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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리, 한 시 반이 좀 지난 시간이다. 차에서 잠깐 눈 좀 붙이려고 누웠다. 쉬 잠이 오지 않는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달렸던 많은 날들, 대간을 품고 달린 날들도 해를 넘겼다. 돌아보면 지난 한 해 동안 오로지 백두대간 종주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듯하다. 그 준비도 이제 마무리 단계. 오늘 지리산을 넘으면 2월에 설악으로 간다.
지난 해 2월, 황철봉 너덜을 건너고 미시령까지 눈밭을 헤매며 수없이 가슴에 새겼던 다짐, 이제 곧 2월이 올 거다.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두시 반이 조금 지나서 배낭을 매고 나선다. 주차장을 지나고, 매표소엔 불이 훤하다. 안엔 TV도 켜놓고, 어쩐지 좀 찜찜하다. 혹시 우회로가 없나 살펴본다. 왼쪽으로 길이 하나 있고 노란 리본이 달려 있다. 5분쯤 오르자 전방에 감시 초소 같은 곳에 불이 켜진다. 어쩐지 아닌 것 같다. 다시 매표소 쪽으로 내려온다.
'산행 시작부터 샛길이나 찾고, 에이 참..., 당당하게 정면 돌파다.'
하지만 어림없다. 매표소에서 숙직까지 하며 지키고 있는데... 다섯시 반이 넘어야 산행이 가능하단다.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한참이나 내려간다. 다섯시 반이라... 안된다.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에 새긴 일인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오늘 지리산을 넘어야 한다. 저녁은 구례에서 먹는다.
세 시가 지났다. 매표소도 통과하지 못하고 30분 까먹었다. 헤드랜턴을 끄고 상가 건물 쪽 그늘로 해서 매표소 건너편으로 다가간다. TV는 켜진 채 있고..., 얼른 매표소 앞을 통과한다. 매표소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발소리를 죽이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휴우, 지리산 종주하기 어렵네'
헤드랜턴을 다시 켜고 드문드문 눈자국이 남아 있는 산길을 걷는다. 30여분 후 칼바위, 출렁다리를 건너면 장터목산장과 법계사 갈림길이다. 우측 법계사 쪽으로 길을 잡는다. 길이 상당히 가파르다. 망바위를 지나며 시간을 확인한다. 네시 반이 넘었다. 야간산행을 해야 할 것 같다.
로타리산장과 법계사 불빛이 보인다. 날이 밝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법계사와 그 주변을 살펴볼 수도 있으련만 지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불빛뿐이다. 법계사 왼쪽으로 천왕봉 이정표가 있다. 한시간 정도면 천왕봉에 도착하겠다. 배낭에서 물을 꺼낸다. 칼바위에서 마신 물인데 얼음이 잡혀 있다. 물병을 흔들어 한 모금 마신다. 손이 시리다. 지금껏 끼고 있던 장갑 위에 방한용 장갑을 덧낀다. 아이젠과 스패츠를 꺼냈다가 도로 넣는다. 아직 돌길이 많은데...
조금 오르자 머리 위로 세찬 바람소리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뒤돌아보면 중산리 쪽 불빛도 바람에 날리는 눈 때문에 흐릿하게 보인다. 산모퉁이 돌 때면 세찬 눈바람에 몸이 휘청거릴 정도다. 바람이 끼얹는 눈의 한기로 뼛속까지 시리다.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는다.
눈을 들면 저만큼 위로 천왕봉이 시커멓게 가늠된다. 가파른 눈길을 오르다 돌아보면 까마득하다. 법계사에서 아이젠을 신었어야 했는데...
이정표를 확인하고 정상에 오르니 세찬 바람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다. 눈을 뜰 수조차 없다. 바람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다시 이정표 쪽으로 온다. 장터목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간다. 조금 후면 통천문이겠다. 하지만 돌아서고 만다. 세찬 눈바람 속에서 가파른 눈길을 아이젠도 없이 가는 건 무리다. 바람이 덜 드는 곳을 골라서 조금 쉰다. 아이젠을 신을 엄두도 못낸다. 랜턴 불빛에 비친 온몸이 하얗다. 바람에 날린 눈이 온몸에 얼어붙어 완전 눈사람이 되었다. 손끝이 시리다 못해 아려온다. 방한 장갑도 소용이 없다.
저만큼 장터목 쪽으로 불빛행렬이 올라온다.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일출을 볼 수 있는 날씨는 영 아닌 것 같다.
이윽고 주위가 뿌옇게 밝아오고, 다가오는 헤드랜턴 불빛 아래 드러난 그들의 모습도 나와 다를 바 없다. 저마다 이마에 불 밝힌 눈사람들... 무엇이 저들을 이곳까지 불렀을까? 또 나는?...
세찬 눈바람 때문에 일출을 볼 수 없어도 다들 쉽게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정상에 꽤 오래 지체한다. 추위가 좀 덜해진 것 같다. 그냥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추위가 누그러지는 것 같은 이 느낌은?.... 아마 사람은 이래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보다. 아이젠과 스패츠를 꺼내 착용한다.
일곱시 반이 지나고 있다. 아직 해는 나타날 기미도 없다. 더 지체할 수 없다. 눈이 가득한 통천문을 지나고, 눈 속에 고사목 몇 그루가 허허롭게 하늘을 받친 제석봉을 지난다. 장터목 산장, 추위를 좀 녹이고 아침도 해결하면서 쉬고 싶었지만 그냥 간다. 천왕봉에서 너무 지체했고, 단체손님들로 인해 복잡하다.
연하봉, 촛대봉을 지나는 길섶에 온통 눈꽃이다. 발걸음은 자꾸만 늦어지고, 주머니 속에 디카가 수도 없이 들락거린다. 하얗게 눈을 달고 밤새 추위에 얼어버린 침엽수들이 바람 따라 뻣뻣하게 몸을 흔든다. 저 모진 견딤으로 혹한 속에서도 저렇게 푸를 수 있구나! 나도 저들 곁에 나란히 서 있고 싶다. 모세혈관까지 얼음으로 채우고 저들 옆에서 나란히 이 겨울을 지내면 나도 이 시린 세파 속에서 청청(靑靑), 푸를 수 있을까? 혹한 속에 얼어서 굳어버린 저 가지들도 새봄에 새잎을 피워낼 거라 생각하면 생명이 참 모질다는 생각이 든다.
세석평전 탐방로 안내판이 설치된 봉우리를 지나면서 짙은 안개 속에 눈부시게 하얀 눈꽃은 절정을 이루고..., 너무 황홀하다. 마치 꿈속을 걷는 듯하다.
산장에 들어서자 몇몇 산객들이 먼저와 있다. kbs 촬영팀이다. 산장입구에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그 꿈속 같은 세석평전의 설경을 찍고 있다. 옆에서 몇 컷 찍어보지만 눈으로 보는 풍경과 디카에 담긴 풍경은 너무 다르다. 내 부족한 솜씨에 실망하며 늦은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배낭을 연다. 대구에서 마련해 넣은 김밥은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얼어있다. 산장엔 끓일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단다. 올해 1월1일부터 취사도구로 직접 끓이지 않고는 산장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컵라면조차도... 꽁꽁 언 초코파이 하나와, 역시 얼어서 아이스크림이 돼버린 두유를 꺼낸다. 두유를 흔들고 손으로 비비고 온갖 야단 끝에 좀 걸쭉하게 녹였다. 초코파이 한 입 베어 물고, 두유아이스크림(?) 한 입 먹고, 그렇게 아침(?)을 해결한다. 먹을 수 있는 게 뭐 아무 것도 없다. 고작 초콜렛 몇 개. 사탕 몇 개 정도... 물도 꽁꽁 얼어버렸고... 싸늘하게 얼어버린 과일을 깎기는 싫고...,
추위도 좀 녹일 겸 창문을 통해 보이는 세석평전의 설경에 한동안 눈을 풀어놓는다. 휴대폰 전원을 켜고 시간을 확인한다. 아홉시 반이 지나고 있다. 좀 늦은 진행이다. 하지만 시간에 끌려가고 싶지는 않다. 마음껏 여유를 부릴 수야 없지만 서두르지 않고, 이 아름다운 눈길 위에 내 마음도 섞으며 그렇게 걷고 싶다. 산길님의 문자메세지가 와 있다. 참 반갑다.
영신봉을 오르면서도 눈은 내내 세석평전으로 가 있다. 정상엔 한 무리 고교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사진을 찍는다. 그 뒤쪽으로 다도해의 점점이 떠있는 섬들..., 지금껏 구름과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던 해도 저만큼 바다 위에 붉게 구름자락을 깔아놓았다.
칠선봉을 오르며 돌아보면 영신봉에서 뻗어내린 낙남정맥의 힘찬 산줄기가 내 눈길을 잡고 놓질 않는다. 건너편으로 삼신봉이 눈에 잡힐 듯 솟아 있고... 그 기슭으로 쌍계사가 자리잡고 있을 거다. 기회가 되면 쌍계사에서 불일폭포를 거쳐 세석평전으로 오르며 지리산의 주능선을 조망하는 것도 좋은 산행이 되겠다는 생각도 해보고...
선비샘을 지나고 덕평봉을 돌아설 쯤엔 날도 활짝 개었다. 하얀 눈밭에 쏟아지는 시릴 만큼 투명한 햇살에 그만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다. '저 햇살 속으로 스며들고 싶다.'
저만큼 벽소령산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왼쪽 뒤로는 내내 눈길을 잡아끄는 낙남정맥의 힘찬 산줄기...
배가 고프다. 지금까지 세석산장에서 먹은 초코파이 하나와 두유, 그리고 초콜렛, 사탕 몇 개로 걸어왔다. 이제 나도 얼음 섞인 밥을 먹어보는구나. 산장에서 따뜻한 게 뭐 없느냐고 물어보니 캔커피밖에 없단다. 캔커피와 꽁꽁 얼어버린 김밥이라... 참 겨울산행의 진미(?)다. 연하천산장에서 컵라면을 살 수 있다는 말에 허기만 달래고 한 줄 김밥은 남겨둔다. 한 시간쯤 더 걸으면 따뜻한 국물을 먹을 수 있다! 컵라면 국물도 이렇게 그리울 수 있다! 산죽밭 사이 눈길을 걷고, 주목 군락지 보호철책을 돌아서면 컵라면이 기다리는 연하천 산장이다. ᄒᄒᄒ...
연하천 산장에서 길은 좌측으로 꺾인다. 지금까지 잠잠하던 바람이 다시 세차게 분다. 바람이 몰고 온 눈에 길이 완전히 묻혀버린 곳도 있다. 하지만 길 찾기에 별 어려움은 없다. 간간이 보이는 대간 리본도 있지만 그보다 나무에 달아둔 이름표를 보고 길을 찾아간다. 나무이름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지워진 눈길을 걸어가는 나는 훨씬 자연에 가까워 진 것인가? 사진 촬영 때문에, 메모 때문에 장갑을 자주 벗은 탓인지 세찬 바람에 오른 손이 화끈거린다. 이게 동상인가보다.
명선봉, 토끼봉을 지나고 화개재에 이른다. 하동군 화개면과 남원시 산내면을 연결하는 고개다. 옛 사람들은 화개장터에서 등짐을 메거나 지게를 지고 목통골을 따라 이 고개로 올라 북쪽의 뱀사골을 따라 남원으로 넘나들었을 거다.
화개재에서 느릿느릿 흘러가는 뱀사골은 또 어둡고 슬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하기야 지리산 어느 자락인들 핏빛 아픔이 서려있지 않은 곳이 있겠냐만 뱀사골은 더욱 그렇다. 과거 빨치산의 주요 근거지였고, 여순사건의 종지부를 찍은 곳이 뱀사골 입구의 반선 마을이고 보면, 지금 나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아픈 상처를 딛고 지나가는 셈이다. 하지만 오늘 걸어야 할 길이 아직 너무 멀다. 오래 감상에 잡혀 있을 시간이 없다. 신용선의 시 한 편이 생각난다.
내 평생에 가장 느린 보폭으로 휴식년인 뱀사골 계곡의 놀고 먹는 물줄기를 거슬러 화개재에 올랐는데, 그래도 이게 어디냐고 내가 내 발로 지리산 능선을 밟는 감회에 젖고 있는데 쉼터인 그곳에서 쉬고 있던 한 젊은이가 어느 쪽으로 가느냐고 묻는 것이었네.
나는 얼버무리다가
웃고 말았네.
솟대처럼 서 있기 위해 발목이 잠기는 운해를 찾아간다고, 세상의 시간을 잠시 정지시키는 핏빛 흥건한 일몰의 적막 속으로 투신할 생각이라고, 해돋이를 보러 해가 흔들어 깨우는 산에 사는 내 그림자를 만나러 간다고
죽은 나무들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살던 자리에 그냥 눌러 사는, 들어가서 나오는 것들이 없는 낡은 숲으로 간다고 말하려다가 웃고 말았네.
다 온 사람인 것을 안 젊은이가 마주 웃으며 지리산은 어디나 지리산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네. (지리산 화개재에서 / 신용선)
화개재에서 삼도봉으로 오르는 초입부터 가파른 계단길이다. 삼도봉에서 건너편으로 피아골이 내려다보인다. 행정구역상 구례군 토지면이다. 내일 돌아가는 길에 들러볼 수 있으면 좋겠다. 피아골 초입에 있는 연곡사와 운조루를 돌아보고 싶은데...,
반야봉은 건너다보기만 하고 그냥 지나친다. 쥐꼬리만큼 남은 해가 발길을 재촉한다. 갈수록 주위는 황혼으로 물들어가고...
임걸령을 지나고 돼지령으로 향하는 길에서 보는 일몰은 너무 아름답다. 일몰 후에도 오랫동안 서쪽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저녁노을을 수도 없이 건너다본다. '핏빛 흥건한 일몰의 적막'이다.
노고단으로 향하는 길에 오른쪽 심원계곡 쪽으로 점점이 불이 밝혀지고, 저만치 노고단 고개 마루가 보인다. 지난 학년 친목여행 때 노고단에 올랐던 기억이 난다. 참 모질게도 추웠던 기억, 그보다 더 허허롭던 마음..., 그날 반야봉을 건너다보며, 빈 마음에 불어오던 바람소리... 노고단 정상으로 오르는 입구에 간이초소를 지나면 구례쪽 불빛이 훤하다.
노고단 산장을 지나고 화엄사로 하산하는 갈림길(코재)에서 휴대폰을 꺼내본다. 일곱시가 지나고 있다. 화엄사까지 5.7km, 아홉시쯤엔 도착할 수 있겠다. 무척 가파르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화엄사까지가 더 힘들게 느껴진다. 중재를 지나고 저만큼 불빛이 보인다. 연기암의 불빛인 모양이다. 화엄사는 아직 멀었는데...
길에 눈이 제법 있지만 돌 때문에 아이젠을 신고 걷기가 불편하다. 벗어 배낭에 넣고 걷는다. 걸음이 한결 조심스럽다.
이윽고 화엄사의 불빛이 간간이 보인다. 몇 개의 불빛 아래 웅크리고 있는 화엄사와, 휘황한 상가의 불빛들이 이뤄내는 그 기막힌 대조가 꼭 이 세대의 모습 같아 씁쓰레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이 세대의 초라한 모습이여...
저녁 후 읍내의 찜질방에서 하룻밤 잠자리를 해결한다. 동상으로 감각이 무뎌진 손가락들을 주무르며 오늘 산행을 돌아본다.
그리고, 이제 곧 2월이다.
지난 2월, 황철봉 너덜을 지나 미시령으로 하산하며 '반드시 다시 올 거라' 수없이 새겼던 다짐, 속초 그 바닷가에서 수없이 새겼던 다짐, 1년 간 기다린 나와의 약속을 지키러 설악으로 간다. '눈 덮인 설악을 넘고, 진부령까지 가리라.' 대간 준비 마지막 산행이다.
이튿날 아침 구례 터미널에서 차편을 물으니 만만찮다. 하동에서 진주행으로 갈아타고 다시 중산리로... 주변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단념할 수밖에.
운조루(雲鳥樓), '구름 속을 나는 새가 사는 집이라...' 꼭 돌아보고 싶었는데, 타인능해(他人能解)의 그 뒤주도 새겨보고 싶었는데... (2006, 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