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조있는 영화였다.
복수에 대한 집념이 강했던 박찬욱 감독의 다른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고 예쁘고 가벼운 영화가 필요했다.
사람의 영혼에 가해진 상처에 대한 집착은 여전했지만, 이번엔 구원을 이야기한다.
"내가 존재해야하는 이유를 한가지라도 알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영욱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이보그가 되어 할머니를 지키고 싶었던 소녀, 할머니께 틀니를 전해주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전기 충전에 집착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버려진 기억으로 자신의 존재가 점이 되어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에 떠는 일순. 보잘것 없는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 타인에게서 무엇이든 훔치는 안티소셜. 의사는 한 3, 40년을 교도소에 들락 거리다 보면 자연 치유될 수도 있을거라고 한다. 하지만 교도소에서 그 세월을 보내기 무서워 돈을 벌어 정신병원에 제발로 입원한다. 희망 자체를 버리라는 말, 그 말에 또 작아지는 일순.
정신병자들의 캐랙터가 재미났다. 일순은 그 속에서 독특한 존재다. 그들의 병증을 훔쳐낸다. 즉, 그들의 병증을 자신이 받아 안으면 원래 증상이 있던 환자는 그 증상이 사라진다. 그러고 보면 일순은 어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투명함, 무당과 같은 능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이보그라 믿는 영욱은 할머니에 대한 복수를 위해 동정심을 훔쳐가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일순은 그 동정심으로 영욱을 사랑하게 된다.
영욱에게 자신이 훔친 모든 것을 동원해 위안을 주는 일순의 사랑이 감동적이다.
영욱은 결국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인 백만볼트의 일짱을 만났다. 그 것은 사랑이다. 그리고 일순이다. 황무지에서 포옹하고 잠들어 있는 그들 위에 뜬 무지개는 상처받은 존재들이 살아내야 하는 이유, 구원의 이유를 축복한다.
정신병원이라는설정을 통해서 환상 장면들이 거침없이 끼어들고, 감독은 마구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상상의 힘을 통해 상처받은 영혼들의 내면을 들락달락 거리며 영화의 강점인 환타지를 최대한 발휘한다.
영욱을 치유하는 일순의 후반 캐랙터가 지나치게 급격하게 정상적으로 변해간다는 것이 무리한 설정이라는 느낌도 있다. 구원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쩜 비현실적 왕자님으로 돌변하고 있다.
그토록 황폐해진 영혼이 정말로 사랑을 통해서 치유되고 구원될 수 있는가는 일순과 같은 강한 영혼이 존재하는가, 그것이 현실인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일순은 그렇게 강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과 동정심이 그토록 사람을 돌변하게 하는가? 아님, 영욱에게서 훔쳐간 동정심, 그 영욱의 영혼의 사랑이 깊었던 것일까? 그 힘이었을까?
다치고 황폐해진 영혼들이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감독은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친절할까? 올드보이와 금자씨가 치열한 현실이라면 이 영화는 환타지다.
아니 어쩜 세상은 그 가지 모두가 실체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믿는가?
사랑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영혼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사랑이 정말로 그토록 강한 영혼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괴물을 왕자님으로 변화시키는 힘, 사랑의 힘은 진정 그것일진데,
감독은 믿고 싶어한다. 무리를 해서라도...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을 아름답게 그리고 싶어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느껴진다.
격조 높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설정과 상상... 모두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