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72년 10월에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그리고 11월에 국민투표를 통해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꼭 1년이 지난 73년 10월에 대학생들의 유신 반대 데모는 폭발했고, 뒤따라 사회 지식인들의 저항이 이어졌다. 정부의 강경탄압에도 불구하고 74년 내내 저항은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다. 그 궁지에서 탈출하기 위해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에 나선 것이다.
다음날부터 취로사업은 동네마다 시작되었다. 아무런 계획 없이 갑자기 시작된 일은 주로 수로 확장이거나 농로 정비였다. 일당 1천 원이 발휘한 힘이었다. 그러나 일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감독하는 사람들이 시원찮은데다가, 사람들은 그 일이 투표용 선심 쓰기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어서 마지못해 곡괭이질, 삽질을 하고 있었다.
한편, 천두만네 누더기촌에도 취로사업 바람은 추위를 녹이고 있었다. 날품도 구하기 어려운 겨울이라 집집마다 남자들이 얼씨구나 나섰고, 천두만은 아내가 삽을 들고 나서는 것을 못 본 척했다. 별로 힘들일 것 없이 하루 1천 원씩 벌면 자기가 죽어라고 아파트를 오르내리며 버는 것보다 두 배가 넘었다.
그러나 누더기촌 사람들을 흥분시킨 건 취로사업이 아니었다. 시에서 무허가집들을 모두 양성화시켜 준다고 해서 그들은 얼싸덜싸 춤을 출 지경이었다. 그 지긋지긋하고 위태위태한 철거를 면하게 되었으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세민을 위한다고 라면이 상자째 집집마다 배급되었다. 평소에 라면을 먹고 싶어도 군침만 흘려야 했던 누더기촌 아이들은 라면 상자를 보고 만만세를 부르고 라면봉지를 들고 깡충깡충 뛰었다.
그리고 때아닌 명절을 맞은 건 양로원이었다. 양로원 노인들에게는 라면만이 아니라 양말이며 내복까지 주어졌다. 그리고 극장․목욕탕․이발소를 반값에 이용할 수 있는 표도 나누어주었다. 그 느닷없는 호사에 노인들은 그저 싱글벙글이었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고아원에는 라면 한 봉지도 돌아가지 않았다. 양로원에 생기가 도는 것과는 반대로 고아원에는 겨울 추위만 가득했다.
송동주는 학교 옆에서 배돌다가 식당에서 점심을 사먹고 다시 투표장으로 갔다. 오전 중에 사람들이 몰렸던 투표장은 한산해져 있었다. 송동주는 투표를 했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고 나서 다시 투표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또 투표를 하고 나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3분 간격으로 뻔질나게 드나들며 대리투표를 하고 있었다. 기권자는 거의 있을 리 없고, 돈벌이를 하려고 도시로 떠나버린 젊은이들의 투표용지가 그의 손에 들려지고 있었다. 똑같은 일을 스물다섯 번 되풀이한 다음 그는 학교를 떠났다.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결과는 투표율 79.8퍼센트에 찬성률 73.1퍼센트로 나타났다. 그런데 모든 신문들은 부정투표 사례를 구체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개표 과정에서 무더기표가 도처에서 드러나는 한편 어쩔 수 없이 대리투표를 하게 되었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잇따르면서 ‘양심선언’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박정희 정권은 사회 전반적으로 유신헌법 개정에 대한 요구가 거세어지자 1975년 1월 22일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는 투표율과 찬성율을 높이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유신을 옹호하는 노래를 만들어 교사가 각 가정을 방문하여 노래를 보급하게 하고, "삼권분립은 18세기적 생각이며 우리나라는 유신체제가 맞는 체제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대학교수들은 유신을 찬성하는 칼럼을 게제하였고 모든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유신 투표를 거부하는 기관원들을 위협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홍보(?)와 위협 및 회유, 그리고 부정투표와 개표의 의혹 속에서 투표결과는 찬성 73%로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