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영광
신문기사에 옥당골 들노래가 남도문화제에서 최우수상인 '으뜸상'을 차지했다 라는 기사가 보여요.
옥당골이 어디일까?
옥당골, 옥당고을은 전남 영광의 별칭입니다.
실재로 영광 옥당골을 검색하면 영광에 소재하는 갖은 상호와 단체가 보입니다.
영광을 왜 옥당골이라고 했을까?
먼저 玉堂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요.
구슬 옥에 집 당을 쓰는 옥당은 조선시대 홍문관의 별칭입니다.
그럼 홍문관은 뭔데?
조선시대 관직중 최고 엘리트들이 정승이 되려면 필수로 거쳐야 하는 코스로 삼사가 있거든요. 세 군데의 관청.
삼사는 -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말합니다.
사헌부는 관리들을 감찰 비리를 처벌하고, 사간원은 왕이 내린 정책이나 고관들의 언행을 비판하는 일을 하며,
홍문관은 임금님이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하며 임금과 함께 공부를 하는 관청을 이릅니다.
최고의 코스 3사중 임금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홍문관입니다.
임금과 가장 가까이서 왕이 정책을 결정하는 데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관리
- 그래서 구슬 옥에 집 당을 써서 옥당이라 불렀습니다. 옥은 예전엔 최고의 보석이었습니다.
그래서 창덕궁에도 가면 옥당이라고 해서 임금이 머물던 바로 옆에 건물이 위치해 있어요.
종종 왕이 직접 찾아와 사안을 묻기도 했으니 항상 왕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이들이었을 것이고,
왕의 지근 거리에서 자주 보였을 것이니, 최고 권력자인 왕에게 인정받을 기회도 많았겠지요.
그럼 이 옥당이라는 말이 왜 영광까지 오게 되었는고 하면,
옥당이 중요관직인 것처럼 영광 또한 중요지역이었어요.
고려때 부터 세금으로 걷히는 곡식을 운반하는 창고가 있었던 곳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인근 28개 고을의 세곡을 관할한 창고가 있었기에 그를 관리하는 지역으로서의 역할이 커지지요.
물산이 풍부하니 사람이 많아지고, 사람이 많아지니 걷어 들인 것이 많고, 당연 인기자리이고
또한 철저한 관리와 청렴을 필요로 하니 적어도 홍문관 그러닌까 옥당의 품격이 있는 관리가 수령으로 와야 한다고 해서
옥당고을이라고 불리게 되었답니다.
그러니 옥당골에서 임기를 마치면, 진짜로 옥당이나 아님 다른 청요직으로 영전되게 되는 것이죠.
영광이 지금은 예전의 영광이 아니지만, 흥선대원군이 남도를 돌면서 각지역 특색을 말하는데 호불여 영광(戶不如 靈光)이라고 했지요.
호구수가 영광이 최고다는 말입니다.
전주 나주 순천에 이은 호구수를 갖었다고 하니, 인구도 많고 물산이 풍부한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는 것이죠.
영광을 소개할 때 항상 따라 붙는게 영광굴비입니다.
굴비는 조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인데, 조기라 하지 않고 왜 굴비라고 했을까?
그러면서 역사여행 안내하는 이들은 고려때 이자겸을 얘기하고요.
고려때 딸들을 두 임금에게 결혼 시켰던 이자겸.
아들도 일곱이나 있었어요. 아들들도 요직을 차지하고, 사돈까지 생각하면 왕만 안했지
최고의 권력이었겠지요.
알력싸움에서 밀려 영광으로 귀양을 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맛본 조기를 임금에게 보내면서
‘선물은 보내도 굴한 것은 아니다.’며 ‘굴비’(屈非)라 적어 보낸 것이 이름의 유래라고 합니다.
굴이 굽히다 할 때 굴이고, 비는 아닐비. 굽히지 않겠다. 비굴하지 않겠다.
용서같은 것 바라지 않는다라는 결기를 담는 것이죠.
헌데 이게 실재 사실은 아니고, 그냥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굴비라는 이름은 조기를 짚으로 엮어 매달면 구부러지게 되는데,
그 모양새를 따서 구비(仇非)라고 한자로 표기하던 것이 굴비로 변한 것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에겐 구브러져 굴비다라고 하는 것보다는 최고의 권세가와 연결지어서 이름짓기를 더 원합니다.
요즘에 유명인이 핸드폰이나 아파트를 광고하는 것처럼 당대 최고 권세가가 조기를 먹고 임금에게 보냈으니
당연 조기의 명성이 올라가겠지요.
그러기를 천년입니다.
영광을 가는 사람들에게 이자겸의 굴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면 실망을 해요. 뭔가 역사적인 인물
그리고 본인이 지금까지 알았다는 것이 거짓일수도 있다는 작은 충격이라도 될까요?
원래는 영광 앞바다인 법성포 지역에서 굴비를 잡았었는데, 물고기 또한 바닷물의 변화에 따라 영역이 달라지니
현재는 영광에서 잡히지 않는 영광굴비가 되어 판매됩니다.
우리나라를 종교백화점이라고 언급한 글귀를 본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외국 여행서에서 언급된 것이었는데.
특정 종교가 국교로 되어 있지 않으면서 종교의 외형도 크고, 더불어 갖은 종교가 대립없이 공존한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는 것 같습니다.
종교 관련해서는 영광이 꺼리가 많습니다.
영광에 백제때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습니다.
법성포 - 법성포 라는 이름에서도 보이듯이 법을 전하는 성인이 왔다는 포구.
지금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성역화 해서 인도 간다라식의 건축양식이나 유물관등이 있는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라는 이름으로 단장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순교유적이 있습니다.
염산교회, 야월교회가 그곳이고 저도 교회단체 안내차 다녀온 적이 있구요.
그리고 우리나라 4대종교 중 하나인 원불교의 탄생지가 바로 영광입니다.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영광 백수읍 길룡리에서 났으며, 이곳이 ‘영산성지’로 성역화 되었습니다.
불교에 기독교에 원불교에 ...
그리고 저는 역사여행을 하면 유교 서원을 덧붙입니다.
서원은 조선 중기부터 생겼던 것으로 현재의 사립대학에 비교되는 고등교육기관인데,
거기엔 서원에서 롤모델로 삼는 분을 모시는 공간도 따로 존재합니다.
향교에서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것처럼요.
여기 내산서원에 강항이라는 분을 모시고 있는데요.
이분이 일본 유학사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분입니다.
이런 노래 들어보셨는가요?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조용필이 드라마 주제곡으로 불렀던 간양록이라는 노래입니다.
‘간양록’은 책 이름입니다.
영광 내산서원에 모셔진 강항이라는 분이 쓴 책인데요.
일본에 가면 이 분의 비가 있어요. 일본 오오즈시(大洲) 라는 곳인데요.
시민회관 앞에 세워져 있는 비에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 지역에서 사용하는 초등교과서에도 반쪽 분량으로 강항이라는 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때에요.
정확히 말하면 두 번째 침입인 정유재란때.
토요토미는 임진년에 전라도를 차지하지 못한 게 한이었어요. 정유재란때 일본군들은 철저하게 전라도에서 살육합니다.
닥치는대로 죽이라는 명령도 있었구요.
그리고 기술자들 특히 도자기 만드는 도공들, 지식인들은 포로로 끌고 갑니다.
이때 벼슬길에서 잠시 고향으로 물러나 있던 강항,
군량미를 모아 남원성으로 전달하려던 계획이 성이 함락되어 이루지 못하고,
영광앞바다에서 포로로 잡힙니다. 두 아이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보면서요.
일본으로 끌려가 처음 머문 곳이 아까 말한 오오즈시.
일본에는 생소한 당시의 선진학문인 유학을 전하지요.
탈출 실패후 교토로 끌려가고 거기에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라는 승려를 만납니다.
그 시대 일본 사회의 권력자였던 무사들은 글을 몰라 병서를 읽지 못했고,
일본 사회의 지식층은 승려들이었다고 합니다.
승려들은 불교 뿐 아니라 다양한 학문을 연구했고, 성리학자인 강항과의 만남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창구였던 것이죠.
강항의 학문적 깊이에 감동한 후지와라는 승복을 벗고 강항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자로 거듭 납니다.
두 사람의 필담 대화록은 일본 교토의 덴리대학(天理大學)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죽음후 패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예야쓰가 전쟁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 사회 안정을 위해 성리학에서 말하는 인간 - 상하관계 질서를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기에 강항에게서 성리학을 배운 후지와라가 있는 것이죠.
강항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일본 생활을 담은 ‘건거록(巾車錄)’이라는 책을 써요.
두건 건에 수레 거 - 죄인이 타는 수레로 임금을 모시지 못하고 포로가 되어 살았다는 자기 반성을 나타내는 제목이지요.
이후 책이 간행될 때 제자들이 ‘간양록’이라는 이름으로 바꿉니다.
중국 고사 한나라의 소무가 흉노의 포로가 되어 양을 돌보는 수모를 당하지만,
지조를 지켰다 며 볼 간에 양 양 - 간양록이라는 이름을 쓴 것이죠.
간양록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의 형식부터 일본의 지도, 일본에서의 생활 등 오늘날로 치자면 일본현지 보고서인 것입니다.
당시의 일본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고요.
임진왜란.
일본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칼날을 조선으로 향했지만, 조선은 칼이 아닌 붓으로 일본을 움직인 셈이지요.
첫댓글 영광 옥당골에 그런 사연이 있었나봅니다. 잘보고 갑니다. 쎄쎄~~
쎄쎄. . xiex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