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는 선교사의 전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생 되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중국에서 천주교를 전파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쓴 교리서들이 북경을 왕래하던
사신들에 의하여 유입 되었다..
마태오 릿치 신부가 저술한 <天主實義>와 판토하 신부의 <七克>이 유학자들에게 널리
읽혔졌다.
천주교 신앙 체계를 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자생한 조선 천주교는 세계 천주교사에 유례가
독특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지금도 가끔 천주학 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런 신앙 체계의 결과이다. 이후 1백년에
걸쳐 천주교의 평등 사상과 제례(祭禮) 문제는 조선의 통치이념인 주자학과 충돌하여
신해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등 크고 작은 갈등으로 수많은
순교자를 낳게 된다.
최초의 순교자를 낳은 신해박해는 1790년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조선 천주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려 발생한다.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바오로)와 외종사촌 권상연(야고보)가 금지령대로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사른다. 윤지충은 1791년 여름, 모친상을 당하자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
유언대로 유교식 장례의식을 폐기하고 가톨릭식 장례를 치르자 분노한 종친들의 고발로
체포된 윤지충과 권상연은 끝내 배교하지 않고 순교한다..
천주교와 주자학의 갈등을 예고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800년 순조가 어린나이로 즉위 하였다.벽파 김한구의
딸이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정조 재임 동안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났던 벽파가 권력을 장악한다. 벽파는 시파와
남인들을 축출 하기 위하여 신유박해(1801년)를 일으켜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 등
초대 천주교 지도자들이 순교한다.
장희빈의 몰락과 함께 등용에서 배제된 남인들은 주자학에서 벗어나 서양학문과의
접촉이 비교적 자유로워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신유박해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 저 유명한. 황사영 백서사건이다.
황사영은 1790년 16세에 진사시에 장원하여 정조 임금에게 격려와 함께 20세가 되면
중용 하겠다는약속을 받았다고 한다.
그해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였던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딸 정명련과 결혼하여
초창기 천주교 지도자였던 정약종과 처삼촌 지간이 된다.
사돈이 된 이승훈에게서 황사영이 최초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본 것이 1791년 이었다
학문으로 천주학에 접근했던 황사영은 정약종과 진지한 토론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교리를 이해하게 된다. 1794년 중국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자 비로소
신앙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알렉산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는다.
천주교도가 된 황사영은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등사본 교리서를 집필
하기도 하며 전교에 힘쓴다.
신유박해로 지명수배되자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군 봉양면 배론(舟論)이라는 천주교도
마을에 잠입하여 토굴에 숨는다.
열렬한 신자 황심(黃沁)과 무차별한 박해로 위기에 놓인 조선 천주교회를 구출할 방책을
상의한다. 결론은 중국 천주교를 통한 청나라의 개입이 유일한 방안이었다.
황사영은 신유박해의 경위와 선교사 주문모 신부의 처형, 조선 정치계의 실정,
조선에서의 전교에 필요한 방안 등을 흰 비단에 상세히 기록하여 음력 10월에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게 맡겨 중국 천주교회 북경교구 주교에 전달할 계획을 수립한다.
그러나 한양에 도착한 백서가 적발 당하여 황심과 함께 음력 9월 29일에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황사영은 음력 11월 5일에 장흥에서 능지처참형을 당한다.
1831년 교황청은 조선을 독립교구로 선정하고 앙베르, 모방, 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파견해 본격적으로 천주교가 전파된다.
권력의 핵심에 있던 유학자들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와 천주교가 연관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단정한다.
1846년의 병오박해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사건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충청도 당진 솔뫼에서 출생하여 7살이 되던 1827년, 정해박해를
피하여 용인 한덕골로 솔가한다.
조부 김택현과 숙부 김제철의 묘소가 한덕동이라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김제철이 사망하자 부친 김제준은 골배마실로 이주한다. 김대건이 14살 되던 때였다.
한덕골과 마찬가지로 골배마실도 척박한 은거지여서 화전이나 담배농사, 그릇굽기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록이다.
1836년, 15살이 된 김대건은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다. 1836년 12월, 김대건은 앞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출국을 기다리던 충남
청양 다락골 출신의 최양업과 충남 홍성의 최방제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1837년
6월 7일 포르트갈 조차지 마카오에 있는 신학교에 도착한다. 여섯달 이상 걸린 대장정
이었다.
외세에 저항하는 중국인들의 항쟁으로 1837년과 1839년에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하는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열병으로 최방제가 죽고 1845년 8월 17일, 조선 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서품을 받아 신부가 된 김대건은 선박으로 귀국
도중 폭풍을 만나 제주도 근해까지 표류하였다가 10월12일, 마침내 강경 해안
으로 귀국에 성공한다.
10년만에 귀국한 김대건 신부를 기다려준 가족은 하나뿐이던 여동생 남편 곽 씨,
즉 사위의 밀고로 부친 김제준이 1837년에 순교하였고, 유리걸식으로 연명하던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뿐이었다.
골배마실로 돌아온 신부는 영세를 받았던 '은이 공소'에서 첫미사를 집전한다.
이 땅에서 조선인 신부가 집전한 최초의 미사였다..
<용인 천주교회사>는
"은이 공소는 조선 교회 사상 최초의 본당"이라고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는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 지시로 만주에서 입국 기회를
기다리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신부에게 전할 주교의 편지와 함께 입국이 가능한
연평도 앞바다의 비밀항로가 그려진 지도를 돌아가는 중국 어선에 맡기고 귀환하던 중
1846년 6월15일, 백령도에서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뒷날 백범이 갇혔던 해주 감영을
거쳐 한양으로 압송된다.
김대건의 신부로서의 활동은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1845년 시월부터 이듬해
부활절 까지의 아홉달과 순교할 때까지의 옥중생활 넉달, 모두 1년 1개월이었다.
해주 감영에서 부터 한양 포도청으로 이어지는 옥살이 넉 달은 엄중한 문초와 모진
고문의 시간이었다..
망덕 고개로 명명된 해실이 정상에 세워진 비문에 문초와 고문의 일편(一片)이 김대건
신부의 말씀으로 남아 있다..
"오늘 묻고 내일 물어도 오직 이 길을 갈 따름입니다. 때리든지 죽이든지 오직
이 같을 따름이니, 어서 때리고 어서 죽이시오. 이제 죽는 것도 천국을 위하여
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려 합니다."
김대건 신부가
"때리든지 죽이든지 오직 이 같을 따름이니, 어서 때리고 어서 죽이시오."
라고 한 고문의 실체가 조금쯤 남아 있는 곳이 서산. 해미읍성이다.
1866년의 병인박해로 6천여 명의 평신도와 프랑스 선교사 등이 처형된다. 해미읍성은
약 3천여 명의 충청도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한 곳이다.
해미읍성 정문 진남문(鎭南門)을 지나 동헌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
옥사(獄舍) 앞에 반 이상 썩은 속을 시멘트로 메운 수령 3백년으로 추정하는 회화나무가
서 있다.
녹 쓸어 삭은 못이 박혀 있고 천주교도들의 목을 감아 죽였다는 철사토막이 남아
잔혹한 박해의 흔적이 생생하다. 또 서문 밖 순교헌양비 옆에는 넓적한 돌판이 하나
있다. 천주교도들을 곡식단처럼 묶어 자리개질하듯 몽둥이와 돌로 쳐 죽인 현장
이라고 한다.
취조 과정에서 드러나는 김대건 신부의 박학다식을 안타까워한 일부 중신들이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나,서양 귀신을 섬기는 천주학을 공부하고 서양 오랑캐 들과 접촉한
사실을 반역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
헌종실록 12년 7월 15일(무신)에 사학괴수 '김대건을 효수하라 명하다'고 씌어 있다.
양력으로 1846년 9월 15일이다. 이튿날 9월 16일, 왕명에 따라 사학괴수 김대건
안드레아의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이. 새남터에서 결행된다.
망나니가 휘두른 여덟 번의 칼질 끝에 몸과 분리된 사학괴수 김대건 신부의 머리가
군문에 걸리고 목 없는 시신이 새남터 모래밭에 매장된다.
증조부 김진후와 부친 김제준에 이은 3대째 순교였다.
1846년 9월 15일의 새남터로 돌아가면. 이민식 빈첸시오라는 17살 청년을 만나게 된다.
김대건 신부의 복사로 김대건 신부를 흠모하여 사제가 될 것을 결심했던 골배 마실의
청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김대건 신부 처형 소식을 듣자 시신을 거두기로 작정하고
열세 명의 신자들과 함께 새남터로 향한다.
미리내를 출발하여 오두재 → 해실이 → 어은이 → 은이공소 → 용인 → 능골(광주
오포읍) → 태재고개(분당 요한성당 앞길) → 오동나무들마을(야탑)→ 널다리(판교)
→ 옛골(청계산)→ 서릿개마을(반포) → 거문돌(흑석동) →동재기나루터(銅雀津址)에
도착한다. 자전거조차 없던 조선이어서 1백5십 리 길을 쉬지 않고 갔다면 1박 2일이
걸렸을 것이다.
통상 처형된 지 사흘 뒤에는 시신을 연고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시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는 멸족시켜야 할 국사범이어서 관례는 무시되고 군문에 걸린 머리와
모래밭에 묻은 몸통의 파수가 엄중하다. 열세 명의 신자들은 엄중한 파수와 지리한
기다림에 지쳐 모두 돌아가고 이민식만 남아 천주님의 도움을 간구하며 기회를 엿본다.
김대건 신부가 처형당한 지 40일째 되는 10월 26일 저녁.파수 군졸들이 저녁을 먹으러 가
삼엄한 감시가 잠시 소홀해진 틈을 이용하여 매달린 머리를 끌어내려 수의에 싸
가슴에 품고 모래밭에서 파낸 몸을 수의와 가마니로 싸 지게에 짊어진 이민식은
나룻배로 어두운 한강을 건넌다.
인적이 많은 동재기나루터 대신 인적이 드문 서빙고에서 잠원나루를 이용하였을
것이란 추측이다.
서릿개마을을 지나 남태령을 넘어 옛골을 거쳐 널다리를 지나 갔던 길을 되짚어 오며
사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낮에는 숨어 자고 밤에만 인적이 드믄 산길을 묵주를 굴리며
끊임없이 기도문을 되뇌며 이민식은 걷는다.
은이에서 10월 28일 낮을 보낸 이민식은 어은이, 해실이 고개를 단숨에 넘었으나
마지막 오두재를 채 내려오지 못하고 29일이 밝아와 서둘러 시신을 콩밭에 숨기자
해가 떠오른다. 밤새 어두운 산길을 걸은 피로가 졸음으로 꼬박꼬박 몰려드는데 웅성
거리는 말소리가 들려 떠지지 않는 눈을 급히 부라려 살핀다.
밝은 해가 맑은 하늘에서 따갑고 콩을 수확하려는 농부 일가가 밭으로 들어서는 게 보인다.
위기를 감지한 이민식 빈첸시오는 급히 묵주를 잡고 천주님과 성모님께 기도로
무사를 간구한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농부 일가는
콩을 따던 손길을 멈추고 급히 돌아간다.
그날 밤 무사히 시신과 함께 오두재를 내려온 이민식 빈첸시오는 새남터를 떠난지
닷새만인 10월30일 새벽, 김대건 신부 시신을 안성 미리내의 선산에 모실 수 있었다.
뒷날 신도들이 김대건 신부의 고귀한 순교를 기리며 고개마다 기념비를 세우고 .
어은이를 신덕(信德)고개로, 해실이를 망덕(望德)고개로, 오두재를 애덕(愛德)고개로
부르며 삼덕의 길'로 명명한다.
신약성서의 집필량이 가장 많은 바오로가 그리스 코린트 신도들에게 쓴 편지에 등장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신앙생활을 실천하고 다짐하기 위함인 듯하다.
미리내는 은하수의 순수한 우리말이다. 신유박해 이후에 크고 작은 박해를 거치면서,
경기도와 충청도의 천주교도들이 미리내 인근의 시궁산(時宮山 515m, 神仙峰)과
쌍령산 골짜기로 숨어든다.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실개천 주변에서 밤이면 점점이 흘러나오는 호롱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이 맑은 실개천에 어우러져 반짝이는 것이 마치 은하수 같다고 해서 붙여진
아름다운 지명이 미리내 이다.
김대건 신부의 묘소는 원래 전통적인 봉분이었으나 봉분의 풀을 먹으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소문으로 인근 주민들의 훼손이 심하여 이민식이 돌로 덮었다고 한다.
7년 후 선종하면서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고 유언한 페레올 주교가
옆자리에 안장된다.
그 무렵 7년 사이에 남편과 아들을 잃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숨을 거두자 이민식은
김대건 옆에 모신다.
1886년에 교황청 시복 판사 프와넬 신부가 내한하여 미리내에 있던 김대건의 봉분을
확인할때 증인은 이민식 빈첸시오였다.
1901년 5월 21일,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발굴할 때 이민식 빈첸시오가 직접 김대건
신부의 순교와 운구 과정을 증언한다.
발굴된 김대건의 유해는 원효로에 있는 예수성심 신학교 교정으로 옮겨 안치된다.
김대건 신부의 묘소를 돌보며 일생을 보낸 이민식 빈첸시오는 1925년 92세로 눈을
감아 평생 사모했던 김대건 신부 옆에 묻힌다.
1960년 7월 5일에 성심신학교 교정에 묻혔던 김대건 신부 유해는 혜화동 성당에 있던
가톨릭대학으로 옮겨지면서 하악골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
으로 분리 안치된다.
가톨릭신학교에 보관되었던 유해 가운데 정강이뼈가 1983년 시성 운동이 전개될 때
교황청으로 조사차 보내졌다가 돌아와 미리내 묘소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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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람들이 하도 복음말씀도 안보고 해서 우짜믄
묵상글이라도 좀 보게할까 궁리하다 방을 바꿔
버렸더니 또 좀 그렇지요
이해하시고 앞으로 이방 좀 채워주시기를
부탁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