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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음악 : 모란동백, 작시,작곡-이제하, 노래-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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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샘의 시창작 강의 (20) : 표현은 개성적이고 독창적으로
표현의 개성과 독창성
"시인은 완전히 공식화되지 않은 말을 그 자리에 놓을 수 있는 시기를 알아야 한다"고 막스 쟈콥은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완전히 공식화되지 않은 말"의 의미이다. 그것은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표현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새롭고 참신한 맛을 느끼게 하는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을 뜻하는 것이다. 시인을 판단하는 데는 그의 독창성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보여주듯 시는 무엇보다도 독창성을 요구하는 언어예술이다. 이 독창성과 개성이 '창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똑같은 소재를 보더라도 그것을 파악하고 붙잡고 표현할 때는 누구하고도 닳지 않은 독특한 자기만의 시각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표현을 해놓은 것은 진정한 창작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만의 생각과 시각으로 발견해 낸 언어를 잡아야 한다. 다른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말, 아직 발견하지 못한 표현을 자기만의 눈으로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우리들의 눈은 이미 알고 있는 부분만을 기계적으로 보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므로 사물은 더이상 새롭거나 경이롭지 않다. 자동화되고 관습적인 인식에 길들여져서 사물이 지닌 미지의 부분은 더이상 볼 수 없다. 이처럼 우리들의 고정적이고 자동화된 인식 때문에 사물의 대부분은 어둠 속에서 그 미지의 부분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은 우리들이 중독되어 있는 고정의식을 깨뜨리며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새롭게 들어난 사물의 모습과 의미는 우리들의 일상성에 충격을 주고 경이로움을 가져오도록 하는데, 이때 시인이 사물을 새롭게 드러내는 방법이란 바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이다. 이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에 의해서 한 세계와 한 사물이 창조되어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퓰리처 賞을 받은 미국의 여류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스미스대학을 장학생으로 다닌 후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들어가는 등 외면적으로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케임브리지에서 그녀는 카리스마적인 영국 시인 테드 휴즈를 만나고 그와 함께 아이 둘을 낳아 잉글랜드의 작은 시골집에 정착했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 《유리 그릇(The Bell Jar)》(1963)에 나타나듯이 동화 같은 성공 뒤에는 해결되지 않은 심리적인 문제들이 곪고 있었다. 그녀가 안고 있던 문제들 중 일부는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나머지는 여성에 대한 1950년대의 억압적인 풍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풍조중에는, 여성은 분노를 표출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경력을 야심적으로 추구하지 말아야 하고, 대신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는 데서 성취감을 찾아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대부분 여성들 또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비아 플라스 같은 성공한 여성들은 이러한 모순 속에서 살아야 했다.
플라스의 동화 같은 삶은 휴즈와의 별거로 무너졌고 그녀는 극도로 추운 겨울날 런던의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돌보게 되었다. 아프고 고립된 채 절망에 싸인 플라스는 부엌에서 가스로 자살하기 전까지 시 창작에 몰두했다. 이 시들은 그녀가 죽은 지 2년 후에 출간된 시집 《아리엘(Ariel)》(1965)에 수록되었다. 이 시집의 머리말을 쓴 로버트 로웰은 그녀와 앤 섹스턴이 1958년 자신의 시 수업을 듣던 때에 비해 플라스의 시가 급격하게 발전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플라스의 초기 시는 깔끔한 정통시들이었지만, 후기 시는 대담성과 원형 페미니스트다운 고통스런 울부짖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원자(The Applicant)〉(1966)라는 시에서 플라스는 아내를 표현하기를 무생물인 '그것(it)'이라고 축소하며, 아내 역할의 공허함을 폭로하고 있다.
살아 있는 인형, 너는 어디서나 본다.
그것은 바느질하고, 요리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말하고, 말하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잘 한다, 거기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
너는 구멍이 있다, 그것은 땜질한 것이다.
너는 눈이 있다, 그것은 그냥 환상이다.
내 아이야, 그것은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것과 결혼, 결혼, 결혼하겠니.
플라스는 동요적인 운율과 잔인할 정도로 직접적인 표현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그녀는 대중문화에서 나온 이미지들을 솜씨 있게 활용했다. 아기에 대해 그녀는 "사랑은 너를 뚱뚱한 금시계처럼 움직이게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시<아빠(Daddy)>에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영화에 나오는 드라큘라로 상상하고 있다. "당신의 기름진 검은 심장엔 말뚝이 박혔고 /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어요." 동요적인 운율과 잔인할 정도로 직접적인 표현을 과감하게 시에 사용한 것은 실비아 플러스 시의 독창성을 잘말해주는 장점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기능적으로는 몰라도 내용상 이런 시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다. 당신 같으면 당신의 아내를 it 이라는 무생물로 취급하겠는가? 국내의 모 여류 문예창작과 교수가 억압받는 여성의 분노표출을 테마로 실비아 플러스를 아주 높게 표피적 사고로 평가했지만 나는 그 바탕에 걸러지지 않고 베낀 폐미니즘의 문제점들도 깔려 있다고 본다. 시인의 시창작에 있어 개성과 특히 "독창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중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저 스승이나 기존의 유명한 시에서 수십년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몰개성적인 시를 쓰는 사람이 시인이라면 그같은 목석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독창성이라는 테마의 고민을 엉뚱한 방향으로 너무해서 시로써 인간의 정신과 영혼, 훌륭한 문화를 파괴하고 대안이 없다면 차라리 독창적인 시를 쓰지 않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을 하는 학생일수록 다른 사회과학의 내용도 공부를 좀 하시라는 것이다. 자기 분야의 전문적이긴 하지만 좁고 편협한 시각만으로 독자,사회와 너무 동떨어진 정신세계의 외로움을 잘못 간직하면 특히 시창작에 있어서 정신질환자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사회과학에서 편협한 일부 지나가버린 좌파사상만을 비판적 시각없이 편협하게 공부해도 문제지만....나는 내가 좀 좋아하는 수필가 중에 "故전혜린 여사"가 있었다. 중학교때인가 이모님 방에서 발견한 전혜린 여사의 작품들은 거의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것들이나 문화에 대한 새인식의 깨닳음이었지 오늘날의 폐미니즘처럼 억압에 대한 반항이라해서 "반항"의 요소를 있는 것보다 부풀려 작은 문제를 터무니없이 오히려 더 크게 만들지만 대안은 없고 이를 또 정치 이데올로기화 해서 붉고 썩은 정치이권에 이용하는 작태도 좀 지적되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한창 우리에게 페미니즘이 유행하던 이제는 좀 낡은 시기에 어느 평론가가 전혜린 여사의 자살에 대해 정신이 해소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반항의 죽음이라고 평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도 않다. 글쓰기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정신의 유희를 여성의 육체가 따라가지 못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정말 죽은 이유는 본인 밖에 모르지만 말이다. 왜? 글을 쓰거나 시를 쓰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밤새기가 여사고 나도 그렇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억압의 문제는 보다 더 현명한 방법으로 치유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실비아 플러스의 사상을 교수랍시고 피상적으로 소개만 할 것이 아니라 아예 그녀의 시를 분석하는 정신과 의사가 필요하다고도 보기도 한다.그런 인식도 이제는 낡아가는,베낀 폐미니즘에 대한 새로운 독창적 인식이며 또 그런 창작인식으로 시를 쓴다면 말이다.
프랑스의 유명했던 시인 '아르튀르 랭보'도 마찬가지다. 오래 전 필자는 시 스승으로 부터 랭보에 대해서 좀 깊이 접근을할 수 있었는데 지금의 내가 보기에 그는 매우 독창적이며 당시에는 뛰어난 시들을 남겼지만 쉽게 말해서 매우 불행하고 어린 다중인격자였다. 쉬르레알리즘 시인들의 정신분열적 문제도 아직 논란 중이지만 그것은 그 정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반푼이들 때문에도 그렇고 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쉬르쪽은 문제다"하며 문단의 원로교수라며 떠들어대며 공부하지 않는 염소기침의 늙은 乭突이 고릴라들도 마찬가지다. 쉬르 시의 창작 시 그 대상을 아름다운 것, 시를 쓰는 시인의 아름다운 인격에 의해서 잘만 조절하면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지난 시간에 설명한 이제하 시인의 시 "모란 동백"과 그에 대한 필자의 해설과 필자의 졸시도 말해주지 않는가? 그것도 비꼬아 본다면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럼 시창작에서 누구나 독창성, 독창성하며 독창성을 강조하며 매우 중요하기도 한데 어떤 독창성을 발휘해야 좋을까? 그것이 시창작 요소의 기능적 독창성인가? 아니면 내용적 독창성인가? 어느 한쪽도 아니고 둘다일 수도 둘중에 한쪽일 수도 있는데 이 독창성에 대한 문제는 십여년 이상을 시를 써 오고 있는 필자도 아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또 어떤 원로문학교수는 요즈음 신세대 작가들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창작의 경향에 있어 자신 나름대로 그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했다.
"<첫째,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림(시를 산문화한다든지, 시에 희곡이나 시나리오 기법을 도입하기도 하고, 시 속에 회화나 도형을 삽입하기도 한다.) 둘째, 표현 매체의 개방( 시는 언어 예술이지만 표현 매체를 언어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그림, 사진, 도형, 기호 등을 동원하여 표현하기도 한다.)셋째, 기존의 규범 문법에 구속되지 않음 (사회적인 약속인 기존 문법에 구애되지 않고 비문非文이나 논리적 타당성이 없는 문장을 구사하기도 한다. 넷째, 시적 주체의 소멸(독특한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이 담긴 개성적인 글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글들을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끌어다 자신의 글처럼 쓴다든지 [pastiche], 광고나 기사記事, 사진 같은 것들을 오려 붙인다든지[collage]하는 행위) 다섯째, 탈이념脫理念현상 (어떤 주의主義나 사상思想에 예속되지 않고 자유를 추구한다.나아가서는 도덕과 윤리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한다.)여섯째, 예술의 저속화[kitsch] 현상(일상의 저속한 것들 속에서 소재를 구한다든지, 속어나 욕설 등의 비어卑語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으로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으로도 지적되고 있기도 하다.)>......("000전 교수, 시인의 글에서 인용)
필자가 보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미디어 매체가 만연하고 이를 잘 활용해야 할 시대에 위 주장이 과연 전부 타당한가? 나는 일면일부 그렇지 않다고 보기도 한다. 그 원로교수는 쟈크데리다를 끌어와 나름대로 비판을 했는데 내 보기에는 데리다에 대한 치밀한 사고문제 지적이 아니라 자신의 심리적 열등감을 포장한 평에 지나지 않았다. 쟈크 데리다를 비판하려면 적어도 데리다 사상의 정수를 설명해놓고 무엇이 문예적 관점에서 단점인지 치밀하게 지적하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가 명확,타당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영감의 평은 왜 그런지에 대한 이유의 문제에 있어서 미디어 환경발달과 글로벌 문화 경계사라짐 세상의 안목에서 너무나 편협하고 추상적이며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자가 국립대 교수였다니? 지금 이름없이 00동 뒷방에서 허전하며 쓸쓸하게 잊혀져 가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다른 시인과의 인격문제이기도 하며 시간이 수십년이 지나는데도 남들 다아는 것을 가지고 무슨 보물신주단지인양 수십년을 맨날 같은 강의노트를 가지고 있는 염소기침 샌님형 인간들의 비애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훌륭하고 세계적인 시인,작가들을 양성할수 있는지 무척 의문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무엇이든 기존을 지키려는 문제와 기존의 것을 깨려는 문제는 항상 충돌해 왔으며,또는 타협하며 또는 수용화해 하기도 하며, 그러면서도 잊혀지기도 하고 명맥을 유지해 나가기도 한다. 이것은 비단 시창작의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문화요소, 인간의 역사 자체가 그러하다. 오늘이 어제로 내일이 오늘로 쟈크 데리다 말의 일부처럼 불확정스럽게 흘러가기도 하는 것이다.
위에 나열한 그의 지적 중에서도 첫째는 이미 논할 의미가치가 없다. 필자의 등단시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문제는 '산문시에서 우려되는 점을 어떻게 잘 소화시키고 걱정끼치지 않는가?'하는 점인데 그것은 필자등단시의 평에 잘나타나 있다. 둘째 지적도 이제는 미디어를 잘 활용하자면 이미 논할 가치가 없다. 그런데 필자는 셋째와 넷째 지적은 그 교수의 지적에 일부 동의를 한다. 이유는 시가 읽는 이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려면 모든 사람이 쓰는 공통 문법을 파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각적 효과만 활용하는 다른 매체나 예술쟝르를 사용하지 굳이 문학의 시를 쓸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넷째 지적의 문제는 쓰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양심이 있고 대학을 졸업했다면 언급할 가치가 없다. 베낌의 문제는 법에도 저작권이 있으며 글을 베낀다고 해도 인용과 각주를 달아주고 원저자의 허락이 있고 원저자를 당연히 밝혀주면 아무 문제가 없다. 원래 인간의 모든 지적산물들 중에서 기존 있는 것에서 태어났지 없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퓽"하고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은 그렇지만 시는 단연코 아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당연히 시창작과 시로써의 의미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시는 쓰는 자신만의 예술작품 아니겠는가? 다섯째 지적도 의미가 크게 없다. 어떤 주의나 사상에 예속되던 아니던 "하라,하지마라"는 진짜로 유치한 언급이 어디 감히 자유예술 창작세계에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이야 말로 시발전 저해 요소다. 어떤 주의나 사상을 필자에게 시창작을 배우는 여러분은 정말 다양하게 깊게 공부하시라....일단 넓고 깊게 공부해 놓으면 그 주의,사상이 싫으면 따라가지 않으면 그만이고 배울 점이 있고 좋으면 훌륭하게 수용,소화해 나가는 법을 배우시라...그것이 모든 인문사회과학 공부의 정도(正道)다. 특히 시 창작도 공부없이 넋두리만 뱉어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공부해 나가면서 쓰는 것이 앞으로 글로벌, 세계적인 시인, 작가를 지망하는 여러분이 지양해야 할 일이다. 이것에 스스로 즐거움을 부여하시라...필자도 죽기 직전 시창작을 손놓을 때까지 끊임없이 즐겁게 그럴 생각이다.
여섯째 지적도 지적자체가 좀 의미는 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유치하기도 하다. 이것을 좀 깊이 생각하자면 키치현상에 대해 양식있는 읽는 이들의 동의나 평의 결과를 구하면 될 것 같기도 하다. 즉 시인의 작품에 대한 독자층이 얼마나 다양하며 넓은가? 하는 문제와 그 다양함의 근저에는 일반사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끄떡하는 양식과 교양, 상식수준에서 긍정적인 시적 장치나 어떤 상쇄할 기법을 개발할 수만 있다면 풀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고 그 수준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막말 쓰레기라면 나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어떤 계급적 민중시를 쓴다며 그 시가 어떤 연극이나 마당극에 꼭 필요하게 들어가야할 대사라면 어떤가? 그런데 그것이 대사중 이유있는 일부라면 몰라도 예술자체로서의 "시"가 될 것인가?는 좀 두고두고 생각해볼 문제이기도 할 것 같다. 대게 좌파 정치적 목적이 있는 작품들이 예술로서의 심미성(心美性)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다 이유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내의 어떤 시인이 "X새끼"라는 언어를 습작노트나 오늘날의 자기 카페나 블로거도 아니고 사회적 책임을 부여받은 등단지에다가 쓴 적이 있는데 그가 알았던 몰랐던 이미 위에 언급한 실비아 플러스는 벌써 그보다 수십년 전에 써 먹었던 것이었다.^*^ 언급했듯 실비아의 정신이 온전했던가? 나는 내 나름대로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나는 아주 창작에 있어 매우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비속어나 키치현상의 표피적 사고인식을 쓰는 것을 그리 바람직하게 보지는 않는다. 언어는 인격이다. 시 쓰기가 무엇이든지 어떤 인식과 이미지, 감정에서 출발하는 것은 맞지만 작품으로써 그 결과물은 자기자식이고 예술작품이다. 출발했던 감정이 허접하고 어린 치기에서 출발했어도 퇴고의 결과물은 시인의 역량에 달려있다. 허접하고 어린치기에서 출발한 감정이 잘 순화되고 승화되어 작품을 읽는 이에게 인식이나 정신적 사고에 좋은 도움이나 어떤 즐거움이 되어야만 "시"로써 가치가 있다고 나는 본다.
여하튼 총론적으로 형식의 파괴나 내용의 파괴를 두려워해서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를 거부할 것은 아니라 이를 어떻게 긍정적이고 사회문화와 예술발전에 도움이 되며 읽는 이에게 유용하도록 잘 걸러 그 좋은 요소는 수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창작에 있어 그 형식이든 내용이든 독창성과 쓰는 이의 인격 문제는 더욱더 중요한 것이다. 잘 수용해서 더 독창적으로 잘 발전시킨다? 말이 쉽지 행이 더 어렵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시인들이 더 노력해야 할 자세이며 사회문화, 예술발전에 기여하며 보답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스스로 좋은 점 나쁜 점 가려내는 비판의식과 안목이 있고 읽는 이들의 행복과 즐거움을 창출해 낸다면 꽉 막히고 편협한 우물속에서 진부하게 썩는 물보다야 그 창작이 낳을 수도 있으며 결코 배타적으로 볼 필요도 없으며 필요한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의 기준은 사회문화, 예술발전과 독자들에게 정신적 도움을 줄수 있느냐? 아니겠는가? 나는 그렇게 본다.
달이 팽나무에 걸렸다
어머니 가슴에
내가 걸렸다
내 그리운 山 번지
따오기 날아가고
세상의 모든 딸들 못 본 척
어머니 검게 탄 속으로 흘러갔다
달아 달아
가슴 닮아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달무리진 어머니. ----- 천양희, <그믐달> 전문 ----
예로부터 하늘에 걸려 있는 둥근 보름달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표상이 되곤했다. 세상 만물을 두루 감싸안듯 둥글고 넉넉한 모습과, 삼라만상을 어린 새끼로 여기며 가슴에 품어 젖을 물린 것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달빛은 영락없는 어머니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위의 시 역시 달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믐달에서 가슴이 닳은 어머니의 모습을 본 것은 시인의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발견이라고 볼 수 있다. 평상시 달에서 느꼈던 어머니의 모습, 즉 넉넉함, 푸근함, 따뜻함, 너그러움, 자애로움 등의 관습적인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어머니의 한없는 희생과 헌신, 아픔을 그믐달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 닳아 / 만월의 채 반도 못 산 / 달무리진 어머니" 라는 구절은 지금까지 그믐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만큼 시인의 시각과 그것을 언어로 가시화한 표현이 개성적이고 독창적이다.
산
절망의산,
대머리를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부활의산, 영생하는산, 생의산, 희생의
산, 숨가쁜산, 치밀어오르는산, 갈망하는
산, 꿈꾸는산, 꿈의산, 그러나현실의산, 피의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산, 아아너무나너무나폭발적인
산,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대
지의산, 우리를감싸주는,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황지우(黃芝雨),<무등(無等)> 전문----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니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이상(李箱),<오감도(嗚瞰圖) : 시제2호> 전문------
어떠신가? "<맨위의 황지우 시인의 "산"이라는 시는 한눈에 보아도 '산'이라는 것을 알수있다. 꼼지락 거리는 글자들은 나무와 돌, 5.18을 겪은 광주시민들이라는 느낌이 들고 밑의 이상 시인의 시 "오감도:시제2호"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을 한참 잘보며 집중해 보면 무엇인가 비밀이 있지않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가? 자신을 포함하여 증조부까지 4대의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답답한 심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띄어쓰기도 무시하고, 음송증(吟誦症, verbigeration) 환자처럼 동어반복을 하면서 웅얼거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윤석산,시창작강의,,중에서) 지금의 나는 위 두시에서 첫시는 너무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면에만 집착했고 그러면 내용이 얼마나 알찬가? 하는 문제인데 그 내용도 무겁기는 하지만 그림의 틀에 끼워 맞춘다고 너무 수사적인 기교에만 치우쳐 있다고 생각하고 이상 시인의 시에서도 너무 자신의 감정에만 치우쳐 있다고 생각한다. 늙은 애처럼 어리광 부리듯 좀 유치하지 아니한가? 하지만 당시의 창작적 풍토를 생각할 때 독창성이 뛰어난 것은 틀림이 없다.
위의 두 시들은 창작당시들의 창작풍토들을 감안한다면 시 라는 글 하나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시인이 깊은 고민을 했는지 여실히 잘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시로 아예 그림을 그려 버렸다. 시창작에 있어 연(聯)나누기는 나중의 강의에서 설명할 것이지만 그 그림이 연(聯)을 무시한 그림으로 나타나거나 연(聯)을 잘 살리면서 내용적으로 나타나거나 그것은 큰 상관이 없다. 위 두시들이 지금이야 한참 지나간 작품들이지만 연(聯)나누기를 매우 중시하고 산수 고릴라 똥덩어리 스트레스처럼(산수 고릴라들 문제는 메타포와 연(聯)나누기 강의때 왜 산수 고릴라들인지 충분히 설명할 것임 !) 토착화 될뻔한 풍토가 만연했던 시인들 당시의 창작적 측면에서는 얼마나 독창적이며 훌륭한가?
살면서
가장 목이 마를 때
긴 물관부를 흔들며 꽃눈을 튼다.
터서는 1백일을 지지 못해
향기로운 혀 내밀고 서 있다.
밤이면
하얀 뿌리털 잘게 흔드는 한숨 소리
떠날 날을 미리 알고
한 점 벼랑에서도 대를 잇는 뿌리들아
이 땅의 잡초보다 처절하구나
숨진 네 그리움의 뿌리를
풀이끼로 포근히 감싸준 그날
삐죽이 고개 내민 새끼 촉 하나
아하, 서로의 눈빛만으로
새끼를 치는구나 사랑하므로
헤어져 사는 너희들은 ------박라연,<풍란>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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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蘭)의 미소에 대하여
맑은샘
남향 베란다에 놓인 난(蘭)
흰눈쌓인 지붕들과 들판을 향해 웃는다
난(蘭)은 흰눈의 사랑을 모른 채
향기를 은은히 품고 있다
온통 하얗게 내린 눈은 녹아
또 새생명을 잉태할테지
창문을 열자 난(蘭)은 춤을 춘다
춤추는 난(蘭)들을 보며
흰눈은 멎었다
고요한 적막속 흰눈의 순환은 난(蘭)에게 말한다
너는 내 사랑을 모르는구나
선녀의 운무(雲舞)가 살포시
수줍은 듯 언덕을 드리울 때
난(蘭)은 고개를 다시 숙이고
안온한 햇빛이 감싸
다시 창밖을 향해 미소 짓지만
난(蘭)은 흰눈의 사랑을 아직 모른다
난(蘭)의 미소에 대한 흰눈의 감상(感想)은 무엇일까?
무지개와 바람은 흰눈의 옷깃일까?
orchid‘s smile
(Pure spring) Boeng chan, Kwon
orchid, It is situated on the south veranda
orchid smiles snowy rooftops, towards the field
It is smiling white snow's mean without knowing
and fed up with the scent
The white snow is melting, also conceived a new life
Let's open the window, orchid is dancing
White snow watching them, snow were breathtaking
still in the dark, white Snow's cycle It says orchid
"Thou shalt not knowing my love"
The dance of the clouds, this hill when overshadow
It is up and lean back, sunshine is coming
orchid smiles toward the out the window again
orchid don't know white snow's love
What is white snow's feeling to orchid?
Rainbow and wind, Are there snow's lapel?
위 박라연 시인의 시 '풍란'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표현은 '아하, 서로의 눈빛만으로 /새끼를 치는구나 사랑하므로 / 헤어져 사는 너희들은"의 구절이다. 그것은 여기에 이 시인만이 볼 줄 아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눈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을 키워 본 사람이라면 촉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며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기쁨과 설레임을 느끼게 마련이다.어디 난뿐이겠는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물들 속에서 우리가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는 것을 보고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모습이자 현상이다. 하지만 시인의 눈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눈 너머로 하나의 생명 탄생 배후에 있는 근원적인 의미까지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랑의 힘'에 대한 깨달음이요, 발견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흔하고 닳아져서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생동시키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위 시는 사랑이 지닌 순정성과 진정성을 환기시키며 우리들의 삶과 사랑을 뒤돌아 보게 만드는 것이다.
밑의 부끄러운 필자의 시에서 난은 남향 베란다에서 온실속의 화초처럼 잘 크는 보기에는 아름다운 난이다. 난은 온실속에서는 모르겠지만 바깥의 환경에서도 잘 자랄 수 있을까? 흰눈은 비이며 근원적으로 온실속 온실밖을 가리지 않는 큰 힘의 존재다. 하지만 기본원소인 물이므로 어디에든 스며들 수 있다. 자기가 처한 환경이나 받고있는 사랑이 무엇인지 깊이 모르는 온실속의 난에 대한 감상을 적은 것이다. 그러나 흰눈 즉, 물은 온실속이나 바깥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지만 모든 존재들에 대하여 생명의 근원이 되어야 하는 존재다. "난(蘭)은 흰눈의 사랑을 아직 모른다/ 난(蘭)의 미소에 대한 흰눈의 감상(感想)은 무엇일까?" 시인은 이를 감지하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창작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개성과 아름다운 독창성이 자라나지 않을까? 시에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표현이란 결코 언어에 의한 기교에서 얻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통찰과 성숙한 사고에서 나온다. 그래서 우리들의 경험세계를 새롭게 확대시켜 나간다. 시의 세계가 무한한 지평으로 열려 있는 까닭도 시인의 이러한 독창적인 표현이 우리들의 삶과 세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열어 보이며 확장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감상음악 : Por Una Cabeza
클릭 :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1eYH0YN_2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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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스가 날아간다 (메타포에 대하여)
맑은 샘
돌돌(乭乭)아
작품(作品)을 위한 메타포냐?
아니면
메타포만을 위한, 메타포의,
처음부터 끝까지 메타포로 떡칠한
폼잡기 넋두리 낙서냐?
나는 아직 글로벌 서민(抒民)이라 전자(前者)란다
우주의 위대한 시를 써야 할 사랑하는 돌돌(乭乭)아
작품(作品)을 위한 창작기법의 요소들이더냐?
아니면
기법들만을 위한 말레고놀이 짜맞추기냐?
나는 수학들을 공부해 레고산수놀이가
아주 오래전 싫어졌단다
돌돌(乭乭)아
삼류시인같이 무식(無識)한 산수 릴라 고 영감의 방뎅이를 핡기만한 녀석이
아직도 문학과 문예창작 교수를 한다며?
무지(無知)한 릴라 고 영감의 방뎅이들을 쫒아 핧지말고
릴라 고 영감의 돌머리를 네자신 스스로 해부해 보거라
정말 아무것도 아닌
꾸리 꼬리타분한 베껴무스들이란다
네 자신만의 아름다운 노래와 황홀한 작품(作品)
네 자신만의 고귀(高貴)한 독창적 예술(藝術)
그것은 네 마음으로부터 우러 나온단다
가장 기초적이던
시를 쓰는 가장 순결한 마음은
그것이 어떤 시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처음부터 최고(最高)의 경지이며 끝이란다
수학을 풀면서
당연히 산수도 쓰고
아직
맛없고 빈약하며 볼품없는 작품(作品)을 위해
멋부리기를 배우기도 해야 하지만
그것은 너의, 너만의 작품을 위한 것이지
무식(無識)한 산수릴라 영감의 꾸리꼬리한 냄새의 방뎅이를
간질간질하며 핧고 닦는 것이겠는냐?
돌돌(突乭)아
나는 이 아름드리 가을밤
푸른 선율로 네게 노래 한단다
릴라 高?
방뎅이 핡기가 考?
高, 考, Go 날아 오를려면 Go
방뎅이 흔들어 봐도 Go
젊고 위대할 시인(詩人)이여
릴라의 멍청한 골을 해부해 버려라
진정한 예술가(藝術歌)인 시인(詩人)은
자기 작품(作品)만을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노래하며
걸어가야 한단다
나도 오늘은
천계(天界)의 바람이 심하게 불어
Go와 스톱을 외치던 *옥타비오 파스의 빤스가
전자 빨래줄에서 날아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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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옥타비오 파스 : 칠레의 외교관, 시인...199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원래 쉬르레알레슴 계열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 의해 시적창작과 칠레문단의 등단도움을 얻었으나 내면의 순수성과 심미성을 강조, 네루다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칠레의 좌파민중 데모에 "참여"의 문제로 회의를 느껴 프랑스 파리로 더 시창작과 예술을 공부하러 떠났다. 하버드대 교수를 역임하고 세계적 거장이 되었다.
타란튤라
맑은 샘
옛날 어느 *시인이 네 부하에 대해 노래했지
구차히 유치하게 묘사(描寫)와 은유(隱兪)로
너를 거미어천가(御天歌)로 찬양하거나
오 아름드리 털 숭숭 열개의 다리를 닦는 듯
복종(伏從)의 처세는 하지 않으련다
네 수하가 습하게 쳐놓은 줄을 칸살마다
하늘의 그림이 다르다는 둥
하수(下手)의 구업(口業)도 짓지 않으련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그림에
원숭이 말 레고놀이 상상력의 철지난 그림은
아아, 슬프게도 네 부하의 20세기 그림에 지나지 않았지
저, 바다 건너 있다지?
너는 둥굴고 푸른 공 위에
찬란한 은빛 줄을 칠수도 치지 않을 수도 있다지?
우리 보이지 않는 전자 네트워크줄 술술 풀자구
그래, 우린 거쯤 되어야 이야기가 되지
1500종중 너를 흠모하는 세마리 짝퉁 부하들이
나의 처마 밑에서 춤을 추고 있어
하지만, 옛 시인의 노래로
이제 그것들은 두르륵 교살(絞殺)을 못한단다
배고픈 촉새가 잡아먹을 맛있는 프로테인 단백질
오, 독(毒)을 먹는 멀미여
그춤은 유치하게도 훤히 보이는 쇼일 뿐
넌 곤충은 물론 새나 작은 쥐도 잡아 먹는다지?
그래, 우린 거쯤 되어야 이야기가 되지
잡은 사냥감에 이빨을 푸욱 꽂아 독액을 주입,마비시키고
주욱 체액을 빨아먹는 그 황홀한 드라큐라적 쾌감(快感)과 스릴
그래 어이 열개다리 털숭숭 친구, 지금은 21세기야
슬슬 나와 보실까
아얏, 친구 황홀하네,
나는 네가 되어가네 친구
조금만 기다려, 우리 황홀한 고차원의 밤을 즐기자구
둥근 공 온통 마비시킬 황홀한 마약(麻藥)의 문자(文子)를 만들자구
지렁이 기어간 듯 사인은 고불꼬불 하고
붉은 사이렌의 유치한 지네들이 너를 잡겠다고 발버둥치다가
체액을 다 빨리고 시체의 껍데기만 남겼네
네 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아 글쎄, 이빨을 푸욱 꽂아 워따 빠른 총잡이를 칼잽들이 알겄는가
서로의 이빨을 푸욱 꽂고
우리 밤의 황홀한 교미(交尾)를 즐기자구
아마 상상치 못한 멋진 변종(邊種)이 나올거야, 친구
달님의 빛조절 따라 몸색(色)이 달라지는,
그 황홀한
난 네 짜릿한 독(毒)이 필요해
어때? 빛으로 해체될 친구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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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옛날 어느 시인: 청록파의 "故박두진 시인"을 지칭함<거미와 성좌>에서 나는 메타포와 시적 리얼리티 배합의 진수를 보았었다.
*타란튤라 : 글로벌 시대에 존재하는 거악(巨惡)의 무리들을 지칭함
*다음 (20)강 예고 : 시의 언어가 갖는 특성
첫댓글 부지런히 공부하고 , 연구하고, 발표하는 맑은 샘 시인---
그 샘이 부럽구먼---
새해 더욱 건강하고 소원 성취하도록 --
하나하나 얻어나가는 것도 힘들지만
앞으로 만들고 베푸는것은 더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명이라면...
늘 행복하시고 큰 축복이 임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