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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괴감에 사로잡히다
온 나라가 비탄에 빠졌고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할,
나라도 아닌 나라의 국민이라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는 나날.
일어나지 않을 기적을 기다리며 TV 곁을 떠나지 못한 날만 무심하게 늘어갔다.
시인(T. S. Eliot/1888~1965/ '황무지' The Waste Land 에서)의 말을 빌리면 우리
에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인가.
4월 30일 오전 10시 50분,
회룡탐방지원센터를 통과했다.
사패산쪽 포대능선 동측에 형성된 한 계곡 변의 고찰 회룡사(回龍寺)의 이름을 따서
회룡골, 회룡천 등 통칭 회룡이다.
681년, 신라31대 신문왕(神文王/재위681~692) 원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법성사
(法性寺)를 4번째 중창한 무학대사가 회룡사로 개명했다는 절이다.
한데, 의상대사의 창건설이 신빙성이 부족한가.
후대에 세운 절들도 거개가 의상, 원효 또는 도선 등을 창건주로 삼고 있는데, "절의
유래가 오래될 수록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듯 하다"나.
회룡사도 의상의 창건설에 확신이 없다는 것이 회룔사측의 말이다.
무학대사의 개명은 함흥으로 들어갔던 이성계의 귀환과 관련이 있단다.
역성혁명이라는 쿠데타로 이태조가 되기는 하였으나 피를 속일 수는 없었던가.
이즘 용어로 DNA 탓이었던가.
후계권력을 노리는 5째 아들 방원에 의한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성계는 방원으로 인하여 태조가 된지 겨우 6년여에 물러난 후 함흥으로 들어가서
함흥차사를 양산 중이었다.
무학대사가 회룡골의 토굴에 은거중일 때, 소위 '함흥차사(咸興差使)' 라는 고사를
낳은 후 환궁 중이던 이성계가 무학을 방문했다.
무학은 회룡가(回龍歌)로 기원하던 이성계의 환궁이 이뤄졌음을 기념해 절을 짓고
(중창?) 회룡사라 했다니까.
1954년, 한국불교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일제의 잔재이므로 모두 물러나야 한다" 고 생뚱맞기 짝
없는 유시를 함으로서 불교계의 법난으로 불리기도 하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난 것.
기독교의 장로인 그가 왜 불교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해서 분란이 일어나게 했을까.
이로 인해 비구와 대처, 조계종과 태고종의 양대산맥이 형성되었고 회룡사도 이 때
부터 완벽한 비구니 사찰이 되었다.
나는 대간과 정맥을 타는 중에 산사에서 일박할 때가 이따금 있었는데, 어두워져서
찾아간 산사가 비구니사찰이라 난감한 때도 있었다.
낯선 늙은 처사를 재울 수 없다는 것.
공양만 받고 쫓겨나듯 했던 추억 때문이 아니라 비구와 대처가 나뉘고, 비구와 비구
니가 따로 편 가르는 것에 나는 부정적이다.
수행 정진하는 승려가 유혹과 파계를 두려워한대서야.
아직껏 쓰지 못한 '어느 순애보 그 후(3)'
4월을 넘기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걷는 동안 만이라도 무심해질 수
있으므로 오지 않는 소식 포기하고 길을 나선 것이다.
4.7km 안골길(회룡탐방지원센터~안골계곡/15구간)은 고가 서부로 밑을 지나 계단
으로 시작하여 울창한 숲길이 되는 듯 하나 잠시였을 뿐이다.
아마, '사유지'라는 이유인 듯 쫓겨난 둘레길은 철망 펜스 끼고 난 배수로를 따른다.
꽤 긴 배수로와 데크를 되풀이하며 호암사, 범골 입구 통로암거(서부로)를 지나는데
여기가 사패산에 오르는 범골능선 들머리다.
서부로와 나란히 가면서 수락산이 압도해 오는 지점을 지나면 꽃잔디와 영산홍으로
단장한 서부로 시청IC다.
신원배드민턴클럽 다음, 신정약수터 입구 맞은편의 한층 높은데서 철망펜스로 보호
받고 있는 시설(배수지?)과 서부로 통로암거를 통과하면 직동근린공원이다.
의정부시청 뒤에 조성된 다목적 공원.
조성을 준비할 때부터 눈여겨 보아왔는데(사패산에오를때마다) 의정부시가 내세울
만한 공원이다.
안골길은 공원의 남단에서 각종 시설들을 경유해 북단 직동축구장을 벗어나서 남쪽
범골능선으로 오른다.
산불감시초소, 군 참호, 교통호가 있는 서부로 사패터널 위를 통과해 배수지쪽에서
오르는 사패산 등산로와 합류한 후 곧 등산로를 이탈해 불로약수터로 내려선다.
약수터는 폐쇄 상태지만 안골지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웰빙시설(배드민턴 코트와
운동기구들)이 있는 곳이다.
한데, 전에 들렀을 때만 해도(2011년 9월) 물통들이 드나들었는데 왜?
이름에 내포된 이미지와 달리 요절했는가.
약수터 조성에 쓰인 폐타이어더미가 수질 악화의 주범이라고 지적하는 것 같다.
언뜻 수긍되지만 그렇다면, 벽돌과 콘크리트 등 시멘트제품과 약품처리한 방부목은
무방한가.
식탁이 있는 나무 그늘 밑, 12시 30분에 당도했으니 도시락 먹기 안성맞춤이었다.
둘레길 3번째에 마지막이 될(오늘 마치려니까) 점심이지만 전 보다 더 심란했다.
전번의 보루 보다 한참 더 높은, 사패산 턱밑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아내의 불평, 원성이 극에 달하겠지만 나도 오늘만은 모든 인내심을 한꺼번에 쏟아
부어서라도 말 없이 받아들이리라 거듭 다짐두며 점심을 먹었다.
숲길을 내려와 계곡을 건넌 후 계곡과 함께 가는 안골 등산로는 사패산으로 오른다.
이 길에는 내게 감동을 준, 잊혀지지 않는 추억 하나가 있다.(메뉴 '우리의 이야기들'
215, 226, 271번 참조)
'어느 순애보' 그후(3)'을 끝내 쓰지 못하고 말 것인가.
아직껏 못쓴, 내게 안타까움을 주는 길이기에 그간 멀리 해왔는데 오늘 아내와 함께
얼마동안 걷게 되었다.
크고 작은 산사들도 세월호 참사 애도의 현수막들을 걸었다.
애도한들 살아오랴만 희생자는 극락에 다시 태어나고(往生極樂), 실종 상태인 아들
딸, 형제자매들이 살아서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일 텐데 '생환귀환'은 무슨 뜻?.
말하기, 글쓰기를 배우는 까닭이 무엇인가.
글에 품위가 있으면 염원이 빈약해지거나 퇴색하는가.
사패산 정상도 자신있다?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지만.
콘크리트 안골교를 건넌 사패산 등산로와 둘레길 안골길이 잠시 후에 헤어진다.
둘레길은 나무다리 안골교를 통해 안골계곡을 되건너 오르며 '산너미길'로 바뀐다.
50여분(아내의 걸음으로) 줄기차게 오르기만 하는 동안 아내의 입이 다시 닫혔다.
'조금만 더 가면' 에서 '조금밖에 안남은' 으로 바꿔가며 하는 격려도 바닥이 났으며
힘겹게 오르는 아내가 가엾기 까지 했다.
이쯤에서 하강코스로 바뀌면 오죽 좋으랴만 아직도 한참 올라가야 하니 난감하기는
본인 보다 영감인 내가 더 심한 듯 했으니까.
500m도 못되는 거리지만 5km는 됨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도 덩달아 그랬다.
코스와 철을 바꿔가며 사패산에 오르내리기를 무수히 했지만 이처럼 힘겨워 보기는
나도 처음이니까.
전망 좋은 바위, 이름하여 거북바위가 데크 전망대로 업(up) 되어 있다.
왼쪽의 불곡산과 고읍지역에서 천보산과 금오동, 민락동, 그 뒤로 용암산, 가까이에
있는 장암동과 수락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다.
소위 1.21사태 이후 얼씬도 못하다가 다시 개방된 1992년으로부터 20여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의정부의 변화를 볼 때마다 전설처럼 느껴지게 하는 곳이다.
가능동 아파트 단지에서 활처럼 휘어 오르는 안골계곡도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고.
전망대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사패산 등산객들로부터 받은 찬사의 효과?
예 까지 올라온 것도 신기한데 스스로 힘껏 오르는 아내가 더욱 신기해 보였다.
"둘레길 분기점까지는 아직도 꽤 올라야 한다" 고 등산객들이 무심코 하는 한마디에
맥이 빠질 법도 한데 전혀 개의치 않는 것도.
사패산 턱밑 까지 온 것이 스스로 대견한지 정상에 오를 자신감까지 내비치는 아내.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는데 하물며?
백두대간 추가령에서 분기하였으나 남반도 수피령(강원도)에서 발길이 허용된 한북
정맥이 울대고개에서 사패산으로 오른다.
한북정맥이 안골능선과 합류하는 지점이 산너미길 분기점이다.
산너미길의 산너미란 여기 안골능선을 말하는 것이다.
552m사패산의 6부쯤 되는 위치다.
산을 넘었으니 2.3km 산너미길의 남은 길은 거저먹기다.
이 쪽 저 쪽 모두 필요치 않은 계단들만 없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지만.
울띄골 까지 내려가는 동안은 사패교, 갓바위교, 울띄교 등 목교들을 통해서 계곡을
건너고 되건넌다.(사패산과 갓바위산은 同山異名이지만)
사패산 속이라 사패교, 갓바위 아래니까 갓바위교, 울띄골 위라 해서 울띄교 등으로
이름지었을 것이다.
이름이 대수냐, 원시림에 다름아닌 울창한 숲속 길을 내려갈 때 아내의 표정은 오른
고생을 충분히 보상받는 기분인 듯 했다.
사패산 암봉이 지호지간인 지점, 원각사 입구에서 14구간 산넘이길과 13구간 송추
마을길이 바통터치 한다.
차량에 의존하기 전인 예전이라면 범골능선 또는 안골계곡, 안골능선을 타고 사패
능선을 넘어서 원각사로 내려왔을 것이다.
걸어서 간다면 이 지름길을 두고 사패산 자락을 돌고 돌아서 갈 사람이 있겠는가.
고승을 비롯해 옛 승려들은 이같은 지름길을 걸었을 뿐이며, 그래서 시간이 단축된
것인데 세인들은 축지법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처럼 많이 걸음으로서 승려들의 체력에 당할 자가 없었지만 지금은 최하위권이다.
왜냐하면 차량에 맛들인 승려들이 하나같이 걷기를 싫어하니까.
심심산골 산사까지도 찻길의 유무에 흥망성쇠가 좌우되는 것이 현실이다.
사패산 서남쪽 산속 깊은 곳, 원각사까지 포장 차도가 닦여 있으니까.
아내의 일생에 큰 획을 긋는 대역사(大役事)의 준공이 목전에
5.3km송추마을길은 도봉산둘레길의 첫 구간이지만 우리처럼 반시계방향으로 걸을
때는 마지막 구간이다.
차도 따라 내려가면 원도봉에서 숨어버렸던 외곽순환고속국도가 사패산 중심 4km
를 관통하여 나타난다.
이 사패산 쌍터널 앞 가운데에 희한한 돌기둥 하나가 서있다.
保合紀念塔(보합기념탑).
"주식이나 상품의 시세가 거의 변동없이 유지되는 상태" 를 사전은 보합이라 하는데
설마 현상유지를 기념한다는 것은 아닐 터.
"터널공사로 쇠약해진 북한산국립공원의 기를 북돋워준다는 뜻"에서 세운 탑이라니
자연 파괴의 해악을 인정하는가.
그리고 이런 돌기둥 하나로 쇠약해진 기가 복원된다고 믿는가.
참으로 편리하고 안이하며 황당한 사고다.
불교계와 갈등이 적잖았으니 지난 반목을 씻고 화합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라느니,
"치열한 역사의 현장을 기념하는 듯 하다"느니 자의적 풀이도 있는 것 같다.
불교계와 환경단체들이 과연 반대급부 없이 대승적 차원의 양보를 했는가.
그래서 만족하여 화합하는 뜻의 기념탑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인가.
파괴와 보존의 관계는 이분법적 문제가 아니다.
보존이 필요하지만 파괴 또한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균형잡힌 양눈의 시각이 필요한데도 모두 단선적, 단세포적 외눈박이들이기
때문에 매사에 충돌 일변도인 것이다.
산속에 사찰들을 신축, 증축하고 기도원을 비롯한 종교시설들을 짓는 종교계야말로
자연을 가장 많이 파괴하면서도 행정력이 동원되면 종교탄압 중단하라고 반응한다.
원각사길 차도는 사패산 원각사를 음각한 바위와 한림대학교 울대리수련원 푯말을
지나 군 부대 앞까지 한층 높은 외곽순환고속국도와 나란히 이어진다.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2개의 원각사(圓覺寺)가 공교로운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원도봉 초입의 도봉산 원각사(조계종)와 사패산 서쪽 기슭 사패산 원각사(법륜종)가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의 사패산터널 양쪽에 터널지기처럼 위치해 있으니까.
부대 앞 이후의 송추마을길은 개통때와 사뭇 달라졌다.
"군부대와 사유지 등으로 숲을 벗어난다" 고 양해를 구했던 길로 전에는 송추마을길
대부분이 39번도로를 따랐다면 지금은 대부분의 길이 도로를 떠나 숲속에 있다.
북한산둘레길 담당자들이 더 좋은 둘레길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들에게 치하를 보내는데 인색해서는 안될 것이다.
더욱 노력해달라는 격려의 뜻이 포함된 갈채를.
달라지기 전후의 두 길을 다 걸어보지 않은 이들은 내 충심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9200부대(백호대대) 앞에서 외곽순환국도 밑을 건너 도로를 따랐던 둘레길이 부대
정문 앞에서 부대의 담장을 끼고 숲속으로 들어간다.
부대를 가리는 송판 담장에는 각종 사진을 비롯해 둘레길 홍보물을 전시하고 있다.
평가받을 만한 아이디어다.
송추마을길은 잘 관리되고 있는 한 묘역 옆으로 해서 고가 외곽순환국도 밑 주차장
지역을 지나 송추의 오봉탐방지원센터로 간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송추마을.
소나무(松)와 가래나무(楸)가 많아서 송추(松楸)라 불렀으나 계곡에 연중 내내 맑고
시원한 물(湫)이 흐른다 해서 송추(松湫)로 바꿔 쓰고 부르게 되었다는 계곡.
1970년대 초부터 애들과 함께 퍽 자주 찾던 로얄수영장과 계곡이다.
2km 넘는 계곡을 빈틈 없이 점유한 음식점들의 텃세 때문에 소위 알뜰나들이객들은
서성이다 마는 신세였던 송추유원지.
탐방인구의 급증에 수반되는 것은 수려 청정한 자연과 넉넉한 인심의 오염과 파괴다.
그 도가 극에 달해가는 이곳에 일대 변혁이 진행중이다.
'송추지구이주단지조성 준공 기념비'가 그 증거물이다.
대서문쪽 북한천의 정화에 이은 개가라 하겠다.
반가이 인사하는 오봉탐방지원센터 여직원.
교현리 우이령탐방지원센터에 근무하던 관리공단 직원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준비의 일환으로 매일같이 우이령 넘어 교현리 센터를 반환점으로
점찍고 돌아설 때 만났던.
그 때, 내가 그녀에게 팁으로 준 것이 '사전예약'라는 표현에 문제 제기하라는 것이
었는데 아직껏 감감이다.(메뉴'강따라길따라' 22번글 참조)
오봉센터에서 골인점인 교현리까지 남은 거리는 2.6km.
둘레길 12.3km와 회령역에서 들머리까지 1.2km를 더하면 오늘 거리가 13.5km인데
난이도 최하의 2.6km는 아무리 체력이 바닥났다 해도 1시간 미만의 거리다.
북한산 지역 45.7km, 도봉산 쪽 26.1km, 총71.8km에서 2.6km를 남겨 둔 지점.
아내의 일생에 큰 획을 긋는 대역사(大役事)의 준공이 목전에 다가오는 중이다.
완만한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연록 숲속, 부드러운 흙길의 촉감이 유난히 정겨웠다.
송추마을길은 마지막 군 초소 옆을 지나고 망주석 있는 자그마한 묘역과 봄 내음이
진한 농장을 지나 39번도로(북한산로)에 진출한다.
장흥면 울대리에서 장흥면 교현리로 바뀐 것.
"길이 흥한다"는 땅의 다리고개(橋峴).
고려의 17대 인종(仁宗/재위1122 ~1146)의 비 공예태후(恭睿太后)는 전남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 출신이다.
인종은 태후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고을이름을 '長興'(장흥)이라 지어 하사하였는데
"길이 흥할 고장"이라는 뜻이란다.
여기 장흥 역시 반정으로 등극한 이조11대 중종(中宗/재위1506~1544)의 원비 단경
왕후 신씨(端敬王后愼)의 고향인데 전남 장흥의 경우와 같은 시각으로 보는 것 같다.
단경왕후는 아조의 역대 왕비 중 재위 7일이라는 가장 짧은 기간의 왕비였다.
역적의 딸로 연좌되어 폐출은 되었으나 중종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단다.
영조 때에 비로소 부모와 함께 복위되었으며 그녀의 유택은 이곳 장흥면 일영리의
온릉(溫陵)이다.
또한 교현리의 본 이름은 다리고개((달현/達峴)였단다.
나무로 징검다리를 놓고 서울로 왕래했던 마을 땔감장수들이 부른 이름인데 한자화
될 때 교현리로 바뀌었다나.
지금은 장흥면의 법정리와 행정리의 이름으로 굳어졌지만.
기적이 별거냐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흘 높다 하돗다
북한산로는 소로에 불과했던 옛길이 왕복 2차선으로 확장되더니 지금은 편도 2차선
대로로 거듭났다.
송추~구파발 간의 대표 길이던 일영길을 제쳐버린 길이다.
우리가 진입한 지점은 골인점(교현우이령길입구)을 1.2km 남겨둔 곳이며 남은길은
북한산둘레길에서 유일하게 1km 이상 걷게 되는 도로다.
일명 올림픽부대(72사단) 앞 올림픽회관(부대클럽?), 전번에 혐오감을 주었던 뱀닭
농장, 교현우이령길0.7km지점을 차례로 지났다.
키 큰 소나무 한 구루를 사이에 두고 다가오는 여성봉과 오봉의 위압을 즐기는 새에
교현교를 건넜다.
그리고 아내는 곧 골인했다.
2014년 4월 30일 17시 59분에.
1~3구간에서는 완주가 아니라 어디쯤에서 어떤 이유로 하차할지가 궁금거리였다.
북한산 지역은 해낼 수도 있겠다고 판단된 후로는 얼마나 걸리느냐가 관심사였다.
아내에게 하루에 2~3km 이상은 벅찼기 때문이다.
또한, 하루에 완주한(북한산쪽구간) 이 영감에게도 여간 아닌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의 걸음에는 가속이 붙어갔고 7일만에 북한산쪽 45.7km을 마쳤다.
기적같은 쾌거였다.
아무리 그랬다 해도 도봉산 지역에 대해서는 농담을 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함께 해야 하는 내 인내심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었다.
한데, 아내는 26.1km를 단 3일 만에 해치웠다.
아내의 자부심과 자존심에는 설악산(대청봉)에 이어 북한산둘레길이 추가되었다.
실로, 16년 만인 77세에.
하마터면 영영 묻혀버릴 뻔 했던 아내의 진면목(實體)이 드러난 것?
그렇다면 모든 책임이 영감인 내게 있지 않은가.
기적이다.
기적이 별거냐.
너절한 설명이 필요 없다.
늙은 아내에게 일어난 10일 간의 역사(役事)가 바로 기적이다.
내게(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나폴레옹이 말했다던가.
우리나라에도 있다.
이조시대의 양사언(楊士彦/1571~1584)이다. .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히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 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흘 높다 하돗다" <끝>
첫댓글 마니아들은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다.
그러나, 항암 투병을 막 끝낸 아내로 하여금 환갑날에 설악산 대청봉을 넘게 한 것은
의기소침해진 아내가 성취감을 통해 자신감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로부터 16년 세월에 아내는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더욱 노약해졌다.
이번 북한산둘레길의 완주 역시 해냈다는 성취감 보다 많이 늙었다 해도 자신감만은
왕성함을 확인함으로서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공헌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일회적 행사로 끝나지 않고 지속하는 일상의 일이 되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