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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다원, 김종직, 1472년 유두류록, 김굉필
함양다원.
김종직의 발자취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함양다원'
함양 엄천사 북쪽 대나무 밭 주변에 위치한 차 밭 함양다원.
김종직이 다공(다공=차의 공납) 민폐를 없애려 조성.
뱀사골, 칠선계곡, 한신계곡이 이룬 용류담과 엄천강.
엄천강을 이루는 휴천계곡이 있어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대규모 사찰 엄천사가 있던 마을이라 지금까지도..'절골'.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원기마을(좌)과 엄천사 절터가 있는 동호마을(우).
엄천강 북쪽에 위치한 남호리 소재
경천사 절터
엄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구형왕릉
구형왕릉을 품고 있는 산청군 왕산(932m)
883년 신라 헌강왕 9년에 창건된 엄천사.
화엄사에 있던 결언선사가 창건했다는 사찰.
창건 당시 왕비가 초하루와 보름이면 꼭 기도.
신라 헌강왕이 선왕들의 위패를 모셨던 사찰.
신라, 고려 때 번창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할 당시에 있던 사찰.
'앞으로 5, 6리를 더 나아갔다.
왕대 숲 속에 고색창연한 절이 있었다.
엄천사라는 절이었다. 땅이 평평하고 넓어
가히 집을 짓고 살만한 곳.'-김일손 유두류록 중
-이곳 마을 원로 주민들은 증언 -
'마을 곳곳마다 돌절구, 비석의 받침대,
주춧돌 등 사찰 유물이 없는 곳이 없다.
금동불상과 유물들은 일제가 마구 이전.'
1471년 조선 성종 2년 함양군수로 부임한 김종직
차 한 톨 나지 않는 이곳에 조정에서 차세를 부과해
주민들이 크게 고통을 받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점필재집 <다원이수병서>의 차세에 관한 기록.-
이조시대에 짚신을 신고 지리산 등반은 어려운 일.
특히, 군수의 신분으로 고생을 자처하기란 드문 일.
하여, 김종직에 관해 좀 더 알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우선, 함양다원을 재조명해 김종직에 관해 분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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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다툼에 혈안이 되어 민생을 외면한 사대부들.
백성은 굶어 죽거나 말거나 가문의 부귀영화만 추구.
그 당시 권세영화를 버리고 민생에 전념했던 김종직.
김종직이 함양군수 시절 조성했다는 관영 차 밭 터.
군수가 백성을 위해 차 밭을 만든 것은 이조 역사상 최초.
점필재 김종직은 도학사상 정맥을 이은 사림파 종조(宗祖)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실천하는 도학
정몽주에서부터 비롯하여 길재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계승.
김종직은 사리를 버리고 의를 지키는 도학사상 애민정신 실천.
'점필재집’- 차세(茶稅)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에 관한 기록.
“나라에 바칠 차가 나지도 않는데도
해마다 함양 백성들에게는 차세가 부과.
그래서, 백성들은 나라에 차를 바치려고
쌀 한말에 차 한 홉을 바꿔서 차세를 납부.
이 폐단을 알고 관가에서 대신 납부했다.”
김종직이 함양다원을 일군 이유는 애민정신.
함양 농민들에게 과중하게 부과되었던 차 공물 납부
농민들은 과중한 차세를 납부하지 못할 만큼 무거웠다.
백성이 불행하면 나라도 불행해진다는., 김종직의 철학.
차 공물은 왕이나 사대부들이 애용하는 기호품이 아니라
중국황제와 귀족들의 기호품이라 외교에 사용되는 조공물
공물 납부에 차질이 생기면 국가의 위신에 큰 손상이 발생.
이조 왕조는 유교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기에
고려와 차별화를 위해 차문화 단절 및 불교 탄압책.
그러나, 중국의 황실에 정기적으로 바친 조공품 차.
하여, 조공품을 생산하며., 차 문화 발전.
차문화는 중국이 앞섰지만 차의 품질은 우리나라가 우수
지리산 일대의 차는 향기 색갈 약효 면에서 중국보다 탁월.
하여, 역대 중국의 황실 귀족들이 특별한 좋아하는 조공품.
김종직은 관영차밭을 농민들과 함께 일궈 차 조공품을 해결.
높은 학문과 깊은 경륜으로 백성들 고단한 삶을 보살펴 준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로부터 칭송 받았던 어진 군수의 표상.
경남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예림서원(禮林書院).
영남 유림의 종장(宗匠) 점필재 김종직 후학들의 교육기관.
점필제는 도학사상을 실천해 현실 속에 이상을 실천한 인물.
유학자로서 도학정치의 완성을 꿈꿨던 그는 정치가이자 학자.
낙동강의 좌강(左江)은 안동
낙동강의 우강(友江)은 함양.
낙동강 동쪽 안동은 훌륭한 유학자를 많이 낳은 땅이고,
낙동강 서쪽 함양을 자랑할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함양 유학의 기반 안의현감을 지낸 정여창은 김종직의 문하.
연산군 때 스승인 김종직과 더불어 무오사화 당시 숙청.
그들의 죽음은 오늘날까지 거룩하고 향기롭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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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휴천면 절터 마을의 함양다원
그곳 엄천사는 신라의 결언선사(決言禪師)가 창건한 절.
헌강왕이 선고왕 명복을 빌기 위해 결언선사를 불러 창건.
왕명을 받든 결언선사가 지리산에 사찰 터를 잡고 공사 완공.
하지만, 천년이 지난 지금, 엄천사의 화려한 역사는 끊겼다.
고려 이조를 거쳐 여러 차례 중창 후 이조 후기에 완전 폐사.
흔적조차 찾기 힘든 절터의 북쪽 대나무 밭에 함양다원이 있었다.
함양다원은 점필재(1470-1475)가 조성했던 차밭.
1998년 함양군 마을 입구에 관영 차밭 조성터 기념비.
삼국사기를 열람한 점필제는 이곳이 차 재배지임을 안다.
신라 때 도입된 당나라 차 씨앗을 엄천사 대숲에서 발견.
그 땅을 다원(茶園)으로 만들고 차 재배에 성공.
점필재는 1431년(세종 13) 6월 밀양부 서대동리 출생.
아버지는 강호 김숙자, 어머니는 사재감정 박홍신 딸.
아버지는 처가 재산을 상속받아, 선산에서 밀양으로 이주.
점필제는 29세에 과거 급제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되었다.
34세에 제자들이 많이 모였고 40세에 함양군수(종4품)에 제수.
그 이듬해 유자광이 이 고을에 와서 시를 지어 현판을 붙었는데,
이를 떼어 불사른 사건이 화근이 되어 숙청을 당한 누각이 학사루.
42세 때 정여창과 김굉필이 찾아와 글을 배웠다.
1475년 함양을 떠나자,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운다.
함양다원 기념비에는 김종직이 남긴 시가 새겨져 있다.
차밭 - 점필제 作
'신령한 차 받들어 임금님 장수케 하고자 하나
신라 때부터 전해지는 씨앗을 찾지 못하였다
이제야 두류산 아래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케 되어 또한 기쁘다
대숲 밖 거친 동산 1백여 평의 언덕
자영차 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 덜게 함이지
무이차 같은 명다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점필재 선생의 애민정신이 배여 있는 함양다원 터
요즘 정치가가 그 애민정신을 본받았으면 하는 바램.
김종직.
1431년(세종 13) 경남 밀양~1492(성종 23) 문신 학자.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 사조(師祖).
세조 즉위를 비판한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본관은 선산. 자는 계온(季)·효관(孝), 호는 점필재(畢齋).
아버지 숙자는 고려 말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 학통을 계승.
1446년(세종 28) 과거 응시, 주목 받았으나 낙방했다.
1451년(문종 1) 종직의 문인 조위(曺偉) 누나와 결혼.
1453년(단종 1) 태학에 들어가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
1459년(세조 5) 식년문과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 벼슬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 인수왕후봉숭왕책문 저술
1464년 세조가 잡학에 뜻을 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
1467년 수찬, 이듬해에 이조 좌랑, 1469년 전교서교리
1470년(성종 1) 노모를 모신다며 외직 함양군수 자청.
1471년 봉열대부·봉정대부,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
1475년 중직대부(中直大夫)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
이듬해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 시행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승언(李承彦)·
홍유손(洪裕孫)·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관에 임명
이듬해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내며 사림파를 형성, 훈구파와 대립
1485년 사복첨정 문극정 딸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재혼.
1489년 공조참판·형조판서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을 양성
1492년 사망하여 부남(府南) 무량원 서산(西山)에 묻혔다.
..................조의제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 〈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
그 사실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훈구파와 대립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사림파를 견제하려 하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이종준(李宗準)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으나 중종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직이 회복되어, 1689년 영의정에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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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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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함양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
점필재 흔적이 깃든 곳으로 무오사화를 일어나게 한 누각
점필제는 29세때 과거급제했고 40세에 함양군수(종4품)에 제수.
그 이듬해 유자광이 이 고을에 와서 시를 지어 현판을 붙었는데,
이를 떼어 불사른 사건이 화근이 되어 숙청을 당한 누각이 학사루.
결국 점필제는 귀양살이를 하고 사후 부관참시 당하는 화를 입는다.
신라시대 문창후 최치원 선생이 이 지방에 태수로 재직 시
자주 이곳에 올라 시를 읊은 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학사루
서쪽에 객사가 있어 정무를 보며 그 피로를 풀기 위한 장소.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학사루가 소실되었고
이조 숙종 18년 (1692) 군수 정무(鄭務)가 중수한 기록이 있다.
1910년 이곳에 함양초등학교가 세워질 때도 학사루는 그대로 보존
1979년 현 위치로 이전, 정면 5칸, 측면 2칸 2층 팔작 지붕 목조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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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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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은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제거후 권력 장악.
세조에게 발탁되어 병조정랑이 되고 1468년 별시문과 장원.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 강순을 역모로 몰아 제거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에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
1477년(성종 8) 도총관, 이듬해 탄핵을 받아 가산몰수
공신적(功臣籍)을 삭탈 당한 뒤에 동래에 유배되었다.
1481년 공신 회복되고, 정조사 등극사로 명나라 사신.
1491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1493년 장악원제조로 봉직.
성종 때 신진 사림파가 집권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
훈구세력은 연산군의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 제거 음모.
유자광은 한때 김종직과 사귀고 추모하는 제문도 지었다.
그러나, 학서루 현판 시를 불태운 김종직과 개인적인 원한
1498년(연산군 4)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
훈구세력 외척을 모아 김종직·김일손을 대역죄로 모함.
무오사화로 사람파를 제거 후 숭록대부에 올라 권력 장악.
1506년 연산군 실정에 반감을 품은 중중 반정 세력에 참여.
정국공신 1등으로 무령부원군에 봉해졌다가 이듬해에 탄핵.
관동 유배, 이어 경상도 변군으로 위배되어 눈이 먼 뒤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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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2년 유두류록.
유배지에서 제 수명을 다하기란 극히 어려웠던 이조시대.
제주도 거제도 등등의 유배지는 농사짓기도 척박한 환경.
흉년에도 굶어 죽는 척박한 외딴 섬의 견디기 힘든 외로움.
특히, 유배지에서 유도화 밭을 가꾸는 노역은 괴로운 일.
유도화 뿌리는 사약 원료로 쓰여질 만큼 독성이 강한 나무.
언제 사약받게 될지도 모르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귀양지 생활.
사약원료 유도화 밭을 아침 저녁으로 가꿔야 하는 유배생활.
유도화를 볼 때마다 불길한 절박감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듯.
언제 귀양생활이 끝날지 기약 없이 유배지에 갇혀 지내는 생활.
사약을 받으면 부인은 관비로 끌려가고 가문은 쑥대밭
사대부 안방마님도 하루 아침에 지방관아 방지기로 전락.
방지기 소임은 지방 출장 온 역관들의 객고를 풀어주는 일.
관비로 전락한 안방마님이 하급관리들의 잠자리 시중들기.
출장 온 중국사신 및 역관에게 기생처럼 수청 드는 방지기.
안방마님에서 노비로 전락해 정절마저 지킬 수 없는 처지.
남편은 귀양생활, 아내는 관아의 방지기,
아들은 노비가 전락하고, 딸은 관비 생활.
딸은 관기로 입적되면 대물림 천민 신분으로 살아야 한다.
꽃다운 20대 나이의 딸은 사치 관비가 되어 수청 드는 신세.
양반 규수가 하루 아침에 천민인 관기로 전락한 비참한 삶.
젖 뗀 어린 아들까지 추자도로 보내져 노비로 성장.
안방 마님은 하루 아침에 지방관아의 관비인 방지기.
뿔뿔이 흩어진 가족은 서로 소식만 전해 들어도 다행.
역적의 어린 아들은 추자도로 보내지고
역적의 20대 딸은 수청 드는 관비가 되고
30~ 40대 나이이면 허드레 일을 하는 관비.
양반 가문이라도 하루 아침에 몰락했던 이조시대.
사약은 죄인이 편히 죽을 기회를 주는 고마운 왕명.
하여, 궁궐의 왕을 향해 4배를 올리고 받았던., 사약.
이조 형벌제도에서 유배형은 유배지마다 차이가 많았다.
법전에 명시된 유배의 종류, 유배거리 및, 유배지의 규정,
유배형의 결정단계, 신분에 따라 달랐던 압송관 등 운영방식.
'북천일록' 이항복의 유배 기록은 참 이례적.
유배형을 받은 한 달 후에야 유배 길에 올랐던 이항복.
유배 행차가 이르는 곳마다 수령이 마중 나와 후하게 영접.
기생집에서 머물기도 했을 만큼 대접받은 유배 길도 있었다.
정조 때 대전별감이던 안조원은 유배지 중 가장 먼 외딴 섬,
추자도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괄시를 받다 결국 보리동냥까지
이조시대 귀양살이는 유배지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던 것 같다.
당파싸움으로 유배생활을 하는 선비가 많았던 이조시대.
당시 지리산 청학동은 남해 고도의 외딴 섬보다 이상향.
유배생활로 가문이 무너지기보다 은둔생활이 나았을 듯.
부관참시란 죽은 후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내리던 극형.
즉, 죄인의 관을 쪼개어 시신을 꺼낸 후 목을 베는 형벌.
김종직은 정몽주 길재의 학풍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절의를 중요시하여 도학의 정맥을 이어온 선비.
김종직은 지리산을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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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은 1000m 이상 높이의 6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함양은 옛부터 울고 왔다가 울고 간다고 알려진 유배지.
첩첩산중 두메산골에 갇혔다는 외로움과 서러움에 울고
떠날 때면 맑은 물 푸른 산을 떠나기 아쉬워 울었다는 곳.
김종직은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벼슬길
이어 저작·박사·교검·감찰 요직을 지내며,
'세자빈한씨애책문' '인수왕후봉숭왕책문' 저술.
왕명으로 인수왕후에 관한 글을 쓸 정도의 석학.
1464년 세조의 잡학(천문, 지리 등등) 몰입을 비판하다 파직.
이듬해 경상도병마평사로 기용되며 관인(官人)으로서 본격 벼슬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임명된 후에, 노모를 모신다며 외직 함양군수를 자청.
'당시 함양군수를 자청한 심경은 어떠했을까?'
함양의 대표적 전통 민속주인 지리산 국화주.
늦가을 서리에 흠뻑 젖은 들국화로 빚은 향기
점필제는 서리 맞은 국화 같은 심정 아니었을까?
눈이 밝아지고 근육과 뼈에 좋다는 동의보감 기록.
청혈해독 약리작용, 말초혈관 확장, 고혈압에 효능.
음력 9월 9일 중앙절에 마시면 무병장수 불로장생 효험.
지리산 국화주의 그윽한 향기와도 같은 인물 점필제.
함양군수로 부임 후 지리산행기인 유두류록을 남긴다.
점필제가 유두류록을 작성한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자.
성종은 이조 10대 연산군과 11 대 중종의 아버지이자 성군.
성종이란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면을 안정시켰다는 칭호의 뜻.
성종은 자유분방하게 삶을 살다가 37세 젊은 나이에 운명한다.
성종은 이조 9 대왕(1469∼94) 세조 손자이고, 덕종 둘째아들.
어머니는 소혜왕후(昭惠王后)이고, 비(妃)는 공혜왕후(恭惠王后)
계비(繼妃)는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1469년 13세에 왕위를 계승.
그 뒤 7년 동안 정희대비(貞熹大妃;세조의 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김종직이 유두류록을 쓸 당시 성종은 16세 어린 임금.
성종은 어린 시절부터 궁궐 여인들 치마폭에 싸여 성장.
성종은 30대에 3 왕비와 8 후궁만도 다스리기 벅찼을 듯.
결국 궁궐여인들 암투로 빚어진 폐비 윤씨 사건.
성종은 이조 역사 상 몇 안 되는 성군 중 한 분이다.
세종대왕이 태종의 난세평정 위에 꽃피운 역사라면
성종의 태평성대 치적은 세조의 피바람 위에 꽃피운 열매.
그 뒷 배경에는 세조의 피바람 공신 한명회.
성종은 자신의 용안을 할퀴었다는 죄로 아내인 국모를 폐위시킨 오점을 남겼다
용안은 괜히 할퀴었을까? 성종은 유난히 여색을 밝힌 왕.
거기에는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도 한몫 단단히 거들었다.
'김종직은 왕명으로 인수대비에 관한 글을 써야 할 입장.'
'김종직 같은 곧은 선비로서는 글쓰기가 참 어려웠을 듯.'
자신의 권력이 며느리에게 옮겨 가는 게 싫어 예쁜 후궁 들이기.
그 후궁들을 뒤에서 조정해 국모인 며느리의 세력을 견제하기.
성종은 궁궐의 투기 다툼을 결국 지엄한 국법으로서 다스린다.
첫 왕비 사별 후 맞은 국모 윤씨를 폐위 후 사약까지 내렸다.
후궁들 모함 시샘에 넘어가 세자의 생모인 국모를 죽게 했다.
폐비 윤씨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다툼에 휘말려 희생되었다.
"내 사후 100 년간 폐비의 일을 입에 담지 말라" - 성종의 유언.
그 유언에는 후회와 우려가 가득 담겨있는 듯 보인다.
훗날, 성종의 아들 연산군이 등극하자 피바람 갑자사화.
폐비 윤씨 사건으로 인한 성종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난다.
연산군은 폐위로 왕권정치는 막을 내리고 대신정치 개막.
이조 역사 상 갑자사화는 피바람 당파싸움의 시작에 불과.
대신정치 시대가 열리며 암중모색 권력다툼은 수면위로 부상.
유두류록이 쓰여졌던 싯점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출발점.
왕실에서는 '세조의 비'가 어린 성종을 대신 수렴청정할 때.
왕실과 대신들 간 보이지 않는 권력다툼이 팽팽히 맞설 무렵.
성종의 비는 한명회의 딸이고 한명회는 세조의 가신이다.
수렴청정을 했던 '세조의 비'의 막후 실권자는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세조를 등극시킨 일등공신이다.
성종 당시 이조는 태평성대이면서도 권력 암투가 심했던 난세.
김종직은 암투를 피해 노모 핑계를 대고 한직을 자청.
함양 군수로 내려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후학을 양성.
이조 500년 역사 상 순탄한 왕위 계승은 극히 드물었다.
이조 왕실 역대 왕위 계승 계보를 살펴보면 파란만장하다.
하여, 왕위 등극은 하늘의 뜻이라 할 만큼 피바람의 결실.
대신들 간 권력 다툼도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을 일으킨다.
성종은 역대 왕들의 평균수명(45세)보다 단명(37세)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자리가 결코 편안하지는 않았으리라.
성종은 임금만이 갖는 고독한 스트레스를 여색으로 푼 것 같다.
고려가요 '만전춘별사'는 남녀 간 애틋한 사랑을 표현한 가요.
이 속요는 내용이 음란해 이조 성종 때 사대부들 사이에서 배척.
그러나, 성종은 궁궐기생 소춘풍과 속요 가사 같은 사랑에 빠진다.
어우동 사건은 성종 당시 퇴폐적인 성풍속도를 말해준다.
성종은 태평성대를 이뤘으나 왕 자신도 호색 유흥에 빠져
규방의 일로 물의를 일으켜 폐비 윤씨 사건은 정쟁의 불씨.
그는 세 왕비와 여덟 후궁에게서 19 아들과 11 딸을 낳았는데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며, 중종은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
이조 왕권정치는 성종에 이어 연산군 시대로 막을 내리게 된다.
왕권정치가 무너진 근본 원인은 왕실의 문란한 성풍속 및 폭정.
유두류록은 이조 왕실이 섭정으로 혼란기인 성종 3년 산행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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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韓明澮]........................
1415(태종 15)~1487(성종 18). 이조시대 전기의 문신.
본관 청주(淸州). 자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
할아버지는 예문관제학 상질, 아버지는 증영의정 기(起)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이적의 딸. 딸이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 즉 한명회는 두 왕의 장인이었던 권력자.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하고 권람과 더불어 산천을 주유.
1452년(문종 2) 문음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다.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의기투합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과 함께 정권을 장악
계유정난 때 참모로 큰 공을 세워 군기녹사에 임명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좌부승지로 승진했으며,
그해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우승지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사육신 주살
1457년 이조판서·병조판서가 되었고 상당군(上黨君)
1459년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체찰사(體察使)
1461년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판병조사(判兵曹事) 겸임.
1466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병으로 사임했다.
1467년 이시애 반란 당시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된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승정원에서 숙직하며 서정을 결재.
1469년(예종 1)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임했다.
성종 즉위 후 병조판서, 대궐 동서쪽에 군영을 설치
1484년 고령으로 벼슬을 사임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성종으로부터 궤장(杖)을 받고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성(忠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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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1454(단종 2)~1488(성종 19). 이조시대 전기의 종실.
이름은 정().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
추존된 덕종(德宗) 맏아들이며, 성종의 형이다.
빈은 병조판서 박중선(朴中善)의 딸 상원군부인(祥原君夫人).
1457년(세조 3) 아버지가 죽자 할아버지 세조의 사랑을 받는다.
1460년 월산군, 1468년 잘산군(성종)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
1471년(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지고,
이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
그의 좌리공신 책록은 성종의 장인 한명회(韓明澮) 등
권신들이 당시 종실의 대표격인 구성군 준을 제거하고
그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취한 조처의 일환이었다.
왕위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던 그는
권신들의 농간을 겪자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1473년 덕종이 추존되어 부묘되기 전
덕종의 별묘를 세우고 봉사(奉祀)했다.
어머니 인수왕후 병을 간호하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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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무서운 권력다툼에서 벗어나고팠던 선비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는 그러한 심경이 담긴듯 하다.
김종직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안주할 이상향을 찾은듯.
당시, 이상향이라기보다는 은둔지에 가까운 청학동.
한번 들어가면,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외딴 곳
김종직은 권력다툼에서 벗어나려고 함양군수로 부임한 듯..'
그는 반야봉과 청학동을 못 가본 아쉬움 안고 중도 하산.
그의 애민사상과 선비의 절개 그리고 유교관념이 흥미롭다.
아울러, 지리산 곳곳마다의 불교탄압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
성종은 재혼녀의 자녀 관직제한 및 불교 억제 정책.
이조시대 여성의 지위를 현격하게 떨어지게 한 주인공.
유두류록은 533년전과 현재를 연결해주는 타임머쉰 같다.
지금부터 기록 속으로 들어가 이조시대 지리산을 살펴보자.
함양군수로 원님 고을살이를 나온 김종직.
김종직(1438~1498)이 45세 당시 산행기록.
제자인 유호인 조위 한인효 등과 함께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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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옛 성현의 지리산 산행기.
1472년 유두류록 코스로 산행하는 등산 인구가 많아졌다.
하여, 유두류록 원문을 알기쉽게 풀이해 해설을 겻들인다.
이조시대 유두류록은 정여창, 김일손, 이동항 등 70 여종.
수십명의 악공, 기생, 노비를 대동, 사찰과 암자에서 기거.
그당시 스님들은 없어서는 안될 산행 가이드.
사찰 암자에 머물며 풍류를 즐긴 이조 사대부들.
당시, 지리산의 사찰들은 오늘날 산장 역활을 한듯.
하여, 사찰에서 사찰로 이어진, 오늘날과 다른 등산로.
..........김종직의 유두류록 코스.........
함양관아→엄천→화암→지장사→선열암→
신열암→고열암(1박)→ 청이당→영랑재→
해유령→중봉→천왕봉→성모사(2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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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은 지리산 동북부 자락의 지명을 많이 언급
함양 인근 지명들이 탐구산행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유두류록 기록 지명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엄천
신라 때 국가사찰 엄천사에서 유래된 지명 엄천.
지장사, 환희대,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독녀암,
향로봉, 미타암 등의 옛 지명도 옛 지명 탐구의 대상.
현재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마을 이름'은 절터.
남명은 임진왜란 20년 전부터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왜의 침공을 일찌기 경계 곽재우 등 50 여 제자 의병장 배출.
남명은 40여 벗들과 지리산을 12번 째 오른 후 유두류록 작성.
그러나, 이조시대 지리산 산행 지침서는 김종직의 유두류록.
오늘날까지 그가 남긴 유두류록은 산행 지침서로서 인기 높다.
그가 1472년 지리산 유람을 떠나는 길가 풍경이 자못 흥미롭다.
詩
말방울 울리며 가는 마천길
'말방울 울리며 내닫는 마천길 들머리에
길손의 행렬이 길게 따르도다
그늘진 골짜기에 찬바람 몰아오고
벼랑의 단풍은 햇빛에 선연하다
신모사당은 눈 속에 파묻혔고
우뢰 소리는 용연에 깊이 움추렸네'
김종직 作
김종직은 성종 3년(1472) 음력 8월 14일 아침,
함양성을 나와 제자들과 함께 지리산에 올랐다.
유호인 조의 한인효 제자들, 함양 관아의 관원들
길잡이 두 스님, 마부, 말바리 등 행렬이 길었다.
그는 사근역 마을을 지나 엄천(엄천 남호리)에서
휴천계곡을 50리 거슬러 올라 고열암에서 첫날 밤.
다음날 의탄마을에 이르는 벼랑길 타고 마천 도착.
의탄 못 미처 계곡 중 으뜸 명소인 용유담에 이른다.
김종직의 시에 나오는 '용연'은 용유담을 말한 것이다.
마천은 지리산 북쪽 관문(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전라도 남원 사람들은 "당벌" 이라 부드러운 억양.
경상도에서는 "땅벌"이라는 억센 억양으로 발음한다.
그것은 지리산의 산신당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신당>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당마을로 부르다가
언젠가 이곳에 장터가 생기며 '당벌장터'가 되었다.
마천곶감, 마천목기, 마천 산나물, 마천임청(산벌꿀),
마천 문종이로 유명했고 지금도 마천 곶감은 유명하다.
500년 전 김종직은 마천 일대를 무릉도원으로 표현했다.
<'오늘날 마천골에 포함된., 의탄마을.'>
"서너 곳의 모롱이를 돌아 이르는 곳에
깊숙하고 한적한 동부(洞府)가 열렸다.
숲이 해를 가리고 솔겨우사리와 댕댕이덩굴이
서로 얽혀 나무를 덮고 있는 아래에슨 시냇물이
바위에 부딪히며 꺾여 힘찬 소리를 낸다.
그야말로 동산(옛 중국의 명승지)에 와 있는 성 싶다..
닭과 소 등을 기르며 나무를 베어 내고 밭을 일궈
벼, 기장, 콩과 삼을 심고 살면 무릉도원이 될 것 같다."
김종직은 그곳에서 발길을 멈춰 지팡이를 두드렸다.
앞서가던 유호인에게 함께 은둔하자는 속마음 표현.
"그대와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 사는 것이 어떠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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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하루 전 사근역에 있는 월명이 무덤을 지나칠 때,
유호인과 둘이 슬픈 역녀의 넋을 회상하는 시를 남겼다.
(영남이 고향인 김종직은 월명이 전설을 잘 알고 있었던듯).
'들풀 푸른 무덤 위에
혼백은 나비로 날고 있네.
무덤 위에 들풀만 어지럽게 푸르렀고
나그네가 슬퍼 노래 부른다
오늘처럼 달도 숨은 밤에는 여우가 울고
봄을 만난 혼백은 나비로 날고 있네.'
塚上靑靑連理枝
行人爲唱華山畿
如今月黑狐狸嘯
應是春魂化蝶飛
- 김종직 作 -
유호인도 한 수를 지어 같이 읊었다.
'월명이 무덤 위에 달빛은 밝아 푸르고
한식날이 찾아와도 잡초만 무성하네.
간밤에는 영혼의 소리 하도 은은하더니
봄바람 지나간 곳에 두견화만 피어네.'
- 유호인 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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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록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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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안내 : 해공, 한백인, 법종
도우미 : 하인과 짐꾼들, 말.
옷차림 : 삿갓, 짚신, 지팡이.
여벌 옷 : 원님 만 무명 솜옷.
코스 : 함양, 엄천, 화암, 환희대,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청이당,영랑재,중봉,천왕봉, 영신봉,백무동,등구재, 함양
산행일정 : 1472. 8.14 - 8.15 - 8.16 - 8.17 - 8.18
4박 5일 숙박지 : 고열암, 성모사, 향적사, 영신사.
추정 코스 : 함양. 하봉. 중봉. 천왕봉. 세석고원. 백무동. 마천
현재 : 모두 사라진 사찰(고열암, 성모사 터, 향적사 터, 영신대)
나는 영남에서 성장했다.
두류산은 바로 우리 고장의 산.
그럼에도 이곳 저곳으로 벼슬살이.
세상 일에 골몰하다 보니 불혹의 나이,
아직까지 두류산을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1471년 봄에 함양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경내에 있는 두류산은 새파랗게 우뚝 솟아
고개들면 보였으나, 흉년이 들고 사무가 바빠
2년이 넘도록 한번도 그곳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유호인, 임정숙과 두류산 이야기를 나누면
그곳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늘 간절하였다.
마침 여름에 조위가 관등에서 와
나와 함께 <예기>를 읽고 있었다.
가을이 되자 부모 곁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떠나기 전에 지리산을 한번 구경가자고 청하였다.
나 역시 허약한 증세가 날로 더해가고
요즘 들어 다리 힘이 갈수록 떨어지기에
금년에 못가면 내년을 기약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때는 바야흐로 가을철이고
장마철 습한 기운도 이미 걷혔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에서 달을 구경하고,
새벽 닭이 울면, 해가 뜨는 것을 구경하고,
밝은 아침에 또 사방을 두루 볼 수 있을 것이니
일거양득이라 드디어 길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이에 극기를 불러 태허와 함께
<수친서>에 적혀 있는 것을 참고
산행 떠날 도구를 대충 준비하였다.
......................<主>...............................
수친서 내용은 이륙 作 1463년 8월 '유 두류산록'
김종직은 산행 전 '이륙'이 쓴 청파집을 참고한 듯.
1472년 산행 전 수친서에 지리산에 관한 정보를 기록.
............................................................
음력 8월 14일
덕봉사 중 해공이 길안내를 맡고 한백원이 따라왔다.
엄천을 지나 화암에서 쉬는데 중 법종이 뒤따라 왔다.
길을 자세히 알기에 그에게도 길안내를 하도록 하였다.
지장사에 도착했다.
길이 가닥이 났으므로
말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올라갔다.
골짜기와 숲이 맑고 깊숙하여
벌써 경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마장 쯤 가니 환희대라는 바위.
태허와 백원이 그 마루턱에 올랐다.
천길 아래로 금대암, 홍연암, 백련암 절.........절골
먼저 선열암을 찾았다.
암자는 가파른 절벽 아래.
그 아래 맑은 샘 두 개 있었다.
담장 밖 바위 홈으로 물이 흐른다.
물방울이 오목바위로 떨어져 괴었다.
마치 깨끗한 못과 같았다.
그 틈에는 몇 마디쯤 되는 적양과 용수초
듬성듬성 나 있는 곁에는 돌계단이 나 있고
등넝쿨 한 가닥이 나무에 매어져 있었는데,
그것을 붙잡고 묘정암과 지장암에 오르내렸다.
"한 비구승이 참선하면서 우란분을 만든 뒤
구름처럼 노닐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법종.
지금은 돌 위에 오이와 무가 심어져 있고
두어 되 곡식을 찧을 만한 절구통이 있을 뿐.
다시 신열암을 찾았다.
중이 없는 빈 암자였다.
솟은 벼랑을 등지고 있다.
동북쪽에 솟은 독녀암 바위. ...........함양 독바위.
................해설...............
운서리 운암마을에서 개울 건너
왼쪽 계곡따라 3.2㎞ <함양 독바위>.
'함양군 빨치산 탐방로'의 이정표,
노장대 마을 지나 오른쪽 능선 바위
서쪽 법화산과 그 아래 임천강이 보이는
<다섯 거대한 암괴 >가 있는 곳이 독바위.
...................................................
그 높이가 천 자나 되고
다섯 가닥으로 갈라졌다.
옛날 어떤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다 돌을 포개어 집을 만들고
혼자 살면서 도를 닦은 뒤 공중으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때문에 그런 바위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 법종이 한 말 -.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있었고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었다.
그곳에 올라 가려면 사다리를 놓고
잣나무를 붙잡고 바위를 돌고 돌아야 하는데,
등과 배가 벗겨진 뒤에야 오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목숨을 내건 자가 아니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따라온 아전 옥곤이와 용산이는 벌써 올라가
발을 구르며 우리를 향해 보란드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지방(현 경남 산청군)을 오가며
이 바위를 바라보았을 때, 하늘을 받치는 듯 높았다.
지금 이곳에 와보니 몸이 오싹하고 황홀해
내가 이 세상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조금 서쪽으로 돌아 고열암에 이르렀다.
현재 사라진 사찰로 점필재 일행 일박처.
해는 이미 저문 서쪽에 의논대가 있었다.
극기 일행은 쳐져 혼자 지팡이 짚고 삼반석.
발 아래에 향로봉과 미타봉이 내려다 보였다.
법공의 말에 의하면, 절벽 아래 석굴이 있단다. ..........선녀굴.
옛날 이 석굴에는 노숙과 우타가 살고 있었는데,
세 승려와 함께 이 돌에 앉아 불교의 진리를 득도
그래서 의논대라는 바위 이름이 붙은 곳이라 한다.
조금 뒤 중 하납이 와서 합장하며 말을 건다.
"듣자니 원님이 구경왔다는데 어디 있는가?"
법공은 눈짓을 하여 말을 삼가하라 시늉하니,
이를 눈치 챈 듯 하납은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서 나는 장자의 말을 인용하여 위로하였다.
"불을 쬐고자 하는 자는 부엌을 다투고,
쉬고자 하는 자는 자리를 다투는 법일세.
이제 그대가 한 늙은이를 만났으니
누가 원님인 줄을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법공 등이 모두 웃었다.
첫날이라 시험삼아 20리 길을 걸었다.
피곤하여 잠에 빠졌다가 한밤중에 깼다.
달빛이 산봉우리를 삼켰다 뱉었다 하고
구름이 피어오르기에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8월 15일
"제가 이 산에서 오래전부터 살면서
구름의 형상으로 점을 쳐보곤 하였는데,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새벽에는 날씨가 더욱 흐렸는데
중의 그 말에 모두들 기뻐하였다.
우리 일행은 짐꾼을 갈라서 보낸 뒤
그 절에서 나와 서둘러 길을 떠났다.
푸른 등넝쿨과 깊은 대숲 속에는
저절로 말라 죽은 덩치 큰 나무가
냇가에 넘어져있어 다리가 되었다.
쓰러진 나무 중에는절반이나 썩었지만
아직 가지가 땅을 막고 있어 말탄 듯 했다.
머리 숙이고 그 아래로 나와 한 고개를 넘었다.
"여기는 앞으로 넘을 9 중 첫 번째 고개입니다"
법공의 말을 듣고 서너 고개 넘으니 골짜기가 보였다.
골짜기 주위는 넓고 깊숙하며 수목이 햇빛을 가리었다.
다래덩굴이 얽혀있고 시냇물이 구비치는 소리도 들렸다.
골짜기 동쪽은 산등성이지만 그렇게 험준하진 않았다.
서쪽은 지세가 점점 낮아져 20리 길을 걸으면 의탄촌.
(의탄촌 = 현재,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에 해당하는 곳.)
.............主 : 의탄촌 (현재 의탄 마을)................
지리산 북쪽 관문을 통틀어 부르는 함양군 마천면.
천왕봉 및 중봉 준령 계곡 물줄기가 하나 되는 마을.
무더운 여름날 마천은 옛부터 피서 인파가 몰리는 곳.
마천의 으뜸 피서지는 칠선계곡의 들머리인 추성동
한신계곡 깃점 백무동, 임천과 엄천을 가르는 용류담
그밖에 벽소령 아랫마을 음정, 양정, 하정의 삼정마을
창암산, 추성동에서 하봉 가는 길목인 광점동, 얼음터,
국골, 지리산 최대의 계곡인 칠선계곡 일대가 마천이다.
마천면 추성동으로 가다보면 임천을 가로지르는 의탄교.
다리를 건너 의탄마을은 천왕봉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
..................................................................................
만약 닭과 개, 소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밭을 개간한 뒤
서속, 기장, 삼, 콩을 심고 살면 무릉도원 부럽지 않을 듯.
나는 막대로 시냇돌을 두들기다 극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언제나 그대와 더불어 함께 숨어 이곳에서 놀아볼거나"
여기 온 기념으로 바위에 이름을 썼다.
아홉 고개를 다 지나 능선 따라 걸었다.
지나가는 구름이 나직이 삿갓을 스쳐간다.
풀과 나무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젖어 있다.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바로 진주 땅이다.......쑥밭재
안개가 자욱하여 멀리 바라볼 수 없었다.
이윽고 판자로 지은 청이당에 도착하였다. .......쑥밭재.
............................................................
(진주가 보이는 산등성이의 당집= 청이당.)
(산청 쑥밭재로 내려가는 고개 옆 물길 부근)
...............................................................
네 사람이 각각 당 앞에 바위에 앉아 쉬었다.
여기서부터 영랑점까지는 길이 극히 험하였다.
'뒷사람은 앞 사람의 발 밑만 보이고
앞 사람은 뒷사람의 이마 만 보인다.'
- <봉선의기> 기록에 나오는 곳 -
나무뿌리를 잡고야 오를 수 있다.
정오가 지나 비로소 영랑점에 올랐다.
함양에서 보면 가장 높고 험준한 봉우리.
여기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이 올려다보였다.
이곳을 영랑점이라 부르는 것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인 영랑이
삼천 명의 문도를 거느리고 유람 중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말봉 또는 두류봉.
그 옆에 만길 절벽 우뚝 솟은 소년대.
(한신계곡 끝에 있는 절벽 이름인 듯.)
혹시 그 소년대는 영랑의 문도 아닐까?
바위를 감싸 안고 밑을 보니까 떨어질 것 같았다.
따라온 사람들에게 그 곁에 가까이 가지말라 했다.
때마침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해가 아래로 비쳤다.
그러자 산의 동쪽과 서쪽의 광활한 계곡이 나타난다.
계곡에는 잡목은 없고 모두 삼나무, 회나무, 소나무뿐.
그중 3분의 1은 말라 죽어 줄기만 앙상하게 남았고
간간이 단풍이 들어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산능선에 있는 것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
가지가 모두 왼편 한쪽으로 쓰러져 자라 있고
바람불자 가지는 굽어진 채 머리칼처럼 나부꼈다.
이곳은 잣나무가 매우 많은 곳이다.
가을이면 잣을 공물로 따다 바친단다.
그러나 올해에는 열매맺은 나무가 없다.
그럼에도 공물을 받으면 백성들은 어찌 될 것인가?
수령인 내가 보았으니 참으로 다행히 아닐 수 없다.
서대초와 유사한 풀밭이 있었다.
부드러워 깔고 누웠다 할 만 하며
주변 곳곳마다 모두 다 그러하였다.
청이당에 오기 전까지 오미자가 울창한 숲
여기 오니 독활과 당귀 만이 보일 뿐이었다.
해유령을 넘자 길가에 있는 선암이란 바위.
법종이 그 바위의 유래에 관해 말해 주었다.
"아주 옛날 바닷물이 땅을 뒤덮었을 때
이 바위에다 배를 붙들어 매었다는 전설.
게가 이 고개를 기어서 넘어갔기 때문에
<선암 : 배바위> 이름이 붙여졌답니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대 말을 믿는다면
그때의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부둥켜 잡고 살았을 것이 아니냐?"
드디어 우리 일행은 다함께 중봉에 올랐다.
우뚝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은 모두 돌이었는데,
유독 우리가 오른 봉우리만 흙으로 덮혀 있었다.
판판하고 넓직하여 말을 달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내려온 후 말을 쉬게 하였다.
바위에 마실 수 있는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었다.
가뭄이 드는 해 이곳 주민들이
이 바위에 올라 발을 구르며 돌면
반드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난 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어 시험을 해 보았더니,
그 소문대로 제법 효험이 있었다.
오후에 천왕봉에 올랐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온누리가 어둡고 안보였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 묘에 들어가 빌었다.
조그마한 부처에게 날씨가 개이게 해달라는 듯.
나는 처음에 장난치는 줄로만 알았다.
그랬더니 속설에 이렇게 하면 하늘이 갠다고 하였다.
하여 나도 의관을 바르게 입고 세수하고 돌길을 더듬어
사당에 들어가서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성모에게 빌었다..........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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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찌기 공자께서 태산에 올라 구경한 일과
한퇴지가 형산에서 노니시던 뜻을 사모하였으나,
직무에 매인 몸이라서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금년 8월에 남쪽 경내의 수확을 살펴보다가
드높은 봉우리에 가서 미력한 정성이나마 드립니다.
드디어 진사 한인효, 유호인, 조위 등과 함께
구름사다리를 밟고 이곳 사당에까지 왔습니다.
하오나 비를 다스리는 귀신이 마술을 부려
구름이 김서린 듯 깔려 황당할 뿐만 아니라
산수유람의 좋은 기회를 놓칠까 두렵습니다.
옆드려 비오니 성모께서 이 술을 흠향하시고
신통력을 발휘하여, 저녁 안으로 날씨가 개어
달빛이 대낮과 같고 내일 아침에는 만리가 트여
산과 바다가 확연히 드러날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러면 우리들이 좋은 구경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어찌 그 큰 은혜를 잊으오리까."
...............................................
이렇게 제사를 지낸 뒤 다함께 신위 앞에 앉아
술 몇 잔씩을 나누어 마신 다음에야 일어섰다.
성모사당은 단지 3칸으로 엄천리 사람이 고쳐 지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못을 단단히 박은 판자집이었다. .....성모사 터.
두 중은 벽에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돌 성모상의 얼굴은 예뻤고 머리엔 쪽
분칠한 얼굴로 이마에는 파손된 자국
그 이유를 중들에게 물었다.
1380년에 운봉 인월역에서 있었던 황산대첩 당시
태조 이성계에게 쫓기던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칼로 찍어 놓은 것을 뒷날 다시 손질했다는 것이었다.
동편 오묵한 돌무더기에
해공이 빌던 부처가 있었다.
이는 국사의 상으로,
민간에서는
성모의 음탕한 남편으로
보고 있다.
성모를 어떤 신으로 보는지 중들에게 물었다.
두 중은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라 대답했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인도와 우리나라는 여러 나라로 가로 막혀 있는데,
인도의 가유국 부인이 어찌 이 땅의 신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일찍이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성모가 선사에게 명한 것에 대한 주석 -
"지리산 천왕은 고려 태조의 비 위숙왕후"
고려 사람이 선도성모의 이야기를
왕실의 혈통을 신성화하기 위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는 기록.
그 기록 또한 증빙할 수 없거늘,
허무맹랑한 중말을 어찌 믿을까?
또한 성모를 마야부인이라 하면서
국사를 그의 음탕한 남편으로 만들어
욕을 먹이니 불경스럽기 짝이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음산한 바람이 몰아쳤다.
성모사의 지붕에 씌워놓은 옷이 모두 젖었다.
네 사람이 모두 사당 안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 두꺼운 솜옷을 껴입었다.
하인들이 온 몸을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어
큰 나무 서너 그루를 가져다 불피우고 쬐게 하였다.
어느덧 밤이 깊었다.
달빛이 어렴풋이 비쳤다.
반가워 일어나보니 다시 구름 속으로 숨어 버렸다.
흙벽에 기대어 사방을 바라보니 천지가 아득하였다.
마치 큰 바다 한가운데서 조그마한 배 하나를 탄 듯.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며
파도에 빠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세 사람에게 말하였다.
"비록 한퇴지 같은 정성과
왕저 같은 도술이 없을지라도
그대들과 함께 우주의 근원을 타고
혼돈의 원시세계에 떠노니
어찌 위대하지 아니한가?"
8월 16일
비바람이 아직도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먼저 하인을 향적사(장터목 인근)로 보내어
밥을 짓고 내려갈 길을 찾은 후 돌아오라 했다.
정오가 지나서야 비가 조금 그쳤다.
길이 미끄러워 부축을 받며 내려왔다.
쇠사슬 박은 길이 있었지만 위태로웠다.
돌 구멍을 뚫고 힘겹게 향적사에 도착했다.
향적사에는 중이 살지 않은 지가 이미 2년이 지났다.
계곡 물은 아직도 나무 홈통을 타고 물통으로 떨어지고,
문 자물쇠와 향반의 불유가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깨끗이 청소를 한 뒤 향불을 피우고 안으로 들어가 쉬었다.
어둠이 깔릴 무렵 천왕봉으로부터 역풍이 불어와
눈 감짝할 사이에 먹구름이 흩어지고 먼 하늘에서
간혹 구름사이로 지는 해의 노을 빛이 비치곤 했다.
나는 기쁜 나머지 손짓을 하며
문 앞에 있는 마당바위로 나갔다.
멀리 구물거리면서도 감도는 살천.
여러 산과 섬이 반쯤 드러나 보였고,
혹은 산봉우리의 이마만 드러나 있었다.
마치 장막 안에 있는 사람의 상투 같았다.
정상 봉우리는 몇 겹으로 구름에 싸여 있었다.
그래서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성모사 옆에 흰 깃발이 남쪽을 가리키며 나부꼈다.
그림 그리던 중이 그 위치를 나에게 알리려고 한 듯.
남북의 바위를 두루 보면서 달 뜨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동쪽이 밝아 오기도 전에 추위가 느껴졌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관솔불을 피워 향적사 방안을 훈훈하게 했다.
잠자리에 누운 한밤에야 달과 별이 환히 밝았다.
8월 17일 (천왕봉 일출,세석, 영신대 )
새벽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자 눈부셨다.
일행은 내가 지쳐 더 못갈 것으로 여겼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여러 날 동안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다가 갑자기 갠 것을 보면
하늘이 나에게 많은 혜택을 준 것인데,
지금 정상을 눈앞에 두고 오르지 않는다면
평생 품었던 소원을 끝내 이루지 못할 것 아닌가.
새벽밥을 재촉해 먹고 옷자락을 걷어붙인 뒤
지름길로 석문(현재 : 통천문)을 거쳐 올랐다.
발에 밟히는 풀과 나무마다 얼음이 맺혀 있었다.
성모사에 들어가 다시 잔을 올리며 감사드렸다.
"오늘 천지가 맑게 개어 산천이 활짝 열린 것은
신께서 도운 덕택이니, 깊이 감사드리는 바이다."
그런 다음 극기와 해공과 함께 북쪽 봉우리에 올랐다.
태허는 벌써 앞장을 서서 먼저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비록 나는 기러기일지라도 우리 위로 날지 못할 것 같았다.
때마침 비가 막 개어 사방에 구름 한 점 없고
탁 트여 끝이 보이기에 내가 일행에게 물었다.
"무릇 먼 곳을 보는 데에 요령이 없으면
나뭇꾼들이 바라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쪽을
그 다음에는 남쪽과 서쪽을 보되,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눈을 옮겨
주위를 바라보며 알아야 옳지 않은가?"
그랬더니 해공이 곳곳마다 자세히 설명했다.
"이 산은 북에서 달려와 남원에 이른다.
그곳에서 처음 솟은 봉우리는 반야봉이고
그 동쪽으로 몇 백 리를 뻗어 천왕봉에 와서
다시 높이 솟아나 북으로 서리다가 끝난다.
그 사면으로 뻗은 곁봉우리와 골짜기는 다투듯 흘러내려,
제 아무리 능력있는 자라도 그 수효를 모두 헤아릴 수 없다.
끌어당기 듯 둘러쳐진 성은 함양의 성 같고,
푸르고 누런 무지개가 가로지른 곳은 진주 강물.
물고동이 점을 찍어 놓듯 비끼어 곧장 솟은 남해
그리고 그 뒤로 거제의 여러 섬이 아닌가 싶다.
산음, 단계, 운봉, 구례, 하동 고을들.
모두 겹겹 산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다.
북쪽의 가까운 산은 황석산, 취암산이고.
먼산은 덕유산, 계룡산, 주우산, 수도산, 가야산.
동북쪽 가까운 산은 황산, 감악산,
먼 산은 팔공산, 청량산 등등이다.
동쪽의 가까운 산은 도굴산, 집현산,
먼 산은 비슬산, 운문산, 원적산이다.
동남쪽의 가까운 산은 와룡산이고,
남쪽의 가까운 산은 병요산, 백운산이다.
서남쪽의 먼 산은 팔전산이고,
서쪽의 가까운 산은 황산, 무등산,
변산, 금성산, 위봉산, 모악산, 월출산.
서북쪽의 먼 산은 성수산이다.
이들 여러 산은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용이나 범 모양새 같기도 하며,
음식 접시를 괴어 놓은 듯, 칼날인 듯..
다만 동쪽에 있는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
주변의 여러 산에 비해 자못 우뚝 솟아있다."
계십령 이북은 푸른 기운이 하늘 가득.
대마도 이남은 바다 기운이 하늘에 닿아
시력이 끝까지 미치지 못해 분별할 수 없다.
그래서 이같은 해공의 설명을 극기로 하여금
기록할 수 있는 것만 위와 같이 기록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서로 돌아보면서 자축하였다.
"예로부터 이 천왕봉에 오른 자가 있었겠지만
어찌 우리들처럼 통쾌하게 본 사람이 있겠는가?"
천왕봉 정상을 내려와 돌층계에 앉아
술 서너 잔을 주고 받으니 정오가 지났다.
멀리 영신봉의 좌고대를 바라보니 아직도 까마득하였다.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석문을 뚫고 내려와 중봉에 올랐다.
이 역시 흙으로 된 붕우리였다.
함양에서 엄천 쪽으로 오르면 북쪽의 둘째 봉우리가 중봉,
마천쪽에서부터 오르면 시루봉(제석봉)이 첫째 봉우리이나
이 역시 천왕봉 다음으로 두 번째 높은 봉우리이므로 중봉이다.
이곳부터는 계속 능선을 타고 갈 수 있다고 한다.
그 사이에는 우뚝 솟은 10여 개의 봉우리가 있다 한다.
모두 올라갈 수 있고 천왕봉 못지 않으나 이름이 없단다.
옆에 있던 제자 극기가 나에게 봉우리마다 이름을 지으란다.
"증거가 없어 믿지 않을 터이니 이름 지어야 소용 있겠는가?"
숲에는 지팡이를 만들 만한 지팡이가 많았다.
그래서 하인으로 하여금 미끈하고 곧은 것만 가려
배어오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이나 되었다.
시루봉을 거쳐 저여원(세석)에 이르렀다.
길가의 단풍나무가 마치 문처럼 휘어져 있어
지나는 사람이 허리를 굽히지 않고 지날 수 있었다.
산마루에 펼쳐진 평원은 평탄하고 광활하여 5, 6리 정도.
수풀은 무성하고 샘물이 주위에 흘러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수도 있는 곳이다. ........음양수.
시내 위쪽에는 조그마한 초막이 보이는데,
나무로 울타리를 두르고 흙으로 만든 아궁이....화전민 터.
바로 매를 잡는 움막집이었다.
나는 영랑점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골짜기 곳곳에 설치한 매잡는 덫을 보았다.
늦가을이 아니었기에 매를 잡는 자도 없었다.
매는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이다.
그런 새가 어찌 이처럼 험준한 곳에 덫을 놓고
움막에서 자기를 노리는 자가 있을 줄로 알리오.
먹잇감을 보고 탐 낸 나머지 마침내
그물에 걸려 끈과 방울을 차게 되니,
이런 점은 사람이 교훈을 삼을만 하다.
나라에 바치는 매는 한두 쌍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를 가지고 놀려는 자들
헐벗고 굶주린 자로 하여금 눈보라를 맞게 하며
천길의 산봉우리에 엎드려 있게 하니, 차마 못할 일
어진 마음이 있는 자라면 어찌 그 고생을 하게 하리오.
저녁에 험준하게 깎아지른 창불대에 올랐다
그 아래는 바닥이 없었고 그 위는 초목도 없다.
단지 진달래 몇 그루와 영양의 똥이 있을 뿐이다......<영신대>
그 아래로 두원관, 수관과 섬진강의 끝을 굽어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겹쳐 있어 매우 기이하였다.
옆에 있던 중 해공이 여러 골이 모인 곳을 가리킨다.
"저기는 신흥사 골짜기로 절도사 이극균이
호남의 도적, 장영기와 싸우던 곳 입니다"
장영기는 좀도둑이었다.
이같은 험준한 곳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극균도 날뛰는 장영기를 막아내지 못했다.
하여 졸지에 장흥군수가 공을 세우게 되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노릇.
또 해공은 악양 고을의 북쪽을 가리킨다.
"저기가 청학사가 있는 동네입니다"
'아! 저곳이 신선이 살던 곳이란 말인가?'
저곳은 인간이 사는 곳과 멀지 않은데,
미수 이인로는 어찌 찾지 못하였을까?
일 좋아하는 자가 이인로 이름을 사모해
절을 지어 그의 명칭을 붙힌 것은 아닐까?
또 해공은 손가락으로 악양 동쪽을 가리켰다.
"저기가 쌍계사 골짜기입니다.
고운 최치원이 일찍이 그곳에서 노닐며
돌에 새긴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입니다"
고운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
기개는 있지만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다.
중국에서만 불우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용납되지 못하였다.
드디어는 인간 세상 밖에 은둔하였다.
산수 깊고 고요한 땅은 그가 놀다 갔으니,
세상 사람들이 신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영신사에서 잤다.
그곳에는 단지 한 명의 중이 있었을 뿐이다.
절의 북쪽 비탈에는 가섭의 석상이 하나 있었다.
세종대왕 때 늘 내관을 보내 향불을 피웠다고 한다.
석상의 이마 한쪽이 파손되어 있었다.
그 역시 왜구가 칼로 깍아놓은 것이란다.
왜구는 참으로 잔인한 오랑캐!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도 모자라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칼질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돌일진대,
어찌 사람의 형상이라고 해서
저렇게 칼질을 해댈 수 있는가.
가섭상 오른팔에는 불에 탄 것 같은 반점이 있었다.
세계가 파멸될 때 일어난 불에 탄 것으로 조금 더 타면
미륵의 세상이 된다는데 반점은 본래 있었던 자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당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미래의 이익을 갈구하는 자들이 앞다투어 시주를 한다.
중들이 그렇게 만드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상을 모신 전각 북쪽 봉우리에 우뚝 선 바위 두 개.
이른바 좌고대이다. 하나는 아래가 뒤틀리고 위가 뾰족
머리에는 너비가 한 자쯤 되는 네모난 돌을 이고 있었다.
중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 예불하는 자는 효험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하인으로 따라온 옥곤과 염정이 그곳에 올라 절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사람을 보내 꾸짖은 뒤 내려오도록 했다.
어리석은 자들이 저렇게 목숨까지 걸면서 그러는데,
이것만 보아도 중들이 백성을 속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신사 법당에 원나라의 중 몽산화상 그림이 걸려있다.
"두타 제일로 번뇌를 없애고
밖으로 인간 세상의 먼지를 떨치고
안으로도 티끌이 없네. 님 먼저 득도하고
맨 뒤에 입멸하였도다,
설의 계산이 천추에도 썩지 않으리"
그 위에 몽산을 찬한 글이 있었다.
영신사 동쪽 섬돌 아래는 영계
서쪽 섬돌 아래는 옥천이 있었다.
물맛이 매우 감미로웠다.
그 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 중냉천이나
혜산천물도 이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샘 서쪽에 무너져가는 절이 오똑 서 있었다.
옛날의 영신사였다.
그 서북쪽 깍아지른 봉우리에는 작은 탑이 하나.
섬세하고 아름다웠으나 그 역시 왜구가 쓰러뜨렸다.
그 뒤 다시 탑을 쌓고 그 가운데
철근을 박았는데 몇 층이 없어졌다.
8월 18일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문 열고 섬진강을 보았다.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참 그 광경을 지켜 보았는데
안개가 판판히 깔려 그리 보였다.
우리 일행은 서둘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절 서북쪽으로 출발해 고개마루에서 쉬었다.
반야봉을 바라보니 약 60리쯤 되어 보였다.
그러나 두 발이 부르트고 근력이 빠진 상태.
반야봉에 가보고 싶었지만 강행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지름길로 곧바로 하산하였으나,
험해 나무 뿌리와 돌 모서리를 딛고 내려왔다.
하산하는 수십 리 길이 내내 모두 그러하였다.
동쪽을 보니 천왕봉.
마치 코 앞에 있는 듯.
대나무에는 간혹 열매
사람들이 대부분 따갔다.
둘레가 백 뼘이나 될 정도로 큰 소나무가
바위 사이 사이에 즐비하게 서서 있었다.
이런 광경은 전에 보지 못하였다.
드디어 우리 일행은 험한 곳을 모두 내려왔다.
두 골짜기 물은 하나로 합해진 뒤 요란한 소리.
산기슭을 진동시켰고 맑은 못에 고기가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물을 한 움큼 떠 양치질을 하였다.
그런 다음 절벽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걸었다.
기분이 상쾌하였다. 골짜기 입구에 있는 사당.
우리 집 종이 말을 끌고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말타고 실택리에 도착했다.
마을 노을 여럿이 길가에 나와 맞아 주며 절을 했다.
"사또께서 아무 탈없이 유람하고 오시니 축하드립니다"
일도 않고 놀러간 나를 탓하지 않는 백성을 보고 기뻤다.
중 해공은 군자사로 가고 범종은 묘정사로 갔다.
동행했던 태허와 극기, 백원은 용유담으로 갔다.
나는 둥그점을 넘어 지름길로 관사로 돌아왔다.
내가 유람한 것이 5일에 불과하지만, 신수가 좋아졌다.
처자나 아전들이 보기에도 예전과 같지 않은 모양이다.
오호라.
만일 두류산처럼 웅장한 산이 중국에 있었으면,
중국 황제는 숭산이나 대산보다도 먼저 올라가
제사를 지내고 금으로 쓴 옥첩을 신께 바쳤을 듯.
우리들은 이번에 평소의 소원을 겨우 풀었다.
청학동과 오대의 그윽한 경치를 보고 싶었지만
공무에 얽매인 몸인지라 두루 구경을 다 못했다.
해공은 군자사(君子寺)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태허, 극기, 백원은 용유담(龍游潭)으로 놀러 가고,
나는 등귀재(登龜岾 현 오도재)를 넘어서
곧장 군재(郡齋)로 돌아왔는데,
나가 노닌 지 겨우 5일 만에
가슴 속과 용모가 확 트이고
조용해짐을 갑자기 깨닫게 되어,
비록 처자(妻子)나 이서(吏胥)들이
나를 볼 적에도 역시 전일과
다르게 보일 것 같았다.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 태산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 옥검을 봉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하였을 것,
그렇지 않으면 의당 무이산, 형악에 비유,
저 박아(博雅)하기로는 한창려(韓昌黎),
주회암(朱晦庵), 채서산(蔡西山) 같은 이나,
수련한 이로는 손흥공(孫興公), 여동빈(呂洞賓),
백옥섬 같은 이들이 배회하며 서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유독 군적(軍籍)을 도피하여
부처를 배운다는 용렬한 사내나 천인들의 소굴
오늘날 우리 무리가 비록 한 차례 등람
겨우 평소의 소원에 보답하기는 했으나,
세속 직무에 급급하여 청학동을 못 찾고
오대(五臺)를 두루 탐토 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의 불우함이겠는가.
자미(子美)의 방장삼한(方丈三韓)
시구를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날아오른다.
임진년 중추(仲秋) 5일 후에 쓰노라.
.......
해설.
.......
................역녀 월명이 전설....................
역녀 월명이는 동경상인 청년과 사랑에 빠졌다.
역녀는 월명이 직업이며, 오늘날의 여성 통역관.
(동경상인은 청년의 직업이며 무역업에 종사한 듯)
'두 사람은 먼 길을 함께 다니다가 정든걸까?'
(어느날 청년은 모친의 위급한 소식을 들었던 듯.)
(하여, 월명이를 두고 머나먼 길을 혼자 달려간 듯)
청년은 월명이와 헤어진 뒤에, 돌아오지 않았다.
청년은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고 장사를 치룬 때문.
청년이 돌아왔을 때 월명이는 이미 죽고난 뒤였다.
기다림에 지쳐 상심 끝에 병들어 죽은 연인 월명이.
청년은 월명이의 무덤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저승에서 이루기 위한 죽음.
역마을 사람들은 월명이 무덤에 청년을 함께 묻었단다.
....................................................
"발자국 마다에 구름이 밟히고 우거진 숲은 지날 때마다
대삿갓이 걸려 벗겨졌다."는 은밀한 숲길, 한 곳에 이르니
청이당이라는 너와지붕의 당집이 있었다고.... 한다는데,
당집은 어떤 사람들이 세웠고 이곳 경계를 즐겼던 것일까?" -유두류록
.................그 의문에 대한 해설..................
김종직은 의탄마을(마천)을 중국의 명산지 동산에 비유.
역녀 월명이와 동경 상인의 사랑의 전설도 유두류록에 기록.
역녀는 통역하는 여성이고 동경은 발해의 옛 도읍지 지명이다.
발해는 742년 문왕이 구국에서 수도를 중경현덕부로 이전,
만주 해란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개발하여 경제력을 확보.
755년 문왕은 상경용천부에서 동경용원부로 도읍지를 이전.
문왕 말기에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고 일본과의 관계 중시.
'월명이와 동경 상인' 사랑 이야기는 발해 시대의 전설인듯.
당벌장터는 발해와 교역하는 동경 상인들의 장터로 추정.
즉, 마천은 고려 때 발해 유민들이 집단이주한 지역 같다.
또한 당벌장터는 통일 신라시대 이전부터 유서 깊은 장터.
발해의 동경 - 당벌장터 - 화개장터 - 대마도 - 일본.
전설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워주는..
월명이와 동경 상인 청년에 관한 전설.
백무동 제석대 천왕봉 굿 제수를 팔던 당벌장터.
전국에서 몰려온 무당과 굿 인파가 북적거린 곳
김종직이 이곳을 찾았을 무렵 성행했던 당벌장터.
.....................................................
..................
옛 자취를 따라서.
...................
.......옛 유두류록 일정......
1472년(성종 3) 8월14일-8월18일
8/14 : 함양군 관아-엄천-화암-지장사
- 환희대-선열암-신열암-고열암(1박)
8/15 : 고열암-쑥밭재-청이당-영랑재(하봉)
-해유령-중봉-마암-천왕봉-성모사(2박)
8/16 : 성모사-통천문-향적사(장터목 인근)(3박)
8/17 : 향적사-통천문-천왕봉-통천문-중산(제석봉)-
습한 저여원(세석평원)-창불대-영신사(영신대)(4박)
8/18 : 영신사-영신봉-(한신계곡)-(백무동)
-실택리-등구재-함양군 관아 (4박5일)
일행 : 문인 유호인.조위.임대동.한인효,
승려 해공.법종, 아전 옥곤.용상, 노비
...............................................
.............옛자취를 따라서................
1472년 8월 14일 김종직 일행 산행 코스
엄천강 다리 넘어 (옛 나룻터)화암 바라보며
운암마을 들머리에는 (해동검도 수련원 건물)
박쥐굴-지장사터-금낭굴-선열암터-
유술이굴-의론대-고열암터-신열암터
독녀암(함양독바위)-안락문-상대날등-베틀재-마당재
-공개바위-수도골-한쟁이골끝-운암마을로 원점 회귀.
4곳 옛 절터엔 깨진 기와장이 널버려져 있고,
우리 민중과 가까웠던 지리산이라 느껴지는 코스)
아쉽게도 오늘날 대부분 옛 빨치산 은신처 (굴)들.
..................................................................
이조시대 지리산을 찾는 이들의 지침서 유두류록
김종직에게는 '어머니의 산'이자 고향인., 지리산.
지리산 유람 도중에 무릉도원을 추구하였던..김종직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하기로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본문 중에서-
그는 사림파 지식인과 목민관 자세를 갖고 산행 도중
매를 잡는 사람들의 응막을 보고 민생의 어려움을 걱정
승려의 혹세무민 행적도 비판하는 유교관을 갖고 있었다.
한편, 천왕봉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며 주위 명산을 설명
그의 국토 산하에 대한 깊은 애정과 지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단촐하고 검소한 유람단 일행 구성이 몹시 돋보인다.
이조 사대부들의 지리산 행적과는 분명하게 비교되는 유람기
그가 당시 산행했던 등산로는 개척 코스로 탐구가치가 있는듯.
오늘날 이미 사라진 유두류록 속 옛 지명들.
옛 지명이 남아있어도 지금과는 달랐던 옛날.
유두류록을 읽다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
'하여, 도움되는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까? '
유두류록에 나오는 배경무대의 당시 상황들.
지금은 많이 달라진 옛풍습을 한번 살펴보자
지금부터 이조시대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목차.....
1. 당벌장터.
2. 선암.
3. 위숙왕후
4.엄천사.
5. 용유담
6. 향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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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당벌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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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록 기록 속에서 당벌장터는 마천.
당시 화계장터 못지 않을 규모였을 마천.
발해와 왜를 잇는 교역이 성행했던 장터.
마천(馬川)은 경남 함양군 남부에 있는 면.
'말처럼 달리는 개울'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
면 소재지는 가흥리이고 면의 90%가 산지.
지리산(1,915m)·창암산(923m)·영신봉(1,652m)
삼정산(1,182m)이 있고 지리산 국립공원에 속한다.
산지에서 발원한 개울들이 모여 북부지역을 흐르며,
하천 양안에 취락과 소규모의 농경지가 밀집해 있다.
칠선계곡과 무명폭포 등등의 계곡과 폭포가 많다.
가흥 군자 덕전 삼정(三丁) 강청(江淸) 추성(楸城)
창원(昌元)·의탄(義灘)·구양(九楊) 등 9개 마을.
무역이 성행한 교역 도시는 성문화가 개방적.
마천은 역사적으로 지리산 휴양지로서 각광받던 명소.
예나 지금이나 장터 퍼서지 휴양지는 개방적인 성문화.
유두류록을 쓴 당시에 마천도 예외일 수 없었을 듯싶다.
'성 해학의 극치로 일컫는 변강쇠전 배경무대.'
작가와 창작연대는 알 수 없고 신재효가 개작한 판소리
고종때까지 송흥록과 장자백이에 의해 불리워졌다는 기록
변강쇠 이야기는 함양군 마천면 등구 마을 일대가 배경무대
변강쇠와 옹녀는 각처를 떠돌다가 남으로 내려와
함양 땅에 도착해 오도재를 넘어 마천 땅으로 진입.
마천장이 없던 일제 때 마천 사람들은 오도재와 지안재 넘어
30여 리 떨어진 함양장까지 나가 가축과 소금 등을 사왔으며
집에서 기르던 돼지새끼를 지게에 짊어지고 함양장에 팔았다.
변강쇠가 살던 산속 폐 기와집은 가락국의 마지막왕 대궐터
500 년전 김일손의 속두류록에는 거북이 산세라 하여 등구사.
1500년 전 대궐터 = 500 년전 절터 = 임진왜란 당시 변강쇠 집
그곳에 정착한 변강쇠는 낮이면 낮잠자고
밤이면 옹녀 배만 타니 옹녀가 견디가 못해
“건장한 저 신세에 밤낮으로 하는 일이
낮이며는 낮잠만 자고 밤에는 나를 조르니
굶어죽기는 고사하고 우선 얼어 죽겠소.
오늘부터 지게를 짊어지고 나무나 좀 해주시오”
변강쇠는 등구 마천 가는 길의 장승을 뽑아 군불을 지피자
화난 함양 장승 목신은 노량진 나루터 장승대방을 찾아간다.
장승대방은 팔도에 통문을 돌려 수만 장승을 새남터에 모우고
응징방법을 강구해 결국 8백 여가지 병으로 변강쇠를 죽게 한다.
함양 벽송사 목장승은 등구 마천의 대표적 장승
벽송사 건립연대인 152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 타 없어진 머리, 홀쭉하게 꼭 다문 입, 움푹 패인 뺨.
그 아래 짧은 수염에 얼굴 표정은 과장과 질박함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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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2년 역녀 '월병이' 무덤에 들렀던 이륙 일행.
역녀는 통역 여인이고, 동경상인은 무역업 상인.
동경상인은 당벌(마천)에서 발해를 오가던 상인.
당벌 장터는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서 쇠퇴해 간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장터 기능을 잃어버린 당벌장터.
그러나, 유두류록을 쓴 당시까지는 장터로서 성행한 듯.
마천은 지리산 북쪽 관문을 통틀어 부르는 지명
행정구역으로는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중심 일대
마천은 전라도 남원사람들은 당벌장터이라 불렀고
경상도 사람들은 <땅벌>이라고 좀 억세게 불러왔다.
원래, 지리산 산신당이 있어 마천은 옛부터 '당마을'.
언제부터인가 이곳에 장터가 생기며 당벌장터.
곶감, 목기, 산나물, 토종꿀, 문종이 등등 유명
특히, 지리산 등구 마천은 예나 지금이나 곶감산지.
'큰 애기들은 곶감 깎기로 다 나간다. -민요.'
지리산 일대는 어디를 가나 감나무가 즐비.
산골마을 어지간한 길가 가로수까지 감나무.
감이 주렁주렁 익는 계절이면 풍요로운 마천.
2003년 11월30일 개통된 2차선 포장도로 오도제.
함양 휴천면 월평리 넘어 칠선계곡과 백무동 계곡
지리산 제 1 관문 오도제는 예전보다 훨씬 편해졌다.
북향 의탄 마천 산기슭 다랑이논 반달배미 삿갓배미
사닥다리논 배꼽논 등등 저 나름대로 호칭마저 제각각.
지리산 산간마을 토박이 주민들 억센 삶을 보여주는 곳.
.....534년 전 김종직의 기록..............
"서너 곳의 모롱이를 돌아 이르는 곳에
깊숙하고 한적한 동부(洞府)가 열렸다.
숲이 해를 가리고 솔겨우사리와 댕댕이덩굴이
서로 얽혀 나무를 덮고 있는 아래에슨 시냇물이
바위에 부딪히며 꺾여 힘찬 소리를 낸다.
그야말로 동산(옛 중국의 명승지)에 와 있는 성 싶다.
..... 닭과 소 등을 기르며 나무를 베어 내고 밭을 일궈
벼와 기장, 콩과 삼을 심고 살면 바로 무릉도원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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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을 유혹했던 땅이 오늘날 마천골 의탄마을이다.
김종직은 이곳에서 발길을 멈추고 지팡이를 두드렸다.
앞서 가던 유호인이 돌아 서자 김종직이 이렇게 말했다.
"그대와 더불어 결의의 계를 맺고
여기서 사는 것이 어떠리요.." -김종직.
김종직의 의식 속에 고개를 든.. 은둔의 싹.
당시 이조시대 정치적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당벌장터는 언제부터 성행한 걸까?'
해동성국 발해 멸망이 당벌장터 성행 원인인 듯.
10세기 초 거란과의 전쟁에서 발해는 갑자기 멸망
발해의 멸망 원인에 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분분.
발해 지배층의 분열 및 사치풍조 등 원인이 지배적
백두산의 화산폭발에 의한 것이라는 소설 같은 견해
그러나, 발해의 멸망 원인은 당시 동북아의 정세 변화
9세기 말부터 10세기 전반기의 동아시아는 일대 전환기
안사의 난 이후 쇠퇴한 당은 황소의 난 후 907년에 멸망.
북아시아 형세는 시라무렌 강가의 거란이 점차 세력을 확장
북중국으로 진출하는 한편, 거란은 동쪽으로 발해를 위협한다.
한반도에서 신라가 패망하고 후삼국의 혼란기에
후백제와 태봉(고려)이 세력다툼을 벌이던 시기.
결국 이 시대는 한반도와 중원 지방 모두 혼란기.
이 틈에 북방 유목민족 거란이 세력 확장을 하던 시기
하여, 국제 정세는 발해에 불리한 입장에서 복잡한 양상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발해는 점차 외교적으로 고립
발해는 외교적 능력을 발휘할 기반을 상실했고
이는 곧 발해의 쇠퇴를 가져오게 된 결과를 초래.
발해는 초기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어 918년 사신 교환.
이후부터 거란의 동쪽진출에 위협을 느껴 상호 적대관계
919년 2월 거란이 발해인들을 요양으로 끌고 가자
924년 5월 발해가 군대를 보내어 거란 요주를 공격
사람들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생산 요충지 요동을 상실
그 치명적인 타격이 발해 멸망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발해 유민들이 대거 고려에 유입된다.
하여, 이 무렵 당벌장터가 고려에서 성행한 듯.
원나라에게 80년간 속국으로 지배 받은 고려.
발해 동경성의 옛 상권은 원나라로 이어진 듯.
하여, 당벌장터 영화는 이조 때까지 존속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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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이륙의 유두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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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698~926년) 멸망 원인 = 백두산 화산폭발 설.
나고야 대학 연구팀이 백두산 용암과 화산재 고목을 채취
연대측정을 한 결과 백두산 화산폭발은 929~945년이란 결론
이는 발해가 거란족 요나라에 멸망한 926년보다 3~19년 이후.
'하여, 발해의 갑작스런 멸망은 백두산 화산 폭발과 무관.'
10세기 백두산 화산 폭팔 흔적은 홋카이도에서 발견될 정도.
도호쿠(東北)지방의 지층에서도 날아온 화산재가 발견될 정도.
학계에서는 발해의 멸망 원인을 지배층의 내분 때문으로 본다.
713년 당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해 국가 실체를 공인
발해는 건국 초 진국(震國)이라 칭했고 일본과도 사절 교환
고구려의 계승을 강조하며 '고려'(高麗)로 자칭하기도 했다.
'발해와 고려는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
아무튼, 백두산 화산폭발 후 동경성 상권은 쇠퇴.
발해 동경성 상인집단은 고려 개성으로 대거 유입.
지금도 마천 일대에는 당벌장터 옛풍습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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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선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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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록에 나오는 '선암'에 관한 전설.
고대사회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해상왕국.
한반도는 옛부터 몇 안되는 아시아 부동항.
파도로부터 배를 지켜줄만한 형태의 바위.
배를 묶어두어도 떠내려가지 않을만한 바위
예나 지금이나 뱃사람에게 선암은 꿈의 대상.
...................유두류록.......................
해유령을 넘자 길가에 있는 선암이란 바위.
법종이 그 바위의 유래에 관해 말해 주었다.
"아주 옛날 바닷물이 땅을 뒤덮었을 때
이 바위에다 배를 붙들어 매었다는 전설.
게가 이 고개를 기어서 넘어갔기 때문에
<선암 : 배바위> 이름이 붙여졌답니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대 말을 믿는다면
그때의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부둥켜 잡고 살았을 것이 아니냐?"
드디어 우리 일행은 다함께 중봉에 올랐다.
우뚝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은 모두 돌이었는데,
유독 우리가 오른 봉우리만 흙으로 덮혀 있었다.
판판하고 넓직하여 말을 달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내려온 후 말을 쉬게 하였다.
바위에 마실 수 있는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었다.
가뭄이 드는 해 이곳 주민들이
이 바위에 올라 발을 구르며 돌면
반드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난 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어 시험을 해 보았더니,
그 소문대로 제법 효험이 있었다.
오후에 천왕봉에 올랐다.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온누리가 어둡고 안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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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선암은 가뭄에 기우재를 올렸다는 곳.
태고에 배를 묶어둔 바위로 알려진 전설의 고향.
선암(배바위)의 전설은 가락국의 것으로 추정된다.
화왕산 정상 분화구 옆 배바위 전설이 이를 뒷받침한다.
선암(배바위)에 관해 전해오는 전설은 가야국의 공통점.
따라서, 배바위가 바라보이는 일대는 가락국의 옛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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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숙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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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41대 헌덕왕 14년에 창건한 엄천사.
선왕들의 위령을 추모하기 위한 사찰이다.
헌덕왕은 선조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심성.
그당시 지금 전북 금산사 주지였던 법우화상
그를 불러 지금 함양군 휘천면 엄천사를 창건.
당시 고승이었던 법우화상은 엄천국사가 된다.
헌덕왕은 낙성식에 참석하여 친히 엄천사라 명명
'부처님 뜻을 엄하게 가져 그 복을 받는 후손이며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듯 후세까지 받으리라는 의미.'
왕으로부터 국사 중책을 받은 법우화상은 주야로 정진
어느덧 세월은 흘러 어느 해 여름 날 법상에 앉아 선정
이때 문득 밖이 소란해 문열고 바라보니 개울물이 넘쳤다.
법우화상은 주장자를 짚고 물길따라 지리산 상봉에 도달.
그곳 바위 위에 天女가 곱게 앉아 빙그레 미소로 반겼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소녀는 하늘에 계신 제석천왕 딸이고
옥황상제에게 벌받아 귀양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인간 세상을 살펴 보니
스님과 백년해로 할 인연이니 허락 바랍니다."
법우화상은 꿈인지 현실인지 몰라 정신이 혼미.
천녀는 법우화상을 바라보며 다시 거듭 애원했다.
법우화상은 스님의 신분이기에 단호하게 거절한다.
"사람의 목숨은 풀잎 끝에 이슬 같고,
바람 앞에 등불처럼 힘없이 사라지는 것
어찌 한평생을 애욕의 구렁에서 보내리까?"
"스님! 도를 닥아 부처를 이루는 것도
고해 중에 빠진 중생을 구제 하려는 목적
우리가 부부되어 재난에 울부짖는 인간을 구제
재난을 면하게 하고 복받게 하면 그게 부처님 일."
결국, 법우화상은 천녀와 부부가 되어 백무동에 움막.
원앙의 보금자리를 틀고 인간생활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리고, 백무동에 살며 선녀 사이에서 8 딸을 낳는다.
법우화상은 8 딸에게 경문을 가르치고
선녀는 굿하는 무술(巫術)을 가르친다.
8딸은 무당이 되어 조선 8도로 퍼져나간다.
천신에게 제사올리는 제장을 당굴이라 한다.
신라시대 제장 또는 당굴은 성직자로서 예우.
이조시대에 들어와 무당이라 부르며 천민 취급.
법우화상이 선녀를 처음 만난 곳에 지은.. 성모사.
지리산 제석봉은 제사 지내던 곳.
제석당은 당할머니를 모신 성모사.
제석 할머니가 세상에 내려와 길흉화복을 점쳐주었고
독경 무술 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하여 제석당은 종가.
지리산 인근 각지 부락 근처 분가들은 당집이라고 한다.
당집 있는 곳에는 돌무더기를 모아 조탑을 세웠고.
잡귀를 물리고 신성시 하였던 이곳을 일컬어 '당산'.
새해가 되면 마을사람들은 당산에 모여 제사를 올린다.
이 풍습은 신라 이전 모계사회부터의 천신 숭배신앙
불교와 한반도 민속신앙이 자연스럽게 접합되는 과정.
신라시대 제석천녀는 고려에 와서 위숙왕후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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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숙왕후..그녀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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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창건한 왕건의 어머니.. 한씨(韓氏) 부인.
919년 왕건이 아버지를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
어머니는 위숙왕후라 추존 했다는 사실 외 알 수 없다.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일찍이 꿈에 미인을 만나
부인을 삼기로 언약했는데 송악에서 영안성 가다가
길에서 한씨(韓氏) 여인을 만나 드디어 혼인하였다.
어디서 왔는지 몰라 세상에서는 몽부인(夢夫人)이라 부르고,
그 부인이 삼한(三韓)의 어머니라 성을 한씨라 하였다고는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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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본관 개성(開城). 금성태수 융(隆)의 아들.
895년(진성여왕 9)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들어간다.
918년 궁예가 민심 잃자 왕으로 추대되어 고려를 창건.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
936년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후백제 점령후 후삼국 통일
왕건은 고려 창건 다음해 어머니를 위숙왕후라 추존.
'위숙왕후의 전설.'은 '천왕성모의 전설'에서 본 딴 듯.
하여, '위숙왕후의 전설'은 919년에 만들어진 듯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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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엄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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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록 기록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옛 사찰터.
'엄천국사와 위숙왕후의 사랑 이야기' 전설의 고향.
유두류록을 쓴 점필제가 함양다원을 일군 엄천사 터.
함양군 휴천면 동호리 절터마을이 엄천사 터.
엄천사는 엄천강에서 유래된 이름일까?
아니면, 엄천사에서 유래된 엄천강일까?
그 논란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 사찰, 엄천사.
그러나, 엄천사 유래를 보면 엄천사가 먼저인 듯.
엄천사는 신라의 결언선사(決言禪師)가 창건한 사찰.
헌강왕이 선고왕(先考王)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사찰.
왕명을 받든 결언선사가 지리산 맥을 보고 사찰터 선정.
'헌강왕은 공사를 완공한 후 엄천사 이름을 하사.'
엄히 계율을 지키면 냇물 흐르듯 복 받는다는 뜻의 이름.
낙성식 법회에 왕이 행차해 선고왕을 위한 불공을 드렸다.
결언대사를 보정사(輔政師) 삼고 사라국사(娑羅國師) 겸 주지
하지만, 천년이 지난 지금, 화려했던 엄천사는 역사의 뒤안길
고려 이조왕조를 거쳐 맥을 이어오다가 이조 후기에 완전 폐사.
지금은 절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 또 다른 역사의 현장이 된 곳.
절 북쪽 대나무밭 주변에 대규모 차 밭..'함양다원'.
1998년 함양군은 점필재 관영 차밭 조성터 기념비를 세웠다.
점필재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게 돼 기쁘다며 지었던 시.
기념비 뒷면에 새겨진 점필재 애민정신과 선비정신이 담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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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법우화상이 있었다는 엄천사로 가는 길.
엄천사 주지가 고려의 국사일 만큼 고려시대의 대찰.
마천 지나 의탄 초등학교 옆 다리 건너 벽송사 가는 길.
'이 오래된 다리 밑 엄천강 일대가 옛 엄천사 터.'
"왕대 숲 속에 고색 창연한 절이 있었다." = 엄천사.
"땅이 넓고 편편해 가히 집짓고 살만한 곳" - 김일손.
엄천강은 1951년 2월 8일 붉은 피가 흐르고 또 흘렀던 강.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일어나기 3일전 일어난 불행한 사건
산청군 금서면 주민 7백 여명을 토벌군이 학살한 비극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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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용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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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지리산 동북부 함양군 마천에서 지방도로를 따라
강물 따라 내려오면 휴천면과 경계지점에., 용유담
도로 아래로 내려가 바라보면 비경을 맛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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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용유담은 선비들의 풍류 장소였던 곳.
유두류록 당시 지리산의 명소는 이 일대였던 듯.
지금으로부터 534년전 세월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용유담은 마천과 휴천 경계인 '휴천면 송전리'의 호수.
지리산 북쪽 백무동계곡, 칠선계곡, 삼정계곡과 뱀사골.
그 계곡물이 엄천강을 이루고 기암괴석 폭포 별천지 조성.
용유담 서편은 청아한 물빛 속에 투명하게 비치는 반석
신선의 경지인 듯 스스로 황홀감에 도취되게 하는 절경.
강 동편 가교와 고기잡는 어부의 작은 배는 한폭의 그림
통발 앞 날뛰는 고기를 잡는 어부의 작은 배와 저녁 노을.
'용유담 일대에 안타깝게 사라져가는 전설들.'
옛 조상들의 얼과 숨결이 담겨 있는 듯 여겨진다.
하여, 용유담 일대에 흩어진 전설을 모아 소개한다.
지금은 거의 그곳 주민들의 기억에서조차 잊혀져 간다.
용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전설 속의 신성한 동물이다.
몸통은 뱀과 비슷하며 비늘이 있고 두 개의 뿔이 있다.
사슴을 닮은 뿔, 소를 닮은 귀, 돼지를 닮은 코의 형상.
깊은 못이나 바다에 살며 하늘을 날고 비구름을 부른다.
용왕은 용의 무리를 거느리며 지배하고 다스리는 우두머리
연못이나 깊은 강에서 살거나 노는 곳 이름이 용소나 용유담
용유담은 전설 속의 용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호수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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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담 강변 마적에 마적도사가 마적사를 짓고 살았다.
마적도사는 기르는 당나귀 등에 쪽지를 써 장을 보았다.
마적사 부식이 떨어지면 당나귀는 오도재를 넘어 광동장.
이때 장사꾼들은 쪽지에 적힌 생필품을 당나귀 등에 실었다.
당나귀가 용유담 나귀바위에서 울면 아홉 용이 다리를 놓았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장기를 두는데 용유담이 거칠게 물결을 쳤다.
눈먼 용 한 마리를 남겨두고 여덟 마리 용들이 아귀다툼
서로 먼저 여의주를 물고 등천하겠다고 싸운 때문이었다.
마적도사는 장기에 정신 팔려 당나귀 울음을 듣지 못했다.
나귀는 무거운 짐을 싣고 울부짖다가 지쳐 쓰러져 죽었다.
이 때 나귀가 죽어 피바위가 된 곳 이름이 바로 나귀바위.
마적도사는 울화를 참지 못하여 장기판을 냅다 팽개쳤는데
한쪽은 마적에 남아있고 다른 한쪽은 용유담 건너 나귀바위.
이 때 마적도사는 눈먼 용 만 남기고 여덟마리는 쫓아버렸다.
먼 훗날 송전리 주민들은 마적에 새 길을 내야 했다.
이 나귀바위를 폭파하지 않고는 새 길을 낼 수 없었다.
주민들은 부득불 이곳을 폭파하자 말방울 16개가 나왔다.
바로 1300여년 전 마적도사의 애마인 당나귀의 말방울이다.
신라 무열왕 기미(659년)년 법화사와 같이 창건한 마적사
마적도사가 절을 떠나던 날 배나무 한 그루를 절에 심었다.
이것이 죽으면 나도 죽을 줄 알아라 하면서 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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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유담 맑은 물에는 등무늬가 스님의 가사 같은 물고기가 산다.
용유담에 서식하는 가사어는 여름에 배암사골 달궁 못으로 이주.
길을 가던 대사가 큰 바위틈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개가 목욕을 즐기고 있다가 선녀로 둔갑했다.
원래 선녀봉이라 부르던 이곳은 그 일이 있은 후 비녀봉
그곳 샘은 견습정이고 훗날 그곳에 지은 절 이름은 선녀암.
백련동은 고려말 개성유수 이억년이 남은 여생을 보냈던 곳.
원나라 내정간섭으로 고려 국정이 어지러운 것을 한탄한 탓.
이때 함께 은둔했던 이백년 이름을 본따 백년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흰백자와 연꽃 연자를 써서 백련으로 불리우고 있다.
백련암은 이백년과 이억년 형제의 명복을 빌기 위한 암자이다.
견불마을은 신라시대 견불사에서 유래.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송대마을 뒤 선녀굴
이 일대는 누워있는 부처님의 옆얼굴 모습
용유담 건너편 마을에서 자세히 보여 견불동
송대마을에서 가장 잘 보이는 부처님 얼굴.
불교신자 아니어도 염불이 절로 나오는 산세.
지리산이 '불교의 성지'라는 말이 실감나는 곳.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동호마을은 역사적인 사실로 보아 엄천골의 대표적 마을.
엄천이란 불교의 계율을 엄하게 계혜한다는 뜻에서 비롯
이 고을을 엄천골이라 하고 절 앞 흐르는 냇물을 엄천강
한남마을은 세종대왕 열두번째 아들 '한남군'의 유배지.
1456년 단종복위 실패로 성상문 박팽년 하위 사육신 처형
계유정란 당시 영풍군과 함께 한남마을 앞 새우섬에 유배
한남마을 가대지라는 곳은 한남군이 거처하던 집터.
누구든지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재앙을 겪어 패망.
지금은 집터의 주춧돌만 남아있어 슬픈 역사를 대변.
양발을 벌려 새끼줄을 꼬는 사람의 모양인 신들바위
마치 중이 배낭을 지고 가는 형국 같아 보이기도 한다.
엄천사의 많은 중들이 이 바위를 깨서 없애려고 하였다.
그럴 때마다 엄천사는 액운으로 파란을 겪어야만 했었다.
결국 엄천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았다.
현재 신들바위에는 그 당시 중들이 깬 파석들만이 남아 있다.
기암터 뒷산 8부 능선에 높이 30m 남성 성기같은 선바위.
산청군 삼가면 역골 처녀가 일생 사랑하며 살던 바위란다.
안의 삼동 중에서 화려한 자연미를 간직한 곳이 화림동.
화림동은 안의에서 전북 장수로 통하는 국도 26호선 따라
4km를 가면 물가에 아담한 정자 '농월정'이 있는 마을이다.
'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이 팔담팔정을 이룬 화림동.'
화림동은 농월정을 비롯 4개의 오래된 정자가 남아 있는 곳.
농월정은 달을 희롱하며 논다는 선비의 풍류사상이 깃든 곳,
함양을 찾은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필히 거쳐가는 명소이다.
9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농월정의 관광편의 시설들
2천여 명이 사용할 수 있는 야영장은 모래땅 위에 조성
화림동에서는 더덕구이, 백숙, 메기매운탕 등등이 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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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향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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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향적암 유래는 지리산 향적사를 이해하는데 도움된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전국 명산에서 산제(山祭)를 올렸다.
덕유산 산제를 올린 자리에 동비를 묻었다 하여 동비현(銅碑峴)
산제를 올리기 위해 이태조가 머물렀던 자리를 제자동(帝子洞),
밥짓던 곳을 밥진골(취찬동 : 炊餐洞), 제사 올린 곳을 유점등.
덕유산 향적봉은 그곳의 향적목, 즉, 주목(朱木)숲에서 유래.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란 주목은 옛날 마패로 사용한 나무.
지금의 향적봉 대피소 아래 옥수(玉水) 이름은 왕생수(王生水)
이성계가 수도할 때 이 옥수를 떠다가 공들였기에 붙여진 이름.
왕생수가 솟아난 곳에 향적암(香積庵)이라는 절도 있었다 한다.
덕유산은 옛부터 전란이 미치지 않는 십승지(十勝地)의 하나.
덕유산은 100리 능선에 낙동강 지류인 황강과 남강의 발원지
원래, 덕유산은 무주 북덕유였고, 남덕유산은 이조 때 봉황봉
'이조시대 덕유산을 성역화 하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조를 창건한 이성계가 지리산을 반역의 산이라 한 탓.
지리산은 통일신라로부터 고려시대까지 불교의 성지이다.
아울러, 지리산은 고려 정권의 밑바탕인 토착세력의 중심.
하여, 덕유산을 이조 태조 이성계의 성지로 만들려 한 듯.
그 후, 유림에서 유교사상의 성지로 만들려 한 듯 보인다.
덕유산은 충청, 전라, 경상 3도가 마주치는 전략적 요충지
신라, 가야, 백제의 접경지이자 백제 신라의 관문 나제통문.
청동기시대 고인돌이 발견될 만큼 집단적인 주거지역의 흔적.
삼한시대와 가야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선 불교 사찰들.
이조시대에는 명망 높은 유학자들의 은거지로서 자리매김한다.
유환 임훈 정온 신권 송준길 임수준 임여남 조상식 신재서 등.
덕유산은 민중에게는 전란을 피하는 피난 보신지이며,
또한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는 혁명의 산실이기도 했다.
농민항쟁, 동학혁명, 독립운동, 빨치산 투쟁 근거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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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법천골 발원지 통신골 위에 지리산신을 섬겼던 향적사(香積寺).
'천왕봉의 천왕성모' 香火를 올리려고 세웠다는 동국여지승람 기록.
533년 전 점필제의 4박 5일 지리산행 중 3 번째 날 잠을 잤던 사찰.
향적사는 그 이후에 불타 사라지고 지금은 사찰 흔적 만 남아있다.
이조시대에 지리산 천왕봉은 상봉이라고도 불렀다.
지리산 향적사 대신 덕유산 향적암에서 산제의 흔적.
덕유산은 봉황봉이라 바꿔 불렀고 향적암도 건축했다.
그러나, 지리산신에 대한 민심을 뒤바꿀 수 없었던 듯.
'결국, 천왕봉 민간신앙은 오늘날까지도 굳건.'
향적사터는 산희샘에서 천왕봉 방향으로 15분 도보거리.
그 옛 터는 천왕봉을 우러러보며., 법천골을 굽어보는 듯.
옛 유두류록 코스를 따라 탐구 산행이 2006년 들어와 열풍.
김굉필.
김종직 문하이고 훗날 조광조의 스승인, 유학자.
그를 통해 유두류록의 시대적 배경을 되짚어보자.
연산군 시절에 무오사화 고초를 겪은 그에 관한 글.
그의 경력과 함께 여기에 그에 관한 글을 소개.
.....................김굉필.....................
김일손(金馹孫)·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김종직 문하
그는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소학〉에 심취했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유학은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도이며
불교는 일신의 청정적멸 만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여,
척불(斥佛)과 유교진흥에 관한 긴 상소를 올렸던 김굉필
1486년 이조참판 스승 김종직에게 시를 지어올려
그가 국사에 별다른 건의를 하지 않는 것을 비판,
1494년 사헌부감찰 등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 제거를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키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 이때 조광조가 그에게 '소학'을 배웠다.
2년 뒤에 유배지가 순천(順川)으로 옮겨졌다가
1504년 갑자사화가 일자 무오당인 죄목으로 죽음
중종반정 뒤 신원, 1507년(중종 2) 도승지에 추증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 상소로 우의정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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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필을 태운 소달구지가 곡성 강가에서 잠시 멈추었다.
평안도 희천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의 명을 받아 가는 중.
긴급체포 압송 중이 아니라 목에 무거운 칼이 걸리지 않았다.
대역 죄인처럼 상투를 풀어헤친 봉두난발도 아니었다.
호송 나졸들 배려로 소달구지에서 내려 쉴 수도 있었다.
평안도 희천에서부터 소달구지 위에서 시달린 그는 중환자.
김굉필 제자가 되려 따라온 남원향교 교생 최충성
그가 남원부터 뒤따라오며 그를 보살펴주고 있었다.
"순천이 아직도 멀었소."
"한훤당 어르신, 저 고개만 넘으면 순천 이옵니다."
"저 아름다운 강 이름이 무언가."
"모후산에서 발원 섬진강으로 흘러 드는 보성강이옵니다."
김굉필은 최충성의 섬진강이란 말에 느낀 아련한 그리움
섬진강과 지리산 부근에 도학 동지들이 유난히 많았던 탓.
서울 출생한 김굉필은 그들의 이름을 소리 없이 불러보았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내려왔을 때
그 문하에서 도학을 공부한 제자들.
함경도로 유배 간., 정여창(鄭汝昌),
무오사화 때 죽은., 김일손(金馹孫),
하동에서 살다가 능주로 은거해 버린 정여해(鄭汝該),
사종 형제 정여창 권유로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던 그.
연산군 폭정으로 고인이 되었거나 고초를 겪는 동지들
김굉필의 눈가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천도가 사라지고 살육 광풍이 휘몰아치는 땅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 조차도 부끄러운 일.
자신에게 할 일이 있다면 도학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유배지에서라도 스스로 공부해 수신하는 것뿐이었다.
연산군. 이름은 융, 폐비 윤씨 소생 성종의 원자.
성종이 38세로 승하하자, 세자인 연산군이 등극하면서
김종직에 이르러 막 꿈틀대던 도학의 기세는 멈추었다.
즉위식이 치러지는 1495년 1월 29일, 날씨는 거칠었다.
우박이 언 땅을 두들기며 화살처럼 쏟아진 잿빛 하늘
즉위식이 끝날 무렵, 연산군은 영의정을 불러 명했다.
성종이 기르던 사향사슴이 어정거리자 살기를 띤 연산군
사임을 요청했으나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연산군 장인
"영상, 내 활을 가져오게 하시오."
"전하, 이 경사스러운 날에 활을 무엇에 쓰려 하시옵니까."
"승지더러 어서 활을 가져오게 하시오."
"활을 어디에 쓰려고 하옵나이까."
"지난 날 저 사슴 때문에 아바마마께 꾸중 들은 것을
장인어른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억이 나시지 않습니까."
"네, 전하. 어찌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일찍이 성종이 사향사슴을 애지중지 길렀는데
그 사향사슴은 성종을 두려워 않고 따라다녔다.
형조판서 김종직을 비롯 신하들을 거느린 성종.
정전(正殿)으로 가는 길에 연산군을 보고 불렀다.
그때 그 사향 사슴은 혀로 연산군의 손을 핥았다.
그때 연산군이 사슴을 발로 차자 성종이 나무랐다.
"짐승이 사람을 따르는데 어찌 그리 잔인하냐!"
연산군은 도승지에게 활을 받자 사슴을 노려보았다.
그래도 사슴은 겁내지 않고 장송 사이를 어정거렸다.
그때 연산군이 쏜 화살이 날아가 사슴의 심장을 관통.
"누구든 나를 능멸한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과인의 화살이 누구라도 심장을 겨눌 것이니라.'
신승선은 그순간 사위인 연산군에게 정이 떨어져
영의정을 그만두고 거창으로 낙향할 결심을 굳혔다.
과거급제 한 선전관(宣傳官) 박영(朴英)도 마찬가지.
즉위식 다음 날 박영도 병을 핑계하고 낙향.
김굉필은 소달구지 안에서 작고한 스승 김종직을 떠올렸다.
스승이 앞에서 지켜보는 듯 자신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나졸은 순천이 가까울수록 채찍으로 황소 엉덩이를 후려쳤다.
'이랴, 이랴앗!'
1489년 성종 20년 이른 봄 5년 후를 본 형조판서 김종직
연산군 행실로 보아 조정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결론
김종직은 판서직을 사임 어릴 때 수학한 밀양으로 내려갈 참
김종직이 밀양으로 내려가기 전날이었다.
남대문 밖, 개울가 정자에서는., 송별연
한강 나루터가는 길목이라 송별연의 명소.
서거정도 이별하며 시를 읊조린 적이 있었다.
친구는 날 이별하여 멀리 떠나며 노래하네
무엇으로 보낼 것인가 은 술병이 한 쌍일세
성문 앞 버들가지 꺾기는 어려워라
한 맺힌 꽃다운 풀 어느 때나 잊을 손가
올해도 지난해도 늘 두고 어긋나니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이별엔 애가 타네
이별가 세 곡조를 더 노래하고 나니
동편 구름 아득하고 북쪽 나무 망망하다.
故人別我歌遠遊 何以送之雙銀甌
都門楊柳不堪折 芳草有恨何時休
去年今年長參商 富別貧別皆斷腸
陽關三疊歌旣闋 東雲北樹俱茫茫
정자마루 안쪽 중앙에는 김종직이 앉아 있고,
그의 좌우로는 제자들이 오는 순서대로 앉았다.
스승 앞에서는 모두가 제자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남효온, 정여창, 김굉필, 정붕(鄭鵬), 조위(曺偉),
정희량(鄭希良), 김일손, 권경유(權景裕), 권오복(權五福),
이목, 홍유손(洪裕孫), 이총(李摠) 등이었다.
김종직은 낙향하는 이유로 칭병을 들었다.
"병든 몸으로 판서직 수행이 힘들어 사임했다네.
더 늙기 전에 밀양에서 도학에 매진하려고 하네."
"유림의 거목이신 선생님이 계시기에
저희들은 선생님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생기는 의혹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하온데 이제 의문이 생겨도
누구에게 묻고 의지하겠습니까."
"허허허. 걸어갈 힘이라도 있을 때
낙향하려는 것이 이 늙은이의 마음일세.
그러니 너무들 나를 몰아세우지 말게나.
얼마가 될지 모르겠지만 남아 있는 여생이라도
이루지 못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게나."
김굉필은 만류하지 않고 시종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히려 낙향을 종용한 제자가 김굉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송별연장에 느닷없이 나타난 유자광(柳子光)
유자광은 예종 때 남이장군을 모함
도학자들이 가장 경멸하는 소인배.
김종직의 제자들 대부분이 돌아앉거나 헛기침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도 유자광은 인사 한마디
"대감, 낙향하신다는 소문이 있어 이렇게 달려 왔습니다.
조정에서 정사를 돌보셔야 할 대감께서 낙향하신다니 섭섭"
"무령군께서 걱정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나설 때와 물러 설 때를 아는 것이 도리,
늙어가니 병든 몸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조정에 경륜 있는 선비들이 하나 둘 떠나는 것도 문제.
대감께서 중심을 잡아 주셔야 조정이 원만하게 굴러갈 듯."
김종직은 유자광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 마셨다.
일찍이 함양군수 시절 학사루(學士樓)에 걸린,
경상도 관찰사였던 유자광이 쓴 시판(詩板)을
소인배 글이라 하여 떼어낸 일도 있어 미안.
과거 사감을 털어버리고자 흔쾌하게 술
유자광은 김종직의 속마음을 알려고 왔던 것.
비로소 때가 온 것 같아 마음속으로 반기었다.
김종직이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길 바랬던 유자광
그래야만 자신이 그 권력으로 다가설 수 있기 때문
미소를 짓고 있는 유자광의 두 눈에는 출세의 욕망
서자로 태어나 가출 경복궁 건춘문 문지기가 되었다가
한명회를 도와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권부에 다가섰고,
이시애의 반란이 나자 자원해서 남이 장군과 함께 전공
병조정랑이 되고 마침내 별시문과에도 장원급제 했던 그
그러나, 그를 보는 정여창, 김굉필 등의 시선은 싸늘했다.
김일손의 입에서는 마시던 술을 뱉어내는 듯 퉤 하는 소리
유자광은 아랑곳 않고 자리를 먼저 일어나며 한마디 남겼다.
"볼 일이 있어 이만 물러가겠소이다.
대신 술과 안주를 보낼 테니 욕하지 마소서."
연산군은 즉위식 날 잔인하게 사슴을 살생하더니
차츰 여자와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군자를 멀리했다.
일찍이 13살에 여자를 안 그는 20살에 황음에 빠졌다.
승려들을 몰아낸 원각사는 황음의 장소가 되었다.
그곳에 궁중놀이를 전담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설치
3천 기생을 두었는데, 후에 장악원은 계방원(繼芳院)
임사홍 등을 채홍사로 삼아 팔도의 여자들을 불러들였다.
선왕의 궁녀까지 음행하고 외명부 여자까지 잔치에서 간통
부끄러움이 없는 부인들은 궁중에 남아 있기를 원했고,
그 남편들은 부인이 원하는 대로 벼슬을 승진시켜주었다.
윤순(尹珣)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윤순의 아내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서
윤순은 과거급제 5년 만에 자헌대부 승진
연산군의 음탕한 행각은 그뿐이 아니었다.
백부 월산대군의 후실을 궁중에 불러 강간
궁 밖으로 나온 박씨는 부끄러워하며 자살
황윤헌(黃允獻)의 최보비(崔寶非)란 첩도 절세가인
채홍사 구수영(具壽永)이 빼앗아 연산군에게 바쳤다.
연산군은 그녀가 비위를 건드리자 그녀 남편을 죽였다.
옥지화(玉池花)라는 유부녀의 남편도 목숨을 잃었다.
연산군에게 '간밤에 남편의 꿈을 꾸었다'고 말했는데,
며칠 뒤 연산군은 그 남편 목을 소반 위에 올려놓았다.
"네가 이 얼굴을 보고 싶어 꿈을 꾸었을 게야" - 연산군.
채홍사들은 서로 다투듯 여자들을 연산군에게 상납.
가야금을 잘 타는 최유회(崔有淮)의 딸이 그러한 예.
정승 한치형이 끌어다 비(婢)를 만들고 그녀와 관계.
채홍사 임숭재와 신항이 다투어 이 여자를 추천했는데,
이때 구수영이 가로채 궁중에 바치니 연산군이 매우 사랑
연산군은 비구니를 상대로까지 음행을 저질렀다.
그가 자하문 밖 사냥을 나갔다가 정업원에 들러
정진 중인 비구니들을 모두 벗겨놓고 온갖 패란
김굉필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흘렸다.
'인륜(人倫)의 절멸(絶滅)이로다. 이 일을 어이 할꼬.
아, 천도가 무너진 이 땅에서 내 할 일이 무엇인고.'
김굉필은 소달구지에서 주먹을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깨는 천근만근처럼 무거워 곧 무너져버릴 것 같았지만
소달구지를 타고 보았던 전라도 산하가 자신을 위로하는 듯
'그렇다. 내 할 일이란 제자를 기르는 것이다.
도학이 내를 이루고 천을 이루고 강을 이루게 하여
드넓은 땅을 적시며 바다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하여 도가 넘치는 군자의 나라가 되게 해야 할 것.'
.............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를 모함한 성종 후궁들을 살해.
성종 후궁들을 배후 조종한 조모 인수대비 살해.
윤씨의 폐비에 찬성한 윤필상 김굉필 등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및 훈구세력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
결국,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교동에 유배된 그 해에 병사.
이후 50년간 사화(士禍) 유혈극이 잇따라 붕당정치로 확대
한편,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연산군 유배지 강화 교동도는 살아 돌아 올 수 없는 곳.
역모 가능성이 있는 왕실 인사들을 특별 관리하는 유배지.
연산군은 9월에 이곳에 들어와 귀양 생활 2달 만에 생을 마감.
20세에 왕위에 올라 재위 12년인 31 세에 폐왕.
유난히도 먹구름 속에서 눈보라 치던 날에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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