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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지킴이로서 입석으로 된 2기의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이 있는 이 마을은 음2월 초하루를 기해 풍물패의 걸림굿을 치고 한쪽에서는 짚단을 모아 줄을 꼬아 남녀노소 없이 1백여 명이 참여 줄을 메고 마을을 한바퀴 돈 다음, 남녀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한 다음 그 줄을 메고 양쪽 당산으로 나아가 입석에 줄을 감아 옷입히기를 한 다음 당산제를 지내고 음복을 한 다음 오후에는 흥겨운 굿판이 밤새도록 흥겹게 벌여지는 전통이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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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 당산의 유래는 앞으로 보이는 삼적산에 비올 때 물빛이 반짝거려 화재가 잘 나 이러한 재액을 막는 수재막이로 입석을 세우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빌었으며 100호(현45호)의 큰 마을이지만 당산제를 중심으로 화합이 잘 되고 있는 모범 마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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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리에서 0.8km 서쪽에 있는 이 마을은 입구에 1.3m 높이의 선돌과 아름드리 당산나무숲인 당산이 2개소가 있는데, 음 2월 초하루에 농민들이 참여하여 줄을 꼬아 만든 다음 풍물패를 앞세우고 마을을 돈 다음 줄다리기를 하고 마을 입구에 있는 입석에 줄을 감아주고 웃당산과 가운데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음복을 한 다음 뒷풀이 굿판을 벌이며 풍년을 빌며 마을의 화합을 이루어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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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의 최북단 상류인 대각산 자락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14일에 나무를 베어 2월 초하루에는 오전부터 솟대를 만들어 모정 앞에 세우고 그 밑에 준비한 제물을 진설하고 마을 사람이 모두 나와 풍물을 치며 솟대제를 지내는 전통을 계속 지켜오고 있다. 이 솟대는 마을이 큰 불이 자주 발생하여 그 화재막이로 세워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오고 있다. 뒷산에는 기우제단이 있는데 가물때는 복흥면민이 모두 이곳에 모여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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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가 적은 추령 마을은 옛날부터 지내던 당산제가 중단되었다가 한때 장승촌이 생기면서 보름날 밤에 당산제와 달집을 태우며 즐기는 마을굿이 부활되었다.
옛날부터 평야부로 넘어가는 추령 고개에 이정표 구실을 하는 장승이 있었다고 하며 오늘날은 장승축제가 벌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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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에서 장승과 솟대를 세우고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 곳은 이 마을 뿐이다. 6.25 전후 빨치산 활동과 토벌작전이 치열했던 가마골 자락에 있는 이 마을은 6.25때도 빠지지 않고 당산제를 지내 왔다고 하며 마을 입구와 가운데 당산 윗당산에다 각각 장승과 솟대를 세워 대보름달 솟대제를 지내고 맑고 아름다운 섬진강 물살을 바라보며 굿판을 벌여왔다. 전북에서 장승 솟대를 세우고 당산제를 지내는 것은 이 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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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가운데 600년이 되는 거목으로 된 할머니 당산과 마을 앞 고인돌로 된 서낭당과 돌탑에서 대보름달 밤 풍물을 치며 당산제를 지내지만 3-4일전부터 걸립굿을 치며 즐기던 옛 모습은 축소되었지만 그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마을이다. 할아버지 당산은 일제때 군용으로 쓰기 위해 공출로 강제로 베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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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호에서 30호로 인구가 줄었지만 지금도 제관을 미리 정하고 풍물을 치며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소쿠리 속과 같은 마을 입구 우측에 당산나무와 좌측 선돌에 풍물을 치고 마을을 한바퀴 돌고 제를 올린 다음 음복을 하고 마을굿이 밤을 새워 다음날까지 이어진다. 도둑이 왔다가 소를 훔쳐 아무리 도망쳐도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마을안에서 빙빙 돌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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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흥 소재지, 바로 남쪽에 있는 이 마을 앞에는 수구막이로 해마다 짐대 5∼6개가 서 있었다. 해마다 솟대를 세워 마을의 액을 막고 편안과 풍년을 빌었으나, 수년 전 농지경지 공사로 철거가 되었으나 그 복원을 서두르고 있다.
총각이 장가를 가고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제관은 총각이 맡게 되는 것이 이 마을 솟대 당산제의 특색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