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을 준비해온 일본行. 日本語를 공부하면서 해마다 계획을 세웠다가는 경제적,시간적인 현실문제에 부딪혀 보류되고 말았던 日本을 아내의 적극적인 권유와 이해로 휴가기간을 이용하여 다녀오기로 결심하고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비용은 최소화하고 관광이 아닌 발로 직접 뛰는 배낭여행을 통해서 피상적으로만 인식되던 日本이라는 나라를 짧은 일정이지만 그속에서 敎訓을 얻어 나에게 刺戟과 동기부여을 통하여 실생활에 接木하고픈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8월 14일. 출국수속을 마치고 08:40분 후쿠오카(福岡)를 향하여 대한항공 KE783편 비행기가 힘차게 창공을 날아 올랐다.
아래로 장엄하게 펼쳐지는 구름을 바라보니 설레임과 함께 이국땅에서의 걱정으로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비행기는 김해공항을 경유하여 현해탄을 건너 11:25분 후쿠오카공항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 도로위의 자동차들이 좌측운행을 하는 것을 보니 日本이라는 사실이 實感된다.
日本의 첫 인상은 거리가 차분하고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었다. 도로위엔 많은 차량들로 붐볐지만 체계적인 신호등의 신호에 따라 질서있게 운행되고 있었고, 운전자의 성급함에 기인하는 경적소리는 그 이후에도 들을 수가 없었다. 都心에서 山寺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 나만의 인식의 飛躍일까?
제일 먼저 찾은 곳이 후쿠오카타워.
높이 234미터로 해변에 세워진 타워 가운데 일본에서 가장 높으며 1988년 후쿠오카시 제정 100주년 기념으로 세워졌는데 8,000장의 거울로 둘러싸여 있어 미러 세일(Mirror Sail)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새롭게 출발하는 후쿠오카를 범선에 비유하여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타워주변에는 마리존과 해변공원등이 드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데 이 곳은 일본 최초의 인공지반위에 세워진 해상리조트 시설로서 건너편으론 일본 최초의 개폐식 돔 경기장인 후쿠오카 돔이 웅대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도보로 이동하면서 후쿠오카시 박물관과 오오호리(大濠)공원등을 둘러보고 훼리탑승을 위하여 모지(門司)역으로 향하였다.
거리의 건물들은 하나하나가 個性과 特色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인 調和를 이루고 있어 그 자체가 거장의 작품과도 같았다.
20:20분 명문대양 훼리호는 힘찬 고동을 울리며 오사카(大阪)를 향하여 출항하였다. 멀리 육지에서 비쳐오는 불빛만이 반짝이는 밤바다는 평온하고 안락하였으며 바닷바람은 더없이 상쾌하다.
8월 15일. 일본 제2의 상업도시 오사카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색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오늘이 光復節이 아니던가. 일본에서 맞이하는 광복절은 나에게 잠시나마 우리의 歷史를 되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주었다.
밤새 바다를 달려 08:00분 오사카남항에 도착하였다.
하선후 JR오사카역으로 이동하여 코인락커에 배낭을 보관한후 오사카탐험에 나섰다. 이 곳 일본은 지하철과 JR선(Japan Rail : 7개 여객수송업체의 공동명칭)그리고 신간선등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지만 초행자들이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안내판과 이정표가 정비되어 있었고, 길거리에서 행인에게 목적지를 물어보아도 판박이처럼 누구나 친절하게 안내하여 준다.
얄미울 정도로.
지하철 요츠바시(四橋)선 우메다(梅田)역에서 탑승, 혼마치(本町)역에서 주오(中央)선으로 환승하여 오사카코(大阪港)역에서 하차하면 전면에 海遊館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8층 전관에 太平洋을 중심으로 해서 남극대륙과 에쿠아도르의 열대우림, 칠레의 암초지대등의 해양 동,식물을 실제와 동일하게 재현하여 환상적인 분위기속에서 바닷속을 體驗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일본인들의 商業的인 속성을 느낄 수 있었다.
2시간 정도의 관람코스이며, 입장료가 2,000엔으로 비교적 비싼 편이지만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은 곳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한 곳은 오사카의 명소인 오사카성(大阪城).
오사카성공원의 서쪽에 위치한 이 성은 웅장한 덴슈카쿠(天守閣)와 돌담으로 유명한데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웠으나, 1615년 전란으로 파괴된 뒤
도쿠가와 가문에서 재건하였다고 한다. 오사카성의 중심인 덴슈카쿠(天守閣)는 5층 8단의 건물로 높이가 46미터이고 5단까지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가고 그 위쪽은 계단을 통하여 올라가게 되어 있다.
내부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안과 오사카와 관련된 미술품,문서등이 보관되어 있고, 맨 위층은 전망대로 오사카성안과 오사카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당시 기온이 35도를 넘어서고 구름 한점 없어 무척 더운 날씨였지만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운다는 감격으로 인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가본 곳이 우메다(梅田)스카이 빌딩으로 지상 170미터 40층의 視界 360도의 공중정원으로서 우리나라도 고층 건축물을 業務用과 展望臺로 복합활용 해봄직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소니(SONY)빌딩과 도요타(TOYOTA)빌딩에서는 일본 전자제품과 자동차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덴노지(天王寺)와 신사이바시(心齊橋),난바(難波)등 보고싶은 곳이 많이 남아 있지만 계획된 일정으로 인하여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되돌아서야만 했다.
배낭족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바로 숙식문제일 것이다.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사정으로 인하여 세계에서 최고물가를 자랑(?)하는 일본에서의 잠자리와 음식은 그야말로 수도승의 고행을 연상하게 만든다.
허기가 지면 음식점앞을 기웃거리며 진열된 플라스틱모형 메뉴판의 가격을 보며 돈에 맞추어 요기를 하여야 하니,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절로 든다.
21:28분 오오가키(大垣)발 도쿄(東京)행 MOONNIGHT NAGARA열차를 탑승하였다.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운행되는 야간열차로서 약 7시간이 소요되는데 대부분 일본을 여행하는 배낭족들이 이용하며 이곳이 바로 오늘의 잠자리인 것이다.
하루종일 걷다보니 발은 부어있고 물집이 군데군데 생겨 도보여행이 절로 실감되고, 몸은 파김치가 되어 모두들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이렇게 이틀째 광복절의 밤은 깊어 가고 있다.
8월 16일. 잠깐 잠깐 눈을 떠보니 바깥으로 여명이 밝아 온다.
04:42분, 드디어 일본의 심장부 도쿄에 도착하였다.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렸던가. 잔잔하게 흥분이 된다.
아직 지하철이 운행되지 않기에 도쿄역 지하1층에 있는 銀鈴휴식센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세면을 한 후, JR사이쿄(埼京)선 이다바시(板橋)역 바로 옆에 위치한 APA HOTEL에 여장을 푼 후 도쿄탐험에 나섰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우에노(上野)공원.
일본에서 공원 제1호로 지정된 곳으로서,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동물원등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공원안에는 메이지유신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동상이 있고,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의 탑골공원같이 노인과 노숙자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공원에서는 내내 까마귀소리가 들려 다소 분위기가 음침하기까지 하다.
일본에서 가장 큰 도쿄 국립박물관은 1872년 개관되었으며 본관,동양관,표경관,호류지관등 4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침 중국,이집트,인더스,메소포타미아의 세계4대 문명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일본인뿐만 아니라 세계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도 질서수준은 과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전시실입구에서 안내를 하고 있는 한 중년부인의 친절은 그야말로 관람객의 입장에서 몸에 배이지 않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였고 감명적이었다.
공원 전체를 도보로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학생소요사태로 본관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곳으로 유명한 東京大學.
젊음과 활력이 느껴졌다. 대학구내식당은 어느 곳이나 가격이 싸니까 온 김에 식사나 하고 갈 생각으로 본관구내식당을 찾았다. 그 곳은 전세계 인종의 집합장소였다. 서양인은 물론이고 중국,동남아등 각국의 학생,교수들이 드넓은 식당에서 식사나 음료수를 들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역시 가격은 시중 음식점보다 저렴했다. 시중의 라면가격으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행복감(?)이 물밀 듯 밀려 왔다.
아! 그런데 오늘 너무 많이 걸은데다가 피로가 누적되어 오후가 되자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 지고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일단 쉬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실로 꿀맛같은 잠을 이루었다. 그동안 배 선실에서, 달리는 열차의자에서 잠을 잤으니 잠다운 잠을 잘 수가 있었겠는가?
저녁일정은 TV시청으로 대체하였다. 日本文化를 접하는 방편으로 이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국내에선 50년만의 이산가족상봉으로 눈물바다를 이루었을 텐데 이 곳 매스컴에서는 너무 조용하다. 비극적인 우리 分斷의 歷史에 一助를 한 일본인데 강건너 불 구경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좀 씁쓰레 하였다.
8월 17일. 일본에서의 4일째. 오늘은 본격적으로 도쿄시내를 관광하는 날이다. JR동경 일일 FREE PASS권을 구입한 후 처음 찾은 곳은 신주쿠(新宿)역에서 10분거리에 있는 東京都廳. 관공서라는 느낌이 전혀들지 않는다. 1991년 3월에 완공된 3동의 건물로 제1청사에는 45층 전망대가 있는데 도쿄시내의 초고층빌딩군들이 한눈에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 223미터의 신주쿠센터빌딩이며 210미터의 스미토모(新宿住友)빌딩도 여기서 볼 수 있으며 333미터의 東京타워와 멀리 후지산도 볼 수 있다.
우리의 관공서들도 이러한 발상으로 국민과 좀 더 가까이서 호흡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라주쿠(原宿)역앞의 다케시타도리는 많은 상점,커피숍,식당등이 밀집해 있는 언덕길로서 현재 일본 젊은이들의 패션을 실컷 감상할 수 있었다. 형형색색의 염색머리에다가 독특한 의상, 굽이 아주 높은 신발등이 눈길을 끌었으며 아주 활기가 넘쳐 흘렀다.
거기에서 도고진자(東鄕神社)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각종 꽃들이 아름답게 배열되어 있었고 연못가에서 그림을 그리던 한 노인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한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도보로 1920년 메이지천황과 소헌(昭憲) 황태후를 제사지내기 위해 건립된 메이지진구(明治神宮)를 찾았다.
굵은 자갈이 깔려 있는 참배로를 따라 가면 높이 12미터나 되는 일본 최대의 목조 도리이(鳥居)가 있고 그 안에 본전(本殿)이 있다. 본전앞의 약수물의 시원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다음으로 요요기공원. 국립요요기경기장과 NHK방송국도 볼 수가 있다.
광장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이 머리에 두건을 맨채 줄넘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는 모습도 볼 수가 있었다. 오늘도 불볕더위가 계속되었다.
코엔도리는 JR시부야역에서NHK방송센터에 이르는 언덕길로 파르코백화점을 비롯하여 멋있는 건물들이 많고 담배와 소금 박물관도 이 길을 따라가다보면 나온다. 시부야의 거리는 역동적인 모습 그 자체였다.
아키하바라(秋葉原)역에서 하차하여 쇼센(泉書)이라는 대형서점엘 들렀는데 역시 일본은 出版의 나라답게 책의 장르가 엄청 세분화되어 있고 서적의 크기 또한 지하철용 문고로부터 전문대형서적에 이르기까지 방대하였다.
가격이 엄청 비싸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까?
그 길로 한국인이라면 꼭 들른다는 아키하바라 전자상가를 찾았다.
듣던대로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며칠을 돌아봐도 다 못 볼 것 같아 수박 겉??기식으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요코하마(橫兵)로!
서양문물을 받아 들이는 관문으로서 요코하마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도시이다.
요코하마에서 노을이 지는 야경은 정말로 추천하고 싶다. JR요코하마역에서 사쿠라키쵸(櫻木町)역에 걸쳐있는 바다에 면한 지역에 조성된 미나토미라이21지역에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랜드마크타워(높이 296미터,70층)가 우뚝 솟아 있는데 전망대로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는 속도가 엄청 빨라 귀가 멍하다.
메이지 32년(1899년)에 건조되어 50년동안 전세계 바다를 항해한 범선인 니혼마루(日本丸)도 볼 만하고, 최신식 초대형 호화 유람선의 조명도 장관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10각형의 등대인 마린타워와 기네스 인정 세계 최대 규모의 놀이시설인 『코스모월드』또한 압권이다.
항구 전체가 잘 짜여진 하나의 세트로서 자연과 현대문명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일본속의 차이나타운인 주카가이(中華街)에는 중화요리 전문점이 160여개가 밀집되어 있고, 토산품 상점들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밤도 늦어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가 뒷시간의 열차를 타야 되는데 잘못 타게 된 것이었다. 옆좌석에 노부부가 있어 물어보니 다음열차를 타야된다며 안절부절하는 것이었다.
괜히 여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분이서 하던 얘기는 중단되었고 나에게 다가와서 이것저것을 묻고는 같이 걱정하다가 할아버지가 옆칸으로 가시더니 승무원을 모시고 돌아와서 나의 사정 이야기를 하시더니 나에게 다음 역에서 3분뒤에 그 열차를 탈 수 있다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 열차를 놓쳤으면 오사카(大阪)로 돌아가는 MOONNIGHT NAGARA열차를 탈 수가 없게 되고 난 밤거리의 미아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일처럼 진정으로 걱정해 주시던 그 노부부에게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8월 18일. 오오가키(大垣)행 MOONNIGHT NAGARA 야간열차로 이동하며 일본에서의 5일째날을 열었다.
7시간을 달려와서 내린 오오가키(大垣)역에서 다시 아보시(網干)열차로 환승하여 2시간을 더 달려 교토(京都)에 도착하였다.
日本文化의 精髓라 할 많은 역사유적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교토는 794년 일본의 수도로 정해진 이후 약 1,000년 동안 일본의 중심지로 발전해 왔으며, 태평양전쟁중에도 폭격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다.
교토역을 나오자 정면에서 교토타워가 반기고 있다. 1964년에 세워진 타워는 높이 131미터로 고전과 현대가 잘 조화되어 있는 교토의 새로운 상징이다.
교토의 명소로는 도지(東寺),긴카쿠지(金閣寺),기요미즈데라(淸水寺),니조조(二條城),료안지(龍安寺)등을 들 수 있는데 최소한 3,4일의 일정을 잡아야 모두 볼 수 있다고 한다. 아니면 약 7시간이 소요되는 정기관광버스를 이용하면 대충 훑어 볼 수가 있는데 요금이 무려 7,300엔(한화 약 77,000원)이라니 그림의 떡이다. 시간도 맞질 않고 해서 욕심내지 않고 그중에 한 군데를 둘러 보는 걸로 만족해야만 했다.
기요미즈데라(淸水寺). 기요미즈(淸水)란 순수한 물을 의미하는데 780년 나라에서 온 승려 엔친(延鎭)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벽에서 10여미터 튀어나온 부타이(舞臺)라 불리는 본당의 마루는 139개의 나무기둥이 받치고 있는데, 여기서는 교토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또 일본인들의 단면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인데 ,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면 예외없이 반갑게 카메라를 받아서 배경을 어디로 할 것인지를 반드시 물었고, 가로로 할 것인지 세로로 할 것인지를 묻고 웃으란 말도 잊지 않고 했으며 어떤 분은 각도와 높이를 맞추기 위해 땅에다 무릎까지 꿇고 찍어주는 성의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이왕 나온김에 한가지 더 하자면, 공사현장에서의 安全意識이다. 주로 야간작업이 많았는데, 현장에서 통행인의 안전을 담당하는 작업자는 形式的인 안전조치가 아닌 實質的인 안전조치를 하고 있었다.
작업을 중단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통행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대기를 부탁했고 보통의 경우에는 작업을 중지시키고 통행인과 동행하여 작업반경 바깥으로 이동한 후 감사의 표시를 하고는 재빨리 자신의 원래 위치로 돌아 가서 같은 행동을 한번의 실수나 태만함이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도로에서의 정지선 준수나 신호준수는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시내버스 정류장에서의 질서나 버스내에서의 승,하차 질서는 월드컵을 공동개최하는 우리로서는 본 받아야 할 행동들이었다.
5일째의 일정은 20:00에 오사카에 도착하여 명문대양훼리에 승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오늘 하루도 보람되고 의미있는 하루였다고 생각된다.
이제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지영이,정민이는 어린이집 잘 다니고 있는지, 아내는 오늘도 학원에 잘 다녀 왔는지 모든 것이 궁금하다.
8월 19일. 후쿠오카 신모지(新門司)항 도착후 모지역까지 셔틀버스로 이동한후 JR선으로 하카다(博多)역까지 가서 지하철로 후쿠오카(福岡)공항에 하차하였다. 무료셔틀버스로 국제선청사로 이동하여 입국수속을 마치고 13:50분 서울을 향하여 대한항공 KE784편 비행기가 다시 힘차게 창공을 날아 올랐다. 기내에서 5박 6일간의 日本旅行 전반에 대해서 돌아보며 그 意味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日本人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이 각자가 자기의 위치에서 성실히 직분을 수행하는 것 같았고, 자신들이 정해 놓은 規則(Rule)은 어기지 않고 준수하려는 것으로 느꼈다. 親切은 상대방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몸에 배여 있었고, 상대의 입장에서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운전자들은 서두르는 모습을 볼 수 없었고 信號遵守는 생활화가 되어 있었고 특히 횡단보도앞에서는 신호와 관계없이 서행을 하고 통행인이 지날때는 정지선 훨씬 이전에 정차하였고 뒤차가 경적을 울려 대는 건 의식적으로 들어 보려고 하였으나 失敗(?)하고 말았다.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휴대폰 벨소리도 들어 볼 기회가 없었다.
길을 물으면 가르쳐준 방향으로 제대로 가는지 확인하고 만약 잘못가기라도 하면 즉시 矯正해 주곤 하였다. 공사현장에서 安全規則은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으며, 좁은 장소에서 몸이 부딪혔을 경우에는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습관적으로 미안함을 표시하였다.
물론 일본인들도 규칙을 어기거나 교통신호를 違反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에 위안을 삼아 행동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난 일본의 長點을 보기 위해 나로서는 거금을 들여 6일간 다녀왔다. 장점을 보기 위해 노력했으므로 이 글이 일본을 讚揚, 美化하는 글로 비쳐질 지 모른다. 지나간 歷史는 역사대로 評價해야 하지만 그 過去歷史에 묶여서 우리가 배울 점을 看過한다면 우리의 뼈아픈 역사는 또 되풀이 될 수 있다. "知彼知己면 百戰百勝"이라고 했다. 克日을 위해서는 우리가 日本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결단코 될 수 없는 일이다.
열차안에서 나를 위해 걱정해주시던 그 노부부와 도고진자(東鄕神社)에서 한국을 잘 아신다며 활짝 웃으시던 할아버지 그리고 수없이 스쳐지나간 일본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글을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