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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신학교에서의 석사과정
6개월 동안의 뉴욕생활을 끝내고 9월 초에 나는 다시 프린스턴신학교로 돌아왔다. 9월 학기부터는 정식으로 석사(Th. M.) 과정에 등록을 하려 하니까 금방 입학과장인 Duba 로부터 TOEFL 시험(외국인에 대한 영어수능 시험)을 쳐서 점수를 내어 달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예상했어야 할 일을 예상하지 못 하고 있었던 터이어서 좀 당황스럽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프린스턴신학교로 오게 된 신분은 ‘방문교수’(Visiting Fellow)여서, 혹 학위공부를 하게 되더라도 일반 유학생과 똑같은 어학시험 같은 것은 면제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왔던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의 법은 교수의 신분과 나이에 대해서도 예외가 없이 냉정하게 적용되었다.
그 동안 매이는 데 없이 미국 구경도 해가면서 자유롭게 지내다가 이제 한 가지 제도에 매이게 된 것이다. 제도와 법이란 사람에 따라 예외가 없는 것이다. 더더구나 민주주의 법치국가인 미국에서랴? 준비할 기간도 없이 시험날짜가 닥쳐와서 시험을 치렀는데 시험장소는 TOEFL 시험 세계 본부(ETS)가 프린스턴에 있어서 편리하였다. TOEFL 시험은 일반 영어와는 달라서 별도의 준비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기에 나는 급히 서울에 있는 아내에게 TOEFL 준비책을 사 보내 달라고 하여 조금 공부를 하였으나 독해와 문법은 평소의 실력으로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듣는 부분(Listening)은 전연 경험이 없어서 좀 염려되었는데 합격통지서를 받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의 나의 석사과정 공부는 시작되었다. 프린스턴신학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평가해서 장로교회 신학교로서는 세계 제일의 신학교임에는 틀림이 없다. 신약의 Bruce M. Metzger, 구약의 Bernard Anderson, 조직신학의 George Hendry 등 쟁쟁한 최고 수준의 학자들이 있어 다른 신학교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미국에서는 뉴욕의 Union 신학교와 더불어 2대 신학교 중의 하나요, Union과 더불어 2대 도서관을 가지고 있는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신학교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본학과 성경 번역의 세계 최고의 학자인 Metzger 교수는 내가 꼭 만나고 배우고 싶어 했던 교수여서 대한성서공회에서 성경의 우리말 번역과 개정의 일을 하다가 온 나에게는 둘도 없는 스승이 될 수가 있어서 나는 그의 과목을 가장 많이 선택하여 들었다. 나는 대한성서공회에서 영인본으로 찍어 낸 Ross 선교사의 우리말 최초의 신약성경 번역인 ‘예수셩교젼셔’를 선물로 드렸다. 프린스턴신학교의 명성은 특별히 ‘장로교회의 왕국’이라고 할 만한 한국에서 유별난 듯하다. 그 이유는 한국 교회의 저명한 목사, 신학자, 그 외의 지도자 중에서 프린스턴 신학교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한경직 목사를 비롯하여 남궁 혁, 백낙준, 박형룡, 김재준, 송창근, 윤인구, 배민수, 전경연, 전성천, 한태동, 강신명, 이영헌, 김윤국, 박창환, 나학진 ... 등이 프린스턴 출신이어서 교계에서 프린스턴이라면 누구에게나 선망의 적(的)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미국의 떳떳하지 못한 신학교에서 박사(Ph.D.) 학위를 받은 어떤 사람이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하려고 왔다가 TOEFL 점수를 내어오라는 말을 하자 두 말도 하지 않고 달아나더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많은 교수들이 그들의 연구학기(또는 안식년)에 프린스턴으로 가서 지내고 온 사람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일면을 보이는 것이라고들 한다.
프린스턴신학교에 관하여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나라 초대,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프린스턴신학교에서도 공부를 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내가 한국 프린스턴신학교 동문회 총무의 일을 보면서, 프린스턴신학교 교수인 이상현 박사에게 한국인 졸업생 명단을 보내어 달라고 해서 발견된 사실로서 아무도 모르고, 정부에서도 모르고 있는 사실을 내가 신문(조선일보)을 통해서 공개하였다. 이승만 박사가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Ph.D)과정을 공부하실 때 그의 숙소가 프린스턴신학교 기숙사 Hodge Hall(당시는 프린스턴대학교 소속) 411호였다는 사실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듣고 아는 사실이지만,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다는 사실은 이상현 교수와 나에 의하여 처음으로 밝혀지고 공개된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한 때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려고 생각을 했으나 후에 조국의 독립운동에만 전념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프린스턴신학교 한국인 졸업생 명단을 보면 그 첫 번째가 1913년 이승만으로 되어 있고, 한경직은 1929년으로 되어 있다.
나의 프린스턴신학교에서의 공부는 참으로 바빴다. 두 학기에 8과목을 수강하는데, term paper 와 precept 까지 합쳐서 총 23편의 논문을 썼다. Term paper 를 쓰는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Hendry 교수의 ‘The Third Article’(조직신학 제3주제 성령론-교회론)이었다. 이것은 필자가 프린스턴에서 처음으로 공부한 조직신학 과목으로서, Hendry 교수의 강의를 온전히 알아듣기도 어려운 데다, Hendry 교수는 그의 인상이 무서운 것같이 점수도 아주 짜게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과목에 낙제를 할까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다른 과목보다 두 배나 더 열심히 공부해서 논문을 써내었는데, 그 결과로 다른 과목보다 더 우수한 성적(A)이 나왔으며, 그의 평가는 “a very good paper, carefully planned, clearly articulated, and full of interesting details”(세심하게 기획되고, 분명하게 꾸며지고, 매우 재미있게 쓴, 참으로 잘된 논문이다)였다. 그의 조교가 나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미스터 나, 당신 Hendry 교수로부터 최고점수를 받았어!” 하니, Hendry 교수의 점수가 들은 바와 같이 무척 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학기의 나의 공부는 외국학생으로서 미국학생들처럼 영어가 능통하지 못 한 탓으로 참으로 힘겨워 사력을 다하여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한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대개 석사과정을 2년 동안에 마쳤는데, 나로서는 장학금을 주는 미국 장로교회 선교부의 사정으로나, 교수가 필요한 장신대의 형편으로나, 가정의 형편으로나 1년으로 빨리 끝내고 가야 할 처지였다. 나는 처음부터 석사 과정만 마칠 생각이었지 박사과정까지 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마지막으로 나 자신이 스스로 즐겨서 치를 시험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매년 치르는 로빈선 상(Robinson Prize)을 위하여 Shorter Caterchism (소요리문답)을 암기하여 쓰는 시험이다. 그 상금은 150달러로서 나 같은 사람에게는 큰 돈이었다. 나는 녹음기에 그 문장을 녹음해서 거듭 거듭 되풀이하여 암송해서 시험에 임하였는데, 그 결과로 합격되어 150 달러의 상금을 타서 내가 꼭 사고 싶었던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신약성서 신학사전) 전 4권을 살 수 있었다.
내가 프린스턴신학교에 있는 동안의 일로 좋은 추억으로 남는 일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나와 McCord(맥코드) 총장과의 관계이다. 나는 프린스턴에 오는 즉시 장신대 이종성 학장님으로부터 편지를 전해 달라는 부탁도 있고, 또 내가 명목상으로는 방문교수(Visiting Fellow)의 신분으로 온 만큼 인사차 개인적으로 맥코드 총장을 만나게 되었다. 약속 받은 시각에 총장실을 찾았는데, 맥코드 총장은 나를 비서실에서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비서를 통하여 전하였다가 한 3-4분 후에 문을 열고 나를 맞아 주셨다. 내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자기가 잠깐 기다리라고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이어서 나에게 그 이유를 말하는데,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다. 말씀인즉, 사실은 자기가 기다려 달라고 한 이유는 그 때 담배를 피웠는데, 한국의 목사들은 담배를 안 피우는 것으로 알아서 창문을 열고 그 담배 연기를 내보내느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국의 교인들이 프린스턴신학대학 총장이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듣는다면 얼마나 놀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것은 맥코드 총장은 나에게는 꼭 교수로서 대한다는 뜻인지, 나를 부를 때는 한 번도 미국의 일반적인 호칭으로 ‘Mr. Na’(미스터 나)라고 부르지 않고 ‘Professor Na’(나 교수)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가끔 나에게 무슨 불편한 일이 없느냐고 묻기도 한 그는 한 번은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친절한 문안의 편지를 해 주신 일이다. 나는 놀라면서 참으로 훌륭한 총장이란 생각을 하였다. 식당에서 한국 학생들끼리만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광경을 보고는 “Any conspiracy?”(무슨 음모라도 하는 것 아니오?)라고 농담까지도 잘 하시는 분이고, 프린스턴 동문들의 모교 방문의 행사가 있을 때는 먼 시골에서 온 작은 교회 목사들을 만나서도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격려를 해 주시는 총장이었다. 뚜렷한 학술적인 저서 한 권 없으면서도 신학교를 운영하는데 있어서는 이처럼 인간관계를 잘 하는 맥코드 총장은 그야말로 훌륭한 CEO총장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과연 프린스턴을 튼튼한 재정적인 기초 위에 재 확립한 프린스턴 중흥의 공로로 Templton 상을 타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은 내가 프린스턴신학교 기숙사에서 두 학기를 지내는 동안 Miller chapel 에서 매일의 새벽 기도를 한 일이다. 한국에 있을 때 내가 1970년 3월에 장신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거의 명맥을 잃어가는 교내 새벽기도회를 활성화시켜서 미국으로 떠나는 날 새벽까지 계속했는데, 나 개인으로는 그것을 그대로 계속하는 것처럼 프린스턴신학교에서의 새벽기도를 한 것이다. 고요한 새벽 나 혼자서 구내 예배실(Miller chaple)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시간은, 외국에서 어려운 공부를 하면서 무거운 과제물에 짓눌리면서, 고국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또한 항상 가슴 쓰리는 것을 위로 받을 유일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한 시간 쯤의 기도를 마친 다음에는 혼자서 피아노로 찬송가를 몇 곡 치고(4부로는 못 치지만 솔로만으로), 다음으로는 고국이 그리워 애국가, ‘울 밑에 선 봉선화’ 등 한국 가곡도 치면서 향수를 달래곤 하였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예배실에 새벽기도를 하는 학생이 언제나 나 혼자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서 기도를 하니까 아예 학교 관리 사무실로부터 채플의 열쇠를 받아 쓰다가 프린스턴신학교 공부를 마치고 떠날 때에 그 열쇠를 반납하였다. 그러나 한 번의 예외적인 일은 수난 주간 동안에는 나 외에 5-6 명의 학생이 동참하였고, 부활주일 새벽에는 10 여명의 학생이 새벽기도회를 하고 난 다음에 교정을 돌면서, 큰 소리로 선두의 한 사람이 “The Lord is risen” 하면 나머지 학생들은 “He is risen indeed!”라고 화답하면서 교정 잔디 밭 위를 몇 바퀴 도는 행사를 한 것이다.
셋째의 좋은 추억으로는 내가 프린스턴신학교 예배에서 한 번 설교를 한 것이었다. 내가 교수로서 공부하러 왔다는 것과 목사라는 것을 안 예배부에서는 나에게 한 번 설교를 하라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물론 영어로 하는 설교가 한국어로 하는 것보다 어렵기는 하지만, 프린스턴 신학생들에게 설교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나는 성경 디모데전서 4장 6-11절을 본문으로 하여 “Train yourself in godliness”(경건으로 네 자신을 훈련하라) 이라는 제목으로 원고 설교를 하였는데, 강조점은 프린스턴신학교의 신학교육이 학문적으로는 뛰어나나 경건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미흡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한국의 장신대에 관한 자랑도 곁들여 하였다.
넷째의 추억으로는 프린스턴 한인교회 창립을 위해서 한 일이다. 당시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는 사람 중에서 이 일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람은 유학생으로는 나학진, 홍성현, 그리고 나채운이었고, 현지인으로서는 조병모, 백운출, 백운철, 윤한보, 김형근 등이었다. 담임목사로는 홍성현 목사를 정하고 프린스턴 지역 신문에 공고를 하였다. 주일 설교는 홍성현 목사가 주로 하고 나학진 교수와 내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협력하기로 하였다. 광고한 첫 주일에 뜻밖으로 근 40명이 모여서 성황을 이루었고, 예배를 드리고는 교우들의 친교도 가지면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도 하였다.
다섯째의 추억으로는 Princeton 신학교를 졸업한 여름 방학 동안에는 4개월 간 Pennsylvania 주의 Camp Ocanicon 에서 Boy Scout chaplain 으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한 달 $400의 사례금을 받으면서 4 개월 동안 camp 에서 하는 일은 단지 아침에 전체 대원들의 조회시에 기도를 인도하고 간단히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전해주고, 낮 동안은 대원들의 개인 상담에 응하는 정도의 일뿐이었다. 네 군데 지원서를 냈는데 영어도 완전하지 못한 내가 미국 학생들을 제치고 가장 가까운 곳, 가장 좋은 곳으로 가게 된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혹시 내가 장신대 교수로 있다가 온 사람이라서, 또 내 영어를 과대평가해서 택했는지 모르겠다.
한편 이 기간에 한국으로부터는 아내가 세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당시 아내는 38세, 아들 강엽은 광장초등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10세가 거의 되었고, 첫 딸 은신은 2학년생으로 7세 9개월, 둘째 딸 은진은 장신대 유치원 생으로 5세 10개월의 나이었다. 내가 처음 미국에 올 때는 장신대 교수가 부족한 사정으로나, 가족의 생활을 위해서나(장신대에서는 현직 교수가 외국에 유학을 갈 때에는 그 가족의 생계비를 1년간만 지급하도록 되어 있다) 한 1년 쯤 공부를 해서 신약학 연구의 세계적 동향과 교수의 요령이나 좀 배워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석사 과정 1년을 공부한 후의 생각은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박사과정을 하기로 하고 가족을 초청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가족들도 의외로 미국 비자를 빨리 받았는데 거기에도 이유가 있었다. 나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1년 공부하는 동안에 장신대 교수의 신분으로 와서인지 McCord 총장으로부터 특별한 예우를 받았는데, 나의 가족이 비자를 신청하는 서류에는 McCord 총장의 친필 서명한 보증서가 첨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 대사관의 통지를 받고 인터뷰를 하는 줄 알고 갔다가 인터뷰도 없이 즉각 비자를 받았다는 것이다. “역시 프린스턴”의 위력을 실감하였다.
1년 반 만에 미국 필라델피아 공항에서 만난 가족-아내와 세 아이- 는 참으로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공항에는 내가 보이 스카우트 사역을 마치고 일시 머물고 있는 길웅남 목사님의 전 가족도 함께 나갔었다. 길웅남 목사님은 대구에서부터 한 이웃에서 가깝게 지내어온 오랜 친구였고, 내가 프린스턴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고마운 친구이다. 나는 그 동안 아내에게 한 주에 한 번 정도로 그리움의 편지를 보내고 사진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오늘날과 달라 편지가 오가는 데도 20일 이상이나 걸리고, 전화는 돈이 비싸서 못 하고, 얼굴과 얼굴을 대하기는 가장 오래 헤어진 후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그때 아직 여섯 살도 채 안 된 막내는 1년 반 만에 만나는 아빠가 안고 뽀뽀를 해도 낯이 선 듯 빤히 쳐다보면서 “아빠라 할까, 아저씨라 할까” 라고 하여 모두를 웃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