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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삭녕최씨 광주:광산파 원문보기 글쓴이: 삭녕최씨
삭녕최씨 유래
1. 朔寧崔氏(삭녕최씨)의 淵源(연원)
朔寧崔氏(삭녕최씨)의 始祖(시조)는 高麗時代(고려시대)에 中書門下省(중서문하성)의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신 崔天老(최천로)公(공)으로 先系(선계)는 文獻(문헌)이 失傳(실전)되어 詳考(상고)할 수 없다.
또한 高麗(고려) 明宗(명종) 때에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신 崔瑜價(최유가)公(공)을 中始祖(중시조)로 하고 朔寧(삭녕) 正言洞(정언동)을 平章洞(평장동)으로 改稱(개칭)하여 世居(세거)하여 왔으므로 後孫(후손)들이 本貫(본관)을 朔寧(삭녕)이라 하였다.
平章事(평장사) 兩公(양공)은 朔寧崔氏(삭녕최씨)의 遠祖(원조)로서 그 前後(전후)의 中間世系(중간세계)가 不傳(부전)하므로 高麗(고려) 末期(말기)에 親禦侮軍郎將(친어모군 낭장)을 歷任(역임)하신 崔善甫(최선보)公(공)과 咸慶殿副使(함경전 부사)를 지내신 崔珚(최연)公(공)을 各其(각기) 郎將公系派(낭장공계파)와 副使公系派(부사공계파)의 1世祖(세조)로 하여 世系(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 始祖(시조)의 遺事(유사)
朔寧崔氏(삭녕최씨)의 始祖(시조)인 崔天老(최천로)公(공)은 高麗朝(고려조)에 中書門下省(중서문하성)의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을 歷任(역임)하셨고 中始祖(중시조)인 崔瑜價(최유가)公(공)은 高麗(고려) 제19대 明宗(명종) 20년(AD. 1190) 庚戌(경술) 12월에 國子監大司成(국자감 대사성)과 樞密院副使(추밀원 부사)를 歷任(역임)하고 知貢擧(지공거)와 秘書省判事(비서성 판사) 등을 거쳐 明宗(명종) 24년(AD. 1194)에 參知政事(참지정사)를 歷任(역임)하고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르신 重臣(중신)으로서 天稟(천품)이 仁厚(인후)하고 德望(덕망)이 높았으며 年老(연노)하여 退任(퇴임)을 懇請(간청)하시니 世人(세인)들이 그 德風(덕풍)을 讚美(찬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平章事(평장사) 兩公(양공)은 우리 朔寧崔氏(삭녕최씨)의 遠祖(원조)로서 그 前後(전후)의 中間世系(중간세계)가 不傳(부전)하므로 그 以上(이상)의 詳考(상고)할 수가 없으며 始祖(시조)이신 天老(천로)公(공)은 우리 朔寧崔氏族譜(삭녕최씨족보)에만 보일 뿐 다른 文獻(문헌)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으나 中始祖(중시조)인 崔瑜價(최유가)公(공)의 行蹟(행적)은 上記(상기)와 같이 高麗史(고려사)에 記錄(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晩成譜(만성보) 등의 姓譜冊子(성보책자)에 朔寧崔氏(삭녕최씨)의 始祖(시조)가 崔瑜價(최유가)公(공)으로 되어 있음은 그러한 緣由(연유)이다.
朔寧崔氏(삭녕최씨)의 始祖(시조)와 中始祖(중시조) 兩公(양공)은 遠祖(원조)로서 그 前後(전후)의 中間世系(중간세계)가 不傳(부전)하고 墓(묘)는 高陽(고양)으로 記錄(기록)되어 전해오고 있으나 守護(수호)하지 못하여 確認(확인)할 길이 없다.
3.始祖(시조) 平章事(평장사) 兩世(양세)의 舊基(구기)
始祖(시조)이신 崔天老(최천로)公(공)과 中始祖(중시조)이신 崔瑜價(최유가) 兩公(양공) 때부터 代代(대대)로 世居(세거)해 오신 舊基(구기)가 옛 朔寧郡(삭녕군) 北方(북방) 40餘里(여리)에 位置(위치)한 馬場面(마장면) 大田里(대전리) 槐陰村(괴음촌)에 壬坐(임좌)로 傳(전)해 왔으며, 槐陰村(괴음촌) 舊基(구기) 앞에는 後孫(후손) 文靖公(문정공) 崔恒(최항)께서 始祖(시조)이신 平章事(평장사) 兩公(양공)을 崇慕(숭모)하기 위해 세우신 興化亭(흥화정)이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朔寧崔氏(삭녕최씨)判書公派(판서공파)의 由來(유래)
우리 朔寧崔氏(삭녕최씨) 判書公派(판서공파)의 始祖(시조)인 崔天老(최천로)公(공)은 高麗朝(고려조)에 中書門下省(중서문하성)의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을 歷任(역임)하셨고 中始祖(중시조)인 崔瑜價(최유가)公(공)[麗史(려사)에는 瑜賈(유가) 또는 瑜嘉(유가)로 기록]은 高麗(고려) 제19대 明宗(명종) 20년(AD. 1190) 庚戌(경술) 12월에 國子監大司成(국자감 대사성)과 樞密院副使(추밀원 부사)를 歷任(역임)하고 知貢擧(지공거)와 秘書省判事(비서성 판사) 등을 거쳐 明宗(명종) 24년(AD. 1194)에 參知政事(참지정사)를 歷任(역임)하고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르신 重臣(중신)으로서 天稟(천품)이 仁厚(인후)하고 德望(덕망)이 높았으며 年老(연노)하여 退任(퇴임)을 懇請(간청)하시니 世人(세인)들이 그 德風(덕풍)을 讚美(찬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平章事(평장사) 兩公(양공)의 中間世系(중간세계)가 不傳(부전)하여 後孫(후손) 諱(휘) 善甫(선보)와 諱(휘) 珚(연)을 各起(각기) 1世(세)로 하여 世系(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親禦侮軍郞將(친어모군 낭장)을 歷任(역임)한 諱(휘) 善甫(선보)의 後孫(후손)으로 朝鮮初期(조선 초기) 世宗朝(세종조)에 文名(문명)을 떨친 諱(휘) 恒(항)은 世宗(세종) 16년(1434)에 謁聖文科(알성문과)에 壯元(장원)으로 及第(급제)하여 文衡(문형)[大提學(대제학)]에 數十年(수십년)을 在任(재임)하였으며, 領議政(영의정)에 오르고, 世宗(세종)의 命(명)을 받들어 訓民正音(훈민정음), 東國正韻(동국정운), 東方語音(동방어음)을 是正(시정)하고 經國大典(경국대전)을 撰進(찬진)하였다. 文章(문장)이 長江大河(장강대하)와 같고 朝廷(조정)의 高文大冊(고문대책)은 모두 公(공)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中國(중국)에서도 표사의 精巧(정교)함을 讚美(찬미)하였다. 公(공)이 謁聖文科(알성문과)에 壯元(장원)할 무렵 世宗大王(세종대왕)이 꿈을 꾸었는데 한 마리의 큰 黃龍(황룡)이 成均館(성균관) 서편 잣나무에 서리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깨어서 內官(내관)을 시켜 살펴보게 했더니 한 선비가 그 잣나무 아래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이윽고 科擧(과거)를 치르고 壯元及第(장원급제)한 사람을 引見(인견)하고 보니 다름 아닌 꿈속에서 낮잠 자던 바로 그 선비였으며 훗날 名臣(명신)이며 大學者(대학자)인 太虛亭(태허정) 諱(휘) 恒(항)이었다. 그로부터 그 잣나무를 壯元栢(장원백)이라 하여 科擧(과거)를 앞둔 선비들이 거기 가서 낮잠자는 風習(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文靖公(문정공) 諱(휘) 恒(항)의 次子(차자)이신 贊成公(찬성공) 諱(휘) 永灝(영호)는 어려서부터 天稟(천품)이 聰明(총명)하고 文學(문학)에 뛰어나 成宗(성종) 8년(1477)에 20世(세)의 少年(소년)으로 春場試(춘장시)에 壯元及第(장원급제)하고 즉시 正三品(정3품)인 司宰監正(사재감 정)에 除授(제수)되었으며 成宗(성종) 12년(1481) 通政大夫(통정대부)에 進階(진계)되어 敬差官(경차관)으로 王命(왕명)을 받들어 固城任地(고성임지)에 赴任(부임)하여 錢穀(전곡)의 損失(손실)과 民情(민정)을 살피던 중 得病急逝(득병급서)하니 成宗(성종)은 敬差官(경차관)으로 보낸 것을 크게 後悔(후회)하고 그의 文才(문재)를 哀惜(애석)해 하였으며, 退溪(퇴계) 李滉(이황) 先生(선생)은 哀悼文(애도문)에서 “才能文高(재능문고)한 公(공)이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사람마다 慟惜(통석)하게 여겼다.” 고 하였다.
贊成公(찬성공) 諱(휘) 永灝(영호)의 長子이신 判書公 諱 秀彦(수언)은 判書公派(판서공파), 즉 一名(일명) 光山派(광산파)의 派祖(파조)로서 成宗朝(성종조)의 文人(문인)으로 弘文館應敎(홍문관 응교)를 거쳐 吏曹判書(이조판서)를 歷任(역임)하였다.
判書公(판서공) 諱(휘) 秀彦(수언)의 아들인 諱(휘) 卿立(경립)은 京西小門(경 서소문) 內(내)에서 世居(세거)하다가 通德郞(통덕랑)에 오른 후 末年(말년)에 家禍(가화)를 당하여 世上(세상)을 恨歎(한탄)하고 湖南(호남) 南平縣(남평현) 竹村(죽촌), 現(현) 光州廣域市(광주광역시) 南區(남구) 九沼洞(구소동)으로 落鄕(낙향)하였다. 이러한 緣由(연유)로 인하여 朔寧崔氏(삭녕최씨) 本宗(본종)과 450여년간 遊離(유리)되는 結果(결과)를 招來(초래)하였다.
朝鮮中期(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忠臣(충신)으로 湖南(호남)에서 名聲(명성)을 드높였던 文靖公(문정공)의 玄孫(현손)이자 贊成公(찬성공)의 曾孫(증손)이며 判書公(판서공)의 孫子(손자)이자 通德郞公(통덕랑공) 諱(휘) 卿立(경립)의 아들이신 松巖公(송암공) 諱(휘) 應龍(응룡)은 明宗朝(명종조)에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丙寅(병인:1566)에 光州牧使(광주목사)를 歷任(역임)하고 世上(세상)이 어지러워 더 이상의 官職(관직)을 不仕(불사)하고 물러나 先親(선친)이 머물렀던 湖南(호남) 南平縣(남평현) 竹村(죽촌)으로 落鄕(낙향)하여 松下(송하)에 江亭(강정)을 짓고 經史(경사)와 詩畵(시화)를 벗삼아 自娛(자오)하면서 한 平生(평생) 淸貧(청빈)을 樂(낙)으로 삼아 富貴榮華(부귀영화)를 뜬구름같이 여겼다. 宣祖(선조) 25년(1592)에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白衣從軍(백의종군)하여 南平(남평)에서 義兵(의병)을 일으켰는데 本人(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朝廷(조정)에서는 行職(행직)인 主簿(주부)[종6품의 벼슬]의 관직이 내려졌으며 全羅左義兵(전라좌의병)의 한 軸(축)을 형성하여 錦山大戰(금산대전)에서 數百(수백)의 倭賊(왜적)을 무찌르다 敗(패)함에 이르러서도 秋毫(추호)도 물러섬이 없이 對敵(대적)하다가 壯烈(장렬)히 殉節(순절)하였다. 오로지 愛國愛族(애국애족)의 一念(일념)으로 國土(국토)를 回復(회복)하고 百姓(백성)의 安危(안위)만를 살폈으며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세운 큰 功(공)으로 宣武原從功臣(선무원종공신)에 策勳(책훈)되었으며 當時(당시)의 世人(세인)들은 忠節公(충절공)이란 別號(별호)로 붙여 哀悼(애도)를 표시했다고 한다.
松巖公(송암공) 諱(휘) 應龍(응룡)의 아들 竹峯公(죽봉공) 諱(휘) 永水(영수)는 壬辰倭亂(임진왜란) 當時(당시) 參奉(참봉)의 벼슬을 지내던중 父親(부친)을 좇아 從軍(종군)하여 義兵(의병)을 일의키고 錦山大戰(금산대전)에서 戰功(전공)을 세웠으며 賊(적)의 捕虜(포로)가 되어 심한 拷問(고문)에도 不拘(불구)하고 선비의 기개를 조금도 굴함이 없이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적을 꾸짖다가 賊鋒(적봉)에 殉節(순절)하니 竹峯公(죽봉공)의 나이 겨우 34歲(세)에 不過(불과)하였다. 公(공)의 强直(강직)하고 義(의)로운 殉節(순절)에 倭將(왜장)도 感歎(감탄)을 하였다고 전해온다. 當時(당시)의 世人(세인)들은 竹峯公(죽봉공)이 선비임에도 불구하고 武功(무공)을 드높였다고 하여 別號(별호)를 武烈公(무열공)이라 불리었다.
朝鮮(조선) 後期(후기)에는 純祖朝(순조조)에 嘉善大夫(가선대부) 經筵(경연)兼(겸)參贊官(참찬관)을 歷任(역임)한 判書公(판서공) 諱(휘) 秀彦(수언)의 14世孫(세손) 諱(휘) 談九(담구)[一名(일명) 致九(치구)]는 孝行(효행)으로 家門(가문)을 더욱 빛냈다.
우리 朔寧崔氏(삭녕최씨) 判書公派(판서공파)는 不幸(불행)하게도 判書公(판서공) 이후 수차례의 家禍(가화)를 당하면서 家運(가운)이 衰落(쇠락)하여 四方四處(사방사처)로 흩어져 많은 血族(혈족)들과 離散(이산)하였으며 이로 인해 朔寧崔氏(삭녕최씨) 本宗(본종)과 數百年(수백년) 동안 결별한 채로 지내오게 됨으로써 先祖(선조)의 偉業(위업)을 제대로 顯彰(현창)하지도 못하고 同時代(동 시대)의 人物(인물)들의 業績(업적)에 비하면 현격하게 뛰아남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地方(지방)의 人物(인물)로 밖에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同(동)血族(혈족)사이에도 無視(무시)하고 排斥(배척)되어왔음은 同祖(동조)의 根源(근원)이란 점을 생각할 때 안타까움이 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朔寧崔氏(삭녕최씨) 判書公派(판서공파)는 始祖(시조)에서부터 朝鮮朝末(조선조말)까지 文章道德(문장도덕)을 드높이고 救國濟民(구국제민)에 힘썼으며 判書(판서) 2人(인), 牧使(목사) 2人(인), 壬辰倭亂(임진왜란) 2功臣(공신) 등 名賢(명현)・忠臣(충신)・孝子(효자) 등 수많은 人才(인재)를 輩出(배출)하여 名門(명문)을 이루고 繁榮(번영)하여 왔다.
참고
우리 朔寧崔氏(삭녕최씨)의 貫鄕(관향)인 朔寧(삭녕)은 朔邑(삭읍)・朔州(삭주)・安朔(안삭)・僧嶺(승령)・非勿(비물)・㠉梁(동량) 등의 別號(별호)로 불리웠으며, 지금은 京畿道(경기도) 漣川郡(연천군)과 江原道(강원도) 鐵原郡(철원군)의 一帶(일대)로 休戰線(휴전선) 北方(북방)에 位置(위치)하고 있다.
朔寧(삭녕)은 本來(본래) 高句麗時代(고구려 시대)에 小邑豆縣(소읍두현)이었는데 統一新羅時代(통일신라시대) 제34대 景德王(경덕왕:AD.742~764) 때에 行政區域(행정구역)의 改編(개편)으로 朔邑縣(삭읍현)으로 고쳐 兎山郡(토산군)에 屬(속)하였다.
高麗時代(고려시대)에는 朔寧郡(삭녕군)으로 改稱(개칭)하고 제8대 顯宗(현종) 9년(AD. 1018)에는 東州(동주 : 鐵原[철원])에 屬(속)하였다가 제15대 睿宗(예종) 1년(AD. 1106)에는 僧嶺顯(승령현)의 監務(감무)를 兼(겸)하여 朔州郡(삭주군)이라 하였다.
朝鮮時代(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제3대 太宗(태종) 3년(AD. 1403)에 僧嶺(승령)을 이곳에 隸屬(예속)시켰고 太宗(태종) 14년(AD. 1414)에 安峽縣(안협현)과 合倂(합병)하여 安朔郡(안삭군)이라 하였다가 太宗(태종) 16년(AD. 1416)에 安峽郡(안협군)을 다시 設置하고 朔寧郡(삭녕군)으로 還元(환원)시켜 한때 楊州(양주)에 屬(속)하였다. 제26대 高宗(고종) 32년(AD. 1895)에 獨立(독립)된 郡(군)으로 昇格(승격)되었는데 西紀 1914년에 日帝(일제)의 行政區域(행정구역) 改編(개편)으로 朔寧郡(삭녕군)을 廢(폐)하여 馬場面(마장면)・寅目面(인목면)・乃文面(내문면)을 江原道(강원도) 鐵原郡(철원군)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京畿道(경기도) 漣川郡(연천군)에 合倂(합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