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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의 승부수를 던져라.
김언식-DSD삼호건설 회장
맨주먹으로 시작해 연 매출 2조원의 국내 최대 건설시행사를 일으킨 건설업계의 전설.
국내 프로볼러 1기 출신으로 프로 첫 공식 퍼펙트(300점 만점)기록도 갖고 있다.
다산(多産)가정 직원에게 급여를 더 주는 시스템을 운영해 주목받고 있다.
“페어플레이 원칙 지켰더니 경영도 스트라이크”
“심판, 제가 파울라인을 밟은 것 같습니다”
1998년 <일간스포츠>가 주최하는 전국 직장인 볼링대회가 열렸다. 사흘간 펼쳐진 대회의
마지막 날. 3인조 단체전 결승에는 삼영출판사와 (주)삼호건설이 올랐다.
마지막 게임의 마지막 프레임에 삼호건설K선수가 섰다. 두 팀의 핀 차이는 5개였다. K선수
가 그 전 프레임에서 스트라이크를 쳤기 때문에 이번 프레임에서 스트라이크를 치면 역전승
으로 삼호건설이 우승하고, K는 개인전 챔피언도 석권하는 상황이었다.
K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스텝을 뗐다. 그리고 왼손으로 가볍게 릴리스를 했다. K의 손을
떠난 볼링공은 플로어를 미끄러져 나간 뒤 핀을 강타했다. 10개 핀 모두가 깨끗하게 쓰러졌
다. “와, 스트라이크!” “우승이다”환호성이 터졌다.
순간 K는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릴리스를 하면서 파울라인을 밟은 것이다. 하지
만 심판은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K는 파울라인에서 슬쩍 발을 뺐다. 잠시 고민한 뒤 K는
심판에게 말했다. “제가 파울라인을 밟은 것 같습니다. 경기 장면 화면을 확인해 주십시오.”
심판은 깜짝 놀랐다. 화면을 확인하니 파울라인을 살짝 밟은 게 드러났다. K는 마지막 프레
임이 0점 처리돼 단체전과 개인전 우승을 모두 놓쳤다. 그러나 페어플레이 정신과 스포츠맨
십의 정수를 보여준 K가 진정한 우승자였다. K는 큰 박수를 받았고, <일간스포츠>에도 소
개됐다.
그K선수가 김언식 DSD삼호건설 회장이다. 김 회장은 1980년 ‘삼호주택’이란 이름으로 건설
회사를 시작해 지금은 DSD삼호, 신삼호, 삼호건설 ,소리자비, 호비 등 다섯 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2010년 현재 경기도 고양시 식사지구WI-city아파트단지, 용인
수지 자이2차 아파트단지 등 전국 9곳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09년 매출이 2조
원에 육박할 정도로 건설 시행사로는 대한민국에서 첫 손가락에 꼽힐 만큼 탄탄한 기업이
다.
김 회장은 또 우리나라 프로볼러 1기 출신으로 현재 한국프로볼링협회장을 맡고 있다. 1995
년 필라컵 프로볼링 대회에서 12개 전 프레임에서 스트라이크를 쳐 ‘국내 프로볼링 1호 퍼
펙트(300점 만점) 기록도 갖고 있다. 그는 사재를 털어 프로선수를 육성하고 삼호컵 국제볼
링대회를 여는 등 볼링 활성화에 힘을 쏟고 있다. 김 회장의 노력이 맺어 정태화(DSD한독)
선수가 2009년 미국프로볼링(PBA)에 처음으로 진출하게 됐다.
김 회장은 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둔 배경을 ‘볼링을 통해 체득한 페어플레이와 스포츠 정신’
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는 1988년 ‘파울라인’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당시 내가 파울을 인
정하는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와 함께 고생하며 결승까지 올라온 동료들에
게는 정말 미안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제일 어려운 것 중 하
나가 남이 아닌 나를 속이는 일입니다. 이 성격으로 인해 많은 손해를 보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결국 진정한 마음과 솔직한 태도의 스포츠맨십이 오늘의 작은 성취를 이루어준
바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1995년 한국 프로볼러 1기 테스트에서도 ‘원칙과 페어플레이’정신을 지켰다. 그는
당시 프로볼링협회 창설을 주도한 주역이었고, 한국프로볼링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1기
프로볼러 테스트에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고수 2,000여 명이 참가했다. 1차 예선, 2차예선
을 거쳐 결선에 오른 선수들이 2주 동안 무려 120게임을 쳐서 48명만을 뽑았다. 그야말로
바늘구멍 통화하기였다. 당시 협회 임원들이 “부회장을 일반 지망생과 같이 테스트 받게 하
는 것은 부적절 하니 변용환, 유청희 선수와 함께 세 명은 특별 선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
나 그는 이 제안을 사양하고 선발전에 출전했다.
변용환 프로와 유청희 프로는 볼링 국가대표로 오랜 기간 활약하며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딴 화려한 경력의 실력자들이었지만, 자신은 전혀 실력을 객관적으로 검증받지 않았으므로
동일한 대우를 받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또 협회 부회장이란 백으로 얻
게 되는 프로 자격증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김 회장은 “당시 나는 십중팔구 떨어
지겠지만 떳떳하게 실력을 평가받고 싶었고, 안 되면 재수 삼수도 각오한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운이 좋아 1기프로에 최종 선발됐습니다. 정말로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습니다”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2001년까지 사업과 프로볼러 생활을 겸했던 김 회장은 프로볼링협회장으로 올라가면서 공
식대회는 출전하지 않는다. 회장이라는 사람이 선수라고 나오면 다른 선수 입장에서 큰 부
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요즘은 주1회 정도 저녁에 볼링장에 가서 대여섯 게
임을 치고 온다. 개인 공을 갖고 가면 210점, 볼링장에 있는 하우스볼로 치면 200점 정도
나온다고 한다.
트랙과 잔재주는 오래 가지 않더라.
직접 만난 김언식 회장은 듣던 대로 호탕하고 남자다웠다.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감사하게
먹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자수성가한 사람에게서 흔히 보이는 허장성세나 거드름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가 살아온 얘기를 듣다 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다. 김 회장의 성공 스토리를 1
인칭으로 정리했다.
나는 경남 창녕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집안의 기둥이던 아버지가 돌아
가셔서 어머니와 내 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님, 형님들 사이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바로 위 누이를 낳은 지 10년 만에 그 당시로는 한참 늦은 36살에 나를 낳았고, 늦둥이여서
그랬는지 막내인 나에 대한 사랑이 유달리 깊으셨다. 또 형들이나 누님과 달리, 나 역시 가
장 가까이에서 어머니의 힘든 삶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할 수 밖
에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년 뒤, 의지할 곳 없던 어머니는 육군 대위였던 외삼촌의
권유로 나와 바로 위의 누이만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막상 서울에 올라왔지만 먹
고 살기 막막했던 건 똑같았다. 하지만 나는 배고픈 중에서도 서울의 크고 멋진 건물들을
보는 게 너무도 신기했고 즐거웠다. 그래서 아무 종이에나 보이는 대로 건물 그림들을 그려
가며 언젠가는 나도 저런 멋진 건물들을 디자인 할 수 있을 거라는 꿈을 키워갔다.
청소년기에 나는 미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대학을 들어갈 형편이 안돼 고등학교도 공고(성
동공고 토목과)로 진학해야 했다. 어려서부터 가고 싶었던 미대 진학의 꿈은 결국 접은 채
나중에야 용인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1977년 구 S전역 뒤 수원에서 토목사업을 하시던 작은 형님을 도와 부동산과 토목공사 일
을 시작하게 된 것이 나중에 DSD삼호건설의 출발이 되었다. 그 즈음 나는 작은형수를 통해
내 삶의 푯말과도 같은 볼링을 알게 되었다. 형수를 따라 처음 가본 볼링장에서, 공이 핀에
맞는 순간 울려 퍼지는 경쾌한 파열음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나는 순식간에 볼링에
매료되었다. 그 소리는 힘들었던 하루의 스트레스를 모두 날릴 만큼 경쾌했다. 하지만 당시
에 볼링은 귀족스포츠로 인식되고 있었고, 소위 좋은 집안의 사람들이나 접할 수 있을 만큼
비용도 많이 드는 운동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손목이 떨어져 나갈 만큼 원 없이 볼링을 치
고 싶었지만, 박봉이었던 주머니 사정 때문에 직접 게임을 할 때보다 남들의 경기를 지켜볼
때가 더 많았다. 그러다 1980년 2월 수원에서 처음으로 독립하여 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
다. 그 동안 모은 돈을 모두 털어 작은 사업 부지를 사들인 후, 그 땅위에 내 손으로는 처음
으로 여섯 채의 단독주택을 짓게 된 것이다. 그 때 나는 밤새도록 배치계획도를 그렸다 지
우기를 반복하고, 당시 고급주택이 가장 많이 신축되던 영동(강남)을 수없이 답사하면서 많
은 것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또 시간만 나면 을지로와 청계천 건재골목을 어슬렁거리며
새로운 자재들을 찾아다녔고, 좋은 자재들이 눈에 띄면 직접현장에 적용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노력을 통해 내 작품들을 한 땀 한 땀 완성시켜 가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
취감과 희열을 맛볼 수 있었다.
그 단독주택 건축을 끝내던 날 수고한 작업현장 사람들과 함께 축하파티를 했다. 드럼통에
불을 피우고 현장에서 미장공들이 쓰는 사모래채를 석쇠삼아 왕소금을 뿌려가며 먹던 목삼
겹살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첫 사업이 성공을 거둔 후, 자신감을 얻게 된 나는 주택의 미적 감각을 높이는데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사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주택을 짓는 일과 미술 작업이 굉장히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좀 더 실용적이고 편리하면서도 어떤 미술 작품보
다 더 미적 감각이 살아 있는 멋있는 집을 지을 수 없을까 여러모로 궁리했다.
그 후 점점 주택사업의 규모가 커져가고 일도 많아지면서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보다 작업
점퍼를 입고 공사현장에 나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시간이 늘어갔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볼링을 칠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술, 담배를 안했던 터라 나는 밤
시간을 쪼개가며 꾸준히 볼링 실력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일을 마치고 저녁을 먹은 후 볼링장에 손님이 뜸할 밤 11시쯤 나는 어김없이 볼링장으로
달려갔고, 보통 새벽 한 두시까지 거의 매일 볼링연습에 몰두했다. 그 시간에는 심야 할인도
받을 수 있었고 조용히 집중하며 생각하는 게임을 할 수 있어 무엇보다 좋았다. 실력을 저
울질하고 싶어 대회가 있는 곳이면 서울이 아닌 지방이라도 어렵게 시간을 내 달려갔고, 강
호의 고수들과 일합을 겨루면서 볼링의 진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나는 비교적 젊은 시절에 볼링을 한 덕분에 방탕에 빠지지 않고 절제하는 습관을 들일 수
있었다. 또 수많은 대회에 출전해 대부분 나보다 나이 어린 고수들과 겨루면서 트릭과 잔재
주는 오래가지 않고, 결국 땀 흘려 가다듬은 실력만이 통한다는 사실도 절감했다. 볼링에서
얻은 교훈은 사업을 하는 데도 변하지 않는 원칙이 되면서 지금의 DSD삼호건설을 일구는
데 커다란 초석이 되었다고 본다.
나는 건설업을 시작해 처음 10년간은 직접 시공을 하다가 1988년부터 시공을 포기하고 사
업계획 수립 및 사업부지 물색과 구입, 설계와 인허가만을 전문으로 하는 시행사로 방향을
바꿨다. 여기는 다음과 같은 내 생각이 담겨 있다.
세계적인 의상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작품이 모두 그가 직접 바느실해서 만든 것일까. 그가
정녕 혼을 다해 만든 작품이라 해도 그의 직접적인 역할은 디자인과 소재를 정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 디자인에 따라 재단사 마름질을 하고 숙련된 재봉사가 정성껏 바느질을 하여 작
품을 완성시킨다.
하지만 이렇게 남의 손을 통해 완성된 옷이라고 해도 그것은 분명 앙드레 김의 작품이다.
의상을 만들거나 영화를 찍거나 건물을 지을 때나 모두 단순 작업자보다는 최초로 디자인하
거나 기획하거나 설계한 사람이 작품의 진짜 주인인 것이다.
당신 우리 회사는 수원에 본사를 두고 있었는데 굴지의 건설사인 현대, 대우, 삼성에 비교하
여 근무지의 위치, 자금, 직원의 급여수준, 복지, 기술력, 잠재력, 인지도와 더불어 사장인 나
의 전문성까지 뭐 하나 우월할 것이 없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단순 시공
으로는 답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1987년 나는 미국의 종합건축회사인 백텔사를 방
문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백텔은 회사의 명성과 달리 직원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도
세계 최고의 실적과 이익을 내고 있었고, 특히 직원 1인당 수익은 우리나라 건설사에 비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다. 당시의 나에겐 몇 명 되지 않는 인원으로 그런 엄청난 수익
을 거둔다는게 이해되지 않았고 놀랍기만 했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 백텔사의 사업운영
방식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내가 꿈꾸는 사업과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
었다.
그것은 직원 한 명이 책임질 수 있는 하드웨어(건축, 또는 토목, 시공부문)는 한계가 뚜렷하
지만 소프트웨어는 그 범위가 무한대일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10억짜리 프로젝트를 기획하
고 완성하는 데 1명이 필요하다고 해서 10억짜리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완성하는 데 1명이
필요하다고 해서 100억짜리 프로젝트를 꼭 10명이 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2~3명으로도 충
분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후 나는 시행과 기획 중심으로 회사를 운영하면서 시공부분은 나보다 좀 더 잘할 수
있는 1군 건설사에 도급을 주게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은 회사를 키우려면 직
접 시공을 해야 한다고 권유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2류가 될 수 밖
에 없을 바에는 직접 시공하여 얻는 이익은 포기하더라도 그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특화된
분야를 개발하고자 마음먹었고, 그것이 결국 오늘의 DSD삼호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시행사들이 한여름 반딧불처럼 명멸하다 스러져 갔지만 우리는 30년을 하루같이 변함
없이 한 우물을 판 결과, 2009년 매출이 2조원에 근접하고 영업이익이 5,000억 원을 넘어서
는 우량회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아기 많이 낳으면 월급 더 많이 주는 제도 시행
김 회장에게는 볼링과 바둑을 통해 배운 인생철학이 있다. 그것은 바로 조화로움이다. 그는
볼링과 바둑의 가장 큰 공통점을 조화라고 생각한다.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겠지만 볼링에서
도 욕심을 부리거나 무조건 세게 친다고 해서 핀이 다 쓰러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적절한
힘으로 적절한 위치에 공을 일관되게 보낼 수 있을 때, 핀끼리의 액션이 가장 조화로울 때,
비로소 스트라이크를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볼링은 평정심을 유지할 때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출중한 실력을 가지고도 흥
분하거나 욕심이 앞서면 거의 틀림없이 게임을 망치게 된다. 사회생활에서도 욕심을 버리고
상대방을 대할 때 가장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이 옳고 정당하더라도 너무 공격적인 태도는, 너무 강력한 스트라이크
액션이 핀을 플라잉시켜 남지 않아야할 스페어를 남기듯이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좋은 결과
를 얻어내기 어렵다고 김 회장은 강조한다.
김 회장이 볼링을 사랑하는 것은 ‘가족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볼링
을 통해 즐거움을 느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다. 요즘같이 한 가족이 모이기 힘들 때, 가
족간의 유대강화를 위해 명절이나 생일에 가족끼리 볼링 한 게임 하는 문화를 만들어 보자
는 것이다.
볼링은 아무 장비 없이도 볼링장에만 가면 아이부터 어르신까지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실수
하면 격려하고, 스트라이크를 치면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가족간의 정도 깊어질 수 있다. 볼
링은 운동량도 많아 다섯 게임을 하면 속보로 2시간을 걷는 유산소운동 효과가 있다고 한
다.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게임으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대중 스포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볼링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으면 하는 게 김 회장의 바람이다. 또 청소년
들이 월 1회 정도 볼링장에서 현장학습을 통해 볼링을 배울 기회를 마련해 줬으면 좋겠다
고 한다.
김 회장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다. 그리고 자녀를 많이 낳는게 곧 애국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1980년대 산아제한 분위기에다 아내가 그만 낳자고 하는 바람에 1남 1녀만을
뒀지만 잘 키울 수만 있다면 형제는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김 회장은 2009년 4
월부터 직원들에게 가족 수당을 차등 지급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자녀가 1명이면 20만
원, 2명이면 40만원, 3명이면 70만원, 4명이면 100만원, 5명이면 130만원, 6명이면 160만원
을 매달 자녀양육비 명목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자녀 여섯 명 낳으면 월급 160만원 더 준다’는 제목의 기사가 <중앙선데이>를 통해 나가자
찬사가 빗발쳤다. “정말 참신하고 실용적인 발상이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기업인이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음은 그 기사를 쓴 <중앙선데이> 조강수 기자와 김 회장의 일문일답 이다.
저출산 문제에 과심을 갖게 된 계기는.
“몇 년 전 지인으로부터 저출산의 심각성에 대해 들었다. 이런 추세로 가면 남북통일이 돼
도 인구 부족으로 국력이 쇠락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프랑스처럼 이민족이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길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언제 심각성을 절감했나.
“내가 건설. 시행사를 경영하니까 공사 현장에 자주 간다. 인부 중에 50세 미만을 찾아보기
가 어렵다. 50대 초반만 해도 영계 취급을 받는다. 40대는 매우 영계다. 그마저 중국동포가
대부분이다. 젊은이들이 3D 직종을 기피하는 것이 원인이기도 하겠지만 인구감소의 영향도
큰 것 같다.”
가족수당을 차등지급하는 시스템 보입은 어떻게 착안했나.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육아비 지원이 시스템의 핵심이다. 자녀를 많이 낳도록 동기를 부여
하는 방법으로는 현금 보상이 제일 낫다고 판단했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돈을 많이 주는
것이 형평성에 맞다.”
회사 경영이 나빠지면 수당 지급을 중단할 수 있지 않나.
“당장 들어가는 돈은 전체 급여의 10퍼센트 가량으로,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건 사회운동의
일종이다. 주춧돌을 놓는 마음으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 기업 저 기업이 동참해 여론이
되고 민심이 되는 제도는 저절로 굴러갈 것이다. 호두까기인형 보러가서 꼬박꼬박 졸아도
세액을 공제해 주면서(국가의 존립과 직결된)이걸 안 해 준다면 말이 되겠나.”
이 제도의 정착에 필요한 게 있다면.
“수만명의 직원이 일하는 대기업이 나서야 인구 증가 효과가 나타난다. 정부가 기업의 부담
을 덜어줘야 한다. 문화예술. 교육 분야처럼 출산 및 양육분야에서도 세금을 깎아주는 게 필
요하다.”
정부에 재정 부담이 클텐데.
“정부와 기업이 적정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인구 증산 문제는 국가 백년대계를 좌우한다.
적어도 여야가 궤를 같이하는 부분이다. 정치인들도 적극 나서야 한다.”
생각하는 다른 출산장려책이 있나.
“장남, 차남이 군대를 갔다면 셋째는 군 복무를 면제해 주는 것도 방법이다. 대학 진학이나
취업 때도 다자녀 가정에 특별 가점을 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김 회장은 이 가족수당 지급 방식을 잘 아는 국회의원에게 소개했다. 좋은 의견이라고 동감
을 표시한 그 의원은 얼마 후 육아수당을 증액 지급하는 기업에 한해 법인세를 10퍼센트
한도 내에서 감면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고 알려왔다. 김 회장은 “이 법안이 빨리 국
회를 통과해 많은 기업들이 동참하게 될 날을 기대해봅니다”라면 웃었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어깨동무 경영’
김 회장은 요즘 ‘어깨동무 경영’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고 이를 실천하는 데 애쓰고 있다. 어
깨동무 경영이란 한 쪽이 일방적으로 도와주거나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상생의 동
반자’로서 손을 맞잡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성숙한 기업의 책무인 사회공헌 활동도 당연
히 포함된다.
김 회장은 2007년 6월 DSD삼호건설이 소유한 수원시내 인계동 중심가의 센터빌딩 강당에
5억원을 투자, 리모델링을 거쳐 소공연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삼호아트센터라 이름 지은 350
석의 이 공연장은 지역민들을 위해 월2회 무료로 공연을 벌인다. 서울에 편중된 격조 높은
공연을 수원지역 시민들이 편안히 볼 수 있도록 준비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삼호아트센터에서는 ‘WMF 음악친구들’이란 전속 출연진이 매주 공연을 한다. 또 이들은 양
로원, 사회복지관, 아주대병원 등 곳곳의 사회복지시설을 찾아 문화예술을 접하지 못하는 시
민들에게 공연을 펼치며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에는 국제 종합전시장 킨텍스(KINTEX)가 있다. 킨텍스 정문 입구에 심어진 조
경수목이 외래종인 기리다 소나무여서 본 건물경관 및 전시장의 한국적인 조형과 조화를 이
루지 못하고 있었다. 김 회장은 고양시에 한국산 소나무를 무상 기증하여 예쁘게 식재해 주
었고, 그 장소는 킨텍스 전시장과 잘 어울리는 한국적인 소나무 군락조경 공간으로 재탄생
하게 되었다. 지금 그곳은 킨텍스에 오는 사람들이 단골로 사진 촬영하는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김 회장은 부동산 개발 사업을 펼치면서 한번 맺은 시공사와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고 있
다. 10년 넘게 아파트 시공을 한 회사에 맡겼다. 시행사는 파트너가 일류회사라서 품질에
신뢰를 갖고 맡길 수 있어 좋고, 시공사로서는 경쟁을 거치지 않고 일감을 따낼 수 있는 윈
-윈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신뢰를 쌓다 보니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눈빛
만 봐도 알 수 있고, 상대방을 재거나 의심하지 않고 방향만 결정되면 바로 공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김 회장에게도 아찔한 위기는 있었다. 2007년에 경기도 일산에서 펼쳐놓은 대규모 주택사업
이 때마침 찾아온 국제 금융위기와 맞물렸다. 금융권의 돈줄죄기와 경기침체로 인해 상당
규모의 미분양이 발생했다. 이 미분양 사태에서 벗어나는 데 그 동안 함께 했던 시공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시공사는 물론 그룹 계열사가 적극 나서 미분양 아파트를 사주는 바람
에 금융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어깨동무 경영 철학이 빛을 보게 된 예 중의 하나”라고 김
회장은 말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어깨동무 경영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김 회장은 역
설한다. “‘그대 없이는 못살아’라는 노래가 연인 사이에 러브송을 넘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 경영 현장에서 널리 불렸으면 하는 바램” 이라고 그는 말했다.
김 회장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도고 헤이하치로(1848~934)라는 인물이다. 1905년 러일전
쟁 당시 무적이었던 러시아 발틱함대를 괴멸시킨 일본 해군 총사령관이다. 동해에서 일본
함대를 이끌고 발틱 함대 38척과 싸워 35척을 침몰시키는 전과를 기록한 명장이었다. 러일
전쟁 승리 이후 한때 일본천황보다 대중적 인기가 높았으나, 정계 진출을 끝까지 사양하며
군인으로서 절개를 지켜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군신(軍神)으로 불리고 있다.
한국인들이 대부분 싫어하는 일본 장군을 김 회장이 좋아하는 큰 이유는 그가 이순신장군을
가장 존경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가 사쓰마 지역의 사무라이에서 해군으로 변신한 것도
이순신 장군과 같은 인물이 되고 싶다는 열정 때문이었고, 러일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쓰시
마 해전을 앞둔 전날에는 이순신 장군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쓰시마 해전
승리 이후<런던타임스>기자가 나폴레옹 함대를 격침한 영국의 넬슨 제독과 비교하자 “넬슨
과는 비교가 될지 몰라도 이순신장군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급에 불과하다”고 했던 그의 말
은 지금도 유명하다.
김 회장은 도고 헤이하치로가 지난 웅대한 기상과, 편협한 국수주의를 벗어던진 높은 안목
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 자신도 도고 헤이하치로 처럼 넓고 깊은 철학과 세계관을 갖고 싶
어 한다.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움츠러들지 않고 세상을 향해 과감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받은 것을 돌려줄 때가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살고 있다.
마크 트웨인이 어느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했던 말을 김 회장이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되돌려준다.
“지금부터 20년 뒤 여러분은 잘못해서 후회할 일보다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일이 더 많을
겁니다. 그러니 밧줄을 던져버리십시오. 안전한 항구에서 벗어나 멀리 항해하십시오. 탐험합
시다. 꿈을 꿉시다. 발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