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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南溪書院)
쌍수당
경내에 있는 서원으로 英憲公의 忠孝 雙修의 위업을 숭상하기 위하여
1704년(숙종 30년)에 청도 고을 향인진사(鄕人進士) 朴太古, 朴尙古,
幼學 朴師古, 이경렴(李景濂) 등 82인 사림(士林)들의 중론으로
창건된, 제향 기능을 중시하는 조선 후기의 서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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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2001년) 추향제에 참석하였을 때 남계서원에
들려보고싶었으나 그러하지를 못하여 못내 서운하였습니다. 남계서원은 시조할아버님이신
영헌공(英憲公)을
비롯하여 원정공(元貞公
漢貴 6世),
호강공(胡剛公
漸 8世) 삼위(三位)를 모신 서원으로,
꼭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금년에도 추향제에 가면서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다녀오리라
마음을 먹고 갔는데 마침 동화(죽산 31世)일족을 만났습니다.
동화님은 본 홈페이지 [계파마을]의 [죽산]파를 맡아 수고해주고 계시며 종사(宗事)에
열심이신 분으로 부산에 계십니다. 반갑게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제가 남계서원
얘기를 하자 마침 차를 갖고 왔으니 안내를 해주시겠다고 하여 참으로 고맙게 남계서원을
다녀왔습니다. 남계서원은 추향제를 모시는 염수당에서 과히 멀지 않았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과 경남이지만 승용차로 30여분정도의 거리였습니다. 남계서원이 있는 청도면은
산이 많았습니다. 높고 낮은 산들이 연립(連立)하여 그야말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고을이며, 남계서원은 그러한 산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서원은
학문의 장소임과 동시에 선현에게 제향하는 공간입니다. 남계서원은 정문인 숭덕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재와 서재가 있으며, 마당 중앙
안쪽에 강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강당의 북동쪽 뒤편으로 따로 울타리를 치고 사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즉, 위패를 모신 충효사가 좌측에, 학문의 공간인 쌍수당이 우측에
자리잡은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배치형태로, 제향기능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서원입니다.
남계서원에는 이외에도 제수 준비를 하는 전사청과
서원의 관리를 위한 고직사가 있습니다.
아래의 사진들은 이번에
남계서원의 이모저모를 촬영한 것입니다. 자랑스런 우리 청도김씨의 서원입니다.
강당인 쌍수당(雙修堂). 쌍수당 앞의 화단이 참으로 운치있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춘향제때 오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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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의 정문인 숭덕문(崇德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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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東齋)인 원청재(元淸齋) 정면
3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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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西齋)인 강의재(岡毅齋) 정면 3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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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수당(雙修堂) 중앙의 마루에 걸려있는
순두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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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수당(雙修堂)을 옆에서 본 모습.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가운데 2칸 마루를 두고 좌우에 각각 온돌방을 두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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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의 묘우(廟宇)인 충효사(忠孝祠) |
충효사의 신문(神門)인 대보문(代報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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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밀양시민신문 역사기행에서 남계서원에 관한 부분을 일부 전재한 것임>>
류창목(밀성정보고등학교장)
태백산 주맥이 남으로 뻗어 화악산을 이루고, 다시
그 한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내려간 곳, 청도면사무소가 있는 구기리에서 북쪽으로
2km정도 거리의 두곡리 366번지에 고려 중기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영헌공 김지대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오산군 김원정과 의촌 김호강 선생을 봉안한 남계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영헌공의 충효쌍수의 위업을 숭상하기 위하여 1700년(숙종 26년)에
향인 진사 박태고 등 82인이 '선생의 문장, 학술의 높음과 충효, 절행의 뛰어남을
스승으로 삼고 법으로 삼을 만하다'고 공론에 붙여 건사(建祠)하기로 결의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현풍현 생원 곽수성(郭壽星), 진사 곽재일(郭在一)외 58인과 창녕현
이최(李最) 등 58인 및 밀양부사 진사 이명기(李命夔)외 63인과 선산부 진사 황도홍(黃道弘)외
36인 등이 찬동하여 1702년 2월에 묘우(廟宇)를 완성하고, 1704년(숙종 30)에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남계서원이라 게액(揭額)하였다. 처음 사당의 이름을 충효사(忠孝祠)라
하였고, 강당을 쌍수당(雙修堂)이라 하였는데 이는 영헌공이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종군하면서 지은 순두시(楯頭詩)에 '忠孝可雙修'라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1871년(고종 8)에 나라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어 폐허가 되었으나
그 후 자손들에 의하여 강당을 보수하고 중창(重創)해 오다가 1907년(순종 1)에 낡은
강당을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 1954년에도 후손들의 출연(出捐)으로 재차 강당을
철거하고 지금과 같이 쌍수당으로 확장 중건하였다가 1986년 후손 문회(文會)의 발의로
서원 복원을 추진하기로 하여, 1989년에 사우(祠宇)를 완공하고, 1990년 영헌선생
탄생 800주년을 맞아 영헌선생 5세손 오산군 원정공 휘 한귀(鰲山君 元貞公 諱 漢貴
6世), 7세손 호강공 휘 점(胡剛公 諱 漸 8世) 양 선생도 동시 배향(配享)하여 봉안
고유(告有)하였다.
서원 제도(制度)로는 묘우(廟宇) 신문(神門), 강당인 쌍수당(雙修堂),
동재(東齋)인 원청재(元淸齋)와 서재인 강의재(岡毅齋), 성생단(省牲壇), 전사청(典祠廳),
정문인 숭덕문(崇德門), 고직사(庫直舍) 등의 크고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後略)
첫댓글 청도김씨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남계서원에 대한 글을 올려보았습니다. 내용이 좀 주관적이다 싶으면 운영자님께서 적절히 편집하여 사용하시어도 무방합니다. 남계서원은 청도김씨 시조공을 비롯한 선조님들을 모신 서원이지만 한가지 특이한것이 그 서원을 청도김씨 문중에서 세운것이 아니고 밀양 고을의 선비들이 발의하여 창건된 서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첫 해(亥)일에 모시는 향사에 지역 유림들이 참여하고 계십니다.
지난번 남대문 불나고 얼마 안되어, 남계서원을 한 번 다녀왔습니다, 유사되시는 분께서 날씨도 춥고, 연로하시고, 바쁘신데도, 나오셔서 서원을 청소하시고, 문을 열어 서원의 구석구석까지 안내와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사진을 여러장 찍어 와서 <누정록편>에 올려 놓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좋은 글과 사진 올려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남계서원 유사되시는 분이 2분이라 하셨는데, 또 한 분은 얼마 전에 아버님께서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뵈었습니다, 팔순에 가까운 연세였지만, 병원에서도 여러가지 공부를 하시는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청도김씨 문중은 밀양과 경북 청도에서 세거하는 대문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