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토요일) 오늘은 장춘에 있는 문묘를 찾아갔다. 문묘는 1872년에 세워진 건물로 이곳 장춘에서는 가장 역사적 연원이 오래된 문화유산이다.
문묘(文廟)에 들어서는 순간에 나는 이 문묘가 우리나라의 문묘와는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문묘라 함은 공자의 사당을 뜻한다. 공자는 글을 편 왕이라는 뜻으로 당나라 때에 문선왕(文宣王)에 봉해졌고 문선왕을 모시는 사당을 문묘라고 한다. 문묘는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군현급 이상의 지방관아의 소재지였던 곳에 아직도 남아 있는 향교와 서울의 성균관에 명륜당과 함께 남아 있는 건물이다. 그리고 공자 이하 제자를 모신 건물을 대성전(大聖殿)이라 칭한다.
중국에서 우선 문묘의 입장료를 받는 것부터 우리보다 더 철저히 자본주의화하였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다 하고 이곳 문묘에는 공자와 맹자의 가묘가 있어 색다르다는 점을 느꼈다. 공자의 가묘에는 세가(世家)라 하여 공자의 선대 5대조를 추존하여 모시고 있었으며, 맹자는 유학자 중에 특히 백성을 위한 정치사상을 가졌다고 하여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공자보다 더 존중했던 학자이었다.
또한 글에 대한 시험을 관장한다는 문천상의 상을 문창군이라고 하여 조각상을 밖에 만들어 놓고 향불을 피움은 곧 종교적 대상으로 비화한 감을 준다 . 이는 현재 이곳 사람들이 자기 자식의 좋은 학교 입학과 성공을 비는 기원으로 항상 향불이 피워져 있다.
그리고 대성전 안에는 공자의 위패가 아니라 조상을 만들어 놓았고, 공자의 제자들도 극히 엄선하여 모셨다. 그리고 동쪽의 배전(配殿)과 서쪽의 배전에 정호와 주희등이 모셔져 있고, 동쪽의 배전에는 황종희, 양계초 등 실용적 경세치용을 주장한 학자들도 모셔졌고, 그들의 사진을 붙여 놓았다. 이는 아주 파격적이어서 전통을 묵수하고 있는 우리의 문묘와는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곳의 문묘에서 유교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문묘의 활동에서도 초등학교 입학전의 어린이에게 부모를 공경하게 하는 교육을 시키는 의식, 18세 전후의 청년에게 성년식을 행하고 있었다.또한 효경의 보급운동, 글씨 쓰기 대회, 또 강연회 등을 통하여 유교문화를 현대 생활에 연결시키려함에 노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전 중국적인 현상인가하고 물었더니 장춘만의 것이라고 대답을 들었으나 아직 그 진위는 확인하지 못했다.
1966년의 문화대혁명에서 유교 사상의 타파를 주장한 것과는 달리 지금은 유교문화와 전통문화의 연구 등이 크게 부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등소평의 중국적 특색을 가지는 사회주의를 창조한다는 선언과도 맞아떨어지는 형상이며, 어쩌면 문화적으로 당연한 역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제는 장춘에서 가장 거대하게 꾸미고 있는 정월담(淨月潭)산림공원을 다녀왔다. 거대한 규모로 만들어진 호수인데 이 거대한 호수가 누구를 위해 만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그 까닭은 호수 아래에 또 다른 호수를 만들었는데 수백마라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하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물고기의 시체가 호수가에 즐비하였고, 이를 꼬챙이로 건져내는 모습이 참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갖게 하였다. 이 거대한 공원을 만들어 놓고 30원(한국돈 6천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이는 누구를 위해 만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공원에는 차량을 가지고 들어가는 경우 별도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아마 장기적인 산림육성계획도 없는 것 같다. 이를 보는 순간 나는 거대한 국가와 그 속에 썩어가고 있는 부분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오늘 문묘를 보고 친철한 설명을 해주는 두 분의 노고를 보고 어제의 내 생각이 한갖 잘못된 곡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 남은 기간 이를 더욱 눈여겨보아야할 대목이다.
이와는 달리 문묘에는 민간인들의 역사쌓기 운동이 활발하게 벌여지고 있었다. 도심 안에 많은 사람들을 끌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은 입장료를 받지 않는 날도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 계기도 가끔 만들어주고 있었다. (사진은 올사모 사진으로 올렸습니다)
전통의 묵수보다는 창조적 계승이 우선은 바람직하지만 창조적이란 묘한 표현 뒤에는 많은 변질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전통의 묵수라는 말도 그 표현만으로는 죽은 것, 딱딱한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으나 오랜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처절한 인내심과 고집이 담겨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고구려가 독자적인 문화전통을 지키려다가 수 당나라의 침입을 10차 이상 받았고, 마침내 멸망한 사례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번뇌를 하게 하여준다. 그래서 원조라는 말이 인기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한국의 농악 등 전통적 묵수를 주장하는 논리가 결코 가볍게만 볼 수는 없다. 이에는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이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