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9일 롯데백화점에서 샤넬화장품 매장이 철수하자 의견이 분분했다. 국내 백화점 1위 업체와 세계적인 브랜드와의 대결에 관심이 뜨거웠다.
유명 백화점의 1층에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와 함께 화장품 매장이 자리하고 있다. 화장품 매장의 대부분이 외국의 유명 브랜드라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롯데백화점 전국 25개점 가운데 매출 순위가 높은 대도시 7개점에서 세계적인 브랜드인 샤넬화장품(이하 샤넬)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들의 각축장인 1층 화장품 매장에서 가장 큰 明堂(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샤넬이 철수한 자리에 국내 브랜드인 (주)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가 들어섰다.
1996년 유통시장 개방 물결을 타고 외국 유명 화장품이 봇물처럼 들어왔을 때 한국 화장품의 존립을 걱정했다. 그러나 2003년부터 국내 화장품이 선두로 치고 올라왔고, 그것이 샤넬이라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백화점에서 퇴장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백화점 1층의 화장품 매장 가운데 가장 좋은 자리는 어디일까. 백화점들은 일반적으로 매장을 A, B, C 3개 등급으로 나누는데, 이 가운데 A급은 주요 動線(동선)이 겹쳐 고객들에게 자주 노출되고, 면적이 다른 점포보다 20~50% 크며, 기둥이나 방화셔터 등 구조물이 없는 곳을 뜻한다. 그 가운데서도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있으며, 출입구에서 가까운 곳이 ‘특A급 명당’으로 분류된다.
우리나라 3대 백화점이라면 롯데, 현대, 신세계를 꼽는다. 매장 면적으로 따지면 롯데가 전체의 57%를 차지하고 있어 백화점 업계에서 롯데는 가히 공룡이라고 할 수 있다. 롯데백화점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매출이 높은 소공동 본점 1층의 화장품 매장 두 명당자리 가운데 정문 바로 옆은 샤넬, 건너편은 에스티로더가 차지하고 있었다.
샤넬은 명성 덕택에, 에스티로더는 외국화장품 가운데 가장 매출이 높다는 이유로 좋은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에스티로더 옆으로 (주)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와 헤라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파동으로 샤넬이 차지하고 있던 명당 자리에 설화수가 입성했다.
샤넬의 명성은 새삼 들먹일 필요가 없을 정도다. 백화점에서 명품 브랜드를 유치할 때 “이런 이런 브랜드가 입점하면 우리도 입점한다”는 조건을 내거는 회사가 많은데, 그때 늘 거론되는 브랜드가 다름 아닌 샤넬이다. 그런 샤넬과 대한민국 1위 백화점 롯데와의 사이에서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샤넬은 언제나 최고 명당 자리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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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백화점 본점 샤넬 화장품 매장의 철수 전 모습. 정문 및 에스컬레이터와 가장 가까운 ‘특A급 명당’에 위치하고 있었다. |
롯데백화점은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MD(매장진열) 개편을 한다. 매출 순위에 따라 매장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매출에 관계없이 샤넬은 언제나 최고의 명당, 가장 넓은 매장을 차지했다. 샤넬 매장은 다른 화장품 매장의 1.5~2배 크기였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샤넬은 MD 개편에서 늘 예외적인 위치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매출 성적에 따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 눈에 띄는 자리, 크기 등을 고려해 위치를 정합니다. 그런데 샤넬만 예외적이었죠. 샤넬은 자신들이 자리를 찍었고, 다른 업체는 직접 인테리어를 하지만 샤넬의 인테리어 비용은 백화점에서 지원했습니다. 유명 브랜드를 모시고 오려면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하는 게 업계 현실입니다. 화장품 회사가 ‘갑’이고 백화점이 ‘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자세라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샤넬이 입점할 때는 그 명성이 독보적이었고 매출도 가장 높았으니 샤넬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샤넬의 굴욕, 매출 6위로 떨어져
샤넬은 1992년 롯데 잠실점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2001년 초반까지 샤넬이 매출 1위를 기록했기 때문에 넓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2002년부터 문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롯데 본점 기준으로 2002년에는 랑콤이 매출 1위, 2003년에는 국내 브랜드인 설화수가 1위로 올라선 뒤 매년 守城(수성)하고 있다.
샤넬은 롯데 본점 기준으로 2007년 매출액 5위, 2008년 6위를 차지했다. 샤넬의 매출 순위가 떨어지면서 매장 위치가 문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롯데 관계자는 샤넬의 매출 순위가 떨어지는데도 계속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대해 협력업체들의 항의가 있었다고 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의 말이다.
“당연한 얘기지요. ‘MD 개편을 공정하게 하겠다고 해놓고 왜 샤넬에만 특혜를 주느냐, 우리가 샤넬보다 못한 게 뭐 있냐, 왜 우리는 만날 뒤에 있게 하고 샤넬만 좋은 위치를 주느냐, MD 개편을 납득할 수 있게 하라’는 요청이 계속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원칙적인 MD 개편을 하자는 취지에서 샤넬에 협조를 요청한 것입니다.”
샤넬에 대한 특혜는 매장 위치나 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롯데백화점에 입점한 25개 국내외 화장품 브랜드는 예외 없이 판매액의 31%를 롯데백화점에 매장 수수료로 지불하고 있다. 샤넬만은 다른 화장품회사들보다 2%포인트가 낮은 29%의 매장 수수료를 백화점에 납부해 왔다.
롯데 측에서 2008년 8월 개편을 앞두고 샤넬에 매장 위치 변경과 축소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샤넬에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9차례나 공문을 보냈지만 답변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화장품 업계 관계자는 “샤넬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우리 매장을 누가 마음대로 건드려’라는 의식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샤넬 매장에 대해 딴죽을 거는 일은 없다고 한다.
결국 롯데는 작년 하반기에 화장품 MD 개편을 하지 못했다. 올해 2월 MD 개편을 앞둔 시점에서 두 회사의 신경전을 눈치챈 언론이 ‘롯데와 샤넬의 대결 국면’ 기사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샤넬도 롯데의 요청을 묵살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됐다. 1월 14일에 샤넬 측에서 ‘현재의 위치를 고수할 수 없다면 7개 매장에서 철수하겠다’는 공문을 롯데 측에 보냈다.
한국여성의 화장패턴 변화
그동안 구두로만 응하던 샤넬에서 공식 공문을 보내오자 롯데에서도 더 이상 협상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등 대응을 준비하고 있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그 즈음에 샤넬이 롯데 측에 수정 제안을 했다고 한다. ‘수수료를 브랜드 평균수준으로 인상하고 MD 개편에도 협조하겠다. 명분을 지켜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롯데에서는 샤넬을 내보내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므로 서로 명분과 실리를 얻는 차원에서 잘 마무리지으려고 했다고 한다. 양사가 원만하게 합의했다는 합의문을 쓰려고 할 때 느닷없이 샤넬에서 언론에 보도자료를 발송했다.
1월 20일자에 일제히 샤넬이 롯데에서 철수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왔다. 샤넬의 보도자료에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샤넬은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브랜드 명성을 보호하고 높은 품격을 제공하는 데 가장 적합해야 한다는 부티크 매장 위치 선정 기준에 따라 작년 롯데 센텀시티에 패션 부티크를 오픈하지 않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 결정 직후 롯데는 샤넬 측에 7개 화장품 매장의 이전을 요청하자 샤넬은 이 같은 롯데의 요구가 합리적이지 않고 불공정하다고 여겨 이 요청을 거절해 왔다. 이에 대해 그간 롯데는 샤넬의 매출을 이유로 들어 롯데백화점 내 7개 샤넬 화장품 매장에 대한 계약해지를 통보했으며, 샤넬은 롯데의 이 같은 계약해지 방침이 불공정하며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롯데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어 매장을 철수한다.>
이 보도자료를 접한 롯데는 더 이상 샤넬과 협상 여지가 없다고 결정했고, 결국 1월 29일에 샤넬은 롯데백화점 주요 7개 점(본점, 잠실점, 영등포점, 노원점, 부산점, 광주점, 대구점)에서 철수했다.
샤넬 관계자에게 “매출 순위에 따라서 매장 위치를 정하는 게 타당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이렇게 답했다.
“샤넬을 유치할 때 가장 좋은 매장을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매출 순위에 따라 자리를 바꾸겠다는 조건이 없었어요. 10년 이상 이어왔는데, 지금 와서 매출을 따져서 자리를 바꾸라고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죠. 샤넬의 영업방침은 화장품 업계에서 매출 1위를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이에 대해 롯데는 이런 반론을 폈다.
“샤넬이 세계적인 브랜드라는 건 인정합니다. 입점할 때 매출 1위였던 것도 맞아요. 하지만 이제 바뀌었습니다. 모든 건 흥망성쇠가 있는 겁니다. 순위가 하락해도 예전과 똑같이 적용하라는 건 무리한 요구죠. 형평성에서 어긋나는 일입니다.”
샤넬은 설화수를 제외한 다른 업체들과 매출액 차이가 많지 않은데 순위를 매겨 자리를 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2008년 롯데 본점 기준으로 화장품 매출액을 살펴보면 설화수 128억1000만원, 에스티로더 77억4000만원, 랑콤 68억5000만원, 디올 66억9000만원, 키엘 62억9000만원, 샤넬 61억5000만원 순이다. 이에 대한 롯데의 의견은 다르다.
“3위 업체부터 매출액수가 비슷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1점 차이가 나도 등수는 달라집니다. 등수에 따라 대접받는 게 당연합니다. 상황은 변했고, MD 개편은 성적순으로 하는 것이 공평하다는 게 우리 입장입니다.”
샤넬 관계자에게 매출이 낮은 이유를 묻자 이런 답변이 나왔다.
“화장품은 원래 스킨케어(기초화장품) 제품이 매출을 리드합니다. 샤넬은 1990년부터 스킨케어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니 다른 화장품에 비해 출발이 늦은 편이죠. 샤넬은 예전에는 색조화장품 위주였지만 차츰 스킨케어 제품 비율을 늘려나가고 있습니다. 본사에서 스킨케어 제품 연구개발과 마케팅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어요. 현재 색조화장품 50%, 스킨케어 30%, 향수 20%로 제품이 구성돼 있지만 앞으로 스킨케어의 비율을 더 높일 겁니다. 샤넬이 원래 강했던 색조화장품의 매출 역시 늘고 있어 앞으로 매출은 더 늘어나겠지요.”
보복이냐 원칙 고수냐
업계에서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화장 패턴이 바뀐 것이 샤넬 매출 하락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뜻하는 ‘쌩얼’이 유행하면서 색조화장품 사용량이 현저히 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색조화장품만 판매하는 전문점은 많이 늘어난 상태다. “샤넬은 유행보다 자신들만의 색채를 고집한다”는 평가도 있다고 하자 샤넬 담당자는 “메이크업 컬러를 정할 때 유행을 따르고 국제적인 감각을 살핀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샤넬이 소비자의 요구를 살피지 않는 것도 매출 하락의 원인”이라면서 이렇게 분석했다.
“7종 구성, 10종 구성 등 여러 화장품을 하나로 묶어 판매하는 방식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마케팅 방법입니다. 호응도가 높아 면세점에서도 따라 하고 있습니다. 샘플을 많이 주면서도 거울이나 가방 같은 선물을 따로 줍니다. 로레알을 비롯한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들도 다 이 방법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바뀌고 소비자의 요구가 달라졌건만 샤넬은 이 방식을 도입하지 않고 사은품도 일절 주지 않아요.”
샤넬은 이 같은 지적에 “사은품을 주지 않는 대신 제품의 질을 높이는 데 투자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 이번 일로 인해 소비자들에게 잘못된 인식이 심어질까 우려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체 매출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2008년에 샤넬화장품 매출이 사상 최고였습니다. 2007년 대비 25% 상승했어요. 그런데 이번 롯데의 조치로 마치 샤넬이 매출이 하락하는, ‘지는 브랜드’로 인식될까봐 걱정입니다. 매출을 비교했을 때 설화수를 제외한 2위부터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샤넬 관계자는 自國(자국) 브랜드가 판매율 1위를 기록하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서 자국 브랜드인 시세이도가 강세지만 그래도 샤넬이 1위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자국 브랜드가 잘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제가 샤넬에서 일하지만 한국인 입장에서 국산 화장품이 많이 팔리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죠.”
그는 이어 “샤넬 입장에서 한국은 테스트 마켓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시장”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잘 팔리는 제품은 다른 나라에서도 잘 나갑니다. 그 이유는 한국 소비자들이 굉장히 세련됐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행에 민감해 괜찮은 제품이 나오면 급속도로 퍼집니다. 세계에 이런 나라가 없어요. 그래서 제품을 생산하면 한국의 반응을 살핍니다. 파리의 연구개발원들이 국내 대학과 연계해 제품 개발도 하고 학술 네트워크도 형성하고 있습니다.”
샤넬은 2002년 ‘루즈 드 서울’이라는 립스틱을 생산했다. 한일 월드컵 때 광화문의 빨간색 물결을 보고 충격을 받은 샤넬 디자이너가 “태극기를 보내달라”고 해 태극의 빨간색과 동일한 색의 립스틱을 만들어 인기리에 판매했다고 한다.
샤넬 관계자는 매출액 순위에서 밀린 것은 2002년의 일인데 롯데가 이제 와서 문제 삼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작년에 롯데 센텀시티점에 패션 부티크를 오픈하지 않기로 결정한 직후 롯데에서 샤넬 측에 7개 화장품 매장의 이전을 요청했어요. 롯데가 패션 부티크 입점에 따른 요구조건을 따라주지 못해 입점하지 않은 것뿐인데, 그것을 문제 삼아 보복하는 것입니다.”
롯데는 이번 일과 부산 센텀시티 문제는 별개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논쟁 자체가 안 되는 일입니다. 부산 센텀시티에 샤넬이 입점하기로 했는데 시기를 지연하다가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내세웠어요. 그래서 입점이 무산된 겁니다. 이번 일은 화장품 MD 개편의 형평성과 관련된 일이지, 부산 센텀시티 일과는 무관합니다. 화장품 MD 개편을 원칙적으로 하자는 것 외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보복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 백화점이 국내에서 가장 크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해야 관행이 되고, 또 큰 점포에서 실시해야 이런 원칙들이 지방의 작은 점포로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샤넬 측은 “롯데백화점에서 철수한 것은 고객들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는 말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고객들에게 우편, 휴대폰 문자 등을 통해 매장 철수에 관해 고지했다”고 밝혔다.
샤넬이 철수한 상황을 롯데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만 타격이 있는 게 아니라 샤넬도 마찬가지입니다. 롯데에 샤넬이 없으면 ‘샤넬에 무슨 일이 있나’라고 생각하겠죠. 이번 사태는 해외에서도 관심을 가졌고,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에서도 보도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샤넬과 마찰을 일으킨 예는 찾기 힘들 거든요.”
롯데백화점 25개점 중 7개 점에서만 샤넬화장품이 철수했다. 가방과 신발, 의류를 취급하는 샤넬 부티크 매장은 여전히 롯데백화점 전점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롯데 면세점에서는 샤넬 화장품을 구입할 수 있다. 외국인들은 주로 롯데 면세점에서 화장품을 구입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불편을 겪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2008년 롯데백화점 전점에서 화장품 매출은 7600억원으로 이 가운데 샤넬이 올린 매출은 460억원이다. 롯데백화점 화장품 매출의 6%에 해당하는 액수다. 샤넬의 경우 한국내 매출의 40% 이상을 롯데백화점에서 올리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샤넬로서는 타격이 클 테니 앞으로 협상의 소지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롯데백화점 본점은 전 세계 샤넬 매장 중에서 세 번째로 높은 매출을 올리는 중요한 매장이다. 업계 관계자는 그런 파워 때문에 샤넬이 롯데에서 명품 매장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관측했다.
한방화장품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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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의 한방화장품 브랜드 ‘설화수’의 제품들. 설화수는 롯데와 샤넬의 분쟁 덕에 백화점 내 ‘명당’을 차지하게 됐다. |
이번 롯데와 샤넬의 파동 덕을 단단히 본 것은 (주)아모레퍼시픽이다. 롯데 본점에 (주)아모레퍼시픽에서 생산하는 제품 가운데 설화수, 헤라, 라네즈, 아모레퍼시픽 4개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1층에 나란히 붙어 있는 설화수와 헤라는 매출을 함께 집계하고, 수출에 역점을 두고 있는 아모레퍼시픽과 20대를 대상으로 하는 라네즈는 따로 집계를 낸다. 설화수와 헤라의 매출액이 7 대 3 비율이어서 설화수 매출만으로도 롯데 본점 화장품 26개 브랜드 가운데 1위다.
2000년에 본점 기준으로 매출액 5위였던 설화수가 2003년부터 2위와의 격차를 두 배 가량 벌리며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롯데백화점 측에서도 설화수의 약진을 궁금하게 여겨 따로 조사를 해봤다고 한다. 백화점 관계자의 말이다.
“설화수는 한방화장품 대표주자로 인식되면서 고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보이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동양인들의 피부에 맞는 한방화장품에 고객들이 매력을 느낀 거죠. 반대로 수입 완제품인 외국 화장품은 동서양 구분 없이 전 세계 고객을 상대로 만든 동일 제품을 판매합니다. 중금속 파동으로 매출이 격감했던 브랜드도 있지만 설화수는 한 번도 그런 파동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 재구매율이 가장 높은 브랜드입니다.”
롯데백화점 전국 25개점 전체 합계를 내면 1위는 설화수, 2위는 LG 생활건강의 오휘, 3위는 외국 화장품 에스티로더라고 한다. 이 순위는 몇 년간 바뀐 적이 없다는데, LG가 약진한 것도 한방화장품 ‘후’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는 랑콤, 디올, 샤넬 순이다. 국내 두 개 회사가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국내 화장품과 외국 화장품의 판매 비율을 살펴보면 2008년 롯데백화점 기준으로 28% 대 72%로 수입 화장품이 높다.
2008년 우리나라 화장품 시장 매출액은 6조5900억원이었고, 그 가운데 백화점은 1조5500억원으로 전체의 23.5%를 차지했다. 백화점에서는 외국 화장품 판매율이 높지만 전문점, 마트, 방문판매, 인터넷, 홈쇼핑 등 다양한 판매방식을 합쳤을 때 국내 화장품 판매율이 높다. 대만의 경우 화장품 판매액의 90%를 수입 화장품이 차지하지만 우리나라는 수입 화장품이 전체 매출액의 30∼40% 정도를 차지한다.
2008년 우리나라 화장품 매출 6조5900억원 가운데 아모레퍼시픽의 매출은 1조5313억원이었다. 그 가운데 설화수 한 브랜드가 5005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는 전체 화장품 매출액의 8%에 해당한다. 2008년 전체 한방화장품 매출 1조4200억원 가운데 설화수의 판매고가 35%를 차지했다. 설화수 한 브랜드의 매출액이 2위 업체의 화장품 전체 매출과 맞먹을 정도다. 소비재 업종을 통틀어도 한 브랜드의 매출이 연 5000억원대를 올린 예는 많지 않다.
설화수 제품 가운데 대표적인 베스트셀러는 윤조에센스(60ml, 8만원)로 2008년 한 해에 160만개가 팔렸다. 헤라가 배우 김태희를 내세워 대대적인 광고를 한 데 반해 설화수는 단 한 번도 TV 광고를 하지 않았다. 검증된 제품의 효능이 입 소문을 타고 퍼져나가면서 고객이 늘어났다. 1997년 제품 출시 첫해에 127억원이었던 설화수 매출액은 11년 만에 39배 성장했다.
제품력과 탄탄한 판매망이 강점
언론에 롯데와 샤넬의 기사가 나올 때마다 설화수가 덩달아 거론되자 아모레퍼시픽 홍보실로 전화가 많이 왔다고 한다.
“진짜 설화수가 일등이냐는 전화를 많이 하셨고, 특히 남자분들이 문의전화를 많이 하셨어요. 요즘 다 안 된다고 하는데 기분 좋은 소식이라는 격려 전화도 많았습니다. 특히 올해 1월에 부서를 바꾼 기자 분들이 많은데 그 분들이 사실이냐는 확인전화를 많이 했죠.”
설화수의 고성장 비결에 대해 아모레퍼시픽은 1967년부터 시작한 한방연구 기술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인삼유효성분을 추출해 특허를 획득한 뒤 1973년에 최초 한방화장품 ‘진생삼미’를 선보였다. 진생삼미는 34개국에 수출돼 200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린 바 있다. 이후 연구를 거듭해 1987년에 ‘설화’를 출시한 데 이어 1997년에 경희대 한의대와 공동연구를 통해 ‘설화수’를 선보였다.
설화수에 들어가는 한방성분은 100% 국내산 한약재를 사용한다. 2만 가지의 한방성분 중 3000가지를 추려낸 뒤 최종적으로 30가지를 엄선, 피부에 미치는 효과를 연구해 적용한 것이다. 설화수의 기본 원료가 되는 滋陰丹(자음단)은 다섯 가지 한약재를 혼합해 특허를 받은 물질이다.
다른 브랜드들이 스킨케어부터 색조 제품까지 수백 가지 품목을 내놓는 것과 달리 설화수는 스킨케어 45개 제품에 공을 들이고 있다. 설화수 재구매율은 50%를 넘는다.
설화수 매출의 75%는 방문판매 사원들이 올리고 있다. 3만2000여 명의 방판 사원들이 1인당 평균 100명의 고객을 관리한다. 업계에서는 제품력과 탄탄한 판매망을 갖춘 설화수를 넘볼 브랜드가 없다고 분석한다. 35세 이상 여성들이 주고객층이지만 20대 여성은 물론 2008년에 출시한 남성용 ‘정양라인’으로 남성 고객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1960년대부터 해외진출을 시작한 아모레퍼시픽은 1990년대 초부터 프랑스와 중국에 생산공장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2008년 말 현재 미국 프랑스를 비롯한 10개국에 15개의 법인을 설립했으며 해외에 2004곳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의 2008년 매출 1조5313억원 중 해외 매출은 2340억원으로 전체의 15.3%를 차지한다.
2007년 현재 아모레퍼시픽은 세계 화장품 가운데 매출 순위 19위를 기록하고 있다. 2015년에 10위권에 진입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놓았다. 동양에서 20위권에 진입한 화장품 회사는 아모레퍼시픽과 일본의 시세이도, 가오 등 3개사에 불과하다.
아모레퍼시픽은 창립 60주년을 맞아 신갈에 제2 연구동과 오산에 새로운 공장을 짓는 등 시설투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 매출액 대비 5%를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자체 연구원 운영과 별도로 강원대와 충북 제천시 전통의약산업센터에서 우수한약재 재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경희대 한의대와 합작으로 설립한 한방미용센터에서 한방미용건강 연구개발을 하고 있다.
영원한 일등은 없다
최악의 불황이라는 2009년에도 국내 화장품 매출은 2008년보다 6% 성장한 7조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불황에도 화장품 매출이 오르는 이유는 高價(고가)의 피부미용실에 가는 대신 좋은 화장품을 사용하겠다는 대체소비 심리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화장품 매출은 IMF 불황이 닥친 1998년과 카드大亂(대란)을 겪은 2004년에 잠시 하락했을 뿐 경기와 상관없이 매년 상승했다.
샤넬은 “매장 철수한 후 1주일간 조사해 보니 전체 매출이 줄지 않았다. 샤넬 단골들이 롯데 대신 인근 백화점에 가서 구매하는 것으로 본다”며 담담해 했다.
롯데 관계자는 설화수가 넓고 좋은 자리로 갔으니 매출이 더 올라갈 것으로 내다봤다. 롯데 본점 1층 에스컬레이터 앞 명당을 차지한 설화수 매장은 연일 소비자들로 북적이고 있다. (주)아모레퍼시픽 홍보실 관계자나 설화수 매장 매니저는 현재 반응에 대해 묻자 “자리와 상관없이 많은 분이 찾아오셔서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화장품 업계 관계자는 “영원한 일등은 없다”면서 어느 업체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옛 명성만 믿고 변하지 않으면 언제든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 샤넬도 이름만으로 장사할 때는 지났다는 것이다.
샤넬은 품질개발에 더욱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이렇게 밝혔다.
“샤넬은 브랜드 가치, 매출신장, 서비스 및 고객만족 등 모든 부문에서 가장 선호되는 브랜드입니다. 지금까지 제공해 오던 모든 서비스와 최고 품질의 제품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이번에 철수한 7개 매장 외, 다른 57개의 샤넬 매장은 변함없이 영업을 계속할 것이며, 올해 3개의 화장품 매장을 새로 열어 소비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겠습니다.”
롯데백화점은 언제라도 샤넬과 협상할 용의가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샤넬은 MD 개편에 관해 우리와 협의를 한 일이 없습니다. 문은 언제든 열려 있습니다. 2월 MD 개편은 끝났으니 8월 개편에서 서로 의견을 조율하여 뜻이 맞으면 다시 입점하면 됩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MD 개편을 원칙적으로 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할 예정입니다. 국내 업체와 해외 업체 차별 없이 1등을 1등답게 대접하자는 게 우리의 입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