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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友會 원문보기 글쓴이: 김수종(안정면)
소수서원에서 ‘죽계’를 거슬러 올라 소백산 초암사까지
안축-주세붕-이황 선생과 함께하는 죽계 도보 탐방기
고려 말, 근재 안축(安軸)선생이 남긴 경기체가 죽계별곡(竹溪別曲)과, 조선 중엽 신재 주세붕(周世鵬)선생이 남긴 ‘소백산 유산록(遊山綠)’ 가운데서의 죽계수(竹溪水)와 퇴계 이황(李滉)선생이 죽계를 거슬러 올라 초암사-봉두암-돼지바위-석름시봉-국망봉를 둘러보던 길을 나도 따라 걸었다.
죽계별곡을 지은 근재(謹齋) 안축(1282~1348)선생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과 고향은 순흥이다. 해동주자학의 비조인 회헌 안향 선생의 삼종손이다. 신흥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탁월한 재질로 학문에 힘써서 글을 잘 지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단양부 주부를 거쳐,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요양로개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후 고려에 돌아와서 우사의대부를 거쳐, 충혜왕 때 강릉도 안렴사가 되어 이때 문집 <관동와주>를 지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 판전교지전법사에서 파면되었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되고, 그 뒤 내시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
1344년(충혜왕 5) 밀직사지사에 이어 첨의찬성사, 1347년 정치도 감판사로 양전(量田)에 관여하였다. 뒤에 민지가 만든 <편년강목>을 개찬(改撰),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남겨 문사로 이름을 날렸다.
풍기군수 시절, 죽계수를 둘러 본 후 ‘소백산 유산록(遊山綠)’을 남긴, 풍기의 역사와 땔 수 없는 대학자인 신재(愼齋) 주세붕(1495~1554)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경남 함안 출생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 때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정자(正字)가 되고, 1541년 풍기군수로 나가 이듬해 안향의 사당 회헌사를 세우고, 1543년 주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사림자제들의 민족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리고 서원을 통하여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서원에서 유생들과 강론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 이후 퇴계 이황선생의 건의로 소수서원의 사액을 받아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뒤 영남사림의 중심기구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 건립되었다.
이후 벼슬은 대사성, 호조참판, 성균관 동지사, 중추부 동지사에 이르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도동곡〉〈육현가〉등 장가(長歌)와 〈군자가〉등 단가 8수가 전한다. 함안의 덕연서원에 배향되고, 소수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에 <무릉잡고>, 편서로는 <죽계지> <동국명신언행록> <심도이훈> 등이 있다.
또한 그는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풍기의 기후, 토양 등을 면밀히 조사 연구한 다음, 소백산 산삼을 논밭에 심도록 하여, 조선 땅에 처음으로 인삼재배를 성공했다. 이후 풍기인삼은 궁궐에 진상되었으며, 오늘 날 ‘풍기인삼’의 뿌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역시 풍기군수 시절, 죽계를 따라 국망봉에 올라 ‘유소백산록(遊小白山綠)’를 남긴 퇴계(退溪) 이황(1501~1570)선생은 예안 출생이며,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이다.
1523년(중종 18) 성균관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42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 삭직되었다가 풍기군수를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되었다.
1554년 형조, 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그는 인간의 순수이성은 절대선(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유성룡, 김성일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이루었고, 율곡 이이 선생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 당쟁과도 관련되었다.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과 대만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설립하여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그의 사후인 1574년에 도산서원이 창설되었고 1575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단양의 단암서원, 괴산의 화암서원,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가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 글씨에 <퇴계필적>이 있다.
안축 선생이 지어 전체 5장으로 나누어져 있는 죽계별곡은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一章
竹嶺南 永嘉北 小白山前千載興亡 一樣風流 順政城裏他代無隱 翠華峯 天子藏胎爲釀作中興 景幾何如淸風杜閣 兩國頭御爲 山水淸高 景幾何如
1장
죽령의 남쪽과 안동의 북쪽, 그리고 소백산 앞에 천 년을 두고 고려와 신라의 흥망 속에도 한결같은 풍류를 지닌 순흥에, 다른 곳 아닌 취화봉에, 임금의 태를 묻었네! 이 고을을 중흥시킨 모습, 어떻습니까? 청렴한 정사를 베풀어 고려와 원나라의 관직을 맡았네, 아! 소백산 높고 죽계수 맑은 풍경, 그 어떻습니까?
二章
宿水樓 福田臺 僧林亭子草菴洞 郁錦溪 聚遠樓上半醉半醒 紅白花開 山雨裏良爲 遊寺 景幾何如高陽酒徒 珠履三千爲 携手相從 景幾何如
2장
숙수사의 누각과 복전대 누대, 승림사의 정자, 초암사, 욱금계, 부석사 취원루 위에서,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깨어, 붉고 흰 꽃이 피는, 비 내리는 산속을 아! 흥이 나서 노니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풍류로이 술꾼들이 떼 지어 아! 손잡고 노니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안축은 죽계별곡을 통하여 고향인 풍기 땅 순흥을 관통하는 죽계의 경치를 읊었다. 1장은 죽계의 지역적 위치와 경관을 담고 있고, 2장은 사찰의 누각, 정자 등을 찾아서 기녀들과 어울려 노는 광경을 다루었다. 3장은 향교에서 글을 배워 유학을 익히고, 철 따라 시를 읊고 음률을 즐기는 광경을 자랑하고, 향교의 스승을 보내고 맞는 광경도 거기 곁들였다. 4장에서 기생들과 어울려 놀다가 헤어져서 멀리 두고 생각을 하는 심정을 읊었으며, 5장에서는 성대를 중흥하여 태평을 길이 즐기는 모습을 묘사했다.
안축, 주세붕, 이황 선생이 걸었던 죽계 길은 조금은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죽계를 따라서 올라가면서 즐기는 계곡의 정취를 노래한 것이고, 글로 담은 것이다. 오늘은 안축의 문재(文才)와 주세붕의 구세제민(救世濟民)사상, 이황의 순수이성은 절대선이라는 철학사상을 생각하면서 세 사람이 걸었던 길을 혼합한 형태로 소수서원의 백운동 취한대(翠寒臺)에서 출발을 하도록 한다.
취한대는 퇴계 선생이 지었다. 취한(翠寒)이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으로 옛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비취 취와 차가울 한을 따온 말이다.
취한대 아래에는 유명한 백운동(白雲洞) 경(敬)자 바위가 있다. 백운동이라는 글씨는 퇴계선생의 글씨로 백운동 서원을 의미하는 말이며, 경자는 주세붕 선생의 글씨로 유교의 근본이념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준말이다.
경자는 원래 바위에 그냥 글씨를 쓴 것이었지만,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죽계에 수장당한 순흥부 백성들의 슬픈 원혼들이 밤만 되면 울어대어 이를 달래기 위해 붉은 색을 칠한 후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더니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때의 경(敬)은 수기필경(修己必敬) 입사필성(立事必誠)의 준말로 구차한 것을 물리치는 것, 사악한 마음을 막는 것의 준말이다.
소수서원(http://www.seonbichon.or.kr)에는 이외에도 입구의 송림군락, 숙수사지 당간지주를 포함한 유물, 주세붕 선생이 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가운데 하나인 경렴정, 강의실이었으며 사방으로 툇마루를 둘러놓은 것과 배흘림기둥이 좋은 강학당, 고려 충숙왕이 안향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그리게 하여 그의 종가에 하사한 선생의 영정으로 현존하는 고려시대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영정과 주세붕 선생, 주희(주자)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는 영정각 등이 볼만하다. 물론 이웃에 조선된 선비촌, 소수박물관, 선비문화수련원, 청소년수련관 등도 한번 둘러볼만한 곳이다.
다음은 소수서원과 선비촌 사이 시비(詩碑)공원에 여러 개 있는 죽계별곡 노래 말이 적힌 비석을 차례차례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죽계를 걸으면서 사전에 큰 공부가 된다. 원문과 번역된 글이 같이 있어 읽는 재미가 있다.
금성반석 순흥향교를 보러가야 하지만, 최종 목적지 중에 하나인 금당반석의 초암사에 있던 국보 78호로 삼국시대의 유물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보기위해 소수박물관으로 간다.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세계적인 명품이다. 금동 반가상 가운데에서는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앙드레 말로, 버트란트 러셀, 칼 야스퍼스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감동을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현재 원본은 초암사에 있지 않고,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영주시와 초암사가 돌려줄 것을 몇 차례 요구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아 몇 년 전 복제본을 만들어 소수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미리 보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제 원단촌(院壇村)으로 향한다. 원단촌은 소수서원 옆에 있는 마을의 이름으로 소수서원과 금성단이 있는 충절의 마을, 선비의 고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단촌에는 조카인 단종의 복위를 위해 형인 세조에 맞서다가 죽은 금성대군을 기리는 금성대군신단, 순흥도호부의 역사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1100년 된 은행나무 압각수, 단종복위운동인 정축지변(丁丑之變)으로 피해를 본 어린아이들이 ‘업둥이가 되어 다리 아래에 버려졌던 순흥 청다리’, 청다리의 정식이름은 제월교(霽月橋)로 중국 송나라의 주돈이의 글에 나오는 말인 ‘장마 비가 멎은 후 맑은 하늘같은 기운’을 뜻하는 제월광풍(霽月光風)의 준말이다.
순흥도호부가 폐부되었다가 다시 명예회복이 되었다는 의미로 흔히 ‘송도(개성)의 선죽교요, 순흥에는 제월교가 있다.’라고 하고 하여 충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로 퇴계 선생이 이름을 정했으며, 죽계제월교라고 쓰인 다리비가 옆에 서있다.
인근에 순흥향교, 금성대군의 가택연금지였던 위리안치지 등이 있다. 이 곳을 둘러본 후 배점리 방향으로 이동한다. 돌아가는 길이 있기는 하지만, 빨리가기 위해 논밭두렁을 질러서 간다. 물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죽계호(송림지, 순흥배점저수지)가 보인다.
호수 옆에는 순흥지역의 명소가 된 대원종합건설이 건축한 통나무 목조주택인 ‘한스빌(http://www.dwhans.co.kr )’이 20여 채 보인다. 죽계별곡을 알리는 돌비석이 있고, 호수 건너편에도 민박을 겸한 펜션이 여러 채 보이고,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식당과 찻집도 있다. 장승을 조각 해둔 곳도 있고, 통나무로 잘 지어진 별장형 펜션도 있다.
길을 더 가면 폐교된 순흥초등학교 배점분교와 보건소 등이 있는 배점리에 다다른다. 학교 옆에는 퇴계 선생의 제자였던 배순을 기리는 배순정려각이 서있다.
배점(초암동)에 사는 무쇠장이였던 배순(裵純)은 퇴계 선생이 소수서원 백운원에서 강학할 때 뜰아래에 와서 자주 청강을 하기에, 선생이 친히 불러 시험을 보았더니 능히 이해함으로 기특하게 여긴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그를 가르쳤다.
그는 퇴계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3년 상을 지내며, 매일같이 제사를 지냈으며, 이후 선조임금 상을 당했을 때도 3년 상을 모셨으며 3년 동안 소식(小食)을 하면서 벌레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퇴계에게서 배운 제자의 도리대로 유교의 이념을 실천한 것이다.
효자에 행실까지 반듯했던 배순은 선조임금의 3년 상 동안은 매일같이 나막신을 신고 국망봉에 올라 한양을 향해 곡을 하였으며, 그 곡소리가 한양 대궐까지 들렸다고 전한다. 정려각은 후일 그의 손자들이 세웠다고 전해지며, 마을 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초암동에서 배점이라고 바꾸었다.
배점마을을 지나면 이내 좌측은 초암사, 국망봉으로 가는 표식과 우측은 성혈사로 가는 표지판이 보이고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조그만 가면 초암사 매표사가 나온다. 이곳까지는 소수서원에서 1시간 거리다.
매표소를 지나면 ‘죽계구곡’을 알리는 안내와 설명을 겸한 표시판이 나온다. 1곡~9곡에 대한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정확한 위치와 구체적인 설명을 담은 안내판은 길을 가면서도 발견할 수 없어 아쉬웠다.
원래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었지만, 소백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을 받은 이후 등산로가 정비되면서 계곡을 위에서 바라보면서 걷는 길을 내어 죽계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올라야 하는 것이 안타깝다.
안축, 주세붕, 이황 선생 등이 극찬했던 죽계의 옛 절경은 많이 퇴색되어있다. 세월을 탓하랴만 집이 들어서고, 과수원이 계곡의 또 다른 주인이 되어가고 있지만, 안축 선생이 죽계를 찬양한 문학작품은 남아있어 그나마 위안이다.
길을 올라가면서 바위위에 조그만 하게 목욕담, 청련동애, 용추비폭 등을 알리는 표식을 볼 수 있지만, 정확한 위치와 설명이 없어 찾기는 쉽지 않다. 현재 1,2,4,5,9곡은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3Km정도의 거리라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정도면, 해발 500m에 위치하고 있는 초암사(草庵寺)에 닿을 수 있다.
영남의 진산 소백산의 주봉인 비로봉과 국망봉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나는 이수지합(二水之合)의 터인 중봉합류(中峯合流)는 초암사를 지나 300미터 정도 올라가면 볼 수 있다. 이곳이 죽계9곡의 끝이다. 이곳까지는 소수서원에서 2시간 거리다.
퇴계선생은 초암사를 지나 국망봉까지 자주 오르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48살의 퇴계는 죽계를 거슬러 오르는 것이 힘이 들었던지 초암사에서 하룻밤 유숙을 하고, 이튿날은 가마를 타고 국망봉에 올랐다고 한다.
여승들만 있는 비구니 사찰인 초암사는 소백산 국망봉 남쪽 계곡 아래인 순흥면 배점리에 의상대사가 세운 조계종 사찰이다. 부석사를 지은 후 이곳에 다시 절을 세웠는데, 우람한 거석 축대, 주춧돌 등으로 미루어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백산의 절경 속에 자리 잡은 청량도량으로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어 다시 지은 법당이 남아 있으며,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126)과 동부도(경북유형문화재 128), 서부도(경북유형문화재 129)등을 소장하고 있다.
높이 3.5m의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한 것으로, 사각형 지대석 위에 세워진 이중기단의 각 면석에 우주가 있고, 일주씩 탱주를 모각하였다. 각 층 옥신에도 우주가 있고, 옥개석 아래 4단의 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없지만, 주변에 그 파편이 흩어져 있다.
월래 이곳에 남아있던 국보 78호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세계적인 명품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이미 소수박물관에서 복제본을 보았고, 국보 282호인 ‘목조아미타불좌상병복장유물(木造阿彌陀佛坐像幷腹藏遺物)’ 한국전쟁 직후 이웃 이산면에 소재한 흑석사(黑石寺)로 피난을 간 이후 돌아오지 않아, 현재 초암사는 석탑과 부도, 축대를 제외하곤 별로 볼 것이 없는 절이 되었다. 하지만 절을 빛내주는 죽계가 있으니 계곡의 기암괴석과 맑은 물은 탄성을 절로 나오게 하는 보물들이다.
그렇지만 초암사에도 재미있는 볼거리는 하나 정도 있다. 바로 삼성각 좌측에 최근 만들어진 돌개상이다. 비구니들만이 도량이라 좀도둑이 성해서 보원(普元)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 사냥개 형상으로 돌을 다듬어 삼성각 처마 밑에 두었다. 사나워 보이지도 않고, 얌전하게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이지만, 개의 형상을 안치한 이래에 좀도둑이 사라졌다고 한다.
초암사를 둘러보고는 바로 하산을 해도 좋다. 죽계구곡을 전부 보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길을 연장하여 국망봉과 봉두암, 돼지바위 등을 보고 내려오면 더욱 좋다. 바로 하산한다면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혈사(聖穴寺)를 한번 둘러볼 것을 적극 추천한다. 순흥면 덕현리에 있는 성혈사는 신라 때 의상이 창건하였다.
성혈사에는 기존의 사찰에선 보기 드문 특별한 문화재를 갖고 있다. 조선 명종임금 때 창건한 보물 제832호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 다포계(多包系)단층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배흘림기둥과 내이출목(內二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으로 공포가 구성되어 있다.
특히 정면 개구부(開口部)의 꽃창호 문창살은 용, 게, 물고기, 동자상, 여의주, 기러기 등 다양한 형태의 문양이 어우러져 있고 세밀하게 조각되어있다. 조각 공예기술이 섬세하고 뛰어나 ‘조선 목공예의 백미’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문창살의 조각들이 ‘날 좀 봐주세요.’라고 말을 걸어와 사진을 몇 장 찍어왔다.
스위스 바젤대학 미술대학원에서는 매년 20~30명의 학생들이 성혈사 나한전의 창호 문창살과 부석사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무량수전 안에 있던 부처님의 닫집(법당 안의 탁자 위를 덮도록 만든 집의 모형 또는 불상의 머리 위를 가리는 양산인 닫집(보개, 천개(天蓋)). 인도에서 부처님이 설법할 때는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산개(傘蓋)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후에 불상조각에 받아들여져 닫집이 됨. 큰 절의 경우 부처의 머리 위에 지붕을 씌운다.)에 붙어있던 목조 용머리, 선비촌 초가의 초겨울 지붕갈이를 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고 한다.
홍익대 미대의 경우에도 목공예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매년 이곳을 찾고 있을 정도로 조선 목공예의 백미이다.
성혈사를 둘러 본 이후에는 ‘순흥읍내리 고분벽화’를 둘러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이다. 남한에서는 몇 안 되는 고구려식 채색벽화로 ‘삼족오’를 볼 수 있다. 인근에 10여기의 석실고분이 산재해 있고, 뒷산에는 옛 비봉산성 터 자리가 있다.
경북북부와 충북북부, 강원남부를 관할하던 흥주(순흥)도호부의 중심에 있던, 역사와 문화의 고장 순흥면에는 정말 볼 것이 너무 많다. 면사무소 옆에 조선시대부터 조성된 공원에 봉서루가 있고, 연리지 소나무, 순흥안씨들의 제실인 추원단,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왕실의 태를 묻었던 태장리, 청구리의 여근산, 남근바우, 선사시대의 입석, 1906년에 설립된 경북북부지역 최초의 초등학교인 순흥초등학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볼거리가 많은 고장이다.
먹을거리로는 순흥기지떡(증편, 술떡, http://www.xn--ok0b44l27kuuh7wr.kr )과 순흥묵밥, 복숭아 등이 유명하다.
*길 안내: 서울에서 시외버스로 2시간 30분 걸리는 경북 영주시에 도착한다. 영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30분마다 한 번씩 있는 순흥 소수서원행 시내버스를 타고 서원 앞에 하차하여 도보여행을 시작하면 된다. 천천히 보면 1~2시간 정도면 서원과 선비촌, 소수박물관, 선비문화수련원을 둘러볼 수 있다. 이후 죽계를 따라서 인근의 원단촌을 본 다음 초암사로 향한다. 이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하산을 하거나 등산을 연장하여 국망봉을 오르기도 한다. 하산을 하는 경우 성혈사를 둘러 본 다음, 순흥 읍내로 나와 읍내리 고분벽화를 둘러본 다음, 순흥전통묵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면 된다. 이후 풍기나 영주로 나가 서울로 돌아가면 당일로 충분한 시간이 된다. 서울로 올라가는 시외버스는 영주에서 저녁 9시경이 막차이다. 더 늦어지면 중앙선 기차를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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