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동체
까만색으로 번쩍거리는 LG 상표가 붙은 at&t 셀폰이 울렸다.
요한님 지금 뭐하세요?
시간이 흘러갈수록 손아귀에 쏙 들어붙게 디자인된 셀폰을 열자마자 들린 청성님 고유의 클래식한 목소리가 엘지 디자인의 귀여움을 송두리째 다 날려 보내듯 울렸다.
지금 사무실인데요. 애들하고 점심 먹을 준비하고 있지요.
몇 시쯤이면 끝나나요?
오후 2시 40분에서 3 시경이요.
WS 자매가 와서 대가에서 식사하고 있어요.
그러면 끝나고 저의 사무실로 오셔서 차나 같이 하시지요!
요한님 그럴게 아니고, 르모인 애비뉴에 있는 유명한 커피집 있잖아요?
커피집이요? 다이너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이름이 뭣이더라?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아! 스타박스에서 만나지요. 그리고 그 근처에 있는 한의사 한 분을 만나야 하는데 요한님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으니 그 곳이 제일 좋을 것 같네요.
당연히 스타박스 라고 하니, 그리고 르모인 애비뉴라고 하니, 포트리의 린우드 킹스플라자 안에 있는 스타박스가 생각났다. 그래서
그러면 제가 애들 끝내놓고 나서 그리로 가지요.
두 명의 아이들 이번 여름학교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정말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미국경제의 실상을 몸통으로 느끼며 칠월의 반 토막을 보내는 중이었다. 햇살은 따가웠으나 견딜만한 여름철의 한 낮이었다. 중앙냉방이 시원하게 작동되던 사무실을 나오니 햇살이 따뜻했다. 고유가의 고공행진이 끝을 모르고 진행하는 중에 이런 따뜻함을 즐기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을 때에도 목욕탕의 찜통에서 피어나는 뜨거운 증기가 모락거리듯 화끈거리기는 했지만 오전 내내 건물자체가 냉각시켰던 몸의 체온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만큼 세상은 여름의 열기를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나는 실반 애비뉴에서 자동적으로 이름이 변경되는 르모인 애비뉴를 타고 내 마음의 회로에 그려진 GPS에 맞추어 린우드 플라자의 스타박스 커피숖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 곳에서도 두 여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짙은 원두형 커피의 내음이 코를 찔렀다. 열심히 랩탑을 두드리는 한 청년의 손놀림이 유일하게 내 눈에 들어왔을 뿐인 텅 빈 공간을 두루 살피고 다시 문 밖을 나오며 검은 비로드 같은 셀폰을 눌렀다. 돌아오는 응답은 메시지남기라는 자동문답뿐이었다. 아직 식당에서 오지 않았는가? 시간을 낭비하기도 아깝고 일단 차를 타고 도서관부터 가야 했다. 그동안 빌려서 읽고 있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을 비롯한 디비디 영화 몇 편을 돌려 줄 날짜가 다 되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페이퍼 백으로 만들어진 월든. 사실 나는 이 책을 빌린 이유가 있었다. 고등학교 학생 한명을 튜터하면서 접한 19세기의 미국문학을 일람할 때에 초월주의자였던 랄프 왈도 에머슨의 제자 소로의 불후의 명작인 월든을 꼭 읽어야겠다고 다짐한 탓이었고, 요즘 같은 자본주의 문명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자연으로 돌아가 살겠다는 내 나름의 여생플랜 때문이었다.
도서관에서 책과 디비디를 반납하고 나오는 데 다시 까만 비로드의 셀폰이 도서관의 적막을 울렸다.
청성님의 음성이 다시 우렁차게 들렸다. 나는 반갑게 응답하며
어디 계시지요?
스타박스에 있어요 왜 안 오세요?
어? 조금 전에 갔었는데 안계시던데요?
그래요? 르모인 애비뉴에서 메인 스트릿 통과해 고려정을 지나면 보스톤 마켓이 보이잖아요? 그 옆에 스타박스에 있어요.
이때 나는 나의 마음의 편견이 일을 그르쳤다는 것을 알고 얼른,
그러면 바로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실은 도서관 근처에 바로 보스톤 마켓이 있었고 그 옆에 스타박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포트 리의 지리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 있다. 어디에 일방통행로가 있는지 어디로 빠져나가면 정확한 위치에 도달할 수 있는지 까지도. 그런 익숙함으로 바로 도서관 주차장을 빠져나와 일단 정지의 센터 애비뉴를 가로질러 스쿨 넘버 원(포트리에는 초등학교가 4 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우선멈춤의 사인을 둘러보고 패트롤의 경찰차처럼 휙 오른쪽으로 꺽어 바로 그 몰 안으로 내달려갔다. 좋은 장소에 적당히 차를 주차하고 스타박스 문 앞으로 들어가는데 벌써 알겠다. 온통 유리로 만든 스타박스 안은 법석거리고 있었다. 밖에서 보아도 두 여인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안에서 반갑게 맞이하는 WS의 모습에 웃음이 감돈다. 청성님과 함께 두 분은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바로 통유리로 치장된 좋은 명당자리에 앉아 있었다. 참 오랜 만에 다시 만나는 WS님을 다시 만나서 악수를 하고 자리를 잡았다. 이미 두 분은 거나하게 취한 사람처럼 대화의 바다에 빠져있었던지 아니면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파도의 가장자리에서 바다의 대화를 즐기고 있는 듯 했다. 난 바닷가에 분명히 간 것이었다. 대서양의 바닷가에 도달하자마자 느껴지는 광활한 마음의 탁 트임이 있지 않았던가?
그 만큼 나는 이 세상에서의 생이 생이 아니었으며 삶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다 도덕의 룰이고 의무인 국가의 국민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가족관계로 이어지는 삶의 링커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영주권 아니면 시민권자가 되어 세금을 내야하고 직장에 다녀야 하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참석하여 거룩한 주일을 보내야 하는 역할도 해야 하는 존재였다. 실은 모두가 기계처럼 살아가야 했던 자본주의의 한 구성원이었던 것이다. 엔도 슈사끄의 작품 '침묵'에 비교될 바는 아니지만 침묵이 나의 기계적 존재에 아주 깊이 깊이 내려앉고 있었던 때에 바닷가에 나가 가슴을 트는 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가? 누구에게 나의 속마음을 열고, 그리고 말을 하고,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인가? 애천의 이야기는 애천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의 소통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고 내 삶의 미래를 열어젖히는 연단(단상)이었다. 그만큼 대화는 바다의 파도처럼 이어져 갔다.
WS와 연결되었던 사람들 하나 하나의 이름이 떠올려 졌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세월이 지금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이 때에도 생생하게 그려지는 얼굴들의 모습에 시간은 또 그만큼 흘렀다. 모두 다 세상의 흐름에 맡겨 그렇고 그런 삶의 여정을 누리고 있었지만 WS와 관련된 파도타기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찌릇해지고 짠해지는 이야기였다. 그의 주변을 스쳤던 그리고 아직도 나의 이미지 네트에 걸려든 얼굴들. 정*복의 등장에는 언제나 꿈을 꾸던 요셉이 어울려진다.
서울 어딘가에서 의사로서 충실한 삶을 살아갈 후배였다. 한양대 의예과 재학시절 웬 꿈과 환상을 사실처럼 받았었던지... 한 때에는 새벽에 급하게 전화가 왔었다. 신림동 살던 때였다.
형만 형 지금 큰 일 났어요. 오늘 새벽에 휴전선 터지는 사건이 일어났어요. 북한군이 밀고 와요. 땅굴도 터지고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어요.
분명 그때는 나도 다급했었다. 그 무렵 정명석의 땅굴과 북한 괴뢰군의 제2의 육이오 터지는 일이 우리의 애천 모임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때였다.
그런데 *복아 사실이 아니고 꿈이지? 아마 다른 의미가 있을꺼야. 선생님에게 연락했니?
아니 형에게 전화하는 거에요. 선생님은 전화 안 받아서...
그 후에도 그는 늘 꿈을 꾸고 다녔다. 의학공부보다 더 열심히 애천의 비전을 받고 있었던 형제였다. 지금 WS와 청성님의 대화에 동참해 보니 불현듯 그가 보고 싶다. 자신의 영적 체험과 환상의 계곡에서 무엇이 섭리의 뜻인지 분별하기도 힘들었던 시절이었나 보다. 꿈을 진하게 꿀수록 그는 애천 선교회의 선교현장에서 구름 위를 걷듯이 걸어갔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다가 조용히 꿈에서 깨어나듯 그는 나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간간히 그와 인척관계에 있던 최*렬 형제를 통해서 전해 듣기는 했지만.... 지금 진료하며 아픈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위치에 있겠지만 그에게 삶의 한 가운데를 통과했던 그 공동체의 현존은 마음 속 깊은 어딘가에 이불처럼 꼭꼭 포개져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는 다행히 자신의 전공을 잘 살려서 지금 잘 지내고 있는 편이다.
WS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일들을 계속 쉬지 않고 쏟아냈다. 모두가 다 애천이라는 공동체에서 빚어진 일들이었다.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재학 중이던 미모의 동료들을 언급했다. 황** 자매와 이** 자매들이다. 길지 않은 몇 개월 동안 애천에서 같이 활동했지만 그 애천을 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 후 지금까지도 연락이 닿는 이들이란다. 모두가 다 열심히 교회봉사를 하며 신앙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고도 했다. 그 중 한 명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다가 알게 된 것은 그 짧게 스쳐가듯 있었던 애천이었지만 나가고 나서도 그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죄의식 비슷한 것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보상심리가 신앙에 더 몰입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더 아픈 사연도 있었다. 결혼 그리고 이혼으로 이어져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한 여인의 일생이다. 그 여동생 역시 우울증 증세에 시달린다는 것도 함께. 그것도 미국에서. 더구나 뉴저지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든다. 아무하고도 만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은 도대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자신의 이야기이고 지금 내가 겪어가고 있는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나에겐 그런 상처뿐인 일들이 늘 일어난다. 지겹도록 복습시키는 미국이주사의 끝없이 반복되는 애가를 통해 아내는 콕콕 찌르듯이 상처를 낸다. 나는 이 글을 써가는 이 순간에도 그 상채기에 마음이 저리고 있다. 무엇이 이토록 삶을 악연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가?
갑자기 나의 재능이 아깝다느니, 애천에 있으면서 사법시험이라도 보았더라면, 지금이라도 공부하면 어떻겠느냐는 등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할 말이 없었다. 솔직하게 나에게 공부할 기회와 물질이 있다면 나는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더니 WS는 내 말에 깜짝 놀랄 지경이라고 했다. 로스쿨도 아니고 현실과 직결되는 학교도 아니고 전혀 생각지 않은 것이라 아마 나의 아내가 들었더라면 기겁을 했을 것이라고 아내동정도 했다. 그만큼 나는 이 현재의 삶의 방정식에 엉뚱한 해법으로 다가가고 있는가? 또 한 방을 헛치면서 자본주의의 삶의 방식과 어긋나는 발언을 한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청성님이 치유받기 위해 가야 할 곳으로 가야 했다. 우리가 자리 잡고 있는 바깥에서는 아니 바로 유리 벽면을 맞대고 앉아 보이는 바깥 데스크에서는 까만 정장차림으로 앉아있던 나이 지긋이 든 할머니 한 분이 꽤 넓고 큰 검은 색 파일가방을 꺼내더니 악세사리 주얼리 등을 꺼내면서 같이 앉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장사하는 분이었나? 그러나 마치 우리들이 앉아서 이야기 하던 그 장소에서 청성님과 WS님은 꼭 꼭 감추어 두었던 마음의 귀걸이를 비롯한 각종 주얼리를 펼쳐내고 있었던 것 아니었던가? 유리를 맞대듯이 세상을 맞대고 앉아있던 스타박스의 모임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꺼내보여야 할 소중한 이야기들이 공동체 아니면 전개될 수 없는 그런 신앙의 진실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 차로 모두 타야 했다. 차로 약 3분 걸리는 거리에 청성님이 침 맞으시며 건강관리하시는 곳이 있었다. 최근에 건립된 근사한 포트 리 커뮤니티 센터 부근의 굳 네이쳐 마켓(구 장스마켓) 뒤에 자리 잡은 뉴욕 휘트니스 센터 내에 침놓으시는 분이 계셨다. 자세한 내막을 잘 모르겠으나(아마 이 부분에 이르면 청성님의 명쾌한 부연설명이 댓글에 올라올 것으로 알기에 나는 사족을 붙이지 않겠다.) 그 분은 60세가 넘으셨던 것 같은데 악수하는 손힘으로 보아 실질적 건강의 나이는 아마 매우 젊은 편에 속했던 것 같다. 건장하셨다.
옅은 남색 티셔츠 차림의 그 분은 채식주의자였던 것이다. 뉴저지 서섹스 카운티의 워렌에 사시는 데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즈스탄을 비롯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진료 겸하여 선교사로 활동도 하셨고 평생의 숙원사업인 자연 치유센터를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계셨다. 그 꿈을 이루려고 호주까지 갔었지만 파트너가 9 개월 만에 사라지는 사기 비슷한 것도 당하셨던 분이었다. 자연 치유센터는 이미 이상구 박사가 뉴스타트 운동하면서 한국에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던 안식교의 위마연구소와 비슷한 것이었는데,-직접 그 모임에 참석도 하셨단다.- 그 분 말씀으로는 자신이 연구해 온 녹초즙과 차콜요법을 한방의 침술과 겸비해서 완전치료도 병행하면서 공동체를 운영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면 훨씬 제대로 된 자연치유 공동체가 될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5.16 군사정권시절부터 호흡훈련을 지도했고 많은 돈도 모았으며 건축업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집 건축하는 데에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갖고 계셨다. 이미 자신의 집(뉴저지소재)은 구들을 놓았다고 자랑도 했다. 그리고 십계명에 모든 것이 다 있는데 현재의 기독교모습을 보니 참 개탄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역설을 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이니 내가 곧 하나님이라고 하는 깊은 경지까지 도달한 듯 보였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받치라고 외치는 교회에 그렇게 십일조 하지 말고 자신의 수입의 십일조를 차라리 육신의 부모님께 바쳤으면 사회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내 마음을 울렸다.
나는 사전에 청성님께 자연으로 돌아가 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말을 했었고 그 말을 이미 청성님이 이 분에게 전했던 터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실행 가능한 것인지를 묻게 되었다. 이미 실질적 구상의 일환으로 직접 사전답사 경험까지 있으셨던 분이었으므로. 일단 땅이 있어야 했고, 재배할 채소를 비롯한 식량문제가 거론되었으며, 거주할 집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공동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누구보다 제일 최우선의 조건으로 경험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안식교의 자연치유 공동체에 몰려 간 일단의 공동체 회원들이 처음에는 쉽게 결정을 내렸지만 농사짓는 일이 쉽지 않았고 기뻐서 하기 보다는 의무감으로 해야 한 일에다가 한 두 사람이 근처의 마을에 나가서 다른 일을 하면서 쉽게 돈을 버는 일례가 생기게 되니 모임은 쉽게 변질되었다는 사례에 주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든 이 분의 주장은 공동체에 들어갈 사람들은 누구든지 공동재산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즉 각자의 필요에 따라 각자가 쓰는 것은 마음대로 사용하지만 공동으로 재산이 형성되는 것이니 사유의 개념은 사라진다는 것인데 자본주의 시대에 원시공산사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이 생각까지는 나는 미치지 않았다. 월든 호숫가에 들어가 홀로 이년간을 살았던 헨리 데이빗 소로의 경우에도 경제문제는 매우 중요했다. 그는 처음부터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점을 던지면서 자신의 체험담을 적어가고 있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체온유지 하는 문제는 매우 컸다. 그래서 거처지 즉 집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 핵심의 이면에는 에너지 확보의 문제였다. 어떤 에너지원을 확보해가는 가가 중요한 존재의 근거였다. 그리고 동시에 확보할 문제는 먹 거리 문제였다. 음식이었다. 이러한 기본적 의식주의 문제해결은 모두가 부딪쳐야 할 과제다. 거의 150년 전의 월든에 들어가 살던 헨리나 이제 자본주의의 한 복판에서 맘 조리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동일한 문제다. 무엇하러 사는가? 아니 왜 사는가 물어야 할 때가 되었던 것이다.
침 놓으시는 분의 성함을 지금도 모르기에 침술사 아니 한의사 아저씨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이 분의 이야기에 몰두하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자꾸 애천 출신의 한 형제 생각이 난다. 전남대 나오고 열심히 선교활동 하던 양광* 형제이다. 웃음 짓는 그 눈매와 입가를 보니 말이다.) 한의사 아저씨의 경험으로는 도축장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울음을 들어보았냐고 물었다. 눈물을 뚝 뚝 떨어뜨리며 벌써 죽기 싫어 몸부림치는 그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죽기 싫어 힘을 써 그 모든 울화가 뭉쳐진 도살장에서 만들어진 육식을 고스란히 먹게 된 인간의 삶이 어떻겠는가에 이르니 마음이 숙연해 졌다. 먹는 것은 채식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그 분의 이야기이며 화식보다는 생식으로 섭생을 취하게 될 때에 더 인간은 건강해 진다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었다.
더 생생하게 거론될 지역선정의 문제와 자금 확보의 문제에 이르면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지금 침술과 한약을 제조하면서 돈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최소한 오 만 불을 모아서 기초자금으로 사용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땅은 수고한 만큼 대가를 내기 때문에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몸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그리고 인간의 몸에 대한 귀한 가치를 터득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2년의 기간을 본다고도 했다.
나는 홀로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분의 의견을 들으면서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나 혼자 살아가기도 힘든데 그리고 이미 어떤 지겹도록 쫒아 다니는 공동체의 악연을 갖고 있었는데 또 자연치유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진정한 자연치유의 공간으로 그리고 그 리얼한 삶의 현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살기 보다는 새로운 삶의 혁명을 일구며 살아간다는 것은 확실히 정신 나간 자의 모험이다. 가뜩이나 제정신 못 차리고 있다고 집안에서 구사리 먹고 사는 나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아이들이나 다 큰 다음에 갈 생각이 있다고 청성님께서 의견을 내시니 한의사 아저씨는 더 적극적으로 말한다.
아니지요. 오히려 같이 데리고 들어가야지요.
그럼 경쟁력이 없게 키우는 것 아닌가요?
교육이요? 그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데요? 결국은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맞게 키우는 것 아닙니까? 결국 이 세상은 바른 세상이 되지 못해요. 이 바르지 못한 세상에서 살아갈 유일한 방법이 바로 자연치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환원되어야 합니다. 어릴 때 같이 살아가면 됩니다.
청성님은 그래도 경쟁력이 떨어지는 문제와 제대로 된 교육 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실은 나 자신도 자신이 없다. 아이들과 함께 자연으로 들어가 산다? 나는 정말 가족들과 같이 들어갈 자신이 없다. 나 혼자 들어가겠다고 언급했더니 왜 같이 안가냐고? 그러면 단호하게 말하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들어가니 같이 가기 싫으면 혼자 살라고. 결국은 이 공동체로 같이 갈 것이라고 예언자처럼 한의사 아저씨는 말씀하셨다. 아마 악에 받쳐서 떨어져 나온 가족들은 더 잘살 것이고 아이들도 더 잘 성공할 것이라고....ㅋㅋ
우리들은 다시 나왔다. 공동체가 화두였다. 청성님은 소박하게 은퇴하고 나서 나중에 전원생활하면서 애천에서 한 맺혀 지냈던 후배들 모아서 재미있게 채소밭 가꾸면서 건강하게 말년을 보내면 좋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WS님은 인도의 어느 명상 공동체, 프랑스의 베트남 승려인 틱나한 공동체를 비롯한 명상센터를 언급하고 있었고, 자신의 여동생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도 언급했다. 한국에서는 고도원의 아침편지 회원들은 청주근처에서 그런 공동체를 준비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실은 나 역시도 스위스의 라브리 공동체를 꿈꾸었었고, 한국의 대천덕 신부님의 영성공동체인 예수원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의 신앙으로서가 아니라 이념이나 종파의 예속 단체 혹은 수도사들을 연단시키기 위한 훈련소가 아니라 삶의 진정한 삶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 책임을 사회에 돌릴 수 있는 생명의 공동체를 꿈꾸고 있었다.
벌써 명퇴준비를 하는 WS님 여동생의 미래가 같이 어우러지는 저녁에 다시 청성님의 남편이신 허드슨님과의 저녁만찬에 우리는 발길을 옮겼다. 동방그릴이라는 곳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허드슨님과의 만찬은 정말 정겨운 것이었다. 채식주의자 한의사 아저씨 못지않게 채식을 좋아하시는 허드슨님 옆에서 나는 산채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시애틀까지 출장을 다녀오신 탓에 피곤하게 보였지만 같이 옆에서 밥상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었던 때였다. 마침 그 곳에서는 나이 지긋이 드신 분 수 십 분들이 부부동반으로 계모임을 하시는 것인지 왁자지껄 했다. 바닷가의 파도소리에 묻힌 것처럼 옆에서 말을 건네는 것이 힘들었지만 저녁만찬은 참으로 그 언젠가 버겐 블루바드의 하루 레스토랑에서 즐겨 나누었던 그 만찬 못지않게 신선함을 가져다주었다.
밖으로 나와 헤어지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힘을 모아갈 희망의 푯대를 본 것 같았다. 흩어져 힘을 잃고 헤매는 모든 후배들을 살리고 이 자본주의의 폐해를 치유해 갈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는 것처럼 밝고 기쁜 소식은 없다. 이제 2년을 열심히 돈 벌어 기초 자본을 형성해서 자연치유 모임으로 들어갈 공동체를 이루어갈 각오로 이 글을 쓴다.
오늘 공동체 모임은 여기까지입니다.
07.15.08
첫댓글 요한님..언제나 요한님의 글을 대할때마다 드는 생각...참, 공부를 못할 수가 없었겠다. 저를 포함한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죽어라 읽고 외우고 까먹고, 스스로의 머리를 미워하면서 다시 외우고, 할때, 타고난 케취력과 기억력으로 얼마나 탱자탱자 하면서도 공부를 잘 하셨을까..하는... 어제의 만남은 유별나게 좋았습니다. 남아있는 여운도 그렇고, 한여름의 수채화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제겐, 여러 케이스를 얘기하면서, 애천을 거친 마음들이 이해가 되더군요. 제스스로에게도 풀리지 않았던 일이거든요. 만삼년 있었던 곳, 이십여년전에, 얼마전 맑은하늘님의 공감표현과 같이, 남모르는 눈물을 뿌리며 떠났던 곳, 그런데, 과정도
결론도 너무 보잘것 없던 그곳이 왜 그렇게 오래동안 마음을 잡고 있었는지, 지금까지도 우리 모두의 화두가 되어야 하는지, 가끔씩 자기점검을 하기도 했지요. 나 혹시 푼수아냐..하면서...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형제자매들, 초창기 단 육개월을 머물렀던 어느 자매의 삶 전체에 드리웠던 영향력..등등 결국, 기간의 문제가 아닌 깊이의 문제였다는 것...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과정중에 있는 사람들.. 평생의 한처럼 남아있는 그곳과의 연관성들... 결국, 풀린자들에겐 그들이 풀리는 것을 도와야 한다는 한이 또 다시 존재함을 알게된 것입니다. 슬프고 감동적이고 사랑스러운, 자유로움을 향한 프로시져란 느낌입니다.
침선생님. 도사가 되고보니 (ㅋㅋ) 도사들을 서로 알아보게 되더군요. 서로의 키를 그냥 아는 것이죠. 항암치료로, 여기저기 쑤시곤 해서, 마사지를 받았는데, 그 마사지사가 배운 학원원장님 친구분이라고, 침과 한약을 잘하시는 분으로 소개를 받았죠. 침 맞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이분도 도사시구나 했고, 관심사가 비슷해서 요한님을 소개하게 된 것인데, 많은 도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10년동안 카자키르스탄등에 머물면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전재산을 쓰셨답니다. 근데, 아이들까지 데리고 가라시는데, 부모라고 맘대로 정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분도 자녀들은 의사, 변호사라네요. 아이들에게 여러가지 길을 보여주면
자신들이 살아보면서 그때그때 선택할 문제라고 봅니다. 여러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는, 새롭고, 유익한 또 다른 패턴의 삶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늙어서까지, 세상의 틀에 맞춰진 정치, 경제, 규율, 문화, 등의 구속안에서 사는 것, 재미없죠.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찾아 세우는 장소인 자연으로가서,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특히 요한님께는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쓰시고, 좋을 것 같고요. 저도 꽤나 이상주의자인가요? 아무때고 자유롭게 친구들 오라고 해서, 자연이 주는 환경속에서 말이죠. 그동안 가져왔던 모든 내용들을 정리하는 시간도 될 것이고, 결국 흙과 자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인데, 여러가지로 매력적이네요.
이미 공동체는 준비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의식주 문제해결하는 자본주의의 최종 목적이나 전원생활하면서 살았던 원시시대의 조상들이나 행복의 가치는 오히려 그 때가 훨씬 더 낫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획득하기 위해 싸워온 공동체의 힘을 다시 생각합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명제와 다시 부대끼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멋진 분들과 멋진 구상을 하셨네요! 자연을 어디로 정하실지,,, 매력적인 구상에 우선 한표!^^ 교육의 본질,삶의 본질을 어떻게 이뤄가야 하는가에 대해 새삼 깊게 생각하게 되는군요.어디에서 살건, 속한 곳의 국가관리체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백이,숙제가 생각나네요. 공동체,,, 멋진 화두인 것은 분명합니다만,
미국은 정말 넓고, 쉬는 땅이 많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포트리와 레오니아는 맨하탄과 아주 가까운 곳이라 인구 밀집지역이지만, 이곳에서 삼십분만 나가도 농가이고 산과 호수랍니다. 한시간 정도 거리인 포코노, 델라웨어, 뉴욕 엎스테이트 등 어디든지 고를수 있죠. 일본에서도 한번 연구해 보시면 어떨까요? 만일 한국, 일본, 미국 정도에 비슷한 공동체가 연계되어 있다면 그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말로 끝나지 않을 첫 삽뜨는 일을 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는데 몇 달 전 잠시 다녔던 곳에서 상추와 깻잎과 고추 등을 심으면서 그 실천의 씨앗들을 다시 쟁기질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 공동체 연재는 그 일환으로 계속 일지처럼 올리게 될 실천의 장이 될 것 같은데요? 백이 숙제가 되려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뒤바꿔 버릴 혁명을 하게 될 것 같아요.ㅋㅋ 같이 동참하시지요.
네..요한님, 그것은 골치아프고 버티기 힘들어지는 세상에서의 현실도피가 아니라, 혁명을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은 지금과 같은 상태가 계속되면, 아비규환의, 답이 없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로 접어들 것 입니다. 에너지도 고갈될데로 고갈되었고, 식량난도 그렇지요. 그 모든 것을 해결하면서, 모두가 살 길은 영육의 순수의 시대로 되돌아 가는 것이고, 사람들의 눈길도 그쪽으로 돌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때 입니다. 오늘, 침 맞으러 갔더니, 또 재밌는 스토리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답글로 달겠습니다. 개봉박두!! ^^
초창기멤버들이 모여 근사한 계획들을 이야기 하셨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근데 WS씨는 아직도 단말머리 맞겠지요? 엄격함과 따스함을 같이 갖추고 있는, 그리고 '달랑'이라는 단어를 즐겨 쓰시는 여자분 맞지요? 확인에 또 확인을 해야 할것 같아서..ㅎㅎㅎ
네...한결같은 모습의 피엔소님이 사랑하는 선배언니십니다. 저와는 갈수록 마음이 스며들며 오가는 사이가 되고 있어요. 강건너 뉴욕에 있지말고 이쪽으로 옮기라고 막 꼬시는 중이랍니다.
정확하게 맞추셨습니다. 말도 어찌나 똑 부러지게 빈틈없이 하시는지 마야문명 유적지의 돌탑에 면도날 들어가기도 힘들만큼 여전히 빛나는 얼굴이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피엔소님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습니다. 미국오시면 좋은 모임 될 것 같은데요?
WS님이 청성님 좋아하는건 어제 오늘일이 아니지요.아주 오래전부터 청성님을 찍어놓고 계시던데 두분이 갈수록 서로 맘이 스며들고 있다니 제가 긴장을 해야 할것 같군요.../'돌탑에 면도날 들어가기도 힘들만큼 '표현이 절묘하네요... 모두들 빨리 뵙고싶군요..
강귀비님도 오시면 좋을 듯 하네요... 딸이 대학에 들어간다고 들었는데 미국 한번 오지 않을까요?
그레이엄 헨콕의 '신의 지문'에 같은 표현이 있던데, 요한님이 그 책도 읽으셨나 봅니다. 마야의 돌탑이, 돌 한개의 무게만도 몇백톤씩 되는 돌들을 수십개씩 쌓아 놓았다는데, 그것도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그 돌 하나하나가 너무 정교하고 반듯하게 잘려져, 틈새가 전혀 없어 종이 한장의 단면도 끼워볼 수 없다고 합니다. WS님의 정리되고 반듯한 느낌을 표현하신 것이죠. 저도 동감입니다.
그레이엄 헨콕의 책은 읽은 적이 없었고요. 문화재 반환 논문 쓰다가 마야 유적지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정교한 돌탑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표현한 것이지요.
맑은 수채화 같은 좋은 만남의 시간 가지신 청성님, 요한님, WS님, 허드슨님 부럽습니당. 더구나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연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누셨다니 그것처럼 신나는 이야기도 없을 것 같습니다. 나를 위한 공동체 나라를 만드는 것이니 "혁명" 맞는 것 같습니다. 혁명을 위한 동지들과의 만남처럼 끈끈한 것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자연치유공동체" 듣기만 해도 신납니다. 남과 비교하는 의식주 걱정은 조금만 하고 나머지는 자연과 동지와 즐기면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아이들에게도 그런 세상 물려주고 싶습니당. 야호.....
이미 시작했습니다. 자연치유의 삶의 현장이 될 요건은 이미 다 갖추어 졌답니다. 약간의 준비 시간과 물질만 기본적으로 챙겨지게 되면 난 바로 들어갑니다. 내가 땅파고 농사지으며 그럴 듯해지면 한 번 다 놀러 오시지요. 언제든 와서 쉬고 즐기는 그런 혁명이 되어야 제대로 된 혁명이 아닐까요? 우리가 디디고 선 이 땅에서 치유의 혁명을 다각적으로 진행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말 신납니다.
와
정말 신나는 일을 준비하시고 있네요

같이 누리는 날도 오겠지요?
요즘 도시생활에 찌들어 청정지역인 산사체험이 새로운 휴가문화로 인기를 더하며, 스님들의 식생활이 고품격으로 평가되는 가운데 '남보다 잘사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잘사는' 사회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같아 저도 신나네요. 진리를 향해가는 사람들은 형제이상이라고 하지요... Go fot it!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상한 종교집단촌처럼 발전한답니다. 늘 경계하고 있습니다. 상업화된 자본주의의 잘못된 적용이 혹시 망칠지도 모르는 일이라 조심 또 조심 자나 깨나 불조심하면서 기도하는 중입니다요. 자연과 친화하면서 가는 길 밖에는 방법이 없는 요즘입니다. 한 번 해 보는 것입니다!
늘 열정으로 따뜻한 요한님의 넉넉한 미소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