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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째날(8월 3일)
(17)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무안과 접경인 목포의 종합관광안내소 앞에서 C에게 전화했다.
하루를 앞당겨 도착했는데도 그는 지체 없이 달려왔다.
목포시 거주 퇴역 기관사들(옛 철도공무원) 중에서 교분이 가장 두터운 친구들의 정기
술자리를 펴놓은채 온 그를 따라가 합석하게 되었는데 묘한 감회가 들었다.
왜냐하면, 나도 철도공무원이 될 뻔 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철도를 이용할 때
또는 철도관계자들을 만날 때 종종 그런 분위기에 빠져든다.
대한민국이 탄생은 했으나 불안정한 시기인 당시에 철도중학교는 전액 관비(官費)라는
이유로 경향 각지의 빈한하나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1949년에 특차인 이 학교에 지원하였다가 낙방했으니 망정이지(1년재수해 용산중
학교에 입학) 붙었더라면 필시 철도공무원이 되었을 것이니까.
60대 중반의 호주가들과 대작한다 해도 평소라면 꿀릴 리 없으나 수술 후 처음 마시는
술이기 때문에 다소 긴장되었는데 뒤탈이 없어 다행이었다.
내 몸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 리 없는 C는 자기 부인이 경영하는 식당(목포 MBC 인근의
나주추어탕) 방에서 자기와 함께 일박하기를 권했으나 찜질방으로 갔다.
삼남대로와 목포, 신안, 무안 지역의 택리지 답사때 이용했던 찜질방이다.
자칭 목포의 마당쇠인 그의 성품으로 보아 무료히 밤을 보낼 리 없고 술판을 계속 벌릴
텐데 아직은 감당할 만한 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속정이 깊은 그는 꼬깃꼬깃 접은 지폐를 내 포켓에 쑤셔넣고 멋쩍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여정을 축원하는 갸륵한 마음을 어찌 모르랴만 이렇게 얻은 수입은 작은모임더불어의
지출에 쓰인다)
(함평의 일부와 무안의 해안선은 지형으로 인한 애로를 각오했지만 지나치게 쉽게 끝남
으로서 오히려 미련을 갖게 되었다.
트럭 운전자가 말로 할 수 없이 고맙기는 하나 그의 과도한 호의가 결국 언젠가 다시 이
해안에서 한 고생 하고야 말 것만 같은 예감이다.
그보다도,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8개월이 갔는데도 그의 무소식이 나를 안타깝게 한다.
내 명함(e-메일과 카페)을 주었을 뿐 그의 인적사항을 묻지 않은 것은 그의 소식을 간절
하게 기다린다는 뜻이라고 단단히 강조했건만.
좌절의 늪에서 빠져나와 심기일신하여 포부를 새롭게 펼치고 있기를 바라지만 누군가
에게 말하지 않고는 도지히 배길 수 없는 사연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을까.)
찜질방 지근에 있는 목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해남행 첫 버스에 올랐다.
영암호를 따라 강진으로 가지 않고 해남을 택한 것은 해남의 Y를 만나고 가기 위해서다.
갑자기 앉은뱅이가 되어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시작한 삼남대로 첫날에 인연이 시작된
(메뉴'옛길'三南大路斷想 2회글참조) 그녀와의 상봉은 서울과 해남에서 수차 이뤄졌다.
해남YMCA청소년문화환경센터의 청소년프로그램을 담당했던 그녀가 해남 화산면쪽에
손수 짓고 있다는 전통한옥을 방문하려 했으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결혼해서 득녀(得女)까지 한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보고 가려 한 것.
전화를 받고 나온 모녀와의 반가운 상봉은 해남 종합버스터미널에서 가졌다.
이 터미널은 전라남도에서 가장 많이 이용한 장소다.
삼남대로 답사를 비롯하여 두륜산, 보길도 방문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진도와 강진을
포함해 3군에서 유일하게 영업중인 찜질방 효과가 가장 크다.
수줍고 나약한 처녀로만 기억되고 있는데 어느 새 활달하고 듬직한 엄마티가 나다니.
과연 여인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실감나게 하는 그녀다.
그녀의 생후 수개월된 딸 이도원(이름)과의 첫 상면을 노상에서 간략하게 마쳤다.
헤어질 때, 이 아이가 나를 똑똑하게 기억하게 될 때까지는 내가 살아있겠지 생각하니
아침부터 쓸쓸한 황혼이 아른거리는 듯 했다.
그녀가 손수 지은 한옥 방문의 약속을 지키려면 서둘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다니.
강진행 버스에 올랐을 때 지난 연말의 대통령선거 기간중 있었던 일 하나가 떠올랐다.
일파만파로 회자되었던 한 대학 심리학교수의 '여성성'(女性性)에 대한 발언이다.
결혼을 하고 어머니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여성이라는 취지의 말을 임의로 각색하여
몰매질을 했으나 나는 그의 주장에 변함없이 동의한다.
예외가 있겠지만 엄마가 되지 않으면 강한 사람은 될지언정 강한 여성이 될 수는 없다.
앳된 여직원이 강진군의 이미지
버스편으로 강진읍을 경유해 마량항(馬良港)에 당도했다.
강진만을 따라 남하하여 강진군 최남단에 있는 국가어항이다.
이 일대는 택리지 답사때 샅샅이 누비고 다닌 해안이라 버스를 이용한 것이다.
특히 강진을 제외하고는 고려청자를 이야기할 수 없으며 우리나라의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된 청자중 80% 이상을 생산했다는 강진(대구면 사당리 도요지)의 남단이니까.
마량5일장터에서 아침 겸 점심 요기를 한 후 높은 곳에 위치한 마량면 사무소로 갔다.
장흥군 대덕으로 넘어가는 해안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워낙 더운 날씨였기 때문일까.
방문 이유를 말하는데 앳된 여직원이 얼음물컵을 들고 다가왔다.
용무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그녀는 500ml 냉동 패트병을 들고 왔다.
내가 방문한 전국의 관공서를 통틀어 이만큼 인상깊은 친절은 처음이다.
삼복 염천에 늙은이로 하여금 서서히 녹아가는 얼음물을 마시며 아름다운 다도해 해안
길을 걷게 한 그 여직원의 고운 마음씨가 어찌나 고맙고 갸륵한지.
마량면의 이 앳된 여직원의 모습은 강진군의 온갖 이미지를 평정해 버릴 만큼 내 안에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다.
2007년에 개통된 마량면과 고금면(古今), 강진군(康津)과 완도군(莞島)을 잇는 760m
연륙교(連陸/ 고금대교)가 돋보이지만 달리는 차량이 아직도 별로다.
현재 건설중인 고금면과 신지면 사이 장보고대교(4.24km)의 준공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러면, 강진에서 고금대교 - 장보고대교 - 개통된지 오래인(2006년) 신지대교를 거쳐
해남까지 단숨에 달릴 수 있으니까 비로소 시너지 효과가 나올려나.
이즈음의 교량과 터널 공사는 낭중취물(囊中取物) 또는 식은 죽 먹기가 되었다.
각종 장비와 토목기술의 혁명적 발달의 결과다.
절개만능주의로 온산이 난도당했는데 절개보다 손쉬운 터널공법의 지각이 원망스럽다.
20.3km,16.7km등 10km넘는 터널의 등장으로 1km미만은 터널같지 않은 느낌이다.
교량 역시 21.38km인 인천대교를 비롯해 km단위 교량이 범람하듯 하여 3자리수 미만
길이의 다리는 잔챙이 취급당하기 알맞다.
한데, 우리나라의 다리는 왜 하나같이 복사판에 다름 아닐까.
울진의 덕구온천에서 응봉산에 오르는 덕구계곡(온천골)에 세계의 유수 교량 미니어처
(miniature)가 가설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지만 눈여겨 볼만한 점도 있다.
무지한 내가 기술적인 면은 말할 수 없으나 교량이라는 점 외에는 닮은 데가 전무하며
시각적 미각(美覺)만은 누구라도 느낄 수 있건만 한국의 교량은 왜 천편일률일까.
현수교와 아치교는 이즈음 전국적으로 지천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같은 일란성에 역겨움을 참을 수 없다.
세계의 현란한 다리들을 건널 때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다리를 쳐다볼 때마다 미각이
없는 교량 디자이너(designer)들이 활개치고 있는 우리나라가 개탄스러워진다.
고금대교 길인 신마교차로 고개를 넘으면 신마(新馬) 마을 초입에 말(馬) 쉼터가 있다.
제주말이 육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쉬어가던 곳이란다.
마량은 고려때부터 한양으로 올려 보내는 제주말의 상륙지점이며 육지 적응을 위하여
머물다 가는 곳이라는 뜻에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또한 신마 마을은 마량 주민들이 넘어와 새 마을을 형성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마을 공지에 말 쉼터를 재현하고 말과 마부가 마셨던 우물(수청샘)을 복웠했단다.
이른바 제주마역사테마공원이란다.
마을민들이 "참 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정각과 말상, 샘 등을 조성했다
하나(2008년) 붓어진 정각, 버려진 샘, 깡마른 마상(馬像)과 무성한 잡초뿐이다.
아무리 너그러이 평가해도 살기 좋은 마을의 모습같지 않은데 타기해야 할 관리소홀의
고질로 인해 조성하지 않으니만 못한 꼴이다.
예쁘게 가꿔 놓은 바로 옆의 개인집 처럼은 못되더라도 공동체적 관심이 조금만 있다면
이렇지는 않을 것이련만.
마을회관에는 가장 흔한 이름 노인정, 경로당과 달리 '수연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백덕산자락,옛길 평해대로의 여우재 마루에는'康寧館'이라 했다.
얼핏 평범한 이름같아 보여도 생각하는 사람만이 지어내는 이같은 좀 다른 이름은 으레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수연당 이름을 본 값으로 한마디 거들고 가려 했으나 문이 잠겨있다.
피서하는 정자의 여인들이 뙤약볕 길 낯선 늙은이에게 뭐라 말할 법한데 함구 일관이고
길을 물어도 시큰둥,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조금 전의 면사무소 인심과는 물론, 지금껏 보아온 전라도의 이미지와도 사뭇 달랐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혹 타지인들의 유입으로 오합지졸 형국의 마을 아닌지.
큰 비닐하우스에 수국이 가득찬 꽃생산 마을인데도 꽃과 달리 경색되어 있으니 말이다.
신마 마을 방조제 해변은 연안항 건설공사가 진행중이다.
아직은 미미하나 완료되면(2015년?) 강진~제주 간 물류를 담당하는 서남권 중심 물류
항이 될 것이며 마량~제주 간 쾌속여객선도 운항할 계획이란다.
장보고대교가 개통되면 완도항이 지척이 되는데 완도 여객을 뺏어온다는 것 아닌가.
도착항이 다를 뿐 장흥에도 제주노선(장흥~성산포)이 있다.
서로 인접한 완도와 장흥, 강진이 벌이는 제주 여객 쟁탈 삼국지가 볼만하겠다.
매생이 마을과 쭈쭈바
마량(신마) 방조제를 건넜다.
1927년에 축조되었으며 1982년에 개.보수했다는데 내가 통과한지 25일 후인 8월 28일
태풍 볼라벤(Bolaven)의 침공으로 400여m가 유실되었단다.
1개월을 더 미적거렸더라면 방조제 통행도 못할 뻔 했다.
방조제를 통해서 마량천을 건너서면 우리나라의 정남진이라는 장흥군 땅이다.
대덕읍 신리 오성금 마을인데 해안길은 막힌다.
해안을 따르려면 농로와 도로를 따르다가 해발218m 오성산 자락으로 난 군도(郡道)를
택하면 되지만 적잖이 우회한다.
해안가 군도변의 정자에서 잠시 더위를 식힌 후 오성금 마을 선착장과 어부손씨 펜션을
지나서 얼마 가지 않았는데 군도가 사라졌다.
말짱한 아스팔트 길이 놀고(休眠) 있는 이유를 비로소 알았다.
이어가던 도로공사가 중단되고(배정된 예산이 바닥났나?) 경운기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산길을 따라 넘어가면 대덕읍 옹암리다.
당도한 가매골 입구 내저매생이길에서 갈 데까지 가본다는 배짱으로 해안으로 갔다.
갬바우 횟집, 내저선착장이 끝이며 남쪽의 넙도, 원도, 초와도가 지호지간이다.
오른쪽으로 멀리 고금대교가 보임으로 다리 끝은 당연히 고금도(완도군 고금면)다.
정면 뒤로 약산도(약산면)도 어림된다.
썰물 때문인지 내저항의 고만고만한 동력선들이 모두 꽁꽁 묶여 있다.
매생이 재배용 배들임을 마을 정자에서 알기 까지는 30여분이 소요되었다.
내저 방조제(?)를 거쳐 옹암 미니반도인 장흥의 최남단으로 가는 해안로는 없고 매생이
마을을 지나 내륙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단다.
한낮과 별로 다름 없는 석양볕에 고전하는 중일 때 한목소리로 쉬어가라는 매생이 마을
정자의 촌로들이 고맙기 그지없었는데 쭈쭈바 까지 주는 인심에 감동먹었다.
나는 이때껏 쭈쭈바를 먹어본 적이 없었지만 이 날 후로는 내게 가장 인기있는 여름철
식품이 되었으며 쭈쭈바와 매생이 마을은 불가분의 연상(聯想) 관계가 되었다.
촌로라 하나 공교롭게도 모두 내 연하였다.
산에서는 산(山)할아버지에서 지관(地官), 심마니, 약초꾼, 심지어 땅꾼에 이르기 까지
내 직업을 다양하게 점치지만 길에서는 점괘가 나오지 않는지 알아맞히기를 주저한다.
나이와 주거지 정도가 궁금할 뿐 별무관심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 영감까지 붙들고 한도끝도 없이 말하고 싶어하는 이베리아 반도
늙은이들과는 대조적이다.
천성이 과묵한 민족이기 때문일까.
매생이 마을은 마을 이름과 도로명이 될 만큼 매생이의 최대 산지란다.
그러나 내게는 김치 외에는 특별나게 선호하는 음식이 없다.
지역적 특산품인 매생이와 과매기를 별미라 해서 지인들이 상을 차리면 응하기는 해도
즐겨 찾지는 않는다.
내 기호식품이라면 아마도 매생이 마을 전화통이 심심치 않을 텐데 유감이다.
또한, 오염된 바다에서는 매생이가 자랄 수 없으므로 매생이 생산지는 청정바다란다.
그러니까, 가장 질 좋은 매생이의 최고 생산지는 당연히 최고의 청정 해역이며 따라서
여기가 최고의 청정마을이란다.
그렇다면 당연히 장수마을일 텐데 왜 장수 노인들이 보이지 않을까.
청정마을과 장수마을은 마치 등식관계처럼 인식되도록 홍보하고 있는데도.
탐진강변의 사념
하룻밤 보내기 딱 좋은 인심 후한 마을의 정자를 두고 장흥읍까지 먼 거리를 달려갔다.
내일 아침에 돌아오는 일도 큰 부담일 텐데 왜 그러느냐는 촌로들.
굳이 그리 한 것은 호남정맥 종주 때 인연이 된 이웃 보성군청 S(메뉴 '백두대간과 아홉
정맥' 91번글 참조)와 상봉하기 위해서 였다.
텔레파시(telepathy)가 통했는지 어제 그의 전화를 받고 내 일정을 알려주었는데 오늘
아침에도 전화가 왔다.
공무에 바쁜 그를 멀리 오게 하는 것 보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내가 다가가는 것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할 듯 하여 그랬다.
한데, 그에게 부득이한 일이 돌발한 듯.
분위기 파악하는 머리가 아직은 작동중인데 퇴근시간보다 많이 늦게 온 그의 전화 음성
으로 미루어 피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듯 하여 내가 선수를 쳤다.
진행을 중지하고 귀가(귀경)중이라고.
그렇잖으면, 내일은 종일 장흥과 보성지역을 걸을 텐데 그에게 지장을 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아예 관심가질 필요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S에게 부담줄 일은 사라져 다행이지만 과제로 남은 것은 내 집터를 찾는 일이었다.
호남정맥 일림산~사자산~제암산 구간 통과와 천관산 등산 등으로 낯설지 않은 장흥읍
이지만 아직 밤을 보내본 적이 없는 땅이다.
정자 찾아가는 일이 쉽지 않은 어두워진 시각에 버스터미널앞 현수막에 눈이 멈춰섰다.
<2012년 장흥 정남진 물축제 .7월 27일 ~8월 2일> 홍보용 현수막인데 어제 끝났다는 그
곳에는 내 집터가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축제장이었던 탐진강(耽津江)으로 갔다.
영암군 금정면과 장흥군 유치면 경계에 위치한 국사봉(614m)에서 발원,장흥과 강진 양
군 유역을 흐르는 탐진강(약55m?)은 섬진강, 영산강과 함께 전남 3대강의 하나다.
장흥읍 관류구간은 자연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물축제가 끝난 야간인데도 인파로
북적거렸으며 피서 천막이 즐비한 것으로 보아 인기있는 유원지임에 틀림 없다.
지자체가 각종 시설에 많은 투자를 했으며 효과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 듯.
원래의 이름은 예양강(汭陽)이었다는데 강진의 옛 이름 탐진이 왜 예양을 밀어냈을까.
(강진은 道康과 耽津을 결합하고 끝자를 취합한 이름이다)
탐라도(제주도)사람이 육지에 최초로 배를 대고 올라왔다 하여 탐진강이라 했다는 설은
터무니 없고 일제가 강점기에 개명하였다는 주장도 근거가 희박한 것 같다.
교각(橋脚) 따라 늘어선 천막들 사이 좁은 공간에 집을 지었다.
가족형 천막들 사이에 들어선 앙증스러운 천막에 시선이 끌리는 듯 오가는 이들이 살펴
보며 주인이 솔로 늙은이인데 놀라고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옆집 젊은 여인은 밥을 여유있게 지었다며 밥짓는 수고를 하지 말라기도 하였으나 이미
빵으로 해결한 후라 정중히 사양했다.
잠자리가 안정되니까 S의 일이 궁금해 왔다.
별일이 아니기를 바라거니와 인연을 가꾸는 일도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 친인척 보다 이웃 사촌이라는 말은 현실적인 면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이다.
친인척은 원근에 무관하게 일정한 관계가 불변한데 반하여 이웃 사촌이란 이웃 관계가
유지될 때에 한한 지극히 가변적인 조건부 관계다.
기독교 성서는 "사랑이 한결같은 것이 친구요 어려울 때 도우려고 태어난 것이 형제"라
했다.(구약 잠언17:17)
평소에는 소원(疏遠)하다가도 역경을 당하면 동기가 제일이지만 친구는 한결같이 사랑
하지 않으면 멀어지고 만다는 역설(paradox)일 게다.
우정이 지성으로 가꾸고 돌보아야 정상적으로 성장하는 식물(植物)에 비유되듯이 인연
역시 이에 다름 아닐 것이다.
결국, 열정이 있어야 하는데 열정은 건전한 정신력에서 나오고 정신력은 왕성한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한 일 아닌가.
그렇다면, 나의 한계가 목전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체력의 한계를 느껴가고 있으니까.
팔도에 분포되어 있는 남녀노소는 물론 먼 나라들에서 자라고 있는 이 관계들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내 인생의 황혼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황혼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황혼으로 마감하는 하루라니.
(이 글을 올리기 바로 전에 내 인생에서 단 한번 이사갈 집을 지어놓고 왔으므로 인생의
황혼 이야기는 앞으로 다반사가 될 것이다.
더구나, 나와 내 가족이 언젠가는 함께 내 부모의 품에 안기도록 지어진 이 집의 시공은
석장(石匠)이 했으나 내 구상과 설계에 의한 것이므로 더욱 애착이 간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