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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 한 노르떼 길
밤에 잠 못이루는데는 천형에 다름 아닌 해결 불능의 신체 문제 때문 만이 아니다.
늘 의외의 이유가 추가되는데 간 밤에는 간절히 보고 싶은 차로 바에나 생각이었다.
아침 6시 반쯤에 알베르게를 나설 때는 마음은 텅 비었는데도 천근이나 되는 듯 무겁게 느껴
지는 몸으로 까르바요 광장으로 갔다.
어제 석양에 봐 둔 노르떼 길의 날머리다.
까르바요 광장에서는 마르꼬스 델 또르니에요 길(C./ Marcos del Torniello) 따라 띠엄띠엄
북상하는 몇몇의 순례자들이 포착되었다.
골레따 길(C./de la Goleta)로 바뀐 후 루고 대로(Av. Lugo)에 합류하여 살리나스(Salinas)로
가는 길을 저들이 택했다면 편한 지름길로 가려는 것이 분명했다.
노르떼 길은 광장의 마르꼬스 길에서 거의 90도 왼 쪽의 오르막 길인 알레마니아 대로(Av.de
Alemania)를 따라야 하는데.
나도 순간적으로는 그들을 따라 빨리 광장을 벗어나고 싶었다.
갈림길에서 잠시 망설이다 그들처럼 직진하려는 순간에 어찌 이런 일이.
노변의 레시덴씨아(Residencia/주상복합Apt.?) 4층(5층?)에서 창문 열고 감시중이었다는 듯
나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izquierda'(이스끼에르다/왼쪽으로)
각기 딴 집에서 연달아 외치는 나이 지긋한 남녀의 한 목소리였다.
앞 사람들이 지나갈 때는 잠잠했으며 잠시 후에 몇몇이 간격을 두고 통과할 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 괴이쩍지 않은가.
젊은이들과 달리 늙은이라 헤매지 않고 바른 길로 가도록 안내하는 것이었을까.
에스빠뇰에게 이 시간은 부지런한 사람들의 기상시간에 해당하는데 잠 깨자마자 선행부터?
순간적으로나마 빠져들 뻔한 편법의 유혹을 물리치게 도와준 그들에게 사례하며 진짜 까미노
에 들어서기는 했으나 앞뒤로 아무도 없는 나홀로 길이 또 시작되었다.
아빌레스는 해안도시지만 알또가 해발144m의 지형이기 때문에 정상부를 돌아서 가는 노르떼
길에 충실하려면 시작부터 꾸준히 올라가는 길이.
좌우를 살필 것 없이 북서쪽으로 난 알레마니아 대로만 따르면 되는 길.
이른 아침부터 힘을 빼는 길이지만, 싱싱한 아침이라 무난하며 전망 좋고 차량의 왕래가 적은
데다 구분된 인도가 있는 안심 길이다.
로터리에서도 직진하는 대로가 삐에드라스 블랑까스 도로(Ctra. Piedras Blancas)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라 사블레라(La Sablera)로 바뀔 뿐 하나의 길이다.
아빌레스의 고급 주택지역인 정상부(meseta/臺地)에 무의탁 고령자들을 위한 원호생활시설
(Hermanitas de los Ancianos Desamparados)이 있다.
무료 제공 시설이라 해서 아무 곳에나 두지 않고 공기와 전망이 함께 좋은 고급지역에 설치한
당국자들의 배려가 돋보이게 하는 시설이리라.
드디어 편한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다.
오른쪽에 아빌레스의 테니스 클럽(Real Club de Tenis Aviles)을 두고 내려가는 라 사블레라
길은 좁아지고 가뭄에 콩나듯 있던 까미노마커도 보이지 않고 낙심천만인 길로 바뀌었으니까.
까르바요 광장의 주민은 물론 모든 자료가 이 길을 바른 노르떼 길이라 하지만 사망 확인서가
발부되지 않았을 뿐 이미 호흡이 끊긴 시신에 비유될 길이다.
길의 생명은 사람이 밟아줌으로서만 유지되는데 아무도 밟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것이니까.
간 밤에, 80명을 수용하는 아빌레스의 알베르게가 만원(full)이었으니까 오늘 아침에도 80명의
순례자가 이 길 위에 있어야 한다.
(아빌레스 이전의 알베르게에서 출발하는 순례자는 제외하더라도)
한데, 이 길 위에는 단 1명의 늙은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길로서의 생명이 끊긴 것이라 할 수 밖에.
이처럼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까미노는 뽀르뚜 길에도 있다.
바르셀루스 ~ 리마의 구 길이다.
그 길은 의도적인 노선 변경이 결정적인 이유지만 여기는 자연사 아닌가.
사탄아 물러가라 : 지름길 유혹과의 싸움
테니스 클럽 길에서 아직은 아빌레스의 별장지역이라는 바스띠안(Bastian)으로 내려갔다.
살리나스를 겨냥하고, 컴퍼스가 가리키는 북쪽으로 가는 길이면 아무 길이나 마구 걸었다.
헤매지 않고 살리나스에 진입한 것은 전적으로 행운으로 돌리고 싶다.
(이 과정을 디카에 열심히 담았지만 기억을 살려낼 방도가 없으니....)
막판에 긴장했기 때문인지 아침나절인데도 피로감이 왔다.
실은, 간밤에 잠 못리루게 한 바에나 생각에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지만.
라이쎄스 대로(Av.Raices) 따라 좁은 라이쎄스 강(Rio Raices)을 건넘으로서 살리나스 땅에
진입했음을 실감하고 노변의 풀밭에 눕다시피 다리 뻗고 앉았다.
대로라고는 하나 이 구간은 중앙분리대도 없는 좁은 길가의 풀밭에.
잠시 쉬는 동안에 확인된 것은 아빌레스의 까르바요 광장에서 직진하면 대로 따라 와서 내가
방금 건너온 것 처럼 라이쎄스 강을 건너게 되므로 그 길이 편한 살리나스 길이라는 점이다.
살리나스(Salinas)는 인구 4.500여명의 큰 마을이며 아스뚜리아스 주의 기초지자체인 까스뜨
리욘(Castrillon)의 8개 교구마을 중 하나다.
괴이한 것은 아스뚜리아스 주에서 가장 긴 해안 중 하나의 해안을 가지고 있지만,'북쪽해안로'
라 하면서도 정작 해안은 밟아 보지도 못하는 노르떼 길 통과 마을이라는 점이다.
노르떼 길은 시발점 이룬 부터 많은 루트가 해안을 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히혼 이후를 특히 '까미노 데 라 꼬스따'(Camino de la Costa/해안로)라고 한다.
이 길(살리나스 길) 처럼 해안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노르떼 길이 아스뚜리아스 지방의 수도인 오비에도를 제외하고 비야비씨오사에서 히혼으로
직행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초기에는 노르떼 길에도 오비에도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같은 비중의 쁘리미띠보 길(Camino
Primitivo)이 오비에도를 시.종점으로 하기 때문에 노르떼 길에서 절로 제외되어 갔다.
쁘리미띠보 길은 100% 내륙길이며 오비에도 이후의 노르떼길도 이룬~히혼에 비해 해안 루트
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갈리씨아지방은 온전히 내륙길이다.
각각으로 유사해 가는 두 길을 구분짓기 위해 해안이 급격하게 줄어드는데도 노르떼길을 해안
길이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라이쎄스 대로에서 왼쪽의 독또르 플레밍 길(C./Dr.Fleming)을 따라 니까노르 삐뇰레 길(C./
Nicanor Piñole)과 합류하는 지점까지 갔다.
까미노마커의 안내에 따른 것인데, 여기에서 또 확인된 것은 라이쎄스 강을 건너지 않고 깜뽄
대로(Av.el Campon)를 따라 계속 직진하여 니까노르 삐뇰레 길로 라이쎄스 강을 건너도 지금
지점에 당도하며, 전자보다 후자가 오히려 편하다는 것.
니까노르 삐뇰레 길에서 왼쪽 라몬 이 까할 길(C./Ramon y Cajal)로 들어선 후 끝까지 가면
쁘린씨뻬 아스뚜리아스 길(C./Príncipe Asturias)이다.
이 길 좌측방향을 택해 잠시 전진하다가 우측 또르네르 길(C./Torner)로 꺾는다.
(까미노마커를 무시하고 깜뽄 대로를 계속해서 따르면 되레 쉽게 이 길에 닿게 되겠는데.)
바둑판 처럼 곧게 구획되고 이베리아 반도 특유의 예술적으로 정지된 가로수길은 이른 아침의
긴장을 말끔히 퇴치할 만한 힘을 가진 것 같은 길이다.
그러나 또르네르 길 이후의 노르떼 길은 이전의 길과는 전혀 딴 판이다.
활력은 잠시일 뿐 굴곡과 오르막이 있는 길이며 다시 긴 산 마르띤 대로(Av. San Martin173까
지)로 이어지고 노면에 그려진, 왼쪽으로 구부러진 노란 화살표가 움츠러들게 하는 길이다.
숲속으로 난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아빌레스와 대등한 대지(臺地/meseta)가 펼쳐진다.
산 마르띤 교회(Iglesia de San Martín de Laspra)를 우측에 두고 다시 내리막 길이다.
기초지자체 까스뜨리욘의 8개 교구마을 중 하나인 라스쁘라(Laspra)에 속한 마을 산 마르띤
데 라스쁘라(San Martin de Laspra)를 지난다.
9개의 미니 마을을 합쳐도 주민이 240명(2009년 기준) 밖에 되지 않는 마을이다.
역시, 라스쁘라에 속한 마을이며 까스뜨리욘의 시청(Ayuntamiento de Castrillon) 소재지인
삐에드라스 블랑까스(Piedras Blancas)도 관통한다.
단일 마을이지만 인구가 9.531명(2014년 기준)이나 되는 큰 마을이다.
여기는 또 잠시 유혹에 빠지게 하는 지점이다.
다음 마을인 산띠아고 델 몬떼까지 편한 지름길이 있기 때문이다
시청 앞 에우로빠 광장(Plaza Europa)에서 갈리씨아 대로(Av. Galicia)를 통해 서남진하다가
대로를 흡수하는 N-632국도 따라 얼마쯤 더 간 후 비베로스 라 요바(Viveros la lloba/종묘장)
앞에서 소로(숲길)를 타면 한결 빨리, 그리고 편하게 당도하니까.
이미, 거의 모든 순례자가 아빌레스에서 살리나스로 직행하며, 살리나스에서도 까미노는 3km
해변을 철저히 외면하는데 이 구간만 수구적이어야 할 까닭이 있는가.
지금은 야산을 이리저리 돌고돌아서 갈 수 밖에 없던 시절이 아니잖은가.
이 길의 개설 오래 전, 취락이 형성되기 전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훌륭한 대안이 있는 지금도 그 길만을 고집해야 하는지?
상당수가 이 길을 택하는 듯 하나 나는 망설임 끝에 옛길로 들어섰다.
두번째 걷는 노르떼 길이라면 아마도 지름길을 택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을 테지만.
다시 오르막 길이고 라 끄루스 마을(aldea de La Cruz)을 지나 2km가 넘는 능선 목초지 길과
유칼립투스 등 울창한 숲길을 걸을 때는 어려운 선택에 대한 충분한 보상으로 생각되었다.
지름길 도로가 거리의 단축 효과는 있으나 숲길의 낭만이 없기 때문이다.
짧은 포장도를 지나 숲속 흙길로 해서 산띠아고 델 몬떼(Santiago del Monte)에 당도했다.
이름(monte)으로 보면 꽤 높은 지대처럼 느껴지나 80m대에 불과한 산띠아고 델 몬떼는 기초
지자체 까스뜨리욘의 8개 교구마을 중 하나다.
2개의 타운과 미니마을 7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민은 다운타운(Santiago del Monte) 204명
(2009년 기준)을 포함해 총 302명인 크지 않은 마을이다.
북쪽에 아스뚜리아스 공항이 있으며 노르떼 길에서 공항이 가장 지근인 까미노 마을이고.
사탄아 물러가라 : 순례의 의미 재정립의 위기를 맞고 있다
산띠아고 델 몬떼 서쪽 날머리에서 공항길 국도(N-643)를 건넜다.
오르막길로 오르막길을 건넜고 라 아레나, 라논(Ra Arena 6km/Ranon 4km) 이정표가 있는
AS-318지방도(Sb-3길)를 따라 역시 오르막길을 이어갔다.
양쪽으로 띠엄띠엄 농가가 있는 숲 사이 포장도를 따라 공항길인 A-81고가고속도로도 건넜다.
노르떼 길은 얼마 후의 갈림길에서 좌측 그란다 산길(Monte Granda)을 따른다.
야산에 불과하고 포장된 길이지만 곳곳에 유칼립투스가 울창하며 3km가 넘는 긴 산길이다.
지도에는 날론 강((Rio Nalon)으로 스며드는 개천 같은 강(Río de la Veiga)을 건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전혀 느낄 수 없도록 우거진 숲길이다.
우측 길(AS-318/Sb-3)은 북쪽 해안의 산 후안 데 라 아레나(San Juan de La Arena)로 돌아
오는(1.5km쯤) 우회로다.
나는 산길을 택했으며 모처럼, 까미노에서는 드물게 산속에서 호젓이 걸었다.
막힌 듯 하나 뚫려있고 끊길 듯 하면서도 이어지며 한도 끝도 없이 펄쳐지는 능선으로 된 우리
백두대간 체질에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길이지만.
우회로에 합류, 남하를 계속하여 엘 까스띠요(El Castillo)로 내려갔다.
기초지자체 소또 델 바르꼬(Soto del Barco)의 5개 교구 마을 중 하나로 동명(homonimo/
Soto del Barco) 교구에 속해 있는 마을이다.
알폰소3세(Alfonso lll/852~910)가 노르만족의 공격으로부터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세웠다는
산 마르띤 성(El Castillo de San Martín)과 중세 탑이 있으며 인구 90명 미만의 작은 마을.
1km쯤 포장도로(AS-318/Sb-3)를 따라 남하하면 소또 델 바르꼬의 대형(중앙?) 로터리다.
자료에 의하면 지자체와 동명의 도심 마을이며 인구가 1.500명 남짓 되는 큰 마을이다.
그러나, 지자체는 1877년에 4.097명이었던 인구가 1960년의 6.087명을 정점으로 해서 133년
만인 2010년에 원점으로 회귀하는(4.041명) 감소일로에 있단다..
농목축업인 1차산업으로는 대책이 없으며 4차산업을 지향하는 시대에 2차산업(공업)에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면 낙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산띠아고 델 몬떼 이후 전혀 보이지 않던 배낭 맨 남녀들이 제법 눈에 띄는 넓은 로터리.
이 구간에서도 대다수가 산길 대신 국도(N-632)를 택했음을 의미한다.
로터리에서도 날론 강까지 노르떼 길은 18c건물인 막달레나의 저택(Palacio de la Magdale
na/현재는4성호텔)으로 해서 고급 주택가를 지나는 막달레나 길(C./ Magdalena)이다.
현 N-632국도 이전에는 국도였던 길, 주택가를 지나면 포장 숲길이 되어 날론강의 뽀르띠야
다리(Puente de La Portilla)를 건넌다.
이 막달레나와 숲길 역시 배낭 맨 순례자가를 보기 드문 길이다.
모두 로터리에서 반으로 단축되는 길인 N-632국도를 따라 가기 때문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구간(Aviles~ Salinas~ San Martin de Laspr ~ Santiago del Monte~ Soto
del Barco ~ Rio Nalon)에는 편법의 유혹이 기승부릴 루트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처럼 길이 순례자에게 문제가 되고 고민거리로 다가온다면 순례의 의미가 재정립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 아닌가.
이 곳 로터리에서 만난 6척의 젊은 장신녀도 보이지 않았다.
공동식사를 한 어느 도나띠보(donativo) 알베르게(구에메스 또는 산따 끄루스 데 베사나)동지
인지 내 성을 아는 여인인데.
'하이 킴'(Hi Kim) 하며 호들갑에 가까운 수선으로 반가움을 표한 여인.
내게 선호하는 유형이나 취향의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수다쟁이에게 호감이 가지
않는 것 만은 분명한데 이 여인이 그렇다.
그래서 이 여인에 대해서는 영어 발음으로 보아 영어권 국적이 아니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거대한 조류습지가 형성되어 있는 날론 강의 긴 뽀르띠야 다리를 건넜다.
왕복 각1차선에 교행이 어렵도록 좁은 인도가 있는 다리다.
배를 이용해 건너던 날론 강에 최초로 다리가 놓인 것은 19c.
그러나 시민전쟁 초기에 파괴되었으며 현재의 다리는 1938년(시민전쟁의 종전 전해)에 새로
건설한 다리란다.
맥주 1캔에 휘둘린 감성의 결과?
다리의 중간 지점을 지나면 지자체는 무로스 델 날론(Muros de Nalon)으로 바뀐다.
다리를 건넌 국도(N-632)를 따라 500m쯤 전진한 지점의 길 좌측 외딴 집 옆을 지나갈 때였다.
집 앞마당에서 캔맥주를 마시던 영감이 힘주어 나를 불렀다.
시원한 맥주 1캔을 마시며 쉬었다 가라고.
한여름 처럼 더운 한낮이라 찬 맥주가 제격인 시간인데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 아닌가.
얼마 후에 이 길을 가다가 나를 보고 다가온 수다쟁이 여인에게도 맥주를 권했다.
소또 델 바르꼬에서 지름길(국도)로 들어선 것이 분명한데도 왜 내 뒤로 처졌는지는 모르지만
맥주에 대한 고마움 표시도 역시 호들갑스러웠다.
조금 후에 물을 구하러 내려온 젊은 한쌍에게도 물 대신 맥주를 주었다.
한데 모여 맥주를 마시는 여럿을 보고 멈칫거리는 순례자 족족 불러서 맥주를 안겼다.
69세라니까 나와는 띠동갑인 이 영감과 그의 부인, 부창부수하는 이 늙은 부부의 후한 인심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차가운 맥주로 무더위를 식히는 동안에 부부는 외출 준비중이었다.
모두 '아디오스(adios/안녕히...)를 나누고, 그들은 또 '부엔 까미노'(buen camino)를 남기고
소토 델 바르꼬 쪽으로 차를 몰았다.
주인 없는 빈 집 마당에 남은 우리도 각기 길을 떠났다.
노르떼 길은 그 집에서 100m도 되지 않는 지점의 국도에서 왼쪽 유칼립투스 숲속으로 오른다.
이 갈림길에서도 공짜 캔맥주 동문들은 국도를 따라 가고 나홀로 숲길로 올라갔다.
좁고 호젓한 흙길은 아쉽게도 잠시뿐이고 포장길(C./Era)로 바뀐다.
기초지자체 무로스 데 날론의 5개 교구마을 중 하나인 에라(Era)의 들.날머리다
에라는 200명남짓 되는 주민이 마을길 양쪽으로 길게 분산되어 살고 있는 마을.
1km쯤 후, 마을길(C./Era)이 리에고 대로(Av. Riego)로 바뀌는 지점, 국도와 악수할만한 곳에
알베르게 '까사 까르미나'(Casa Carmina)가 있다.
주민수 400명쯤 되는 무로스(Muros) 마을의 초입이며 소또 델 바르꼬에서 4.4km되는 지점에
있는 사설(privado) 알베르게다.
50년 이상 식료품가게를 하던 곳에 그 가게의 이름을 따서 산띠아고 길 순례자를 위한 숙소를
개설했다는데 지금은 관광 호스텔로 격상(?)되었다.
이름은 옛 대로지만 개업 정신과 달리 순례자에게는 가장 비싼 알베르게(16€)가 되었으니까.
종일 오르내리는 길이었지만 20km미만이었으며 시간과 체력이 모두 더 걸을만한 상태인데도
알베르게에 들렀다..
단지 세요(stamp)를 받기 위해서.
마감한다 해도 내가 이용할 집은 아니잖은가.
한데, 안쪽 너른 잔디밭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고함처럼 들려왔다.
곧,마치 길목을 지키며 기다리던 지기(知己)를 발견한 듯 달려온 그들은 놀랍게도 까나디엔세
알라인과 디디에르였다.
어제 아빌레스에서 청결한 숙소를 찾아 알베르게를 떠났던 그들.
다시 만나기가 어려우리라 생각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재회하다니.
어제의 일에 대해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자기네가 선불한 맥주를 내게 안겼다.
오늘은 거저 마시는 비어 데이(beer day)인가.
그들이 이 사설 알베르게에서 숙박한다면 청결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만 내 기준과는 큰 갭
(gap)이 있기 때문에 떠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야 할 어떤 사정이라도 있는 듯 자기네와 함께 숙박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은 또, 내 기준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그들의 문화로는 이해되지 않는 황당한 제의도 했다.
16€의 숙박료를 자기네가 부담하겠다고.
도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나도 궁금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들의 제의를 따르거나 뿌리치고 가기가 난(難)하고 천막을 고집하기는 더욱 어려운 지경이
라면 본의에 위배되며 선뜻 내키지 않지만 그들에 앞서서 내가 숙박료를 지불하는 것이다.
상이한 문화를 극복하고 문화를 초월한 인간관계
너무 이른 시간에 잠자리를 정했기 때문인가.
귀한 시간을 소중히 쓸 방도를 모색하는데 문득 맥주 영감이 클로즈업(close-up)되어 왔다.
까나디엔세들과의 일은 저녁시간으로 미루고 왔던 길 1km를 되돌아 갔다.
맥주 영감의 후한 인심의 원천을 모르면 미결수 같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겠기 때문이었다.
빈 집 마당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차에서 내린 부부의 황당한 반응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뽀르께 비에네스 ~ ~ ~데 누에보"(Porque vienes ~~~de nuevo/why did you come ~ ~
again/왜 왔어요 ~ ~또)
반가워서 '올라'(hola/안녕) 하며 다가가려던 나는 어이가 없고 충격이 하도 커서 말문이 막혀
버렸으며 돌이 되어버린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스페인어로 물어보려고 알베르게 주인의 영어 하는 아들의 도움으로 질문 내용을 스페인어로
적어가지고 왔건만.
종교와 가족관계, 과거의 직업과 현재의 수입원, 후한 인심의 동기 등 질문 내용을 번역하지
않고 설문지에 응답하듯 답변을 상세히 적었기 때문에 박장대소 끝에 다시 작성한 질문인데.
내가 어떤 신세라도 지려고 온 것으로 보였는가.
그래서 어떤 여지도 주지 않으려고 단호하고 냉정하게 대한 것일까.
금방 돌아가려고 백팩도 알베르게에 두고 빈 몸으로 갔는데도.
낮에 맥주 1캔을 얻어마신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 일이 없었다면 이같은 어처구니없는 해프닝도 없을 것이니까.
2시간쯤 전과는 어찌나 다른지, 야누스(Janus) 의 전형같은 이 부부의 어느쪽이 진실인가.
캔맥주 1캔에 휘둘린 꼴이 된 어줍은 감성을 탓하며 몹시 일그러진 기분으로 돌아온 알베르게
까사 까르미나의 바르(Bar)에서는 알라인과 디디에르가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네의 내 숙박료 지불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에 저녁식사라도 같이 하려 한다는 것.
도대체, 그들의 사연은 무엇이길래 나를 대접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사람들 같을까..
바르의 주류(主流)는 주류(酒類)다.
식사류는 암부르게사(hamburguesa/햄버거)와 보까디요(bocadillo/샌드위치)와 또르띠야
(tortilla/주로옥수수 부침개) 등 간편한 것들이라 기꺼이 함께 했다.
궁금했던 비밀(?)이 식사 중에 공개되었는데 문화가 다르다지만 정신적 공감대에 놀랐다.
3일 전, 알라인의 생일 파티에서 단짝 친구까지도 빈손으로 참석했고 더치 페이(dutch pay)
한 것은 그들의 문화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내가 주인공에게 목걸이용 십자가를 선물하였고 참석자들 모두에게도 장식용 행운의
자물쇠를 선물한 것은 그들의 문화로는 이해되지 않을 뿐 아니라 경악할 일이었던가.
그들을 이처럼 행복하고 경악하게 하는데 지불한 비용이 겨우 4.25€였다.
마히아(magia/요술)와 밀라그로(milagro/기적)를 연출하는데 들어간 돈이.
십자가를 받은 알라인은 크리스천이 아닌데도 페이스북은 물론 곳곳에 사진을 올리며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그가 크리스천이 아닌 줄 미리 알았으면 다른 것을 골랐을 텐데)
그는 이미 나를 자기의 'Example'로 선언했다.
(꿰백 출신이라 영어가 서투른 그의 의도는 '롤 모델'일 것이다)
다디에르는 내 선물인 키 달린 자물쇠를 볼 때 마다 내가 함께 있는 것으로 느껴진단다.
잊혀지지 않을 내 닉 네임 Key와 함께 생각난다는 것.
그들은 나를 롤 모델이라 하면서도 내게 미안한 일을 계속 했다.
높은 고개는 차량으로 넘고 알베르게가 불결하다고 호스텔로 가고.
그래서 비교될 수 없는 아주 특별한(great/그들의 표현) 뻬레그리노, 다시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나를 만난 김에 대접하겠다는 것이 이유란다.
존경한다는 뜻이라면 상이한 문화를 극복하고 문화를 초월한 인간관계 아닌가. <계 속>
삐에드라스 블랑까스에 있는 호세 비얄라인의 기념물(Monumento a Jose Villalain/의사, 소설가:1878~1939/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