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으로 가기
영덕은 아직까지는 멀다. 비록 위도상으로는 대전과 비슷하지만 남북을 가로지르는 태백산맥을 넘어야 하기에 우리들에게 주는 심리적인 거리는 멀게 느껴진다. 영덕으로 가는 교통수단으로는 육로를 통해서 접근하는 것이 유일하다.
수도권에서는 영동고속도를 이용해서 동해시까지 온 후 7번 국도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오면 울진을 지나 영덕에 도착하게 되며, 영남권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이용 경주에서 포항을 거쳐 다시 7번 국도를 통해 북쪽을 올라오면 영덕에 도착하게 된다. 영덕을 대표하는 도로인 7번 국도는 바다와 산을 오고가며 가장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동해안의 풍경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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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청송 경계 황장재> |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낙동정맥의 고개를 넘어 내륙과 영덕지역을 연결했지만, 지금은 안동을 기점으로 청송군을 지나 황장재를 넘어 영덕을 향하는 34번 국도와 내륙 속의 내륙인 영양에서 창수령을 넘어 영해로 향하는 길이 대표적이다. 어느 길을 이용하던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만날 수 있지만 해안도로를 이용해 영덕에 들어와 내륙도로를 통해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반대로 내륙도로를 이용해서 영덕에 들어와 해안도로를 통해 돌아가는 방법이 좋다고 생각된다. |
영덕 속의 강구, 영덕 속의 영해
-생동감 있는 항구 강구
영덕을 대표하는 곳은 군청이 있는 영덕읍이다. 군의 중앙에 위치하여 행정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가장 많은 인구가 모여있는 곳이다. 하지만 영덕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영덕의 중심지인 영덕읍보다는 대게로 유명한 강구를 많이 찾게된다.
지금은 영덕읍을 우회하는 도로가 생겨 더욱더 영덕읍은 외지인들에게는 오히려 낯선 경우가 있다. 강구는 영덕을 대표하는 하천인 오십천이 바다와 만나서 마을의 이름을 강구(江口)라고 붙였으며 전설에 의하면 약400년에 안(安)과 이(李)의 성을 가진 두 사람이 태풍을 피해 이곳에 표류했다가 개척했다고 한다.
동해안은 항구의 발달이 불리해 큰 항구가 형성되기 어려운데 강구는 바다와 만나는 곳에 남쪽으로는 삼사해상공원이 자리잡은 78m의 산이 위치하고 북으로는 100m정도의 산이 북으로 연결되어 천연의 항구조건을 갖춘 곳이다. 동해안을 여행하다보면 서해나 남해의 항구에 비해 단순한 모습과 주변 풍경에 식상하게 되는데 이곳 강구항은 강구교를 건너면서부터 보이는 풍경이 아늑하고 생동감 있게 느껴진다.
영덕의 관문으로 어항의 기능과 군사적 요충지로 조선 전기는 오포성을 쌓아 수군만호진의 본영으로 왜적을 방비하는 전초기지로, 조선 후기 고종8년(1871)에는 대원군이 서양제국주의 세력의 견제를 위해 연안일대에 척화비를 세운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항구로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919년 일본인들이 자국민을 위한 어업기지화를 위해 축항공사를 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계속 증축되어 1936년 보완공사가 마무리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동해안의 대표적인 피항지로 강구의 명성을 알려준 것은 영덕대게라고 할 수 있는데, 대게철인 12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 오십천 하구의 강구항 주변의 많은 식당에는 대게를 만나러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붐빈다. 우리가 영덕대게라고 하는 것은 그 원조 마을이 따로 있지만 현재로서는 강구항에서 나는 대게가 결국은 영덕대게인 셈이다.
특히 강변을 따라 만들어진 주차장아래 풍물거리는 81개의 작은 상점이 지하에 들어서 있고, 이곳의 작은 음식점에서 강구항을 바라보면서 먹는 대게나 생선회는 값도 저렴하고 멋과 맛이 같이 어우러진 별미이다. 6ㆍ25전쟁을 통해 함포사격을 집중으로 받아 모든 집이 대부분 부서져 일제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아직도 약간의 흔적은 남아있으며, 사라호 태풍 때는 항구주변의 주택이 물에 잠겨 어려움을 겪은 곳이기도 하다.
강구항을 보려면 강 건너 오포리에서 바라보이는 갈매기와 강구항의 모습도 좋으며 삼사해상공원 위에서 내려다보는 강구항과 해변도로의 모습은 시원함을 준다. 대게철인 요즘에 방문하면 아침 일찍 배에서 내린 진짜 영덕대게가 배를 하늘로 향하고 누워 버둥대는 모습과 어민들이 경매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영덕에서 가장 생동감 있는 장소라고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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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공원에 본 강구항> |
<오포에서 본 강구> |
<강구교> |
< 강구항 풍물거리> |
<강구항 풍물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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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거리 내부> |
<강구에 남아있는 일본가옥의 흔적> |
<강구의 일본식 가옥> |
< 강구항 쓰레기 처리 안내판> |
< 강구항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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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구의 대게 조형물> |
<강구항 노점> |
<강구항 축조 기념비> |
-전통속에 저항정신을 가지고 있는 영해
영덕보다 더 스쳐 지나가는 도시가 영해이다. 대진해수욕장이나 영양을 들어가는 길목으로 생각되지만 7번 국도를 지나 새로 지은 예주문화회관 옆에 우뚝 솟아있는 3ㆍ1의거 탑을 보면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이지역 행정의 중심지로 사족(私族)이 많고 그들을 중심으로 많은 동족부락이 형성되어 ‘작은 안동’이라고 불린다.
영해 지방은 조선조 말에 영해 농민란과 같은 민중봉기가 있었고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신돌석과 같은 유명한 의병장이 나온 곳으로 항일에 대한 저항이 어느 곳보다 강한 곳이었다. 신돌석 장군의 항일투쟁에 영해지역의 토착 양반이 적극 가담하게 되어 결국 영해는 일제에 의해 1914년에 영덕에 합병된다.
한없이 조용해 보이지만 영해인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저항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다. 작은 면에 불과한 곳이지만 읍에 절대로 굽히지 않는 보이지 않은 문화가 살아있고 자존심이 강한 이 지역의 노인들을 만나면 ‘영해영덕’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영덕보다는 영해를 꼭 먼저 앞세운다.
영해부근의 괴시리 전통마을과 인량리 전통마을의 흐트러짐이 없는 전통가옥속에서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있으며 주변의 산간 작은 마을을 지날 때마다 마을마다 보이는 오래된 전통가옥을 보면서 영해의 또 다른 저력을 생각해 본다. 강구가 지금의 영덕을 대표하는 도시라면 옛 영덕을 대표하는 도시는 영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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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평야와 상대산> |
<영해면소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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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ㆍ1의거탑> |
<3ㆍ1의거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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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 3ㆍ18 독립만세운동기념탑> |
<영해시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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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의 젖줄 오십천
동해안으로 흘러가는 하천은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하다. 약 6천5백만년전 신생대 제3기에 평탄하던 우리나라는 동쪽이 솟아오르는 지각운동을 겪게 되면서 지금의 함경ㆍ낭림ㆍ태백ㆍ소백산맥이 형성된다. 동쪽으로 치우친 융기는 서해안에는 넓은 평야를 형성하였지만 동해안에는 좁은 평야를 형성하게 된다.
그로 인해 급경사의 사면을 갖게된 동해안은 하천의 유속이 빨라지면서 깊이 파서 골짜기를 형성하게 되고 유속이 빠르게 되어 비교적 굵은 모래질을 해안까지 운반하면서 해안에 많은 해수욕장을 형성하게 된다. 동해안은 넓은 평야의 발달이 드문데 영덕의 오십천과 송천은 비교적 길이가 길어 주변에 넓은 퇴적지형을 만들게 되어 영덕인의 생활을 다른 곳보다 윤택하게 해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영덕인의 문학작품에 가장 빈번한 소재로 등장하고 삶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오십천은 영덕의 젖줄이자 삶의 역사이기도 하다. 포항시 죽장면과 청송군 부동면에서 시작한 대서천과 달산면 봉산리에서 발원하는 소서천, 지품면 황장재 부근에서 발원하는 몇 개의 하천이 지품면 신양리 앞에서 만다 영덕읍으로 흘러간다. 길이 40㎞, 유역면적 380㎢로 황장재에서 해안까지 직선거리로 약 20㎞정도의 폭을 가지는데, 40㎞의 길이로 흘러 내려가니 약 2배정도의 굴곡을 가지는 하천이다.
50개의지류가 모여 강을 이룬다는 뜻으로 쉰내(五十川)이라 부르기도 하고, 50개의 곡류가 있어 오십천이라고도 부른다. 어떻든 많은 곡류와 지류가 있어 주변을 침식한 후 하천양안에 넓은 퇴적지형을 만들어 놓아 달산의 대지평야, 영덕의 구미ㆍ천전평야, 강구의 금호ㆍ원직평야 등을 만들어 양질의 쌀을 생산하고 있다. 하류에는 대게의 중심지 강구항이 위치하며, 민물과 바다를 오르내리는 은어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덕 대게와 함께 경북지역의 대표적인 진상품이었던 수박냄새가 나는 오십천의 은어는 조선시대 영덕 현령이었던 이지걸이 은어의 진상을 소홀히 하여 파직되었다고 할 정도로, 이곳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자랑이자 부담스러운 짐이었다. 은어가 사람 손에 잡히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상놈 입에 들어갈까 걱정’이라는 말이 전해오니 진상품으로서 높은 자존심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옛날 선비들이 배를 띄우고 풍유를 즐겼던 맑은 물의 오십천도 강구주변의 수산가공공장과 영덕읍의 생활하수와 축산폐수의 유입으로 오염되어 2000년대 초까지도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강구항의 풍물거리 횟집에 앉아 오십천의 하구를 바라보면 회의 맛이 달아날 정도로 심하게 오염되어 멀리서 어렵게 영덕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이를 개선하고 강구항을 살리기 위해 영덕군은 2001년 하루 13,000톤 처리규모의 하수처리장을 건설하고 생활하수 줄이기 캠페인과 쓰레기 줍는 환경운동과 오염된 하천에 미나리 등을 재배하는 친자연적 하천관리를 통해 오십천 정화사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 지금의 오십천은 최근 은어와 함께 민물털게가 다시 나타날 정도의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하천으로 변모하였다. 8월에는 오십천에서 은어를 주제로한 축제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은어잡이 등 여러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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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십천과 영덕읍> |
<오십천> |
< 영덕 하수처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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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계도가 있는 축산항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영덕일대를 살펴보면 영덕과 영해로 나누어져있음을 살펴볼 수가 있으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지금의 축산항이 있는 축산포앞에 ‘축산(丑山)’이라는 섬이 바다에 떠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단조로운 해안선을 가진 동해안에서 섬을 만난다는 것은 무척 반갑고 신기한 일인데 영해에 속했던 축산항에 섬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지금 축산항을 방문해보면 <대동여지도>에 표기되었던 축산섬은 높이 80m의 죽도산(竹島山)으로 산 정상에 하얀 등대가 위치하고 온 섬에 대나무가 자생하는 이곳은 죽도산 밑에서 지금부터 300년 전에 오씨(吳氏)가 개척하여 추씨(鄒氏)라는 분과 함께 대나무를 심고 죽산동(竹山洞)이라 했다고 전해온다.
축산항은 1930년대 일제에 의해 동해안의 명태ㆍ정어리ㆍ청어의 대량어획을 위해 새로운 항구의 개발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 삼국시대 이후 왜적의 침입의 주통로로 국가에서 수군만호를 설치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일제시대는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를 침략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건설하였으니 역사의 대비를 보여주는 곳이다.
1933년에 완공된 축산항 공사는 축산섬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절경을 훼손하기도 하였다. 어떻게 축산섬이 지금은 육지로 변했을까? 축산면과 영덕읍의 경계에 자리잡은 화림산(347.4)에서 발원한 축산천은 축산항을 통해 바다로 들어가면서 축산섬의 남쪽으로 많은 모래를 쌓아놓았다. 이 모래가 조류에 이동하면서 모래기둥인 사주(沙柱)를 만들게 된다. 이 사주가 계속 발달하여 축산섬에 연결되어 축산섬을 육지와 연결하였는데 이를 지형학에서는 육계도(陸繫島)라고 부른다.
육계도는 풍부한 모래와 조류작용이 활발한 동해안에 잘 발달하지만, 아쉽게도 동해안에는 섬이 적어 북한의 원산만과 제주도의 성산일출봉 등 일부지역에 발달하지만 남한에서도 이곳 축산항에서 그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축산항의 육계도는 내륙에 위치한 대소산 봉수대 정상에서 바라보면 확연히 잘 볼 수 있다. 육계사주의 남쪽에는 해안도로가 만들어져있고 북쪽해안이 축산항이며, 그사이 좁은 폭에 취락이 배치되어있다.
축산항은 바람이 거센 동해안에서 와우산과 죽도산이 파도를 막아주어 천혜의 항구를 이룬다. 죽도산 정상의 등대로 오르는 길은 축산항 동쪽 끝에 있지만 100m정도 길을 따라 올라가면 아쉽게도 군이 해안경계를 서고있어 들어가 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현실로서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지만 너무나 귀중한 관광자원이 군의 울타리에 있어 아쉬움이 크다. 어떻게 부분적이나마 개방되었으면 좋을 듯 하다. 내려오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와 하얀 등대는 파란하늘과 어울려 청명함을 주어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잊게 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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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여지도 영덕> |
< 대소산에서 본 축산> |
<축산천과 사주> |
< 육계사주 위의 도로> |
< 대소산과 축산항> |
< 축산항 등대> |
< 축산항과 등대> |
해수욕장이 지천인 영덕의 해안
동해안의 해수욕장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우리나라 지형의 특성에 의해 잘 발달하였다. 급경사의 사면을 이루는 동해안으로 흐르는 하천은 유속이 빨라 산지에서 침식한 모래질의 토양을 해안까지 운반해서 모래질의 해안을 만들어 놓는다.
반면에 서해안은 유속이 느려 무거운 모래질의 토양은 도중에 내려놓고 작은 입자의 해수욕장은 남쪽에서부터 장사ㆍ부흥ㆍ남호ㆍ오포ㆍ하저ㆍ대탄ㆍ경정ㆍ대진ㆍ덕천ㆍ영리ㆍ고래불해수욕장이 있는데 길지 않은 해안을 따라 해수욕장의 연속이다.
이들 해수욕장 중 비교적 널리 알려진 해수욕장은 장사해수욕장과 대진해수욕장, 고래불해수욕장이다. 장사와 고래불해수욕장은 간선도로인 7번 국도에서 바로 접해있어 접근하기가 편리하고 넓은 백사장과 맑은 물이 자랑이다. 장사해수욕장은 6ㆍ25한국전쟁 중 장사상륙장전이 있던 곳으로 의미가 있으며 고래불해수욕장은 넓은 백사장과 송림이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해수욕장으로 ‘고래불’이란 이름은 이 지역 출신은 고려 말 대학자 목은 이색선생이 유년시절 대진해수욕장 뒤 상대산(183.3)에 올라가 북쪽에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을 바라보니 앞바다에 고래가 하얀 분수를 뿜고 놀고있는 모습을 보고 고래불(불은 뻘의 옛어원)이란 명칭을 사용하여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래불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뒤쪽의 넓은 영해평야는 원래 모래땅으로 물이 쉽게 빠지고 염분의 바닷바람에 의해 심어놓은 벼가 까맣게 변하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는데, 30여 년전에 해안에 사방공사를 하여 솔밭을 조성하고 방풍림을 만들고 수없이 많은 객토를 하여 모래땅을 옥토로 바꾼 인간의지의 승리가 배어있는 귀중한 농토다. 그 안쪽의 마을 거무역리(居無役里)는 신라의 박제상의 후손인 박씨가 처음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로 박씨가 이웃어부가 잡은 왕(王)자가 새겨진 거북을 놓아주도록 하자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자신의 자식을 살려준 보답으로 대대로 정승에 오르게 해주겠다고 하였고 그 후 박씨는 물론 아들과 손자가 3대에 걸쳐 시중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 마을은 나라에서 부역을 면제해 주어 부역이 없는 마을이란 뜻의 거무역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마을입구의 논 한가운데에 박씨를 위한 사당이 지어져 있다. 고래불해수욕장에서 대진해수욕장에 이르는 해안은 명사20리라고 불리는 끝없이 이어진 백사장과 송림 그리고 내륙에서 흘러 들어가는 작은 하천이 연결되어 아기자기한 맛은 적지만 장쾌한 멋의 이국적인 풍물이 느껴진다.
대진해수욕장은 해수욕장 한가운데를 영덕에서 두 번째로 큰 하천인 송천이 200m의 넓은 폭을 가지며 가로지르고 있어 담수욕과 해수욕이 동시에 가능한 해수욕장이다. 언젠가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수질을 가진 해수욕장으로 선정된 적이 있으며 뒤에 뽀족한 모양의 상대산이 위치하여 더욱 안정감이 느껴진다.
송천의 하구에는 모래기둥(사주)에 의해 하천의 하구가 막히는 석호(潟湖)가 형성되어있다. 각종 철새와 민물과 바다를 순환하는 어류, 재첩과 같은 생물의 서식처인 석호는 동해안에서만 볼 수 있는 호수로서, 이곳의 규모는 작지만 완전한 석호의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다. 지금은 송천을 가로지르는 교량이 설치되어 돌아가지 않아도 쉽게 고래불에서 대진까지의 해안도로를 달려볼수가 있다.
철이 이른 해수욕장에 찾는 사람은 없었지만 시원한 바닷물과 따뜻한 봄 햇살의 색감은 여름이라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 밖의 이름도 생소한 해수욕장들도 규모는 크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주변의 마을과 함께 호흡하는 해수욕장으로서 나름대로의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강구항을 바라보고 많은 갈매기와 함께 하며 하얀 등대와 빨간 등대의 대비를 볼 수 있는 오포해수욕장, 영덕으로 넘어가는 10번 도로 입구의 아담한 마을을 끼고 있는 하저해수욕장, 해맞이 공원 인근에 위치하며 마을에 큰 웅덩이가 있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대탄해수욕장, 오보 부곡이라 하여 신라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천민이나 죄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여 관용물을 생산했던 곳이기도 한 오보해수욕장, 오징어 피데기 말리는 것이 인상적이었던 경정해수욕장, 송천 옆에서 여름을 기다리고있는 조용한 덕천해수욕장 등 지금은 조용한 적막감이 흐리지만 많은 피서인파로 붐비는 여름을 기다리는 해수욕장이 다시 한번 생각난다. |
< 장사해수욕장> |
<남호해수욕장> |
< 오포해수욕장> |
< 오포해수욕장의 등대> |
< 하저해수욕장> |
< 대탄해수욕장> |
< 오보해수욕장> |
< 경정해수욕장> |
< 대진해수욕장> |
< 대진해수욕장의 석호> |
< 덕천해수욕장의 안내판> |
<고래불해수욕장> |
< 거무역리 정류장> |
< 거무역리 김씨 사당> |
영덕하면 대게, 대게 하면 영덕
-영덕대게
필자가 영덕대게를 처음 접한 것은 90년도에 서울에서 경주로 학생들을 인솔해서 수학여행을 갔을 때라고 생각된다. 저녁에 밤참으로 숙박업소에서 큰 쟁반 위에 서너 마리의 게를 놓았는데, 붉은 색이 감돌고 등껍질에 점들이 박힌 거대한 크기의 말로만 들었던 영덕대게였다.
게하면 서해안에서 잡힌 꽃게만 먹어보다 처음 본 영덕대게는 크기에서 놀라고 맛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약간 단맛이 감돌면서도 담백하고 고소한 대게의 살맛은 처음 먹어보았지만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보통 상품은 한 마리에 제철에 10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대게의 본고장이 바로 영덕인 것이다. 아마 전국의 사람들에게 영덕하면 생각나는 것을 묻는다면 단연코 영덕대게라고 할 만큼 영덕은 대게의 고장이다. 유난히 원조에 민감한 우리민족의 특성상 대게도 주변의 다른 지역과 원조논쟁이 한창이지만 대게의 명성을 따라온 여행객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장 많이 인식되어있고 소비되는 양이 가장 많은 영덕에 좀더 후한 점수를 주고싶다. 대게라는 이름은 모양을 보고 크기와 연관되어 큰(大)게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몸통에서 뻗어나간 8개의 다리가 대나무처럼 곧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죽해(竹蟹)’라고 쓰며 우리말로는 ‘대게’ ‘영덕대게’ ‘박달게’라고도 한다.
대게의 유래는 크게 두 가지가 전해오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영해지역을 순시할 때 주안상에 대게를 올리면서」 라는 설과 다른 하나는 「조선 초에 임금에게 올린 대게를 너무 맛있게 먹었지만, 그 맛에 정신이 없어 임금의 얼굴과 수염이 추하게 되어 그 후 신하들이 올리지 않았는데, 임금이 다시 요청하여 궁궐을 나온 신하가 수개월동안 헤매던 끝에 지금의 영덕군 축산면 죽도에서 이를 발견하고 언기(彦其)라고 하였다가 궁궐에 들어와 발견장소와 생긴 모양이 대나무의 곧은 줄기와 같고 다리의 마디가 여섯 마디라는 뜻으로 죽육촌어(竹六寸魚)라 부르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죽해(竹蟹)라 이름이었다」라는 설이 있다.
아무튼 대나무와 같은 다리모양을 가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대게의 서식지는 울진에서 구룡포일대까지 수심 120~150m의 깊은 바다에 서식하는데, 이 지역의 바다는 해저에 낙동정맥에서 내려온 양질의 모래가 바닥에 깔려있고 한류와 난류가 만나 연중 10℃내외의 수온을 유지해서 대게의 대량서식에 알맞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 특히 밑바닥에 개흙이 전혀 없고 깨끗한 모래로만 이루어진 강구면과 축산면사이의 3마일 앞 바다에서 잡힌 대게가 유독 살이 차고 맛이 담백해 최상품으로 친다.
대게잡이 큰배는 바다에 나가 3박4일에서 4박5일정도의 기간동안 조업을 하는데, 그동안의 남획으로 어획량이 줄어 요즘은 연안보다는 근해에서 잡거나 대회퇴부근의 먼바다까지 가서 잡는 경우도 있어, 영덕에서도 옛날 원조 영덕대게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6월부터 10월까지는 어획 금지기간으로 본격적인 어획기는 12월부터 시작되지만 아무래도 속살이 꽉차고 단맛을 맛보려면 2월~4월에 영덕을 찾는 것이 좋다.
매년 대게의 어획량은 감소추세로 많은 걱정이 있었지만 다행이 올해는 조류의 영향과 서식환경이 좋아졌는지 2003년에 비해 약 20%정도의 어획량이 증가했다고 한다. 2003년에 강구 수협 위판장을 통해 금액으로는 26억 정도가 거래되었고, 양으로는 16톤이었다고 하니 한때 연간 3000톤 정도 잡힌 것에 비하면 1/10수준도 되지 않아 어족자원의 보호에 관한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몇 년 전까지 영덕에서 잡히는 모든 대게는 반드시 수협의 위판을 거쳐야 했지만 지금은 소형선박을 이용해서 연안에서 잡는 것은 자율적인 판매가 이루어지고 수협소속의 대형선박에서 잡는 대게만 강구수협을 통해 위판되고 있었다.
강구수협 위판장에 혹시 어민에게 자율적으로 맡겨 어족자원이 고갈될 염려가 있을까 혀여 질문해보니, 각 어민들마다 암게와 껍데기 지름 9㎝이하는 잡지않도록한 규정을 잘 지켜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수족관 속의 작아 보이는 게를 바라보면 걱정이 되었다. 강구수협에는 대게잡이 대형어선 6척과 소형어선은 100척 정도 있고, 대게를 잡을 때 대게잡이 그물을 바다에 150수를 깔아놓고 매일 30수정도 걷어와 위판을 하는데 큰배는 한척당 3000~4000만원의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필자가 방문한날은 대게 1마리당 6,500에서 75,000원에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물론 이곳을 거쳐나간 대게는 좀더 비싸게 일반 소비지에게 거래가 된다. 강구일대의 대게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가게에는 휴일인데도 생각보다는 한산했다. 상인들에게 물어보니 대통령 탄핵사태 이후로 찾는 사람들이 대폭 감소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만만치 않은 가격으로 인해 일반 서민들은 쉽게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되고 자신의 주머니가 아닌 곳에서 나온 돈으로 대게를 찾았던 사람들이 시국 탓이거나 어려운 경기 탓인지 일단 줄어든 것이 아닌가 하여 씁씁한 생각이 든다. 역시 아직까지 대게는 쉽게 맛볼 수 있는 음식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보통 포획기간이 끝나면 영덕의 강구에 가면 주로 북한산과 러시아산 일본산이 2만원 내외의 가격으로 판매가 되는데 제철에 잡힌 영덕대게와는 맛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그래도 영덕에 직접 와서 영덕의 바다를 보면서 영덕게와 비슷한 것이라도 먹고 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된다. 영덕을 떠난 다른 지역에서 흔히 영덕대게라고 판매되는 것은 십중팔구는 영덕대게라고 속인 홍게일 것이다. 홍게는 영덕대게보다 더깊은 바닷속에서 살지만 껍질도 연하고 약간 짭짭한 맛이 나서 가격도 영덕대게의 1/5이하 수준이다. 일년 내내 잡히는 홍게는 지금도 어디선가 대게로 둔갑해서 영덕대게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이 앞선다. |
<영덕대게> |
<경매를 기다리는 대게> |
<대게대게잡이 선박> |
<배에서 내리는> |
<경매된 대게를 사가는 상인> |
<경매가 이루어 지는 강구 수협공판장> |
<대게 경매> |
<대게 경매> |
-대게마을
영덕대게를 주로 접하게 되는 영덕의 마을은 대부분 강구항이다. 하지만 영덕군에서 대게의 원조마을로 지정해 놓은 곳이 있는데 그곳은 축산면 경정2리 차유마을이다. 차유(車逾)라는 마을의 이름의 유래는 고려 때 예주(영해)부사가 부임하여 경정리를 순시하면서 수레를 타고 고개를 넘으면서 이 마을의 형국을 보고 우마차(牛馬車) 길마 같이 생겼다고 하여 우차의 차(車)와 넘을 유(踰)자를 따서 차유(車踰)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마을에서 보면 북쪽에 죽도산이 바다로 툭 튀어나와 있는데 죽도산이 보이는 이곳에서 잡은 게의 다리가 죽도산의 대나무와 흡사하여 대게(竹蟹)로 이름지어지고 이곳의 대게는 다리가 길고 토실토실하며 껍질이 얇고 살이 많으며 속이 박달나무처럼 단단하여 박달대게라 부른다. 영덕군에서는 영덕대게가 이 지역의 특산물임을 알리기 위해 1999년 4월 17일 제2회 영덕군민의 날을 맞아 대게축제행사와 연계하여 이곳에 대게원조마을 표석비를 세워 이곳의 의미를 알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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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 원조마을 표석비> |
<차유마을과 축산섬> |
<차유마을> |
영덕의 숨은 아름다움 영덕 복숭아
복숭아는 예로부터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는 말이 있듯이 장생불로의 신선의 과일로 인식되어 십장생도에서도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진다. 악귀를 제거하고 장수를 상징하며 태몽에서는 남자아이를 상징하는 귀한 과일 복숭아가 영덕의 오십천에 가면 온 천지에 널려있다.
필자는 영덕의 대게도 물론 좋아하지만(먹기보다는 감상하기) 그보다도 봄에 오십천 주변을 붉게 물들이는 복사꽃 피어있는 영덕의 모습이 가장 좋다. 오십천 주변의 복숭아밭은 이곳 사람들의 자연을 이겨내려는 의지를 볼 수 있는데, 원래 약간의 복숭아가 자라고있었지만 1959년 9월 17일 추석날 아침 사라호 태풍이 이 지역을 강타하면서 하천의 범람으로 사질토양으로 바뀌어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더 이상 다른 농업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주민들은 실의에 빠지게 되었고 이것을 극복하고자 하천 변에 복숭아를 심게되었다.
오십천 주변은 사질토양으로 배수가 잘되고 ,일교차가 크며 일조량이 많아 복숭아 생육에 적당하고, 바람의 영향이 작으면서 계곡을 따라 공기의 순환이 잘되 복숭아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1962년에 강구에 복숭아 통조림 공장이 생기면서 대량으로 판로가 확보되자 재배면적은 급격히 늘어나 2002년에 재배면적 385㏊에 8,037톤을 생산했다.
재배면적은 2000년 이후 큰 변화는 없으며 지품면이 51.4%로 재배면적이 가장 넓고 달산면ㆍ영덕읍ㆍ강구면의 순이며 나머지 지역은 적은 편이다. 매년 복사꽃이 피는 4월 20일경이 되면 영덕에서 안동간의 34번 국도는 복사꽃 천지의 무릉도원을 이루며 특히 영덕읍 화개리에서 지품면 소재지까지는 복사꽃이 장관이다. 필자는 96년 동해안 일주를 할 때 영덕의 34번 국도의 일부구간을 자전거로 달려갔는데, 오십천 주변의 복숭아밭에서 막 수확하고 있는 하얀 복숭아를 한아름 얻어 달리는 중간에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지금까지 가장 맛있는 복숭아를 먹었던 기억인데, 그때 영덕봉숭아의 맛과 함께 복숭아를 키우는 영덕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으며, 아마 영덕의 복숭아가 맛이 좋은 것은 기후 적인 환경도 물론이지만 그 속에서 노력하는 영덕인의 손끝과 마음이 너그러운 것일 거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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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천변 복숭아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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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천변의 복숭아 판매대> |
<영덕 복숭아 조합> |
외부세계와 영덕
- 일본과 영덕
영덕을 여행하다보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 중 가장 많은 것이 영덕대게이고 다음으로 신돌석장군의 캐릭터이다. 오른손에 커다란 칼을 들고 짙은 눈썹에 꾹다문 입술이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모습니다. 영덕을 대표하는 인물 신돌석, 그만큼 영덕은 일본과의 인연(?)이 있는 곳이다.
삼국시대부터 동해바다 건너 일본의 왜구들이 끊임없이 우리나라 해안을 괴롭혔는데 영덕은 많은 약탈과 어려움을 겪었던 곳이다. 영덕군에 별다른 문화재가 남아있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대륙침략의 기지로, 자국민을 위한 어업의 전진기지로 이용되었고 최근에는 한일어업협정으로 인하여 어업권에 영향을 받았고, 70년대까지 영덕에서 잡히는 대게는 대부분 일본을 수출되어 일반국민은 접하기 어려웠는데 요즘 대게철이 아닐 때는 일본에서 잡힌 일본산 대게가 영덕산으로 팔리기도 한다.
강구는 많이 사라졌지만 영덕읍에만 가도 일제시대 지었던 가옥의 모습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영덕은 항일 의병활동이 다른 지역보다 활발했던 곳이었고 을미의병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김하락이 강구의 오십천에서 모두 전멸할 때까지 싸운 대표적 의병장이고 평민출신으로 경북내륙과 동해안에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신돌석과 훌륭한 의병장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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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읍의 일본식 가옥> |
<영덕 군민탑> |
<충혼탑> |
<신돌석 장군 캐릭터> |
- 신돌석 장군
1878년 11월 3일 영해군 남면 복평리(현재의 영덕군 축산면 부곡리)에서 태어난 신돌석은 고려시대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의 후예로 조선시대는 중인을 거쳐 자신의 대에 와서는 평민신분으로 전락하였다. 영해지역은 1870년부터 1년 동안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난을 일으켰던 지역으로 농민들의 반봉건의식이 높은 고장이었다.
1895년 일제에 의한 명성왕후의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1896년 19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영덕ㆍ영해ㆍ영양ㆍ평해ㆍ울진ㆍ삼척에서 출몰(1906.4), 영양 분파소 공격하여 분파소와 군청을 불태움(1907.8.20), 영양에서 150여명의 일본군 공격(1907.9.15), 150여명이 영해를 공격(1907.10.12), 이강년 부대와 함께 영월에서 순흥읍을 공격하여 전 읍을 불태움(1907.11.11), 약 50명을 이끌고 영해 북이면(현재의 병곡면)을 습격(1908.7.24)하는 등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활약이 대단했다.
1908년에 들어와 다른 의병장들의 순국과 불리한 전세에 잠시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의 외가 동생 집에 은거다 현상금에 눈이 먼 김씨 형제에 의해 피살된다. 그는 영덕지역에서 일어나 전국적인 의병활동에 영향을 미친 의병장으로 한말 의병을 대표하는 분이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하고 1971년에는 장군의 묘를 국립묘지에 이장하였다. |
<신돌석 장군유적지> |
<신돌석 영정> |
<기념관 내부> |
<기념관 내 전투모형> |
<신돌석 장군 생가> |
- 대진 바닷가의 도해단(蹈海檀)
대진항에서 대진해수욕장을 가다보면 바다로 둘출된 길옆에 작은 단이 쌓여있고 그 위에 기념비가 서있다. 안동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경술국치를 당해 나라 잃은 설움과 부끄러움에 이곳 바닷가에 몸을 던진 벽산 김도현을 기리는 장소다.
김도현은 1852년 영양에서 출생하여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가산을 팔아 안동ㆍ의성ㆍ강원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했던 애국지사로 일제에 의해 옥살이를 한 뒤 ‘망한 나라의 땅에는 그 어디에도 묻힐 곳이 없다’고 해서 1914년 1월 7일 이곳에서 바닷가로 걸어 들어갔다. 1971년 그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바다로 향한 비문 앞에는 ‘천추대의(千秋大義)라는 글귀가 크게 써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주변을 지나가는 관광객과 낚시꾼들이 이곳에 이런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있을까? |
< 도해단과 앞바다> |
<도해단> |
- 대소산 봉수대
통신시설이 잘 갖추어지지 못한 옛날에 한 지역에서 일어난 위급사항을 외부에 알리는 대표적인 수단은 봉수다. 보통 산의 정상에 위치한 봉수는 그 역사적 의미도 있지만 조망이 가장 좋은 곳에 설치한 경우가 많아 지금도 그곳을 찾아가 보면 주변의 잘 살펴볼 수 있다.
영덕을 대표하는 봉수로는 축산의 대소산 봉수가 있다. 해발 282m의 대소산 정상에 위치한 봉수는 영해면 소재지에서 직선거리로 동남쪽으로 3㎞, 축산항에서 서북쪽으로 1㎞, 해안에서는 1㎞지점에 위치한다. 축조된 시기는 고려 혹은 조선 전기로 추정된다.
봉수대는 직경 약20m되는 넓이의 둘레에 돌로 축대를 쌓아올려 그 위에 봉수대를 만들어 놓았고 그 바깥쪽에 보호벽을 쌓아 놓았는데 이 보호벽 내에서 조선시대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봉수를 관리하는 병사들의 막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대소산 봉수대는 남쪽으로는 창포리 뒷산의 별반산 봉수대, 북으로는 후포의 후리산 봉수대, 서로는 영해 원구리 뒤의 관산 봉수대를 거쳐 진보의 남각산 봉수대에 연결된다. 최근에 복원하여 깔끔해 보이는데 옆에 한국통신의 시설물이 있어 이곳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변에 소식을 알리는 지역으로서 중요한 곳임을 확인하게 해준다. 정상까지 차량이 올라갈 수 있으며 정상에 서면 멀리 축산항과 영해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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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산 봉수대> |
<봉수대와 한국통신> |
<봉수대에서 본 축산> |
<봉수대에서 본 영해> |
북부형과 남부형 가옥의 모습이 같이 남아있는 초가 까치 구멍집
영해에서 영양으로 향하다 창수면사무소에서 영덕학생야영장이 있는 갈천리로 향하면 삼계로 향하는 길과 장육사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지난 수해를 복구하느라 하천이 파해쳐지고 공사가 한창인데 붉은 흙탕물이 그대로 흘러 내려가 그 안의 물고기들은 어떨지 걱정이 되었다.
장육사로 향하면 작은 마을이 나오고 그 옆에 화수루라는 누각이 나온다. 이곳은 단종의 외종숙인 권자홍 일가가 세조에게 화를 당한 후 그의 아들 권책이 유배되어 여생을 보낸 곳이다. 숙종2년(1676)에 건립해 화재로 전소된 후 다시 19년(1693)에 다시 지었다. 숙종때 단종이 복위되자 이곳에 대봉서원(大奉書院)이 건립되었는데 대원군때 사원이 철폐되면서 화수루만 남게되었다.
앞에 장육사에서 내려온 하천이 흐르고 앞뒤로 산이 막혀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곳이다. 정문은 잠겨있어 옆을 통해 들어가면 앞에 ㅡ자형의 2층 누각에 뒤에 ㄷ자의 1층 건물이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모습이다. 보통 다른 지역의 누각은 개방성이 강해 보이는데 이곳은 폐쇄적인 구조로 되어있어 기후와 지역의 문화성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
지리적인 관점에서는 화수루보다는 그 옆에 작게 자리잡은 까치 구멍집에 더욱 눈길이 간다. 화수루와 거의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집은 화수루에 머무는 양반네들을 시중하는 사람이 산 듯 보인다.
우리나라의 가옥구조는 크게 ㅡ자형의 홑집과 田자형의 겹집으로 나눌 수 있는데, 홑집은 평야지역의 따뜻한 지역에서 주로 분포하고 겹집은 추운 기후의 산악지역에서 볼 수 있다. 방이 두줄로 연속해서 있는 田자형의 구조를 가진 까치 구멍집은 집안의 채광과 환기를 위하여 지붕 용마루 양쪽 합각(合閣)부에 구멍을 만들어 밖으로 공기가 빠져나가게 하였다.
여기서 까치 구멍이란 까치가 사는 곳이 아니라 까치가 드나들만한 구멍이란 뜻으로 대문은 닫으면 외부와 단절된 구조의 집에서 부엌의 연기나 외양간의 냄새를 빼기 위한 시설이다. 보통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겹집에 까치구멍을 많이 만들어 왔다. 이 구멍으로 비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짚을 안으로 말아 넣고 각도를 잘 조정한 조상들의 세심한 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외양간이 있고 부엌이 있으며 왼쪽으로 마루와 방이 배치되어있다. 외양간이 내부에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만큼 귀했던 소를 생각하는 마음을 살펴볼 수 있으며, 보통 겹집에는 마루를 배치하지 않는데 마루를 배치한 점은 특이하다. 이것은 이 지역이 겨울에는 몹시 춥지만 여름에는 더운 기후로 인해 마루를 설치했다고 보며 이것은 추운 기후와 더운 기후에 적응하는 점이형(漸移形) 가옥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부엌에서 마루로 나오는 벽에 구멍을 내고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 구조는 산간지방의 실내조명장치인 코클이 변형된 모습으로 집의 가운데인 이곳에 불을 피워 부엌과 마루와 방을 동시에 조명을 했던 실용성이 엿보인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 황량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옆 화수루의 텅빈 적막감보다는 훨씬 정감 있으며 방금 누군가 살다가 밭에 일하러 간 듯한 친밀감이 느껴진다. 조선시대 일반 서민이 살았던 집의 채취를 그대로 맡을 수 있는 이 집이 한없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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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구멍집> |
<까치구멍> |
<내부 외양간> |
<까치구멍 내부> |
<내부 마루> |
<내부 방> |
영덕의 전통산업
동해안에서 비교적 교통이 좋고 내륙의 안동에 인접하여 많은 사람과 산업이 발달한 영덕은 전통적인 산업이 발달해왔다. 지금 그 명맥을 유지하거나 이미 사라진 산업도 있지만 오천 옹기와 도계 한지는 한때 영덕을 대표하는 산업이었다.
- 오천 옹기
지금은 우리들 주변에서 거의 사라졌지만 한때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던 옹기는 좋은 흙과 풍부한 연료, 그리고 소비시장이 있는 곳에 옹기점이 자리잡고 많은 옹기를 생산해왔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많은 사람이 거주하던 영덕지역은 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옹기를 생산해 왔는데, 영덕지역의 옹기가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영덕현의 서쪽인 성산리에 도기소(陶器所)가 1개 있으며 품질은 하품이다’라는 기록이다.
한창때는 영덕읍 화개리, 달산면 흥기리, 지품면 삼화리ㆍ송천리ㆍ오천리, 축산면 망골 등에서 생산되면서 영덕을 중심으로 동해안 지역에 옹기를 공급해왔지만, 지금은 오천리에 한집만 남아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80년대만 해도 지품면 삼화리의 옹기생산이 유명하여 이대춘이란 사람이 경영하던 옹기굴은 1회 8톤의 옹기를 구워내고 년 간 100여톤의 옹기를 구워낼정도로 성황이었다고 한다. 그 후 서구식생활의 확산과 농촌의 인구감소로 삼화리 옹기는 없어지고 지금은 지품면 오천리 백광훈 옹기굴만 유지되고 있다. 선대로 옹기 굽는 기술을 배워 12살 되던 해인 1962년부터 옹기를 만들기 시작한 그는 1970년에 옹기공장을 설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광훈은 현대의 기계식이 아닌 전통의 옹기제작 방식을 고집하면서 옹기를 제작하고 전국의 다른 옹기점들이 생활옹기 뿐만 아니라 예술이나 장식용 옹기의 제작을 병행하는데 반하여 오직 옹기만을 고집하는 장인이다. 마침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출타 중이어서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전통을 중요시하는 또 한사람의 영덕인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전통식인 일자형의 대포가마1개와 개량형의 가마1개 등 2개의 가마가 있으며, 6개월에 한번정도 15일 동안 불을 지펴 옹기를 굽는다고 한다. 현재는 경북 군위 등 주변지역으로 판매되며, 작년에 군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해서 아직 어떤 지원은 없지만 앞으로 체험실과 여러 부대시설을 갖출 계획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만 해도 옛날에는 35개의 옹기점이 있었고, 백광훈씨의 부인이 시집올 때만 해도 5개가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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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옹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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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 가마> |
- 도계 한지
도계리로 가는 길은 전형적인 우리 옛길의 모습이다. 포장이 되어서 옛스러움은 작아졌지만 산촌마을의 정겨운 모습이 그대로 묻어나고, 한지의 마을 도계리는 과거에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영모정이라는 정자도 마을 입구 높은 언덕 위에 서있었다.
지품면소재지에서 지품 초등학교 뒤로 500년 된 느티나무를 지나 69번 도로를 따라가면 도계리에 도착한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천 옆에 세워져 있는 한지공장이다. 한지를 더 이상 생산하지 않아 폐가처럼 방치되어있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한창 한지를 만들 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만한 각종 기구들과 난로, 생활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함께 간 아이들에게 한지의 생산과정에 대해 아는 데로 설명해주었지만 먼지 나고 음침한 이곳이 싫은 모양인지 자꾸 밖으로만 나가려고 한다. 도계에서 한지가 생산된 것은 조선 현종때 부터였으며 이 일대는 토질이 사질토로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가 자생하기 유리하고, 오십천의 상류로 수량이 풍부하며 수질이 좋아 한지생산에 더 할 수 없는 적지였다.
한지의 수요가 많던 조선에서 일제까지는 중국과 만주, 일본지역에 수출되던 대표적인 무역품으로 당시 도계천 주변에는 한지공방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으며, 일제시대에는 영덕의 한지생산은 경북에서 경주 다음으로 2위의 생산량을 기록하였다. 1983에는 상공부 지정 공예품 전문 생산업체(한지부분)에 지정되었고 1995년에는 영덕군 지정 도계한지 특산단지로 지정 받아 전통한지를 생산해왔지만 3년 전부터 수요가 없어 지금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건물의 옆 벽면에는 한지특산단지를 지정한 안내판만 뚜렷하게 붙어있어 쇠퇴해 가는 우리 농촌의 현실이 떠올라 안타까웠지만 앞으로 관광상품과 교육의 장으로 작은 명맥이라도 유지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
그밖에 영덕에서 가 볼만한 곳
-삼사해상공원
강구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삼사(三思)해상 공원은 7번 국도에 바로 인접하고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고있는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이북 5도민의 고향 잃은 서러움을 달래기 위해 1995년 세워진 망향탑과 경상북도 개도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건립한 경북대종과 야외 공연장이 있다.
특히 경북 개도 100주년을 기념한 대종은 다른 후보지를 물리치고 이곳에 세워졌다는데 남다른 의미가 있다. 1997년부터 시작된 매년1월 1일의 해맞이 행사는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넓은 주차장과 시원한 전망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이다. 정상에는 가수 태진아의 동생이 운영하는 휴게소가 있는데 태진아 노래를 원 없이 듣는 즐거움(?)을 제외한다면 가족과 함께 강구항을 내려다보면서 동해안의 풍치를 만끽할 수 있다. |
-영덕 해맞이 공원
강축(강구-축산)도로는 바다를 끼고 작은 마을과 해수욕장을 지나며 중간에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해변을 볼 수 있는 그야말로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영덕군에서는 이 도로를 영덕대게로라고 명명했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강축도로라는 말이 주는 긴장감이 이 도로에 잘 어울린다.
강축도로의 중간쯤 창포리와 대탄리 사이에 바다를 끼고 급경사의 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공원자리로는 어울리지 않는 이곳은 1997년 2월 이 일대를 쓸고 간 대형산불로 폐허가 되어 방치된 곳을 영덕군에서 4년 간의 노력 끝에 아름다운 인공공원을 만들어 냈다.
약간 인공적인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산불피해목으로 나무계단을 만들고 중간에 전망테크과 수선화 등 야생식물이 어울러져 푸른 바다와 함께 시원한 전망을 보여준다. 주차장이 약간 협소해 앞으로 개선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영덕군에서는 녹차나무 숲을 조성하고 야생화 학습단지를 조성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망망바다가 어떻게 보면 한없이 단조롭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모습이 동해안의 본모습이라고 생각된다. |
<강축도로(영덕대게 도로)> |
<해맞이 공원> |
<해맞이 공원> |
-칠보산
칠보산은 해발810m로 7가지 보물이 있어 칠보산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돌옷ㆍ더덕ㆍ산삼ㆍ황기ㆍ멧돼지ㆍ동ㆍ철의 7가지 보물 중 지금도 생산되는 것은 더덕정도지만 그만큼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보물과 같은 산이다. 산에 오르면 동해안을 한눈에 내려볼 수 있고 멀리 고래불해수욕장을 비롯한 명사 20리의 해안과 송림, 영해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산 중턱의 유금리에는 보물 제674호의 삼층석탑이 있는 유금사(有金寺)가 위치하며 남쪽의 산자락에는 칠보산 자연휴양림이 있다. 칠보산 자연휴양림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바다를 직접 볼 수 있는 휴양림으로 알려져 있고 동해의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휴식공간이다. 이번 방문중에는 산불방지기간으로 산에는 올라가볼수는 없었지만 산림휴양관 앞의 조망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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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보산 휴양림 입구 금곡리> |
<칠보산에서 본 고래불해수욕장 > |
<칠보산 휴양림> |
<칠보산 산림휴양관> |
<칠보산 휴양림 숲속 통나무집> |
<유금사 전경> |
<유금사 삼층석탑> |
-오천 솔밭
오십천 중류에 위치한 강변에 넓은 솔밭이 있고 앞에는 맑은 오십천 물이 흘러간다. 이 주변의 풍경은 흔히들 어려서 나이든 분들이 즐겨 불렀던 동요 ‘고향의 봄’가사와 같은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특히 복사꽃이 핀 4월에 방문하면 더욱 그러하다. 생각보다는 덜 알려져 찾는 이들도 적으며 강변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봄을 느끼기에는 더할나위없이 좋은 곳이다. 최근 진입로가 포장이 되어 더욱 편리해졌지만 아스팔트로 예쁘게 포장한 것보다 비포장의 흙먼지가 더울 릴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인근에 오천 옹기소도 있다. |
<오천솔밭> |
<솔밭 내부> |
<솔밭과 강변 모래> | -옥계계곡
다청송의 주왕산과 포항의 동대산이 만난 곳에 위치한 옥계계곡은 높이 20여m의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인근에 팔각산과 37경의 경치가 있어, 좁은 동해안에 이런 계곡이 있을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깊고 맑다. 그 아름다움에 문화적 가치를 더해주는 것은 조선 광해군 때(1608)에 손성을이 지어놓고 여생을 즐겼다는 침수정이 있다. 커다란 바위 위에 서있는 침수정의 아래 바위는 하천에 의해 둥글게 파였는데 그 사이를 맑은 물이 하얀 거품을 내며 힘차게 흐른다. 옥계(玉溪)라는 의미는 옥같이 맑고 투명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라는 뜻으로 이름에 손색없이 계곡의 물은 맑고 깨끗하다. 계곡을 계속 거슬러 가면 포항에서 가장 오지인 상옥리에 도착하게 되어 가족과 함께 도보 하이킹을 즐기기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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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수정> | -경보화석박물관
특별한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없는 영덕에 사설박물관이지만 화석박물관이 있다. 영덕군의 제일 아래 남정면 원적리에 있는 박물관은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화석박물관으로 1996년 6월에 정식 개관했다. 강해중씨가 20년 동안 수집한 화석들이 2개의 전시관에 전시되어있으며 수석전시관도 있다. 작지 않은 입장료가 약간은 부담이 되지만 한번쯤 자녀를 위해 들려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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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석박물관> |
-전통마을 인량리와 괴시리
평범해 보이는 영해에 오랜 역사를 가진 가옥이 즐비하고 동네골목에서 뜻모를 엄숙함이 느껴지는 전통마을이 있다.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는 영해를 지나 영양으로 가는 918번 도로의 왼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동네 어귀에 서있는 정담장려비에서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며 멀리 바라보이는 반듯한 기와집이 이곳의 역사를 말해준다.
100~500년된 고가(古家) 20여체가 있으며 5대성 8종가를 자랑하는 곳이다. 충효당ㆍ길암종택ㆍ용암종택ㆍ만괴헌ㆍ지족당ㆍ우계종택ㆍ강파헌정침 등 문화재급 고택이 즐비하다.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풍수지리상 학날개를 펴고있는 상으로 길지로 꼽혀 마을이 자리잡았으며 일제때 일본인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마을이다.
이곳에서 해안으로 영해를 지나 대진해수욕장 방향으로 가다보면 괴시리 마을이 나온다. 200년된 고가옥이 30여채가 있는 영양 남씨의 집성촌으로 400년 간 세도누린 곳으로 동편은 산으로 싸이고 산의 주봉우리 망월봉이 팔자형국으로 뻩어내린 사이에 마을이 위치한다. 괴시리라는 지명은 고려 말 대유학자였던 목은 이색선생과 친분이 두터웠던 중국 사신 래왕시가 마을의 모습이 중국에 있는 괴시리 수구풍면의 호지촌과 비슷하다고 해서 괴리시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전면에 영해평야가 펼쳐져 있고 마을 한가운데 옛날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목은 선생 출생지와 함께 물소와 고택ㆍ천전댁ㆍ주곡댁ㆍ물소와 서당ㆍ대남댁ㆍ혜촌 고택ㆍ구계댁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 입구에 주차장을 조성하고 마을안길을 정비하며 2005년까지 목은 이색선생 유적지 조성사업을 펼치는 등 영덕군에서도 전통민속마을로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
<인량리> |
<인량리 정담장려비> |
<인량리 강파헌정침> |
<인량리 만괴헌> |
<인량리 지족당> |
<인량리 충효당> |
<인량리 우계종택> |
<인량리 길암종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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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시리 마을길 정비 사업> |
<괴시리 물소와 고택> |
<괴시리 남씨파종택> |
<괴시리 연당터> |
<괴시리 해촌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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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선생 출생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