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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統의 確立을 爲하여
柳宗鎬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표류하는 몸이면서도 잠시 동안의 휴식을 장만하여 미래를 전망하는 순간을 즐겨 인간들은 갖는다. 지금 우리들은 1960년대의 첫 관문에서 서서 내일을 전망하는 엄숙한 순간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전망이 시작되는 곳에는 으레 인간의 회고가 따르는 법이다. 회고가 있는 곳에 회오가 있고 회오가 있는 곳에 새로운 결의가 따른다. 그렇다면 1950년대를 보내고 나서 우리의 감회는 무엇에 반발하며 무엇에 희망을 걸 수가 있는 것일까? 인습이란 이름 아래 우리가 성토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전통이란 이름으로 우리가 수호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1
우리들에게 1950년대는 6․25라고 하는 비극적 폭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추상하기에도 지겨운 6․25의 비극은 우리에게 가지가지의 역사적 체험을 강요하면서 이에 따른 의식의 변혁을, 비극적 상황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요청하였다. <25時>란 기이한 새 단어는 우리에게 결코 이방의 언어는 아니었다. 우리는 그 전율을 몸소 체험하였다. 이 역사적 체험은 文學面(문학면)에서도 여실히 반영되었으며, 그것은 문학인의 새로운 현실감각의 소유란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사회현실의 대담한 제출이 전례 없이 성행하였다. 동양의 변방 은둔자의 나라였던 우리 나라에서 이러한 현상은 다소 이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의 우리 문학의 특징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패배의 미학이었다. 사회현실에서 도망하여 역사의 방관자로 시종한 문학인들이 즐겨 취재한 것은 저들 자신의 자화상의 일면인 현실의 패배자 애가였다. 그리하여 저들이 주로 형성해 놓은 것도 패배자의 애가를 주조로 한 自棄的(자기적)인 운명론이었다. 이러한 요소는 우리 문학 주류의 중요한 계보를 이루고 있으니 그 실례를 도식화하는 것은 극히 용이한 일이다. 그 결과 애수의 조성에 주력한 나머지 작가의 얄팍한 정감토로가 승하여 실증적 객관적 요소는 거세되고 자연 소설에서도 산문정신의 離反(이반)이라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특히 자아의식에 근본적 결여를 특징으로 하는 촌뜨기의 형상화에만 골몰하고 언필칭 그것을 <한국적>이란 미명으로 수식하는 것에 자족하여 왔다. 사회현실이 완전히 거세된 문학은, 자연 일반대중과의 더욱 심한 괴리를 낳았으며 이에 따른 문학의 사회적 고립은 필연적 추세이기도 하였다. 소위 <순문학>의 바로 이웃에서 통속문학이 저대로 횡행하는 현상도 따지고 보면 소위 <순문학>의 사회적 고립에서 오는 공백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사회적 인간> 하나 제대로 형상화하지 못한 채, 소설에서의 인간탐구 하나 변변히 전개시키지 못한 채, 소박한 인정행위를 두고 휴머니즘 운운해 온 것도 캐고 보면 낯간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우리는 다각적으로 검토해 볼 수가 있다. 우리의 과거를 상기해 본다는 것도 유익한 일일 것이다. 결코 다복하지 못했던 역사는 우리 겨레를 多恨(다한)의 족속으로 만들고 거기에서 온 실의의 비감이 자포자기적 운명론의 온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식민지 시절의 정치적 부자유가, 그리고 표현의 부자유가 문학인으로 하여금 외부에의 투시를 방해했다는 것도 사실이겠다. 해방 직후의 정치문학의 난무와 이에 대항한 소위 순수문학이 편협하게만 흐른 결과를 지적해 본다는 것도 과히 어긋난 견해는 아니니라.
그러나 어쨌든 변화는 일어났다. 작가들은 문학행위가 결코 고립된 사회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해 가고 있다. 역사의 방관자로 자처하는 것이 허망한 문학자의 논리였다는 것도 깨닫고 있다. 시대의 양심이 되려는 의지의 맹아는 분명히 싹트고 있다. 시인들의 경우만 하더라도 개인적 감상표현만이 시의 왕도가 아니라는 자각은 이제 극히 보편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문학의 균형 잡힌 발달을 위해서 이러한 경향은 환영할 만한 현상이다. 재래에 믿어왔던 좁은 의미의 순수문학이란 미신이 타파되었다는 것은 기꺼운 현상이다. 최근에 와서 전개된 작가들의 장편소설에 대한 왕성한 의욕도 단순히 저널리즘의 지면 개방에서 오는 추세가 아니라 <사회적 인간>을 닮으려는 작가의 욕망이 원동력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문학의 명일에 대하여 우리는 낙관적이어도 좋을 것이다. 이에 따라 단편소설 곧 소설이라는 기이한 문단통념이 소멸된다면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어쨌든 6․25의 비극적 폭음과 함께 시작된 1950년대는 은둔자 내지는 방관자의 작가적 위치가 빚어내는 패배의 미학만이 문학의 왕도가 아니라는 자각을 문학인에게 선사하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렇다면 1960년대에 접어든 오늘,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아니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자각이 작가들에 의하여 작품으로서 구현화되는 일일 것이다. 시대의 양심이 응결된 시대의 기념비는 기필코 작가들에 의해서 건립되어야 할 것이다. 문학의 사회적 고립도 이렇게 해서만 극복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똑똑히 우리의 육안으로 목격한 6․25의 비극도 민족의 혈서로써 기필코 증언되어야 할 것이다. 동작동 묘지에 억울한 망령들을 위해서도, 10년이 지나야 나온다는 전쟁문학의 그 10년도 이제는 지나갔으니까ㅡ.
2
필자는 「토착어의 인간상」이란 졸문에서 소위<한국적>이란 것이 이 땅의 재래적인 전근대적 인간상을 싸고도는 후광이라는 것을 지적한 일이 있다. 그리고 전근대적 인간이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근대국가가 베풀어주는 의무교육의 혜택조차 받지 못했으며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의 세계상을 가지고 있고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한 우리들의 고향사람들 즉 촌뜨기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시에서의 한국적이란 것도 토착어(순수한 우리말)가 환기하는 민족의 고유정서임을 지적해서 말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 사회가 낙후성을 탈피하고 개화해 감에 따라서 이러한 전근대적 인간은 소멸되어 갈 것이며 또 마땅히 소멸되어야 할 존재란 사실이다. 이것은 言語面(언어면)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예컨대 <내외>란 말은 부부란 말이지만 이 말은 점점 사용의 빈도가 줄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골의 지아비와 지어미를 두고 내외라 해도, 도회지의 양복쟁이 부부를 내외라고 하지는 않는다. 매스 커뮤니케이션․방사능․열등감․노이로제 등 현대문명을 반영하는 외래어 내지 신조어가 범람하는 대신 순수한 우리말은 점차로 사용도가 줄어들어 자고 있으며, 또 이러한 말들에 의해서 대치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우리 사회가 문명사회의 일원으로서 기타 민족과 보조를 같이 하고 있는 이상, 지금까지 우리가 쓰고 있는 한국적 곧 전통이란 관념은 오류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동백기름><짚신><성황당><나룻배><막걸리>와 같은 토착어가 환기하는 고유정서만이 한국적이고 또 그것만이 <전통적>이라면, 우리에게 <전통적>이란 <후진적>이란 말이 수식된 미사어구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이 같이 불명예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우리는 결코 명예스러울 수 없는 이 한국적인 것을 전통적인 것으로 모셔놓고 끊임없이 경례만을 해야 할 것인가? 답변은 물론 부정문이 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토속적인 것. 민속적인 것만을 한국적이라고 우길 필요가 없다. 그야 물론 거기에 우리 겨레의 서민감정의 혈맥이 흐르고 있음은 부인치 않는다. 민족의 체온이 서려 있음은 구태여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통이라고 우긴다면 참으로 눈물겨운 자기수치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생각나는 것은 전통에 대한 비개방적 사고방식이다.
우리들은 명확한 개념규정 없이 전통이란 말을 남용해 왔으며 또 여기에서 많은 혼란이 빚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쨌든, 우리가 전통을 얘기할 때 좀 더 솔직하고 현실적인 감응태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서 필자는 신라향가나 고려시대의 별곡을 읽고서 영감을 받고 시를 쓴다는 사람을 들은 일이 없다. 또 「춘향전」이나 「심청전」을 소설습작생이 모범으로 사용한다는 얘기도 과분한 탓인지 들어본 적이 없다. 전통이란 이를테면 문예비평상의 비교의 대상이 되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만, 우리 나라의 고전에 전혀 소양이 없는 사람이 얼마든지 비평행위를 전개할 수가 있는 것이 현상이다. 아니 역으로 우리 고전에 소양이 있다는 사람들의 문학적 발언에서 때때로 문학적 비양식을 더욱 많이 발견할 수 가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다행한 일이냐 혹은 불행한 일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다만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엄연한 사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문제의 핵심에서 도피 외면하려는 감상적 태도다.
신문학 발생 이후 선인들이 형성해 놓은 것에는 그래도 무엇인가 주류적인 것이 있었다. 그리고 사소하나마 후진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주로 일본을 매개로 해서 외국 것을 배워온 것과 관련이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들에게 독특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내면적 필연성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교훈을 얻는다.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외부로부터의 정신의 환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명백해진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소위 전통에 대한 비개방적 폐쇄적 태도가 얼마나 무익한 일인가 하는 것은 장황한 언술을 침묵시킨다. 남에게서 배운다 하더라도 배움을 실천하는 주체가 있는 이상, 자기의 것은 은연중에 제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소위 전통에 대한 지나친 쇄국적 비개방적 태도도 결국은 왜곡된 자격지심이 변형된 형태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실내의 창문을 모조리 밀폐하고 그 속에 <한국적>인 것을 보관해둔 채 정신의 환기를 금지하는 일체의 편협한 정신적 자세를 거부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명심 유의해야 할 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친근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경한 사고․감정 등을 어떻게 해서 친근한 것으로 형상화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주책없이 미련이나 집착은 희비극을 연출하기가 예사이다. 나는 여기서 로렌스의 작중인물의 발언을 상기한다. <우리가 타파해야 한 것은 전통이 아니라 인습이다.> 타파해야 할 인습마저를 전통이란 미명으로 수식하는 옹졸한 사고는 조속히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960년대의 문학의 과제가 소박한 전통개념의 수정과 이에 따른 시야의 확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싶다. 이러한 새 기운은 이미 태동하고 있지만 그것이 작품상으로 화려한 개화기를 맞기를 우리는 희구한다. 준비기간도 이제 웬만큼 지나간 것 같으니까.
3
鮮于煇氏(선우휘씨)의 <깃발 없는 기수>를 읽다가 감동적인 삽화를 접하고 한참동안 아찔했던 경험이 있다. 카자흐 기병이 북한에 왔었는데, 동네아이들이 나무꼬챙이를 카자흐 기병 앞에서 휘두르며 장난을 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은 어린애들 장난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랬더니 동네 노인들의 한마디가 걸작이었다.
<저 녀석들 눈알이 파래서 나무꼬챙이를 못 보는 모양이군 그래.>
이 미련한 대사는 희극성과 비극성이 완전히 합일된 절묘한 경지를 이루고 있지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경우는 바로 이러한 경우이리라. 또 이러한 민담이 전해 온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총으로 무장한 것을 원경으로 본 이쪽의 민병들이 한 한마디가 또 천하일품을 이루고 있다. <저 녀석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지, 화살하나 준비 못하고 부지깽이를 가지고 왔군 그래.> 그래서 활을 버리고 몽둥이로 무장했다는 것이다. 울론 이것은 후일 호사가들이 사랑방의 얘깃거리로 지어낸 얘기겠지만, 이런 삽화를 예증삼아 유머가 풍부했던 민족이라고 자극하기엔 너무나 슬픈 얘기들이다.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에 매달린다고, 우리도 지금은 논을 갈망정 몇 대 선조는 정승 벼슬을 했다는 식의 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가. 그러나 어쨌든 첨성대가 동양 최고의 천문대라 하더라도 우리가 당장 천문대 하나 가지지 못한 국가의 백성이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유사한 현상이 모든 분야에서 발을 맞추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국문학사를 보고 문학 없는 문학사라고 논평한 외국문학 교수가 있었지만, 현대문학의 발자취를 일별하고 나서 거의 누구나가 입에 올리는 감개는 무사조의 문학이란 사실이다. 물론 시시각각으로 그때그때의 조류 비슷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일정 기간의 정신의 기후에 필연적이었다기보다는 몇몇 동호인들의 기분이 지배적인 風前細柳(풍전세류)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어떤 기성적인 것에 대한 강력한 반명제로서 상호 견제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야무야한 채로 몇몇 우수한 작가의 작품이 고독한 발광체로 산발적으로 있을 분이다. 문화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정황의 진보와 그 궤를 같이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가령 미국인 정치적 경제적 강대국으로 등장함에 따라서 미국문학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게 된 사실도 그 비근한 예라고 하겠다. 남의 나라에서는 이미 1세기 전에 실시된 보통선거가 이 땅에선 겨우 얼마 전에 등장한 바 있거니와, 이러한 정치적 후진성과 문화적 낙후성은 같은 궤 위에서 있는 것이니 우리가 아무리 초조해 한다 하더라도 현실은 언제나 냉정하다. 부르주아 혁명 하나 제대로 치르지 못한 주제에 부르주아의 서사시ㅡ이것이 소설 개화기의 진면목이었다ㅡ의 출현을 희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소용없는 무리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자각으로서 자아의식 하나 변변히 희태하지 못한 채 진정한 의미의 산문정신의 전개를 요망하는 것도 가망 없는 소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자각을 물론 비판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자각을 심장 깊은 곳에서 뼈저리게 재확인하고 지각의 극복을 위한 정신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난 성급은 금물이다. 초조도 금물이다. 급할수록 서서히 하라는 西諺(서언)과 마찬가지로-.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의식의 흐름>이니 <앙티로망>이니 하는 <새 흐름>에 우리가 그렇게 과민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의 당장의 의무는 오히려 저쪽에서 시험이 끝난 것이라 할지다도 한번쯤 완벽의 극치까지 가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지각이 우리의 숙명인 이상, 무작정 따라가기 위한 성급만이 도리는 아니다. 성급에서 유래한 피상적인 편승만 피한다면 물론 지각의 극복을 위한 일체의 노력은 적극 권장되어야 한다. 성급과 초조의 산물인 피상적 편승을 지양한 지각의 극복ㅡ이것이 1960년대 문학인의 정신적 과제가 되어야 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자. 조총(鳥銃)과 도시(刀矢)의 대결과 같은 지각의 비애는 다시는 이 땅에서 연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화면에서도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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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통의 발견이나 발굴에 동분서주할 필요는 없다. 또 전통의 알리바이를 역설할 필요도 없다. 무제는 몇 세대 후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겪은 바와 같은 빈곤의 탄성을 다시는 발하지 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과업은 오히려 미래의 수확을 위한 시초작업을 수행하는데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크게 보아 현금의 우리의 작업은 처녀지 개간의 치조작업일지도 모른다. 그 점 우리에게는 좀 더 신선하고 발랄한 개척자 정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비관주의의 온상 속에서도 때로 기적은 일어난다. 우리의 역사도, 사회현실도, 우리에게 결코 화창한 이미지는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사실 낙관론자가 될 여건은 구비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기적적 사실을 더러 목격하였다. 비록 불모의 국토일망정, 그리고 우리의 과거가 비록 어두웠다손 치더라도 한번쯤 우리에게도 기적의 내방이 없으란 법은 없을 것이다. 장미가 뿌려진 탄탄대로는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세계』, 196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