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하키는 빙상에서 스케이트를 착용한 6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고무원판의 퍽을 스틱으로 쳐서 상대팀의 골에 넣는 경기이다.
아일랜드의 국기로 인정받는 헐리 또는 헐링, 스코틀랜드의 국기로 인정받는 신티와 비슷한 밴디라는 빙상경기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이주민들 및 영국의 군인들에 의해 캐나다로 전해져 아이스하키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 공식적인 아이스 하키경기는 캐나다몬트리올(Montreal) 맥길대학의 J.크라이턴을 비롯한 학생들이 1875년 결빙한 강에서 편을 갈라 경기를 한 것이 최초이며, R.스미스와 W.로버트슨이 1879년 규칙을 만들고 각 팀의 선수를 9명으로 제한하였다.
그러다가 캐나다의 국기로까지 발전하였으며 1885년 몬트리올에서 최초로전국적인 하키단체인 캐나다아마추어하키협회가 설립되었고, 여기서 각 팀의 선수를 7명으로 제한하였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선수들은 신가드(정강이보호대)를 착용했고, 골키퍼는 가슴보호대를 입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이스하키링크가 캐나다동부전역에 건설되었으며, 스틱도 생산되었다.
이로써 근대 아이스하키는 캐나다를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 경기가 유럽에 소개되자 호응하는 나라들이 늘어났고, 여러나라에서 국제단체를 조직하자는 의견이 있어 1908년 5월파리(Paris)에서 가진 제1회 회합에서 IIHF(International Ice Hockey Federation: 국제 아이스하키연맹)이 결성되었다.
1910년에는 유럽 선수권대회를, 1920년에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창설, 국제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으며, 1924년 프랑스 샤모니(Chamonix)에서 개최된 제1회동계올림픽경기대회때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이와 함께 인공 링크가 도처에 만들어졌고 세계적으로 급격히 보급되면서, 1999년 현재 53개국이 IIHF에가입, 인기있는 동계스포츠 종목으로 각광받고 있다. 세계의아이스하키는 북미지역과 유럽지역, 아시아지역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있는데 북미아이스하키는 캐나다, 미국이 대표되고 유럽 아이스하키는 스웨덴, 핀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체코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시아 아이스 하키는 한국, 일본, 중국, 북한, 카자흐스탄등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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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아이스하키의 역사
우리나라의 아이스하키시초는 용산 철도청의 초정으로 1928년 1월도쿄제국대학아이스하키팀의 시범경기라 할 수 있고 그 당시 창설된 철도팀과 경성제대빙구부가 경기를 갖게 된 것이 한국 아이스하키의 최초 경기이다.
하지만 국내 최초의 공식경기는 1930년 1월 조선체육회주최 제6회 전 조선 빙상경기대회에 아이스하키가 공식종목으로 채택된 시기라 할 수 있다.
1930.11월, 조선 아이스하키연맹이 창설되고 연희전문학교가 처음으로 한국인 학교로 아이스하키부를 창설하였고 1934년에 세브란스의전 ,광성중학팀(평양), 1935년에는 경성의전, 1936년 보성전문, 1938년 송동중학(개성), 1939년에 휘문중학팀이 창설되었다.
중등부 아이스하키경기는 1938년 1월의 중등빙구경기연맹전이 그 시작이었다.
제1회 대회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제2회 대회(1939년)는경성사범이, 제4회대회(1941년)는 휘문중학팀이 각각 우승을 안았다. 고전부에서는고진빙구연맹전이개최되었는데 1939년에제 1회대회가있은후연이어 3년간계속되었으며제 3회대회에서는 한국인팀인연희전문팀이 패권을차지했다.
1945년 광복 후, 남북이 갈라지자 남쪽의 기후조건으로 인해 아이스하키의 발전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으나 그래도 일반부의 교통부, 연희 구락부, 서울구락부을 위시하여 대학부의 고려대학, 연세대학, 서울대학에 팀이 생겼고 중등부에서도 경희, 휘문, 송도 중학이 팀을 재건또는 새로 창설하였으며,
1946년에는 경복, 중동, 용산, 배재가 아이스하키팀을 창설하였다.
1947년에는 동호인들이 주체가 되어 협회가 조직되었고,
1959년 11월 국제아이스하키 연맹에 가입신청을 제출,
1960년 3월에 정식 가입의승인을 얻게 되었다.
동절기자연빙에 의존하던 한국아이스하키는 1964년 11월 숙원이던 실내링크장을 동대문에 갖게 되었다. 동대문 링크장은 1985년에 문을닫을 때까지 한국 아이스하키의 유일한 산실로서 기술 향상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1965년 1월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일본대학팀을 초청하여 국제경기를 가졌고,
1966년에는 서울 선발팀이 일본에 원정하여 5전 4승1패의성적을 거두었다. 한국아이스하키는 1979년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스페인)에참가하므로써본격적으로국제무대에등장하기시작하였고,
이후 1981년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스페인), 1984년 아시아주니어선수권대회(일본), 1986년 제1회동계아시아경기대회(일본), 1990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유고), 1991년아시안컵(일본)등의 참가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각종국제대회를 지속적으로 참가하고 있으며 세계선수권대회의 B+에 속해있다.
아이스하키에서 남북대결은 1986년 제1회 동계아시아경기대회에서다.
한국대표팀은 예상을뒤엎고 1차전 2:1, 2차전 3:2로 모두 극적인 역전승을하여 동메달을획득, 1990년 제2회 동계아시아경기대회서도 북한팀에 승리하며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1984년 5월에는 태릉선수촌에 실내링크가 만들어져 개장을 기념하는 국제초청경기 (한국, 일본, 프랑스, 미국)를 개최하였고 1985년에는 국제연맹주최의 공식대회인 제2회 아시아주니아대회를 최초로 유치하였다.
1990년 제7회 아시안주니어대회, 1993년 제10회 아시안주니어대회, 1995년 제3회 아시안컵대회를 성공리에 치루었고, 1997년 전주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1999년 강원아시안게임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1930년 11월 협회창립이후 1965년에 전국중고등학교 아이스하키연맹, 1981년에 서울시아이스하키협회가 결성되었고, 1991년과 1992년에는 인천시 아이스하키협회와 대구시 아이스하키협회가 각각 조직되면서 서울에만 활동이 국한되 온 아이스하키가 비로서 지방화시대를 열게 되었다.
1930년 연희전문학교팀 창단을 시작으로 그 동안 많은 학교에서 팀을 창단하여 아이스하키를 발전시켜 왔다. 1998년 현재에는 대학 5개팀과 고등학교 11팀, 중학교 11개팀, 초등학교 9개팀, 실업팀이 1993년 12월석탑건설에서 최초로 창단하였고,
이어서 1994년 8월에만도 기계에서 팀을 창단하면서 현대 오일뱅커스팀이 창단함에 3개팀으로 구성 발전하였다. 한국아이스하키는 19985년에 없어진 동대문 실내아이링크하나로 20년간 부족한 여건하에서도 꾸준히 성장해왔으며 현재에는 1994년 5월개장된 태능실내링크와 1989년 12월 건립된 목동링크장외에 1994년 7월 분당스포츠센터와 그 이후 광운대, 고려대학이 자체 링크장을 갖추며 보다 아이스하키의 발전에 기여하고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