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절박한 순간은 있다.
김 수 현
어렵게 내린 결정
갑자기 내려진 결정이었다.
방송 날짜가 부처님 오신날이니, 불교 관련 아이템을 찾아 방송을 해야 한다는 편성팀의
요구였다. 제주도 쪽으로 아이템을 찾아볼까..아니면 태백의 레이싱 파크를 가볼까.. 한창 자료를 뒤져가며 방송 소재를 찾던 담당 PD와 나에겐 당혹스러운 요구였다.
급하게 불교 관련 아이템을 찾던 중, 서브 작가가 내민 자료가 있었다. 지난해 말 추진하다 무산된 ‘월정사의 단기출가학교’ 관련 내용이었다.
그런데 난관은 계속됐다. 이 아이템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것이었다.
‘묵언수행을 하는 행자들을 어떻게 인터뷰 할 것인가?’, ‘한 절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따라가면서 취재하는 형식은 매력이 없다.’ 등등. 월정사의 단기출가학교는 선뜻 방송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특정 사찰과 스님에 초점을 맞춘 기존 불교 프로그램과 달리 한달 동안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행을 자청한 일반인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불과 방송 2주를
남겨두고 ‘월정사 단기출가학교’의 방송이 결정됐다.
가슴 속에 묻어둔 말 못할 사연.
‘과연 방송시간 50분이 나올 수 있을까..’
취재를 결정하고도 내내 불안했던 마음은 촬영 첫날 여지 없이 무너졌다. 첫날 촬영했던
내용은 행자들이 우리나라 불교 5대 성지 중 하나인 적멸보궁까지 삼보일배를 하며 가는 것이었다. 1600M에 이르는 산을, 그것도 자갈밭 길을.. 세 걸음 걷고, 한번 절하며 가는 것이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행자에서 갓 스무살이 된 행자까지..이 고행의 길에 빠진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오대산을 수놓은 47명 행자들의 행렬. 그리고 이들이 외친 석가모니불은 거대한 메아리가 되어 오대산을 뒤덮었다. 그들을 보면서 내 가슴도 뜨거워졌다. 이들이 이런 고행을 자청하면서까지 부처님에게 비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까지 이토록 간절하게 살아온 적이 있었나?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말 못한 사연 한 두 가지쯤은 있기 마련이다. 행자들 중에는 약 3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사람,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생각했었던 사람, 남자친구와의 결혼이 여의치 않아 힘들어하는 행자등 저마다 삶의 괴로움을 가지고 그 고통을 이겨내고자 이곳에 온 것이었다.
삼보일배로 꼬박 2시간이 흐른 후, 행자들은 적멸보궁에 도착했다. 육신의 고통을 통해 삶의 고뇌마저 떨쳐내서 일까.. 얼굴에는 땀이, 다리는 저려와 제대로 걸을 수 조차 없었지만, 행자들의 표정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절박함의 끝에서 찾은 ‘나’
매일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저녁 9시까지 5분 단위로 짜여진 단기출가학교의 일상.
가족과의 휴대전화 통화는 물론 편지와 인터넷도 할 수 없는 속세와 단절된 생활. 속세 생활에 익숙한 행자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한달 동안의 수행생활이었지만, 행자들은 묵묵히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나’를 찾아 한달 동안 떠났던 여행. 촬영 마지막 날,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행자들은 이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을까? 우울증에 걸려 자살까지 생각했었다던 한 행자의 말로 우리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처음 촬영을 시작했을 때, 내내 어두운 표정에 눈물만 흘렸던 그 행자는 촬영 마지막날 수행일기를 쓰며, 이렇게 말했다.
“108배를 하고 나서인지 어제와 또 다른 나를 보게 됩니다. 바람이 불면 안개가 흩어지듯이 자아의 새로운 발견이 새로운 자신을 보이게 합니다. 새로운 출발은 어쩌면 두려운 일이지만 어쩌면 행복해지는, 축복받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조금씩, 조금씩 자신감도 회복되고 모든 사물들이 아름답게 보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살면서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다. 문제는 그 시간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느냐이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듯, 해뜨기 전이 가장 춥듯이.. 약 50명의 행자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추운 그 순간에 월정사 단기출가학교를 찾아 새로운 자신의 인생을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