇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사건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50대의 한 남자가 질식사로 죽었는데 냉동으로 된 영안실에서 보관하던 중에 21시간 만에 깨어나서 춥다고 꺼내달라고 해서 살아나게 되는 희한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의 견해는 “갑자기 차가워진 온도가 신체에 영향을 줘서 호흡 기관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 같다.” 이런 조심스러운 견해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우들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보통 3일 정도의 조문 기간을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우리가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사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새롭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나 이틀 만에 부활을 하셨다면 사실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3일이 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희망을 가질 수 없고, 기대를 가질 수 없는 날이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서도 제자들은 눈을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이고 도마 같은 경우는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음을 수 없다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사실 8년이라는 숫자가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사람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했을 때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8년 정도는 사실 명함도 꺼낼 수 없는 하찮은 숫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숫자 때문에 절망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뭐라고 말을 하냐면 34절에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야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무슨 의미입니까?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을 극복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나셔서 너를 치료하시니 고질병이라고 낙심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안 된다고 부정적인 생각 가지지 말고 당장 네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부활의 믿음이고 치료받을 수 있는 믿음이고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믿음인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지금 이 말씀 속에 나오고 있는 베드로와 같은 믿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 전의 예수님이 아니라 멀리 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 당장 아픈 사람의 아픈 곳을 치료해 주시고 만져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가까이에 계신 예수님!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 예수님께서 직접 치료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선포하고 자랑하고 영광 돌릴 수 있는 이런 믿음으로 기도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부활의 믿음이지 부활절만 꼬박꼬박 지킨다고 해서 부활의 믿음이 되는 것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고질적인 문제이고 세상이 포기한 문제이고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일지라도 우리 기도를 중보 해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 포기하거나 좌절하거나 실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절망적인 숫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현저하게 적은 통장의 잔액이 그런 숫자가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의 평수나 집의 가격이 우리에게 절망감을 주는 숫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키나 몸무게, 혈압, 혈당, 앓고 있는 병의 기간, 먹고 있는 약의 숫자, 자동차가 몇 cc냐 등. 우리에게 절망감을 주는 숫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절망감을 가지고 지난 6개월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뭐라고 말씀을 하시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지난 6개월 동안 그런 절망적인 마음과 생각 때문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지 못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게 살았어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서 그 동안 절망적으로 살았던 그 자리를 이제는 정돈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이 명령에 순종하여 정돈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머지 6개월 동안도 또 절망하면서 항상 기뻐하지 못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것 필요 없습니다. 그 동안 가지고 살았던 절망적인 생각들, 부정적인 생각들, 암울한 생각들, 패배적인 생각들, 겁내고 두려고 하고 떨고 놀랬던 생각들… 이런 것들을 정돈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시잖습니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를 반드시 낫게 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에 숫자에 노예가 되지 마시고 일어나 그 자리를 정돈하면 됩니다. 일어만 나면 안 되고 반드시 자리를 정돈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다시는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지 일어나서 자리를 정돈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서 정돈되지 않은 그 자리에 누워 있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지난 6개월 승리자의 삶을 사셨는지, 실패자의 삶을 사셨는지? 형통한 삶을 사셨는지, 고단한 삶을 사셨는지? 강하고 담대한 삶을 사셨는지, 겁내고 두려워하고 떨고 놀래는 삶을 사셨는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셨는지, 주눅이 들어서 비참한 삶을 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를 억누르고 있던 것들이 있다면 이제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그 자리를 반드시 정돈해야 합니다.
그런 믿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 보세요. 35절입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2024년 나머지 반 년 동안 이런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리를 정돈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남은 6개월은 승리하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