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보따리 (5)
여름의 끝자락에서 수영장에 갔다 와 베란다에 걸린 초등학교 딸아이의 수영복을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어린 아이들은 물을 좋아한다는 걸 느낀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책보따리는 시냇가 바위 위에 내팽겨 치고 곧바로 물로 뛰어들던
그 시절 지금처럼 수영복이며,수모, 수경은 듣도 보지도 못한 먼 세상의 것 이고, 오직 길옆에 있는 쑥 잎사귀 비벼 다져서 귀에 막으면(마른 쑥 잎이 있으면 금상첨화)
그것으로 끝이였다. 천연 수영장 천연 수영복 그리고 물옆 넓은 바위가 천연 다이빙 대가 아니던가,
좀 멋이나 부리려고 다이빙 하다간 영락없이 ”뻥” 하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배치기가 아닌가,
그래도 어린 친구들은 아픈 줄 도 모르고 행복했었다, 입술이 새파랗게 될 때 까지
시간 가는 줄 몰라도 고향 물가는 언제나 멋진 수영장이며 여름 놀이터인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느꼈다. 지금처럼 수영장에 가서 전문강사의 수영지도를 안받아도 촌에서 태어나서 자란 혜택으로
수영실력이 물개(?) 수준은 된다는 것도 다 시냇물 흐르는 고향에 감사 해야 한다. 그리고 수영할 때 입었던 팬티는 그냥 바위 위에 턱 걸쳐 놓으면 바로 뜨거운 바위에서
건조가 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또 귀속에 물이 들어가면 고개를 옆으로 기우려 바위 위에서
몇 번 꽁꽁 뜀박질 하면 만사 ok 였다 . 그리고 주섬주섬 책보따리 챙겨 집으로 가면 꽁보리밥에 된장, 풋고추가 마당 옆
우물에서 방금 올라온 찬물 한 그릇과 어머님이 기다리고 있는 시골집. 그곳이
여름날 우리네 집들이였다 . 아파트와 자동차에서 초가집과 구르마(소 달구지)를 우리는 그리워하고 있다 . -------------------
6탄
추억의 보따리(6)
자연에서 머루, 다래, 어름, 보리똥, 산딸기, 버찌, 오돌개(오디), 개암, 포구열매, 맹감(만개), 등의 열매를 따 먹던 그 순수한 입맛이 세월 따라 흘러 요즘은 어쩔 수 없이 마트에서 바나나, 키위, 파인애플, 오랜지, 메론, 캠벌 포도 등 수입산 과일을 먹는 입맛과
무슨 비교를 할 수 있을까요. 또 칡뿌리, 송곳(소나무 안의 연한 속껍질), 찔레, 진달래, 삐삐(갈대타입 풀 속살),
쌀 풀(작은 풀 봉우리 안에 쌀 모양 의 아주 작은 씨앗) 그리고
나뭇 잎사귀 껌(잎사귀는 처음 쓰나 자꾸 씹으면 껌 처럼 됨) 을 먹던 그 시절….
. 신토불이(身土不二)라 했던가? 양은 적지만 바나나 보다는 어름이, 키위보다는
다래가 우리에게 맞는 것 같다. 백운산 소풍 길에 많이도 따먹고 가져오던 그 열매들,,, 또 남의 집 토담이나 돌담 밖으로 약간 걸쳐진 가지에서 1~2개 따먹던 그 과일들,,,
꼴(풀)베러 갔다가, 혹은 소 띠끼로 갔다가 남의 밭에 밀, 보리 몇 포기 서리해 구워먹지
않은 사람 있을까요? 생밀 봉우리 몇 줄 훝어서 입에 씹어 껌 만들어 씹어보지 않은사람 또 있을까요? 촌에서 자라면서 고구마, 감자, 옥수수 무우 몇 개 서리 안 해본 사람 극히 드물 겁니다. 그때는 그게 애교 있는 서리였지 남의 물건을 어찌하는 수준은 아니 였지요
그러나 좀 심한 경우도 있었지요. 좀 커서 간혹 친구들과 아지트(?)에 모이는
밤이면 간간이 여러 동네를 다니며 닭서리를 해먹고 나중에는 자기집 닭까지
서리를 해먹고는 시침을 떼지 않았던가,
- 어머니: 야, 종한아! 닭장에 닭이 안 보인다. - 종한 : 저, 구름말 씰가지(살쾡이)가 물어 갔는 가배요. - 친구들: ,,, ㅎㅎ…ㅋㅋ.. -----참으로 그리운 시절---- --------------------
7탄
추억의 보따리 (7)
교통이나 모든 편의시설이 낙후되어 있던 옛날에 함양 읍에 나갔다 돌아오는데
거의 하루가 꼬박 걸리던 그 시절에 필요한 물건들은 주로 물나들이 에서 열리는
5일장에서 해결을 많이 했다. 장날 이른 새벽에 소달구지에 쌀, 보리쌀, 또는 나뭇단이나 장작 혹은 손수
키운 채소류와 과일 등을 물나들이 장에 가서 팔고 밤이 되어서야 약주 한잔 드시고
돌아오시는 우리네 아버지들,,, 또 집에 기다리는 아이들을 위해 손에 먹을 것을 들고
오시던 우리네 어머니들,,,
그런 시절에 도시에서 오는 장사들은 정해져 있었다. 여름철 아이스켁키 통을 메고 “아이이스~케이끼” 하면서 동네를 누비고 다니던 아이스켁키 장사,
어쩌다 그 아이스 켁키를 사게 되면 친구들이 뒤에서 줄을 졸졸 섰다 그리고 마음이 통하면
그 팥 아이스 캔디를 한입씩 빨아 먹던 그 순수한 어린 친구들,,, 요즘 파는 추억의 옛날 캔디바는 그 어릴 적 꿀맛 아이스 켁키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지요,
또 지리적으로 바다와 멀리 떨어져 싱싱한 생선은 구하기가 어려웠기에 완전 염장된 간고등어,
간갈치등 소금에 절인 생선을 팔려오는 생선장사 삼천포 아지매가 오는 날은 어머님들이 쌈짓
돈을 푸는 날 이다.
그리고 방울장사 할머니가 오는 날은 바느질 소품 및 참빗 고무줄 등 여자들의 생활필수품을 사고,
우리네 할머니,어머니, 언니들의 긴 머리카락 까지 짤라서 물물 교환도 했다.
그 중에서도 비교적 자주 오는 엿장사는 어린아이 부터 어른들까지 좋아하는 간식을 공급하는
날이기도 했다. 넓은 엿판에 둥글고 큰 가위를 질거렁 거리는 엿장사 가위소리에 못쓰는 고철이며, 빈병이며,
신발이며 집안에 있는 돈이 되는 물건을 찾아내서 엿을 바꾸어 먹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멀쩡하게 신을수 있는 신발도 일부러 훼손(?) 해서 엿 바꾸어 먹고 부모님께 혼이난
어린이도 있었을 것이다.
아! 그리운 그 장사들, 그 이야기는 지금 백전에서는 먼 전설처럼 느껴질 것이다. --------------------
8탄
추억의 보따리(8)
농번기가 끝나면 모든 마을을 떠들썩 하게 해주는 가설극단(유랑극단)이 백전에 온다. 트럭에 큰 나팔형 스피커를 매달고 3류 성우가 재미나는 멘트를 넣어 가면서 길이 있는
모든 동네를 다니며 큰 음악과 구수하고 박진감 넘치는 영화(활동사진) 맛배기로 백전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한다. 가설극단의 삐에로 복장을 한 배우가 동네 벽에 갖가지 영화 포스트를 붙이고 마을의
구장(이장)이나, 유지되는 분들께는 무료 초대권까지 선사 하고는 초등학교 앞 동산에 커다란 나무 기둥을 박고 8각으로 천막을 친다. 동산 소나무 구석구석 큰 스피커와 전등불을 매달고 지신(地神)이 놀랄 정도로 음악을 틀고 불을 밝혀 된다. 그야말로 백전 사람들을 환상의 밤으로 이끌어 가는데,,,
촌에서는 밤에 상영되는 그 영화를 보기 위해 낮부터 바쁘다 부모님 몰래 쌀, 보리, 잡곡, 계란 등 영화를 볼 수 있는 돈이 되는 것은 무조건 들고 나가는 우리의 형과 누나들,,,, 그리고 영화비가 마련 되면 느긋하게 밤이 되도록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들을 감상하면 되는데, 부득이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일이고 뭐고 손에 잡히지 않아 막연히 동산 주변을 서성이며
안절부절 한다.
학교 앞 동산은 영화를 보기 위해 백전주변의 사람들이 모여 반 해치(잔치)를 하는 것 갔다. 수십,수백 곡의 옛 노래를 듣고 밤이 되어 입장을 하면 표를 가진 사람은 승리자요,
없는 사람은 귀가 죽어 부러운 눈으로 입맛만 다신다. 또 영화가 상영되면 밖에서는 천막 사이로 무임 영화감상을 하려는 사람과 지키려는 단원들이 반 전쟁을 한다. 때로는 안에 들어간 친구가 신호를 해주어서 들어 가지만 거의가 헛힘만 쓴다. 영화 마지막
이 가까이 되면 천막을 일부러 개방해 주는데 그때에 의자도 없이 바닥에 앉아서 보는
사람들 틈새에 앉아 마지막 동냥(?) 영화를 보기도 했다 .
그리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영화평을 하면서,,,,
지금도 그때에 보았던 “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라는 웅장한 영화와 박노식, 장동휘, 허장강, 김희갑, 황해 등 배우의 모습이 눈에 선하며, 동산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수덕사의 여승 “노래가 아련한 메아리로 와 닿는다. -------------------------
9탄
추억의 보따리(9)
요즘은 TV나 유선,케이블 방송이 보편화 되어 연속극 이나 뉴스 등 언제나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지만 우리들 부모님들은 고작해야 라디오 방송을 듣는 정도로 세상의
돌아가는 이야기를 알았다. 베개 크기의 사각라디오에 소리도 우려서 잘 안 들리는 그런 구형 라디오에 머리를 맞대고
귀를 기우려 듣는 어머니, 누나를 그냥 무심하게 보던 그 때 ,, 라디오 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 명랑한 우리 집 “이라는 대가족의 삶을 배경으로 한 연속극을 했다. 그 노래 가사 끝 구절은 ~~~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어~도 우~리~집은
언제~ 나 웃~으며~ 산다.
그러다 흑백 TV가 촌에 공급되어 술도가(양조장)집에 TV가 들어왔다. 그때 “여로” 라는 연속극을 매일 밤 방영했다. 부스럼 머리에 앞 이빨이 1개 빠져서 색시야, 하던 바보신랑(장욱제) 착한 아내 (태현실) 등이 펼치는 멜로드라마가 참 인기가 많았다. 그 당시 여로를 모르면 간첩 이였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일찍 저녁을 먹고 전부 술도가 집 마당 떡석(멍석)에 모여 앉아 숨을 죽이고 TV 속으로 빠져들던 그 시절,, 조금 지나 학교 숙직실과 면사무소에도 TV 가 더 생기면서 주말이면, 야간비행 (주현 이 나오는 간첩과 독침 이야기,, 그땐 독침이 공포의 대상 이였다) 과 두만강 (오지명 이 만주벌판서 독립투사로 나오는 독립운동 드라마) 등의 연속극에 촌사람들이 빠져 들어 일희일비(一喜一悲)하였다.
그리고 김일 천규득이 이노끼를 때려 눕히는 레스링 경기, 참으로 많은 어린이들에게 박수를 받았지요, 그때 박치기가 유행 했었지요, 나도 박치기로 기왓장 많이 깼습니다. 그리고 박치기 때문에 동산에 소나무 몆 그루 부러졌다는 후문도 있었지요,ㅎㅎ,
또 우리나라와 이스라엘, 호주, 일본 등이 벌이는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 그건 백전의
남자들을 TV앞에서 꼼짝 못하게 하는 족쇄 였지요, 김재환 선수의 헤이딩,
박희천선수의 드리볼, 이회택 선수의 가로채기, 그리고 차범근 선수의, 슛,,~ ~~
북한식 말투의 흥분된 아나운서의 중계방송에 손에 땀을 쥐고 긴장 했었지요, 또 이세연 골키퍼의 스라이딩 캐취,,, 참 그때 나도 박수 많이 쳤습니다,,
그 시절에도 어른들은 틈만 나면 뉴스만 좋아해 짜증이 났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요즘 뉴스 채널을 고집하는 내가 늙었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 술도가에 꼬드밥 이 있는가요, 그리고 마당에 떡석(멍석)이 깔려 있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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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탄
추억의 보따리(10)
함양하면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이자 물레방아와 정각이 유명했다. 그러면 백전은 어떤가? 거의 모든 마을의 입구에 큰 정자 나무와 그 밑에 크고 넓은
바위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물가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쏘(깊은 시내)가 보이는 곳에는
아담한 정각이 세워져 잇으며, 논으로 가는 물길에는 물 잠자리가 날으고 시냇물 속에는 온갖 고기들이 노니는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고장이지요.
마을입구 마다 큰 느티나무(포고나무 수령이 적어도 100년 이상)와 그 밑엔 넓은 편상 바위, 그 곳은 마을 어른들의 모임 장소였고 마실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쉬는 곳 이였으며, 먼 길에서 돌아오다 앉아 생각도 정리하고, 무사 귀환을 보고하는 자리였지요 또 여름철에는 할아버지들께서 태극선에 모시적삼 차림으로 앉아 마을의 대소사를 관장하시고, 장기나 바둑을 두시며,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있는 손주를 살랑살랑 부채로 부쳐 주시면서 먼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여우가 재주 부리고, 귀신들이 씨 나락 까묵는, 이야기를 들려 주시는 곳 이기도 했지요. 그 정지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이자 살아있는 전설을 이어주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물레방아 그 이름은 언제 들어도 아름답듯이 돌아가면서 물을 쏟아 내는 모습도 한 폭의
그림이지요, 아름답다(?)는 말로는 그 멋스러움을 대변해 줄 수는 없지만 그 맑고 깨끗한 물을 안고 돌아가는 물레 방아는 좀 과장해서 미스코리아 저리 내씨 앉아라, (내씨 앉아라: 수준이나 품격이 다르니 비껴 나라 는 우리어머님들의 순수 백전 말)였지요 여담 입니다만 고향에 사는 일찍 머리가 센 꼬치 친구에게 신경을 많이 써서 흰머리가 생겼느냐고 물었더니, 친구왈: 백운산 물이 너무 맑고 깨끗해서 조석으로 자주 머리를 감으니까, 검은 물이 싹 빠져서 그렇다고 대답하기에, 더 더욱 그 맑은 깨끗한 명경지수 (明鏡止水) 같은 물을 안고 돌아가는 물레방아가 그리웠습니다.
또 정각은 어떻습니까, 비가오면 비를 피하고 해체(해치, 마을잔치)가 있으면 마을사람들이
모여 노는 곳. 젊은 남녀들 에게는 데이트 장소로, 무료 할 때는 유유히 흐르는 물을 보면서 머리를 식히는 곳,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는 지친 몸을 쉬게 해주는 곳으로, 동네 어린이들에게는 놀이터로 때로는 숙제 하는 곳으로 우리들의 삶을 살찌게 해 주었지요.
오늘도 그립습니다, 그 망월정(望月亭) , 그리고 보고 싶군요 백전의 물레방아 그러나 이제 그 물레방아는 꿈 속에서만 만날 수 있겠군요. ------------------
11탄
추억의 보따리(11)
누구에게나 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추억은 있다.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르는 산속에서 가재를 잡던 그 시절, 나에게도 빵가재(물방개)의 슬픈 추억이 있었다. 빵가재 한 마리 잡으면, 고무신 속에서 한나절 장난감 역할을 해주곤 했던 그 빵가재,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함양의 상림 숲에서 천년 문화제( 매년 실시하는 함양의 고유 행사, 요즘은 물레방아 축제로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행사를 하는데 부모님을 졸라 허락 을 받고 함양을 많이 다녀본 동네 6학년 선배와 대한금속 빨간 버스를 타고 차 멀미를 참아가며 상림 숲에 갔다. 10시경 도착하니 상림 운동장 입구에는 온갖 장사들이 리어카며 천막을 쳐놓고 주로 먹거리와 기념품을 팔았는데 시골에서 온 나에겐 조금은 흥분되고 재미있고 신기 하였다. (그 시절엔 몇 년 가야 함양에 1~2번 갈까 말까 했음)
그런데 한쪽 옆에 물이 담긴 큰 다라이의 가장자리 부분에 칸칸이 벽을 막아 빵가재를 중앙 구멍으로 집어 넣으면 빵가제가 풍덩 물에 들어가 다라이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가고 싶은 칸에 들어가면 그 칸 위에 있는 선물을 주는 그런 게임의 장사가 있었는데.(후에 안 사실이지만 탐나는 선물 칸 벽안에 싫어하는 약품을 발라 빵가제가 들어갔다 도로
나오게 하는 야바위 였슴) 시골에서 빵가재 잡아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던 우리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그 게임에 참가(?) 했는데. 결과는 차비며 약간의 여유돈 마저 다 털리고 빈 털털이 가 되었던 것이다. ,,,
그 볼거리 많은 천년 문화제 구경이고 뭐고 이제는 집에 돌아갈 일이 걱정이 된 순진한 촌어린이 2명은 그 길로 백전 쪽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때가 아마도 11시경 이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후회막심하고 막연자실 해서 길을 힘겹게 걷는 두 어린이, 자갈길 신작로에 먼지는 날리고, 곧게 뻗은 버드나무 ,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 간간히 코스모스 꽃잎을 따서 손가락으로 튕기며, 또 길 위의 작은 돌멩이를 주워서 먼 산으로 던지고, 끝없이 걸어가던 신작로 길은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그리 아름답지는 못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무거운 발길에 목도 마르고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오는데, 병곡을 지나 어느 동네 입구 길가에 무시(무우) 밭이 보였다. 그 무시 한 뿌리는 우리들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오아시스였다. 요즘도 고향 가다가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자세히 보니 옥계마을 입구 지나 커브 도는 곳에
있는 밭 이였다 . 세월이 지나도 모양은 그대로 이나 논으로 변해 있었다. 그 밭의 지신(地神)은 세월의 유구함과 무상함을 알까?
그리고 능기의 싸리꼴 입구를 지나 물나들이로 접어드니 안도감에 마음이 놓였다. 물나들이는 부모님 따라 장에 여러 번 와봤던 곳이기에 힘이 쏟아났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니 늦은 오후 였다.
그 가슴 아픈 빵가재의 사연이 훗날 학교 운동회때 검은 고무줄 두 가닥으로 긴 것을 뽑는 게임으로 코 묻은 돈을 우려가는 야바위꾼을 선생님이 심하게 꾸짖는 이유라는걸 대변해 주는 것으로 위안을 받았다 .
아! 빵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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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탄
추억의 보따리(12)
초등학교(?학년)때 함양 읍내 사생실기대회에 참가 한적이 있었다 . 그때는 매년 함양군내 초등학교별 글짓기(산문) 동시, 그림 그리기, 구기 종목 겨루기 대회가 있었다. 백전에서 크레용(크레파스) 불조심 포스터 등을 그리며, 제법 그림 그린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사생실기 대회 그림 그리기 대표로 간다고 색깔 개수가 좀 많은 그레용에 합판(가운데 상단에 ㅁ, 자 집게가 있는 도화지 받침대)을 들고 청운의 꿈을 안고 함양 초등학교에 집합을 해서 그림 그리는 아동들은 상림 숲옆 뇌산가는 입구 뚝(둑)에서 통솔 선생님의 입회 하에 시간을 정해 놓고 흩어져 그림을 그리게 되어 있었다. 주제는 풍경화 였고 집행부에서 나누어준 검정된 도화지를 가지고 쪼그려 앉아서 합판의 스프링 집게에 흰 도화지를 고정해 놓고 그림 구상을 할려는데 ,,, 읍내 초등학교 학생인 듯한 아이가 내 옆에 자리를 잡더니 큰 삼각 나무 받침대에 요상한 물감 개는 것(캔버스), 많은 물감, 붓, 씻는 통, 등 히안하고 거창한 채비들을 쫙 펼쳐 놓고 판자형 합판에 크레용을 들고 촌에서 온 나를 폼까지 잡으면서 분위기로 압도 하며 KO시켜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촌 어린이는 거인 앞에 소인처럼 그나마 좀 그리던 실력 마져도 발휘하지 못하고
그림이 엉망이 되었띠야,,,,,, 백전 초등학교 대표단을 인솔해서 오신 정OO 선생님 께서 각 부분별 참가한
대표들을 격려차 오셔서 힘을 주셨지만 한번 흩어진 폼을 바로잡기란 어려웠지요, 결과는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고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 글짓기(산문)에 참가한 학교 대표는 상을 받아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요즘은 백전과 함양의 거리가 반나절에서 10분 거리로 좁아 들었다. 그만큼 우리의 후배들은 함양을 옆집 드나들듯이 다닐 것이다. 그리고 학습 도구나 실력에서도 귀 죽는 그런 현상은 없을 것이다.
백전 초등학교에서 큰 인물들이 많이 많이 부각되어 우리고향 백전 발전에 이바지 하여 못다한 꿈을 흘러 보낸 선배님들의 소원을 들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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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탄
추억의 보따리(13)
어릴 때에는 도깨비가 무서웠다. 시리절 도깨비 하면 갓난 아이들도 울음을 멈추었고, 초등학교 때는 학교의 변소(재래식 화장실)에서 손을 쑥 내민다는 목 없는 귀신이 무서웠다. 또 외딴 길엔 문디(문둥이)가 지키고 있어 어린 아이를 잡아 간지빰(간지럼)때워 죽여 간을 빼먹는 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동네 어귀를 벗어나지를 못했었다. 어릴 적 어머니의 등에 업혀 밤에 동산 모티를 돌아서 집으로 오는 것은 너무도 무서운 일 이였다. 그리고 어머니 등의 업혀 따뜻한 채취를 느끼며, 머리위로 푹 덮어준 쉐타(겉옷 잠바 같은 것)속에서 눈을 꼭 감았던 기억과, 동산의 오래된 고돌백이(소나무 베어내고 뿌리 부문 밑둥이) 에서 파란 형광 빛이 나는 것을 도깨비 불이라고 해서 무서워 했던 적이 있다 . 또 부머리 너머 비지재(?) 넘는 아영 가는길의 외진 곳에 돌무덤이 쌓인 당산나무 (성황당)도 무서웠고, 또 새재 에서는 호랑이가 어린 아이를 업어갔다고 하여 두려움에 몸을 떨기도 했지요, 또 여우가 나무 하러간 나뭇 꾼을 홀렸다는 이야기이며, 평제이 가는 길에 큰 바위에서 나오는 바위 귀신과, 운산 가는 길에 산 옆에 돌더미가 쌓인 곳에 어린아이들의 돌무덤이라 해서 이곳을 지나가며 매우 긴장하기도 했었다. 밤 길에는 살쾡이나 호랑이가 산에서 돌을 던진다고 (실제로 오매실 에서 학교 다니는 친구 녀석들은 낮에도 그들(?)이 던지는 돌멩이에 많이 맞았다고 하였다. )해서 밤이면 무서워서 꼼짝도 못했던 어린 시절,,,,
백전에서는 시리절 도깨비가 유명했다. 내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해보면 내용은 이러 했다 , 촌로(OOO 아버지)가 물나들이 장에 갔다가, 거나하게 약주를 드시고 술에 취해서 밤 늦게 흥얼흥얼 거리며 갈지(之)자로 신작로를 걸어서 오는데 시리절 다리입구에서 머리에 뿔이 달린 도깨비를 만났는데 그 도깨비가 자기와 씨름을 해서 지면 죽고 이기면 집에 보내준다고 하였단다 , 이 촌로(村老) 밤새도록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도깨비와 씨름을 해서 겨우 이겨 도깨비를 다리입구 나무에다 묶어두고 온몸에 상처와 찢어진 옷차림에 만신창이가 되어 거의 죽기직전의 모습을 하고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 왔는데,,,, 동네 사람들이 현장을 가서 확인해본 결과 그 곳에는 피가 묻은 빗자루 몽뎅이가 나무에 떡하니 묶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일화가 그 당시엔 백전 바닥에 쫙 퍼졌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 이였지요 그리고 그 유명한 시리절 도깨비는 한 동안 백전의 주사들에게 술을 멀리하게 했다고 합니다.ㅎㅎ 그 유명한 시리절 도깨비(?)가 우리 집 헛간에도 있었지요. 지금도 시리절 입구에서 그 도깨비가 검문을 할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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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보따리(14)
요즘은 초등학교는 방학이 끝나도 숙제 같은 게 별로 없는 듯 하다. 우리는 어리적 초등학교 여름 방학 때 숙제가 매우 많았다. 방학이 시작되면 방학 책을 받아 그것을 푸는 것은 물론이고, 곤충채집, 잔디 씨 채취, OO만들기 와 수시로 이루어 졌던 채변 봉투 가져오기 쥐 잡아 쥐꼬리 가져오기, 송충이 잡이, 국군 장병 아저씨께 위문편지 쓰기 등등, 현재 아이들은 곤충채집이나 좀 알라나? 나머지는 생소 할 것이다. (딸아이 왈: 아빠 쥐를 왜 잡아???) 곤충 채집도 마트나 시장에 가면 이 천원 정도 주면 곤충채집 채와 채집상자가 프라스틱으로 만들어져 팔리고 있으며 여치와 잠자리 한 두마리 잡아가면 끝이지만 , 우리는 왕매미 호랑나비, 고추잠자리, 하늘소, 사슴벌레 등 많은 곤충들을 채집해 종이상자를
만들어서 곤충을 고정 시키고 수수깡 위에 핀을 꽂아 정성스럽게 만들어 갔었다. 또 동네 주변에서 놀다가 재미 삼아 무덤가나 잔디밭 위에서 손으로 잔디씨를 훑어 한 웅큼씩 수시로 모아 가지고 방학 때 어렵게 만든 진흙 공예 등과 같이 학교에 가져 갔으며, 채변 봉투라 하여 빈 채변봉투를 주어 집에서 자기변을 받아 가져 오게 해 학교서 단체로 보건소 등에 검사 의뢰하여 기생충의 감염상태에 따라 약을 주는
그런 채변 채취를 간혹 하였다.
그때 일부 영악(?)한 친구들은 자기변이 아닌 타 인분이나 동물의 변을 가져 가기도 했었다. 또 국가적으로 쥐잡기 행사를 하면서 집에서 쥐를 잡아 학생들에게 쥐꼬리를 가져오게 했었다. 그 당시에는 집집마다 쥐덫이 있었고 쥐덫을 이용해 쥐를 쉽게 잡을 수 있었으며
꼬리를 짜르는 일은 형이나 어른들의 몫 이였다 . 도시아이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송충이 잡이라 해서 학교 일과 시간에 단체로 학교 밖
야산으로 우르르 떼를 지어 갔다, 얕은 야산에 학생들을 풀어(?) 놓으면 나무 젓가락 같은 것을 만들어 소나무에 붙어 있는 송충이를 잡는 것이다, 그것으로 소나무를 보호 하는 산림보호 목적의 행사였던 것이다. 잘못해 송충이에 쐐기라도 하면 매우 고통스러웠다.
사실 송충이들이 아이들의 재잘 거림속에 반 빈사 상태여서 송충이 잡기는 쉬웠다. 그리고 국군장병 아저씨께,,,, 라고 시작되는 위문편지는 또 어떠 했는가,
간혹 이름도 성도 모르는 국군장병아저씨 라고 썼지만 대부분은 국군장병 아저씨,,,에서
시작되는 위문편지 , 남자 아이들은 나도 커서 아저씨 처럼 훌륭한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마무리하고, 여자애들은 나라를 지키는 아저씨(또는오빠)가 자랑 스러워요,로 끝나는 그 위문편지 ,
간혹 답장도 왔지만 그때는 학생 신분으로 쓰는 의무적인 편지였지요, 우리들의 편지를 받아보시던 그 국군 장병 아저씨들은 지금 쯤 경로당의
상석에 앉으시는 할아버지가 되어 있으시겠지요.
숙제가 많으면 어떤가 돌릴 수 만 있다면 시계바늘을 꺼꾸로 돌려 연필에 침을 묻히면서
위문편지를 써보고 싶다. ( 640-56 : 경남 함양군 백전면 OO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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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추억의 보따리(16)
부모님 상경기(上京記) . 백전의 부모님들께서 도시에 있는 아들 집, 또는 딸 집에 한번씩 다니려 오신다. 평소 시골서 계시다 도시에 살고 있는 자녀나 손주들이 보고 싶어서, 또는 무슨 행사나 잔치관계로 대 도시를 구경도 하실 겸 겸사겸사 상경을 하시는 것이다. 자식들은 주로 도외지 에서 학교나 직장 관계로 나가 있다가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눌러앉아 도시 아내(며느리), 도시남편(사위)을 얻어 그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이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한 세대가 분가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의 부모님들은 지켜보고 인정하고, 또 배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씩 오셔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자식들을 보시면서 인생의 낙(樂)으로 삼는지도 모른다.
어느 친구 집에 백전에 계시던 부모님이 농한기를 이용해 다니려 오셨다. 물론 주변의 좀 괜찮다는 곳은 다 구경을 하셨고, 바쁘게 도시 생활을 하는 자식을
보면서 집안에 있는 손주들과 같이 지내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손주 녀석을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보면서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눈이 침침해서 혹은 글을 잘 몰라서,,) 나무를 짚으면서 “ 나무” 하면 손주녀석은 나무 하고 따라 하는 그런 것이 였는데,, 할아버지가 무우를 짚으시곤 “무시” 또 토끼를 짚으시곤 “토까이”. 라고 하셨던 것이 였다.
아, 그 분들이 우리를 희생으로 키우신 백전의 부모님이요, 도시에 있는 우리 손주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인 것이다. 그분들이 우리 어릴 적 벌에 쏘이면 잇똥으로 치료해 주시던, 또 눈에 띠클이 들어가면 혀로 핥아 주시던, 배가 아프면 약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던, 혹 아파 누울 땐 밤새 같이 앓아 주시던, 우리들의 부모님이자 할아버지, 할머니이자, 백전의 뿌리인 것이다.
도시가 공기도 안 좋고 복잡하고 불편하기 그지없지만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손들을 위해 오늘도 상경을 마다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에 사는 자녀들은 지극 정성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대가 이어지고 맥이 이어지고 백전의 뿌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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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추억의 보따리(16)
부모님 상경기(上京記) . 백전의 부모님들께서 도시에 있는 아들 집, 또는 딸 집에 한번씩 다니려 오신다. 평소 시골서 계시다 도시에 살고 있는 자녀나 손주들이 보고 싶어서, 또는 무슨 행사나 잔치관계로 대 도시를 구경도 하실 겸 겸사겸사 상경을 하시는 것이다. 자식들은 주로 도외지 에서 학교나 직장 관계로 나가 있다가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눌러앉아 도시 아내(며느리), 도시남편(사위)을 얻어 그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이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한 세대가 분가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의 부모님들은 지켜보고 인정하고, 또 배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씩 오셔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자식들을 보시면서 인생의 낙(樂)으로 삼는지도 모른다.
어느 친구 집에 백전에 계시던 부모님이 농한기를 이용해 다니려 오셨다. 물론 주변의 좀 괜찮다는 곳은 다 구경을 하셨고, 바쁘게 도시 생활을 하는 자식을
보면서 집안에 있는 손주들과 같이 지내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손주 녀석을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보면서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눈이 침침해서 혹은 글을 잘 몰라서,,) 나무를 짚으면서 “ 나무” 하면 손주녀석은 나무 하고 따라 하는 그런 것이 였는데,, 할아버지가 무우를 짚으시곤 “무시” 또 토끼를 짚으시곤 “토까이”. 라고 하셨던 것이 였다.
아, 그 분들이 우리를 희생으로 키우신 백전의 부모님이요, 도시에 있는 우리 손주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인 것이다. 그분들이 우리 어릴 적 벌에 쏘이면 잇똥으로 치료해 주시던, 또 눈에 띠클이 들어가면 혀로 핥아 주시던, 배가 아프면 약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던, 혹 아파 누울 땐 밤새 같이 앓아 주시던, 우리들의 부모님이자 할아버지, 할머니이자, 백전의 뿌리인 것이다.
도시가 공기도 안 좋고 복잡하고 불편하기 그지없지만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손들을 위해 오늘도 상경을 마다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에 사는 자녀들은 지극 정성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대가 이어지고 맥이 이어지고 백전의 뿌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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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탄
추억의 보따리(17)
추석칠, 설칠, 이라는 게 있었다. 추석이나 설을 앞두고 새 옷이나 새 신을 사는걸 백전에서는 추석칠 또는 설칠 이라고 하였다. 일년 중 새신 이나 새 옷을 사는 것은 거의 명절 을 앞두고 샀다. 명절 며칠 앞두고 추석칠을 사면 고이고이 모셨다가 추석날 신거나 입는 것이다. 대부분은 어린 적 경험 하셨겠지만 새 신을 사면 신을 신기가 아까워 방안에서 폼을 잡고 신어보고 머리맡에 두고 어루만지며 쓰다듬어 보며 행복한 모습으로 잠들었던 그 어린 시절,,,, 신발은 대부분 발 치수 보다 큰 걸로 사서 오래 신도록 하였고 때때옷(새 옷)도 사면 몸의 치수보다 헐렁하게 큰 걸로 사서 오래오래 입도록 우리네 부모님들은 대부분 그렇게 명절칠을 해 주었던 것이다. 추석을 앞둔 장날이면 추석칠을 사오시는 부모님을 먼 동구입구까지 마중 나가 목이 빠져라 기다려 본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자주색 추리닝 한 벌을 추석칠로 받아서 처음엔 그것이 아까워 학교 갈 때 만 입고 돌아와서는 벗어두었던 적도 있었다. 또 운동화 한 켈레를 설칠로 받아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던 때도 있었다. 그때는 때때옷(추석이나, 설에 사주는 옷) 한 벌이면 이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고, 운동화 한 켈레 면 태산이라도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시절 이였다. 요즘은 옷이나 신발을 떨어질 때 까지 입고 신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또 오래 신고 입기 위해 싸이즈를 크게 사는 것은 더더욱 없다. 딸아이의 한복이 작다고 해서 다시 사주면서, 요즘은 뭐든지 멀쩡한데 싫증나서 버리는걸 보니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추석날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은 약주에 송편이나 산적을 드시고 마당에서 큰 떡석 (멍석)을 깔아 놓고 윷놀이를 하고 농악놀이 한마당도 하고, 아이들은 때때옷 을 입고 바지를 2~3단 접어 올리고 새 옷을 엉거주춤 잡고 뛰어 놀던 그것이 예전의 우리백전 추석 풍경 이였다고 생각된다.
요즘 추석 풍경은 어떨까? 대부분 도시에서 아빠엄마의 자가용을 타고 고운 한복 입고 온 손자손녀들, 전날 밤 모처럼 모인 형제들과 도란도란 얘기와 고스톱 한판, 추석날 차례를 모시고 돌아갈 때는 촌에서 키운 온갖 것들을 봉지봉지 싸주시며 내심 더 있기를 바라면서도, 차 막힌다고 어여 빨리 가리고 하시는 우리의 부모님들,,,
그 부모님들이 계시는 한 백전은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입니다. 추석을 고향에서 보낼 수 있다는 건 정말로 행복한 일입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뜨는 백전에서 추석 명절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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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탄
추억의 보따리(18)
옛날에는 장난감이나 놀이기구를 자연에서 구하고 자연으로 돌려 보냈던 시절, 진달래 먹고, 개구리 잡아 뒷다리 구워 먹던 때,
요즘처럼 플라스틱 이라는 요상하고 수많은 것들이 거의 없던 촌에서, 풍뎅이 한마리 잡아 다리 떼고 목을 틀어 바닥에 두면 풍뎅이가 날개를 선풍기 보다 빨리 돌리며 회전하는 장난감(요즘 생각하면 잔인한 놀이)으로 한 시간을 놀았고 . 굴밤 나무에서 집게벌레, 사슴벌레, 하늘소 같은걸 한 마리 잡으면 또 한시간, 잘익은 굴밤이나 도토리 몇 개 주우면 구슬치기로 이어 한시간, (여자 애들은 굴밤이나, 작은 돌멩이 몇 개로 공기 놀이에 한시간,, 봉숭아 물들이기에 한시간,,,,) 땅강아지 한 마리 잡아도 손바닥 위에서 한시간, 빵가재 한 마리 잡아도 고무신 속에서 또 한시간,,, 살아있는 장난감들이 버글버글 하던 그 곳,,,,
물가에서 엿쟁이(소금쟁이) 한마리 잡으면 꼬리부분에서 나는 단냄새 맡는다고 또 한시간. 작고 납짝한 돌멩이 있으면 물위에 던져 물수제비 만든다고 친구들과 누가누가 많은 숫자로 멀리 보내나 내기에 또 한시간,. 약간의 모레톱이 있으면 고무신으로 차동차 모양( 한짝은 대대로 두고 한짝을 접어 타원으로 만들어 한짝 위에 끼우면 배 모양의 차가 됨 ) 만들어 차 놀이에 한시간, 신작로 버드나무에 소고랑지로 홀롱개(훌치기) 만들어 매미 잡는다고 한시간, 산에서는 햇대기( 갈대모양의 풀)뽑아 허리에 차고 머리 위에 칡덩쿨로 위장하고 전쟁놀이에 한시간, 허기지면 보리똥, 개암, 등 야산에서 나는 열매 따서 간식거리로 한시간, 왕잠자리 잡아 꼬리 뒤에 실 매달고 한시간, 땡자나무 울타리에서 들쥐 새끼잡아 또 한시간, 못쓰는 가마니 같은 걸로 멧똥(무덤) 위에 올라 미끄럼에 또 한시간,
옥수수 수염으로 턱에 달고 할아버지 놀이, 돼지 오줌보에 바람 넣어 축구하기,,,, 나뭇가지로 새총만들어 사냥 다니고, 잣치기, 비석치기,딱지치기, 술래잡이,나뭇가지 꺽어 칼싸움 놀이,다서개이 놀이 등등... 그 많은 놀이에 해가 지면 박쥐와 놀고. 학교운동장에선 밤새(비둘기 크기의 흑색새 어두워 질때 운동장에 나와 앉았다 밤이되면 사라짐) 잡을려고 뛰어 다니고, 밤에는 반딧불 잡아서 놀고,,,,,
그러나 틈틈이 소 꼴도 베고, 토끼풀도 구하고, 소 띠끼로도 가고, 또 동생도 돌보며, 부모님을 도왔던 백전의 어린이들 ,., 그들은 오늘도 어디서 무슨(?) 놀이를 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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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탄
추억의 보따리(19)
“옜소” (옜 쏘오~) 란 말을 아십니까?
우리네 할아버지들이 가게에서 대접(사발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 부어 새끼 손가락으로 한 두어 번 저어 벌꺽벌꺽 마시고 엄지 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소금을 찍어 드시고 입가에 흐르는 막걸리를 쓰윽 흰 수염을 어루만지듯 쓰다듬듯 닦고 길을 나서던 그 시절. 막걸리 안주는 소금이 기본이고, 좀 특별한 안주가 있다면 김치에 두부 정도가 최고였던 때를 기억하시나요?
혹 부모님 심부름으로 노란색 양은 주전자 들고 술도가(양조장)에 막걸리 사러 가는 날은 횡재 하는 날이기도 했다. 술도가 편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꼬두밥을 주인 몰래 한줌 먹을 수 있는 날 이기도 했다. 그 맛있는 꼬두밥,, 또 운이 더 좋으면 바지 주머니에 한줌 더 넣어 오기도 했었다.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 까지도 살짝 한 모금 하면서,,,,
간혹 돈이 생기면 가게에 가서 소 눈망울 만한 눈깔사탕도 사먹고 하던 때, 그 큰 눈깔사탕 한 알이면 좀 과장되게 말하면 한나절 입안에서 단물을 우려먹기도 했었다. 그리고 좀 색다른 것은 밀가루처럼 가루로 되어 봉지에 든 치약 이였고, 또 쫀드기 라는 노란, 무지개 색 고무과자가 있었다. 그것은 얇은 고무판 처럼 길게 되어 있어 고무과자 라고도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씹으면 씹을수록 달콤한(?) 맛이 나는 고무과자였다. (지금도 도시의 초등학교 앞에서는 그런 추억의 과자를 팔고 있었는데 우리 딸아이는 그것을 불량식품 이라고 부르면서 간혹 사먹더군요. 또 50원짜리 껌과, 100원짜리 아이스 크림도 판다고 하면서 얼마전 100원을 주고 쫀드기 고무과자를 사와서 가스불에 구워 먹어 보았는데,,, 추억의 그 맛이 아니더군요,,,,. )
그뿐인가, 부채과자, 오꼬시. 티밥, 간빵, 뽀빠이, 알사탕,,등등 많은 과자들이 있는 가게는 단연 인기 있는 곳 이였지요,,,
그 가게에 들어서 자리를 비운 주인을 부르는 말 한마디, “ 옜소” 아, 정겨운 그 백전 말. ---------
20탄
추억의 보따리(20)
신작로엔 구르마(소달구지)가 다니고 백전에는 차를 보기가 어려웠던 때, 하루에 1~2편씩 운산 에서 함양을 운행하는 시골버스가 전부였다. 그러나 급한 일이나, 응급환자가 생기면 백전 지서에서 전화를 통해 함양에 급하게 차를 불렀다. 그때는 검은색 전화가 면사무소, 학교, 지서에만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러면 읍내에서 빵가재 차(코르나 택시: 차 모양이 빵가재 처럼 생겼다 해서 우리들은 그렇게 불렀다) 가 대절 택시로 백전에 오면 신기한 구경거리에 차 주변에 모여 이것 저것 만져 보고 구경하던 어린 시절,
어쩌다 신작로 길을 평평하게 고르기 위해 읍내 쪽에서 큰 불도저가 오면 그 이상스럽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차 뒤를 신이 나서 따라 다녔다. 불도저는 앞쪽에 굴곡진 신장로 길을 평평하게 하기 위해 대각으로 넓은 발을 달고 나아가면 바닥이 평편하게 골라지며 높게 쌓인 흑은 깍여져 한쪽으로 밀리면서 길옆으로 흘러가고 불도저 뒷 쪽에는 발의 높이와 각을 조정하는 커다란 기어가 원으로 되어있어 재미있고 특이해 땅 을 고르는 불도저를 따라 신작로 길을 졸졸 갔다. 평제이 있는 아이들은 우리동네에서 바톤 터치를 하고 평촌아이들은 동,서백 까지 따라가 동,서백 아이들에게 바톤 터치를 했다. 그러나 동서백 아이들은 운산까지 그 불도저를 따라서 갔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구퍼(한번은 의 백전말)는 늦은 가을철에 큰 제무시 트럭이 백전에 왔다. 안골,오매실 쪽에서 산판( 큰 낙엽송을 목재로 쓰기 위해 벌목 하는 것)을 하는데 그 삼판한 큰 나무를 도시의 재제소로 실어 나르기 위해 큰 트럭들이 왔던 것이다. 촌 아이들 생전 처음 본듯한 그 트럭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요리조리 살펴보고, 큰 바퀴도 만져 보고,,,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좀 재작스러운 아이들은 바퀴 뒤에 달린 고추 전구를 빼서 장난감으로 가져 가서 트럭운전사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한번은 촌에서 보기 힘든 군인들의 작전이 펼쳐 졌었다.. 군용 트럭 10여대에 군인들을 가득 태운 트럭이 백전면을 떠들석 하게 하고 지나갔다.. 가상 군사 작전을 펼치는 군인들을 처음 보면서 긴장도 하였으며, 처음 보는 신기한 것들도 있었다. 전투복에 직각으로 등에 맨 완전군장, 그리고 총,, 압축된 쌀에 더운물을 부어 밥을 만들어 먹는 모습과. 커다란 안테나가 달린 무전기를 어깨에 메고 서로 교신을 하는 모습이 이였는데,, 훗날 우리들이 높은배이와 육백 고지에서 전쟁놀이 할 때 그 무전을 흉내 내며 전쟁놀이를 했었다.. “ 달구지,달구지, 나와라 오버” - – - “하나,둘 여기는 독수리 독수리 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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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탄
추억의 보따리(21)
초등학교 때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 책가방 방에 던지고 광에 가서 족대와 나무지렛대, 주전자 들고 물가로 고기를 잡으로 자주 갔었다. 흐르는 시냇물에 족대를 X자로 걸치고 지렛대로 큰 바위를 찔기면 땡아리 서너 마리가 족대 안으로 들어오곤 했었다. 그때는 혼자서도 고기를 많이 잡아 주전자에 풍어를 담아오기도 했었다. 어쩌다 메기라도 한 마리 잡는 날은 개선장군이 따로 없었다.
어릴 적 백전에서 잡히는 고기는 자라, 메기, 잉어, 뱀장어, 땡아리, 꺽지, 피리, 불피리, 참피리, 개피리(쉬리종류), 송사리, 붕어, 댕미리, 미꾸라지, 양구락지, 기름쟁이, 망태 모래무지, 중태기,,,,,, 등등
고기 잡는 것 중에 가장 흔하게 잡는 방법은 단연 족대로 잡는 것이다. 족대를 흐르는 물아래 받치고 바위 돌을 흔들어 들썩 들썩 움직이면 고기들이 놀라서 물 따라 아래로 내려가게 해서 족대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낚시로 피리를 잡는 것인데 장독대에 있는 파리를 파리채로 기절 시켜 성낭 갑에 가득 담아 저녁 커럼 아버지와 유병규 교장선생님 께서는 피라미 낚시채비로 물가에서 파리 미끼로 피리를 낚으며 평제이 정각까지 다다라 허리춤에 찬 망태기가 묵직해지면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와 이튼날 찬거리로 피라미가 상에 올랐던 기억이 있으며,
자형은 대지 방죽과 아영 일대 수리조합에서 붕어와 잉어낚시를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고,
큰형은 주낚(줄 낚시)이라 해서 긴 모줄에 중간중간 낚시 바늘을 묶어 사과 상자에 촘촘히 홈을 내어 낚시바늘을 고정 하고 해질녘 낚시 바늘에 큰 지렁이를 끼어 큰 갯쏘에 가서 수심 깊은 곳에 낚시를 쭉 펴서 담구고 중간중간 큰 돌멩이로 고정해 두고 다음날 이른 새벽 가면 자라, 뱀장어, 메기 등 팔뚝만한 고기들이 많이 잡혔었다. 자라는 집에 와 가마솥에 푹 꼬아 소금을 넣어 자라탕(용봉탕)으로 먹기도 했었다.
또 친구들끼리 냇가에서 고기 잡을 곳을 정해 물길을 돌리고 자갈이나 논 흙 등으로 물을 막아 물을 퍼내고 고기를 잡기도 했으며,
얇은 물에 약구 라는 풀을 돌멩이로 찍어 약물을 내서 물에 풀어 고기를 마취시켜 잡기도 했으며,
가을철엔 바위를 뫼(햄머)로 두드려 고기를 기절시키는 뫼고기 잡이며,
초겨울엔 긴 대나무 끝에 오색 천 조각을 매달아서 큰 보나, 쏘에서 오리치기(조리치기) 를 해서 송사리, 피라미 등 작은 고기를 한쪽으로 몰아 족대로 떠서 무우채에 고추장과 버무려 먹는 쌉쌀한 맛도 일품이였다,
그리고 불법이지만 어른들은 읍내에서 어렵게 구한 싸이나로 물고기를 씨를 말릴 정도로 잡았으며, 밧데리 를 등에 메고 대나무 막대기 두개를 선으로 연결해서 물속에 집어넣어 전기로 고기를 찌지기도 했고,
형들은 자전거의 바퀴 회전을 이용해 발전 전기로 고기를 잡기도 했고 ,
또 대나무 통발에 된장 등을 넣어 물속에 놓아두고 고기를 잡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만의 수렵법이 있었다, 큰 물이 지고 나면 세멘보 밑에 땡아리 소굴이 있었는데 수시로 그곳에 가서 많은 땡아리 를 잡았었다,
그 백전의 대표적인 고기인 땡아리는 지금 문득문득 생각이 나서 옛 추억 속을 헤매게 한다. 그 누런 땡아리는 지금도 날 기다리고 있을까? . --------------
22탄
추억의 보따리(22)
함양서 물레방아 축제를 한다. 물레방아는 함양을 대표 하는 것이고, 백전 하면 예전엔 각 마을 마다 물레 방아가 있었지요, 어슴푸레 어린 기억을 더듬어 보면 물레방아는 평제이 입구에, 들말 다리터 지서앞에, 서백 입구와 동백 마을 중간에, 내곡의 포고나무 지나 왼쪽에, 부머리 마을입구에(부머리는 정확치 않음),,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 중에 평촌 다리터에 있는 물레방아가 가장 오랫동안 있었지만 그 물레방아들은 우리 선조 때부터 마을과 함께해 온 귀중한 역사였지요. 농경사회에서 뒤딜방아와 물레방아로 곡식을 빻고 했지요 그 물레방아는 돌아가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나락을 찢는데는 그 당시 꼭 필요한 시설이 였지요,
그리고 어릴 때 애지름(석유)을 넣어 불을 붙이는 호롱 불에서 유리 카바로 된 남포 불로 그리고 물레방아 발전 전기로 그 후 함양 쪽에서 공급되는 한전 전기로 우리 백전의 밤을 지켰던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본격적인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물레방아의 회전 동력을 이용한 물레방아 전기가 있었는데, 물레방아가 빨리 돌면 전구 불이 밝았다 느리게 돌면 어두었다 하는 물레방아 돌기 나름 이였던 때도 있었고 . 그 전에는 불을 밝히는게 아예 남포 불이나 호롱 불 밖에는 백전에 없었다. 양초는 아주 귀한 비상용 이였고,,, 방 한 켠엔 “향로”라 해서 빨래비누 2겹 크기의 각 성냥이 항상 비치되어 있었다( 간혹 불을 켜다 실수로 성냥을 통째로 사르기도 해 혼이 나기도 했었다) 물론 먼 옛날에는 간솔 이라는 불이 있었겠지만, 난 정확히 알지 못한다 ,,,
내가 어릴 때 다리터 물레방아는 서백 쪽에서 내려오는 물을 높은배이 밑 물가에서 보 를 막아 물길을 논 옆으로 지서 옆으로 해서 지금 다리 끝으로 돌다리를 만들고 그 밑으로 해서 면사무소 앞 낮은 곳에 정미소의 물레방아로 물을 공급해 물레방아를 돌렸다, 지서 앞 물레방아 또랑 은 우리네 어머님들의 빨래터 였고, 물레방아를 돌리지 않을 때 물레방아 입구 쪽 물을 나무 판자로 막아 세멘보 쪽으로 물을 떨어지게 했다 그 웅장하게 떨어지는 낙수물은 한편의 동양화 였지요. 겨울철에는 고드름 빙백 인상적이였지요,,
그리나 어머니 따라 빨래터에 왔던 우리네 형님 동생들은 물 들어오는 돌다리 밑으로 머리를 박고 구경을 하며 놀다 간혹 꺼꾸로 떨어져 부모님의 혼을 빼고 물 속을 통해 돌다리 밑을 지나 빨래터로 떠내려 왔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돌다리 밑으로 못 떠내려와 운명을 달리한 아이가 있었다는 옛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그때가 70년대 초 였으니까 30년 이상 된 전설 같은 이야기 이지요,,,
아무튼 그 당시엔 이 물레방아는 우리 백전에서 그 마을의 상징이자, 농사나, 동력 공급에 지대한 역할을 했지요, 지금은 상림 숲이나, 함양 군청마당에, 혹은 경주의 유적지에, 또는 도시의 고급 음식점 앞에서 낭만적으로 전시되어 돌며 향수를 달래주는 물레방아지만 내 어릴 적에는 그 물레방아는 마을을 상징하는 수호신이자, 마을에서 가장 큰 시설물 이자, 명물 이였지요 .,,,
그 백전의 물레방아 ! 돌아오는 명절에 큰집에 보관된 묵은 앨범 속에서 그 옛날 다리터 지서 앞에 돌아가던 물레 방아의 흔적을 찾아 볼까 한다. ------------------
23탄
추억의 보따리(23)
요즘은 계절, 또는 지역별로 수렵 허가를 받아서 그 지역에서만 사냥을 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옛날 보리똥 나무나 산수유 나무의 Y자 가지를 짤라 U자 모양으로 철사를 묶어 잔불이 남은 재속에 넣어 새총 모양으로 성형을 하고 탄력 좋은 노란 기저귀 고무줄로 양쪽 가지에 묶어 뒷부분엔 가죽 쪼가리를 붙여 나무 새총을 만들고 작은 콩알 돌멩이로 참새 사냥을 하던 어린 시절, 엉성한 사격실력에 새가 잡히기야 하겠는가 마는 참새는 못 맞추고 길가의 전봇대에 달린 하얀 애자만 새 총알로 맞추던 그 시절,
겨울철에 공기총을 들고 비둘기 잡으러 동백의 대밭이나 야산을 훑는 자형과 형님을 따라간 적이 몇 번 있었다. 공기총을 꺼꾸로 세워 총을 상하로 펌프질 해서 압축공기를 저장해 볼펜 대롱을 짤라 은단 만한 납 산탄 알을 집어넣고 딱딱한 종이로 입구를 막은 산탄을 장전해서 사냥을 하는 것이다. “퍽” 하고 산탄이 흩어져 나가는데 참새나 산비둘기를 잡으면 새끼줄을 허리에 두르고 그 새끼 마디 하나에 새 한 마리씩 머리를 넣고 궤고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폼이 참 멋이 있었다. 어린 우리들이야 물가에서 작살 총에 민물고기 몇 마리 잡으면 버드나무 가지에 고기 아가미 궤고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지만, 어른들은 사냥총에 새들을 허리에 두른 모습이 위대한 장군 정도는 되어 보였지요,
그 당시엔 잔치 등이 있으면 야생 노루 등을 사냥 총(엽총)으로 잡아 잔치고기로 쓰기도 했다고 들었다. 아련히 기억이 나는데 눈이 억수로 오는 겨울날 늦은 오후 노루를 잡아 큰 막대기에 앞발과 뒷발을 꺼꾸로 묶어 매달고 막대기를 어깨에 메고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포수 아저씨를 보았다. 어깨에 두른 탄약 띠에 긴 엽총 그리고 깊게 눌러쓴 모자. 그분이 백전에서 제일 유명한 동자밭 G 포수 였는데, 내 눈에는 독립운동을 하는 투사처럼 멋있게 보였다. 요즘 TV에서 보는 동물의 왕국이나, 내셔널 지오그래픽 의 한 장면 이였다. 함박눈이 쏟아져 꺼꾸로 매달린 노루 위에 쌓이고 검은 노루 코가 유난히 새까맣게 보였던 것 같다. 그 당시 동자밭 G 포수 하면 백전의 날짐승들이 숨을 죽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간혹 노루들이 동네로 들어오면 마을 사람들이 워이 워이 하면서 산으로 돌려 보내기도 했지만 가장 흔한게 노루고 토끼였다.
나도 토끼를 잡는다고 이른 아침 초등학교 배구부 아침 구보( 초등학교서 평제이 까지 갔다 오는 것)도 빼먹고 육백고지 쪽 토기집을 찾아 토끼 잡으러 갔다가 토끼 뒷모습만 보고 ( 토끼집은 항상 앞, 뒤 양쪽에 문이 있슴) 임만택 선생님께 혼이 난적도 있었지만 간혹 동네 형들이 홀롱개( 훌치기 덫)로 토기를 잡는걸 부러워 했었다.
빨간 눈에 큰 귀 그 산토끼와 긴 다리에 가냘픈 몸매의 백전 노루들 ….. 그들은 오늘도 백전의 산야를 마음껏 누비고 있겠지,,, 그리고 어린 후배들은 산수유 나무나 보리똥 나무의 Y자 가지를 찾고 있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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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탄
추억의 보따리(24)
백전 사람들에게 백운산이 주는 느낌은 무엇인가? 백전을 품어주는 따뜻한 어머님의 품 속 같이, 인자한 아버지의 가슴속 같은 백운산 초등학교 고학년들은 주로 백운산에 소풍을 갔다. 그리고 백운산 하면 어름과 다래가 많았고 물이 맑고 깊었던 용쏘가 생각난다. 용쏘에 정말 용이 살고 있니, 없니 하던 그 시절,
뒷산에 불이 나면 집을 걱정 했지만 백운산에 불이 나면 백전을 걱정했던 백전 사람들 그 백운산이 있기에 그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기억으로 가뭄이 들어 논밭이 타 들어 가면 백운 산에 가서 무연고 묘지를 팠다 그것이 기우제였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큰비가 왔다. 어느 해인가 물라들이 쪽에 심한 가뭄이 들어 백운산에 기우제를 지내러 가는 행렬을 보았다. 곡괭이와 삽 등을 어깨에 메고 건장한 장년들이 백운산으로 향했고 그리고 며칠 후 큰비가 왔다 그 비 때문에 다리터 다리에 백운산 쪽에서 떠내려온 나뭇단이나 큰 나무들이 물을 막아 다리를 넘치게 했고 우리집 마당까지 물이 들어와 공의 진료소로 피난을 간적이 있었다. 큰 비가 오면 오매실등 다리가 없는곳에 사는 친구들은 노디를 건널 수 없어서 학교를 못 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옛날엔 비구름이 몰려와도 백운산 쪽을 눈길을 주며 비가 많이 올 것인지 적게 올 것인가를 예측하기도 했고, 백운산 쪽에 연기가 나도 심각하게 쳐다보곤 했었다. 혹 장에서 만나도 마을의 대소사가 우선 얘기되고 그 다음은 백운산에 OO가 어찌어찌 되었디야.
어릴 때 어른들께 백운산에 불이 나는 연유를 물어보면 멧돼지가 발로 돌을 차서 돌이 굴러 불씨를 만들어 불을 낸다고 말씀들 하셨다.
백운산을 벗어나면 백전을 벗어난다고 생각 했던 어린 시절, 소풍 갔다 돌아오는 길에 운산 초등학교에서 운산 학생들과 축구시합을 했던 그 시절. 초등학교 앞 정지나무가 엄청나게 커 보였고. 그 앞으로 맑은 백운산 물이 흘렀고, 버스 종점 옆 논에는 짚불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던 그 백운산 자락. 걸어서 시리절을 지나 동백의 길가 느티나무, 서백의 마을 앞 포구나무를 거쳐 학교로 내려오는 신작로길옆에 곧게 뻗은 버드나무 그 옆으로 코스모스가 만발한길에. 소풍 길에 돌아오는 어린 학생들 그때는 한 학년에 2반씩 (평촌,오매실, 동백,부머리 1반 / 평제이,서백, 재궁, 대안 2반) 약 120여명이 같은 학년 이었던 백전 초등학교 중흥기 였다, 그 주역들이 아침에 친구들의 손을 잡고 노래 부르며 걸어서 갔던 길, 요즘은 흔한 김밥 등은 구경하기도 어려웠고 양은 도시락에 멸치 볶음이 최고의 반찬 이였고 계란 삶은 것 밤 삶은것 등이 소풍 길에 최고의 인기였다.
그 따스한 햇살아래 백운산 정기를 받고 자라난 우리들은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되어서 백운산에 옻닭 먹으로, 또 모임 때문에, 바람쐐러, 드라이브 코스로 또는 등산 삼아 한번씩 가지만 그 백운산은 백전사람들의 눈에 들어있고 마음속에 살아있고 몸 속에 영원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 백운산은 끝없는 소풍장소이자 백전의 혼(魂)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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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탄
추억의 보따리(25)
10 여 년 부머리에서 친구의 딸 돐 잔치를 했다. 그곳에서 오리지널 똥 돼지를 잡았다며 잔치음식으로 토종 백전 흑 돼지가 나왔었다. 그 맛을 느낀 후 아직껏 그 맛(?)을 찾을 길이 없다.
제주도를 가면 제주 똥 돼지 하면서 전시되어 있는 곳이 있다. 돌담에 돌을 쌓아 간이화장실을 만들고 그 안에 흑 돼지가 살고 있다. 그리고 경기도 용인의 민속촌에 가면 제주도처럼 똥 돼지의 우리를 만들어 그곳에 돼지가 사는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내가 어릴 적 백전에서는 집안 귀퉁이나 뒤쪽에 원두막처럼 나무로 화장실을 만들고 그 아래에 짚을 깔고 돼지마구를 만들어 돼지가 살고 있었다. 그 나무로 된 울타리 앞에 큰 통나무를 깎은 여물통이 있었고 수시로 돼지먹이를 넣어주면 돼지가 그 여물통에 코를 박고 먹이를 먹었다. 사람들이 화장실에 들어가면 그 화장실 아래로 돼지가 꿀꿀거리며 왔다 갔다 하다 위에서 떨어지는 인분을 먹기도 하고 또 등에 떨어진 것을 털기도 하였다. 물론 위아래의 간격이 있어 별 문제는 되지 않았으나, 익숙하지 않은 타지방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도시사람들은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 집에도 그런 변소가 있었는데 도시에서 온 사람들은 화장실의 나무 받침대를 타고 올라가 변소 문을 닫는 것까지는 하는데 그 이후 돼지가 등장하면 서 진행되는 각양각색의 스토리는 무궁무진 했을 것이다.
그 백전의 흑 돼지 아니 똥돼지는 요즘 찾아보기 힘든 전설이 되어가지만 그 당시 잔치가 있으면 한 마리씩 희생양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맛을 제공하는 우리들의 돼지였던 것이다. 좀 잔인하게 잡지만 앞뒤 다리를 묶고 마당에 가마솥을 걸어 장작불로 물을 끓이고 큰해머로 정수리를 내리쳐 기절시키고 그 다음은 큰 대야를 가져와 돼지 목에서 피를 받아 온갖 양념을 넣어 나중에 돼지 대창과 소창에 넣고 짚으로 앞뒤를 묶고 삶아 순대를 만든다, 한편 펄펄 끓인 물로 죽은 돼지 위에 끼 얻어 검은 털을 벼 껴낸다 그리고 부위별로 구분하여 고기를 나누어 잔치음식으로 쓴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게 하나 있다 쓸개는 어른들이 차지하고 돼지 오줌 보는 깨끗이 씻어 그 안에 삼나무 빨대로 바람을 불어넣어 입구를 묶고 축구고을 만든다. 내 기억으로는 그것을 가지고 공을 차고 놀았던 적이 있다. 그것은 풍선과 축구공 중간 정도 수준이 였는데 차고 노는 재미는 제법 있었다.
잔치 때 먹었던 그 돼지수육과 혹 묘사 끝에 나무도시락 안에 들어있는 돼지 수육이 모두 백전의 똥 돼지였던 그 시절,, 어느 집이나 검은 똥 돼지가 뒷간을 지키고 있던 그 고향의 냄새,,, 그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향기(?)였는데……그 아련한 향기가 오늘따라 그립다. 그리고 집 뒷간에 꿀꿀거리던 검은 저공(猪公)은 지금 백전의 어는 댁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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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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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드보이님께 간청하옵니다... 추억의 보따리 사랑방에다 다시 풀어주시라구효~~~
읽다가 다 몬읽고가욤.소설속에 역사속의 잼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