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은 국립발레단에 큰 변화가 있었던 해이다. 이 변화는 비단 국립발레단 뿐만 아니라 당시 국립극장 전속단체 모두에게 해당되는데, 이유는 당시 국립극장 전속단체의 운영 체제를 대폭 쇄신하자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움직임 중 하나가 바로 국립극장 모든 전속단체장의 교체였다. 기존 "단장"이란 직책명도 "단장겸 예술감독"이라고 바꾸면서 "단체운영 등의 행정적인 면과 작품제작 등의 예술적인 면"을 동시에 하는 "수퍼단장시대"를 선포한 것이다. 물론 이 시기 전에 이미 임성남은 "울트라수퍼 단장시대"를 살아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1993년 들어 직책명이 "단장겸 예술감독"이라고 공시됨으로써 어쨌든 국립극장의 각 예술단체장들은 심적으로 더 많은 부담을 떠 안게 됐다.
국립발레단의 "단장겸 예술감독시대"를 연 인물은 김혜식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장)이다. 국내 무용계에서 국립발레단장직을 둘러싸고 당시 치열한 물밑 로비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미국에서 날라온 "김혜식"의 등장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90년도 동아무용콩쿠르 심사위원 자격으로 서울에 올 때 마다 스승인 임성남 전 단장은 그녀를 차기 발레단장감으로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던 터 였다.
그렇다면 혜성 처럼 나타난 김혜식은 누구인가? 국립발레단의 제1기 시기 (60년대 국립무용단 시절)를 보면 당시 이화여대 재학생 신분으로 주요출연진에 나온 김혜식의 이름을 자주 볼 수 있다. 김혜식은 현재 스투트가르트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수진 이전에 이미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은 발레리나였다. 60년대 영국로열발레 수학 후 스위스 취리히 발레단과 캐나다 몬트리올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활약하다 72년부터 92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프레즈노대학의 연극무용과 교수로 재직해왔다. 92년 "Dance Teacher Now" 1월호의 표지를 장식하며 특집기사에 실린 그녀에 대한 글은 김혜식이 해외에서 얼마나 성공적으로 발레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3년간의 짧은 재임기간 동안 김혜식이 한국 발레의 발전을 위해 이루어놓은 업적은 놀랍다. 한국 발레 30년의 숙원을 그녀가 실현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립극장 문화학교 발레반"을 만들고 "국립발레단 후원회 (회장 윤병철)"를 발족시킨 것이다. "국립극장 문화학교 발레반"은 임성남 전 단장이 그토록 열망하던 "국립발레학교" 설립을 위해 중요한 첫 걸음이 되었고 발레단을 일반에게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립발레단 후원회 (93년 1월 발족)"는 현재까지 예술단체 후원회 중에 가장 모범적인 사례를 보이며 운영되고 있다. 공연 한건에 제한된 단발적인 후원이나 협찬에 그치는 국내 현실에서 이는 대단한 성공사례다.
김혜식은 단체 운영 혁신을 가한다. 단원들의 연습시간을 기존의 몇배로 늘리고 과외활동을 금지시켜 단원들이 직업 무용수로서 철저히 발레단에 에너지를 쏟게 했다. 대신 단원들의 월급을 전보다 현실화시켰다. 캐스팅은 선·후배를 가리지않고 철저히 "실력 위주"로 했다. 단원을 정단원-연수단원으로 계층화 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 오랫동안 해외에서 활동하던 그녀 답게 발레단 운영에 서구식의 운영방식 일부를 도입해 국립발레단을 철저히 "프로페서널"한 단체로 단련시켜나갔다. 이렇게 "문화학교 발레반" "국립발레 후원회" "서구식의 단체운영방식" 으로 국립발레단은 제3기,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제 3기에 주역급으로 활동하던 대표적인 무용수로는 최태지 (4,5기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문병남(전 국립발레단 지도위원), 이원국(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나형만, 이재신, 한성희, 강준하, 최광석 (현 미국 아틀란타 발레단원), 박상철 (현 국립발레단 지도위원), 최경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