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로 이야기 房 95번째) 羅麵이라고 한자로쓰는 흔한식품 라면은 그물처럼 얽히고 꼬불꼬불한 국수라는 뜻을 안고 생긴 이름이다. 라면은 국민식품이며 대중의 기호식품 1위자리에서 수십년고락을 같이한 음식이다. 어느집이고 찬장이나 서랍에 라면은 비상식량처럼 삶을 같이 하고있는 친구같은 아이템으로 사랑받고 있슴도 사실이다. 라면은 자체로만도 맛을 내지만 각종찌게나 떡복이에 얹어 먹으면 그맛이 일품이다. 크게 먹거리가 없던 시절엔 아이들이 생 라면을 스프와 흔들어 과자 대우를 해주며 아껴먹던 간식대용으로도 좋았다. 지금이야 매운맛 중간맛 순한맛 외에 다양한 맛을 가미한 수십종 라면이 소비자의 선택을 알쏭달쏭하게 만들며 3조를 넘는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요즘은 1971년 일본 닛산식품이 개발하고 이듬해 삼양식품이 첫 출시한 컵라면까지 가세하여 중국및 동남아 시장수출을 더하면 재벌가의 효자상품으로 어엿한 품목이 됐다. 탄수화물이 50%를 넘는 영양소 공급으로 과다섭취시 섭취균형이 위협받을수 있음에도 현재 대한민국 소비자중 30대미만의 라면 취식률은 주당 한번에서 3회이상먹는다는 대답이 각각30%를 상회하는 주식 아닌 主食이 되어 있다. 생각없이 혀끝의 맛에 취해 먹는 라면이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재미도 있고 사연도 많다. 국내 최장 최초 생산자인 삼양식품의 라면은 라면발 하나 길이가 무려50미터에 달해 타사의 40미터를 능가하는데 유익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롭다. 사랑받고 기호의 대상이 되는 라면이지만 귀한 대접은 받지못한다. 라면이라도 먹지 한다든가 또 라면이야 하는 볼멘소리 외에도 마치 건강의 반대편에 서있는 危害식품취급을 감수하며 원하는 아이와 엄마의 만류사이에서 때때로 천덕꾸러기도 된다. 사정이 어떻튼 라면을 1000원이라 볼때 시장규모로 보면 5천만국민이 가정과 식당에서 1년에 60개씩은 먹는 음식이고 보니 대단하다. 그렇다면 라면은 언제 어떻게 한국땅을 찾아와서 우리와 함께 먹거리 여정에 동반되었을까 들춰보면 결코 흥미와 재미에만 국한되지않는 짠한 역사를 가진다. 우선 라면은 6.25를 승전으로 마무리한 절대절명의 전략이 눈부셨던 인천상륙기념일인 1963년 9월15일에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삼양식품의 사장이던 전중윤이 기필코 가난한 민족의 배곯이를 덜어주겠다는 눈물의 다짐이 만든 식품이다. 남대문에 남루한 인파가 줄지어 먹던 5원짜리 꿀꿀이죽의 비애가 젊은 사업가의 가슴을 아프게 움직였고 그는 일본이 역시 전후식품으로 앞서 개발한 라면에 눈을 돌린다.값싸고 쉽게 한끼 때우기에 안성맞춤 식품이 라면이었던것에 착안한 사업이었지만 당시 생산라인 1기가 6만불이었던 천문학적 돈이 그를 막아선다. 달러가 정부통제에 있고 그나마 농림부 전체금고가10만불에 머문 시절이니 그림의 떡인 사업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를 삼키고 설득을 입에 담아냈다. 인연이 있던 중정부장 김종필에게 어필한 그의 가난극복과 국민먹거리를 향한 애정과 소신이 5만불의 농림부 예산차용으로 이어졌고 라면은 그렇게 출발한다. 그러나65년 한일협정전의 국교단절과 국민감정으로 일본기업의 기술이전 외면의 난제가 발목을 잡았지만 전사장의 간곡하고 진실된 설득과 청원은 한사람의 일본인을 움직인다. 묘조(明星)식품의 오쿠이 사장이 따스한 손을 잡아준다. 훗날 베트남전쟁이 한국산업과 건설의 종자돈 역할을 한것처럼 민족상잔의 6.25는 일본의 돈벌이 과정이 되었고 2차대전 패전후 낙망과 폐허의 일본이 도약하는데 한국전쟁이 디딤돌이 된점을 인식한 오쿠이사장의 양심이 한반도 식문화 변혁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수백만의 생명이 뿌린 피로 강토를 적신 전쟁터에 물자를 팔아 이룬 일본의 현대화와 그들의 주린배를 채운사실에 채무감을 토로하며 오쿠이는 1기에 6만불하던 시세손해를 감수하며 생산라인 두기를 5만달러에 넘겨준다. 이후 일본 현지에서 스프제조기술 습득에 매달리다 실패하고 빈손으로 귀국길에 오른 허탈한 전사장에게 공항에서 오쿠이사장 비서가 건넨 봉투속 스프제조 비법이 전중윤의 눈물과 버무려져 최초의 주황색 봉지속 삼양 치킨라면은 세상에 어렵게 등장했다. 당시 된장찌게와 김치전골이 30원이고 커피한잔값이 35원이던 것에 반해 10원에 판매된 라면은 구수하고 짜릿한 맛으로 단박에 대중 입맛을 훔쳐 선풍적 인기와 함께 삼양식품의 기업품격을 높였다. 무엇이든 前人未踏의 길을 연다는것엔 신화적이고 도전적인 한사람의 불굴의 도전이 밑거름이 됨을 간단한 요리로 대변되는 라면의 속성과는 비교불가 훨씬 뛰어넘는 깊이와 역사를 보게되어 뭉클하기 까지 하다.가난하여 주머니가 얇은 사람들과 함께 시작된 라면은 지난 50수년 바쁘고 열심으로 살아 온 한민족에게 짜장면과 함께 간과할수 없는 눈물의 동행이었고 수출과 함께 원조 라면의 나라 일본이 혀를 내두르며 패배를 인정한 삼성반도체 만큼이나 일본라면을 단연코 제친 뚜렷하고 대단한 다양성과 진일보한 맛으로 세계를 주름잡고 있어 흐믓하다. 지금이야 90키로를 넘는 자칭 위풍당당거구요 타칭 단순비만의 내몸이지만 어려서는 편식과 까다로운 식성으로 왜소빈골하던 나는 라면을 너무 좋아해서 아버지같은 형님들과 라면을 두고 내기를 했었던 기억이 있다. 30일동안 라면만 먹고 견디면 뭐든 다 해주겠다는 형들의 제안에 겁없이 달려들던 기세가 24일만에 맥없이 꺽인 추억이 바로 그것인데 밀가루냄새에 메스꺼운 속을 달래느라 어지간히도 애썼던 뒷맛이 아직도 혀끝에 남아 있다. 당시 삼양라면 공장이 내고향 춘천시 후평동에 있고 목장이 대관령에 있어서 인지 지금도 난 웬만하면 삼양라면만 먹는다. 군사정권때인가 우지파동으로 부동의 1등자리를 내주고 문닫을 지경때도 괜스레 고향땅에 불이라도 난듯 안타까워 놀랐는데 시장점유율이 농심이나 팔도나 오뚜기에 밀려 뒷전일때는 아쉽고 허전하여 속상하고 그랬다. 요즘 주황색 원조 삼양라면을 만나면 오랜친구 만난듯 기쁘고 맘이 온기로 충실하다. 그때 그추억이 아까워 난 라면 그맛만 볼 욕심에 계란이나 기타 첨가물은 절대 얹어먹지 않는다. 전중윤 회장의 국민사랑의 기업정신이 담긴 라면 한그릇의 구수함을 온전히 나누기 위함이다. 라면을 미친듯 좋아하던 막내에게 라면공장집으로 장거가라던 형들의 권고사항(?)을 못지키고 운수업하던 집안 강진사님 둘째 딸인 지금의 아내가 늘어만 가는 남편의 체중과 건강을 염려하여 라면 먹는 걸 막아 설때마다 집에서 멀지않던 삼양라면 사장님집 담장이라도 기웃거려볼걸 하며 피식웃는다
첫댓글 저는 글을 읽다보니 라면이 생각나네요 ^^ ㅋ
라면을 특별히 좋아하시는군요 근데 라면은 국민식품이어서 전쟁시 비상식량이라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