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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보엠: 우리 시대의 사랑법
2012 짤쯔부르크 페스티벌 -
2012년 짤쯔부르크 페스티벌의 라 보엠은 여러 화제를 불러 일으켰는데, 오페라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 인기가 많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짤쯔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비로소 최초로 공연되었다는 점이 최고의 화제였을 것이다. 또한 연출가가 75년생으로 마흔도 안 된 젊은 연출가라는 점에서도 파격적이었다.
처음 영상물의 케이스를 보았을 때 이미 ‘고전중의 고전’이 되어버린 라 보엠을 현대로 무대를 옮겨, 현대적인 의상을 입고 미니멀한 세트에 있는 성악가들의 사진을 보고 당황스러웠지만 그만큼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극장 상영이 끝나고 영상물로 나온 것을 구입한지라 이미 로돌포 역의 베찰라 목소리가 그다지 안 좋다는 점을 감안하고 구입한 이유는 도대체 표지만 보고서는 이야기의 전개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본 이번 라 보엠은 그야말로 세트뿐만 아니라 지극히 ‘현대적인’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였다.
비록 의상이 80년대 디스코세대풍의 의상으로 좀 촌스럽고 소품도 비디오테이프나 싸구려로 보이는 매트리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부러 ‘촌티’를 팍팍 내는데 비해, 2막의 크리스마스 거리 풍경 장면에서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최신(?)전자오락기인 플레이스테이션3 상자를 들고 있는 다 던지 2012년 파리지도책 표지가 3막 배경으로 등장하는 점에서 뭔가 시대배경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안 되는 점은 분명히 이 작품의 단점으로 지적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놀라울 만큼 일관되게 ‘우리 시대 청춘들의 사랑 방식’을 그려내고 있으며, 인물들마다 생생한 생동감을 전한다. 미미가 더 이상 긴 앞치마를 두르고 가냘프게 미소를 짓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르첼로가 베레모와 붓 대신 잠바를 걸치고 그래피티를 위해 페인트 스프레이를 들었음 에도 여전히 그들은 미미와 마르첼로다. 그리고 ‘먼 옛날의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이야기’에서 벗어나 귀를 네 개나 뚫고 가죽재킷을 걸치고 스모키 화장을 한, 촛불이 아닌 담뱃불을 빌리러온 마약중독자로 추정되는(왜냐하면 기침을 거의 하지 않는데다가 2막의 카페씬에서 일행의 샴페인 잔에 미미가 자기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약(환각제 혹은 마약)을 타서 샴페인과 섞기 때문이다) 미미는 놀랍기 그지없다. 이 사실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혹은 반쯤 의도적으로 잊어버린 사항인 ‘미미는 거리의 여자’ 즉 한물 간 창녀임을 통렬하게 일깨운다. 또한 바로 미미와 로돌포의 이야기가 현재에도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고 있는 ‘사건’임을 제시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11분’도 전·현직 창녀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책임을 상기해보라)
안나 넵트렙코가 연기한 미미는 여태까지의 미미와는 달랐는데 분명 로돌포를 유혹하는 면에서는 메트 오페라에서 안젤라 게오르규가 연기했던 미미와 언뜻 같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게오르규가 연기한 미미가 은근히 내숭 떨면서 꼬시는 조금은 새침한 요조숙녀와 같다면 넵트렙코의 미미는 ‘심심한데 남자나 한 번 꼬셔볼까?’하고 속으로는 흑심을 품으면서 겉으로는 튕기는 괄괄한 아가씨와 같았다. 그렇게 짙은 스모키 화장과 흡연으로 자신의 망가진 몸과 불행한 처지를 비관하는 표정을 감춘 미미에게 로돌포는 그저 처음에는 심심풀이의 상대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뒤늦게 찾아온 사랑임을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아갔고, 그녀의 점점 옅어져가는 화장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 하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대상으로서의 여자의 순수한 표정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사랑이 늦게 찾아왔기 때문에 아무 것도 되돌릴 수 없고 그저 사랑이 흘러가게 두어야 하는, 자신의 죽음을 그저 ‘기정사실화’ 해야만 하는 미미는 담담하면서도 처절했다.
이 공연에서의 안나 넵트렙코에게 받은 인상은 이미 살이 많이 쪄서 미모가 사라졌음을 본인도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 이상 미미인형의 죽음과 같았던 예전 모습은 탈피하였다. (자기는 더 이상 예쁘지도 않고 몸도 망가진 사람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냐고 물으며 죽어가는 모습은 그녀가 예쁘지 않았기에 훨씬 진실해 보였다. 오히려 미모의 굴레를 벗어났기에 더 연기 폭이 깊어졌고 앞으로도 롱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미미뿐만 아니라 로돌포도 예전 공연보다 훨씬 리얼한 캐릭터였다. 섬세한 면에서는 기존의 로돌포와 같은 맥락을 유지하나 전보다 훨씬 나약하고, 무력하기 그지없다. 그는 처음에 달콤한 말로 미미를 녹이긴 하지만 정작 미미의 죽음에 대해서는 힘없이 지켜보고 방관할 뿐 그녀의 죽음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로 뛰지 않는다. 즉 사랑은 하되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2막에서도 나타나는데 핑크색 보닛 대신 파티에나 어울릴 법한 핫핑크 스팽글 모자를 사주는 장면에서 로돌포와 미미의 연애가 딱 이정도의 수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첫 데이트인 만큼 가벼운 분위기일 수도 있겠지만 일상생활과는 어울리지 않는 흥청망청한 파티에나 어울릴 법한 모자는 그들이 쾌락을 추구하며 감정을 ‘소모’하고 있음을, 그리고 파티가 끝나면 공허함을 느끼듯이 그들이 서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외롭다는 것을, 외로워서 서로 껴안고 지냄에도 불구하고 더 가까이 다가서며 서로를 책임질 엄두는 못 낸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미는 이 무력한 남자를 결코 탓할 마음이 없기에 진실로 가련하기 그지없다. 미미의 가련함은 창백한 얼굴이나 잦은 기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로돌포의 무력함은 4막에서 결국 베누아에 의해 마르첼로의 그림이 떼어져 버려지고 그나마 남아있던 살림살이마저 차압당하며 내일이라도 당장 월세 방에서 내쫒길 처지에 몰리면서 극대화 된다.
사람에 대해 이렇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만나는 방식은 로돌포와 그의 세 친구의 동거에서도 보면 알 수 있는데, 기존의 누가 보아도 돈독한 우정을 자랑하는 네 친구와는 달리 여기서는 ‘서로 갈구면서’ 대화한다. 그들이 친구임에는 틀림없지만 냉소와 비꼼을 곁들이면서 육체적인 접촉은 거의 피하다시피하고 서로 거리를 두며 대화를 나누는 그들에게선 ‘(아무리 친구라도 내 영역엔 들어오지 마’라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물론 그들도 ‘죽음’이라는 커다란 사건 앞에서는 우정을 위해 서로 기꺼이 자기의 소중한 것(외투 등)을 희생하지만 말이다.
미미는 죽고, 로돌포는 홀로 남았다. 그는 어쩌면 미미만을 가슴에 묻고 평생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아직 젊고 다시 또 다른 여자가, 또 다른 사랑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기에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제 미미는 ‘이미 지나가버린 사랑’이 되었으며 앞으로도 여자와 여자 사이를 방랑하며 자유분방하게 지낼지도 모른다. 미미에게도 로돌포는 ‘마지막 사랑’이긴 했어도 ‘유일한 사랑’은 아니었고, ‘진실한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깊고 큰 사랑’이었다고 확신하기도 어렵다. 그러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빗방울이 뿌옇게 낀 창가에 미미의 이름을 적고 문질러서 지우고 사라진 손은 어쩌면 죽음으로서 사랑을 영원의 대상으로 미화시키는 것이 아닌 사랑은 창가에 이름을 썼다 지우는 것만큼이나 쉽고 부질없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첫댓글 정말 오랜만에 마주한 마리솔님의 내공이 살아숨쉬는 글이네요!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감상할 때 더욱 가슴으로 다가오는 겨울용(?)오페라에선 단연 최고라 할 수 있죠^^ 이렇게 멋진 마리솔님의 글을 자주 볼 수 있게 되길 희망해봅니다! 신혼부부가 함께 감상하면 더욱 사랑을 탄탄하게 해줄 것 같아요! 마리솔님~ 늘 행복하세요^^
과찬에 감사합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젠 고전이 뮤지컬화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고전은 고전답게 보고싶은데 말이죠!!!!
고전은 고전답게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페라는 시대상을 뛰어넘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감정들을 다루기 때문에 위대한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지오바니가 귀를 뚫고 가죽자켓을 입은 펑크족이 되서 무대에 등장한다고 해서 모짜르트 오페라의 예술성이 훼손되지는 않으니까요.
마리솔님!! 오페라가 시대상을 뛰어넘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감정을 다룬다!! 이런 글은 어느 책에 나오는가요?? 아니면 마리솔님의 생각인가요? 마리솔님!! 참 재미있는 분이군요!! 마리솔님이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얼마나 이해하는지느 모르겠으나!! 님이 돈지오반니를 몇번 듣고 돈지오반니의 예술성을 이해했다면 마리솔님이 모차르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돈지오반니의 음반은 몇장이나 소장하고 계시길래 예술성을 저에게 운운 하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