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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항인 나폴리기행
정 수 현
나는 오래전 나폴리(Napoli)를 한 번 다녀왔다. 그때가 1994년이니 지금으로 치면 21년 전이라 그 사이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해버려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12월 7일 겨울철이라 하나 로마는 우리나라의 봄철과 같은 포근한 날씨였다. 아침에 관광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이탈리아반도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 옆에 펼쳐지는 푸른 초원과 밭들이 있는가 하면 올리브나무를 심은 땅이 계속 이어졌다. 저 멀리 시야에 들어오는 야산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펼쳐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감상하며 3시간 후 나폴리에 당도하였다. 로마에서 190㎞ 떨어진 캄파니아주의 주도인 큰 도시였다. 나는 문헌이나 말로 들어왔던 나폴리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어 기쁨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산천을 두루 살펴보았다.
동쪽에는 베스비오산(△1,277)이 우뚝 솟아 그 지맥이 서쪽으로 흘러 나폴리 북쪽을 감싸 안았고 그 구릉이 점차 낮아지면서 고요한 바다인 나폴리만에 이르고 있다. 그 산맥이 밑으로 흐르면서 경사를 이루고 계단식 농장을 형성하였다. 그 전원에는 빨간색 지붕을 한 건물이 있었고, 주변에는 귤나무나 올리브나무를 간격을 두고 식재해 놓았다. 귤나무에는 손주먹보다 조금 큰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렸고, 올리브나뭇잎은 회색빛을 띠고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올리브나무는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노아의 방주에서 내보낸 비둘기가 올리브잎을 물고 돌아왔기에 홍수가 멎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게 바탕이 되어 올리브잎이 평화와 안전의 상징으로 되어있다. 열매 자체를 식용으로 하며 과육에서 짠 기름이 바로 올리브유인데 식용으로 많이 애용하고 나무는 질이 좋아 가구용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자라지 않고 있었으나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후 그리스에서 기증한 묘목이 제주도에서 잘 자라고 있다.
평탄지에서 바닷가까지는 고층빌딩이 즐비하게 지어져 있었고, 해변에는 5㎞ 정도 되는 잔잔한 모래사장이 활처럼 꾸부러져 멀리멀리 까마득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아직 때가 일러서인지 비키니 차림을 한 해수욕객은 없었고 고요한 물결이 모래사장을 덮쳤다가 스르르 빠져나갈 뿐이었다. 수십 마리 떼를 지은 가마우치들이 까악까악 소리를 지르며 활활 날아다녀 그것으로도 진풍경을 이룰 만 하였다. 그러므로 브라질이 리우데자네이루, 호주의 시드니와 더불어 세계 3대 미항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마침 시간이 조금 남았으므로 언덕으로 올라서 가로를 산책하였다. 가로수는 상수리나무였고 나무가 곧게 자라며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수종과는 다르고 보기도 좋았다. 열매는 우리 도토리와 비슷하였다. 마침 리어카 행상이 착색이 잘 된 오렌지를 팔고 있어 2㎏에 6리라(한화 3,000원)를 주고 사먹어 보았더니 수분은 많으나 당도는 제주산 온주밀감에 미치지 못했다. 높은 언덕에서 나폴리 일대를 관망한 후 버스를 타고 동남쪽으로 달려 폼페이(Pompei)에 있는 베스비오 폼페이식당에서 빵과 국수로 된 오찬을 하고 있었다. 노인 2명이 젊은 아코디언 악사를 대동하고 와서 산타루치아 등 민요 3곡을 부르고 바구니를 내밀고 돈넣기를 바랐다. 일행중 몇몇이 소중한 달러를 내주었다. 그 중 산타루치아는 잘 알려진 민요였으나 발상지에 와서 들으니 그것도 나름대로 감회가 새로웠다.
폼페이에 있는 베스비오(Vesuvio) 화산폭발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 참사의 현장을 직접 눈으로 살펴보게 된 게 큰 보람이었다. 서기 78년 8월 24일 정오에 1,277m의 베스비오화산에서 대량의 부석(浮石)과 화산재가 분출하여 폼페이를 매몰시켰다. 이로 인해 2만명이 거주하던 도시에 3,000명이나 매몰되어 버렸고, 1800년에 와서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다. 일부 시신이 석회처럼 굳어져 화석으로 되어 있고 당시의 생활도구가 전시되어 있었다. 더불어 당시 주택, 광장, 술집, 빵집, 사창가, 목욕탕, 상수도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초반으로 이곳에는 매우 선진화된 토목, 건축기술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 그때의 퇴폐풍조도 엿볼 수가 있었다. 특히 부호 베티우의 호화로운 저택이 그대로 남아있었으며 대문 옆에는 남자의 나체화를 붙여놓고 이에 흥미를 느끼는 방문객을 댁내의 스마일방으로 안내해 주었다고 한다. 나도 들어가 그 방을 쳐다보니 춘화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창가가 술집과 함께 공존하고 있었으며 그 대표적인 곳에 이르면 춘화가 붙여져 있어 퇴폐를 조장하였다. 여기서 발생한 성병을 치료할 병원흔적도 찾아볼 수 있었으니 병주고 약주는 형태였다. 이 유적지를 보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인간의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언젠가는 쇠퇴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후 3시 폼페이를 나온 우리 일행은 남으로 달려 긴 터널 2개를 넘으니 세이노(Seino) 지역이었고, 도로 우측은 바다인데 100여미터 이상되는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약간 있는 나는 그것을 쳐다보았다가 오금이 바싹 조려왔고 현기증이 일어났다. 만약 떨어지면 몸이 가루가 된다는 공포에 자동차좌석을 양손으로 붙잡고 눈을 감고 있었다. 차가 추락하며 세상만사 끝나는 것인데 손으로 좌석을 붙잡은들 살아날 수 있으랴마는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다고 저절로 그렇게 우스운 행동을 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그 벼랑위 도로를 통과한 버스는 고개를 내려와 올리브나무로 만드는 가구점 앞에 멈추었다. 나는 후하고 한숨을 내려쉬고 그곳을 다시 쳐다보았다. 도로위쪽 야산은 전부 올리브나무가 우거져있고 해안절벽에는 건물이 한 동 지어져있었다. 발을 헛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데 날개도 없는 인간이 왜, 이렇게 간이 큰 것일까? 이탈리아 사람은 목숨이 하나가 아니고 두 개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관광버스를 타고 얼마 안 가서 나포리만의 남안에 위치한 작은 도시 소렌토(sorrento)에 이르렀다.
얼핏 시내를 둘러본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오던 길로 반전하였다. 우리들은 민요 ‘돌아오라 소렌토로’로를 합창하면서 고색창연한 도시 로마로 향했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고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간 그대를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무더운 폭염
정 수 현
폭염(暴炎) 또는 폭서(暴暑)라 함은 사전적 의미로는 날씨가 몹시 더운 상태를 뜻한다. 2015년에는 비가 적어 저수지가 바닥이 나고 모내기를 제대로 못해 농촌에서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5월말부터 33도 넘는 폭염이 닥쳐왔으나 습도가 낮아 보송보송했다. 그러다 7월 27일부터 평균 낮최고기온이 32.7도로 평년보다 2도가 높게 연일 폭서가 계속되고 있다. 8월에 들어서는 전국 대부분 지역에 연일 폭염특보가 내려졌고 8월 7일 경북 안동·의성·영천의 기온은 39.5도까지 치솟았다. 그러다보니 8월 7일 현재 닭, 오리, 돼지가 50만 마리가 넘게 죽었다. 이런 후끈후끈한 더위는 낮에는 물론이고 밤에도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은 열대아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럴 때 단칸방에서 한가족이 거주하는 분들은 하루하루 지내기가 이만저만 고통이 아니다.
나도 이제는 조그만 집이 있어 사회에 늘 감사드리고 있지만 70년대까지는 남의 셋방을 전전하며 힘든 나날을 살아가던 한때가 있어 그때의 고역을 짐작할만한 하다.
그러다 오늘날 문명의 이기가 고도로 발달하여 더위를 이겨내는데 도움을 주는 선풍기, 에어콘 등 가전제품을 사용하고 자주 사워를 하며 피서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팔자 좋은 사람이 이야기고, 각종 일터에서 막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전신을 땀으로 목욕을 하며 힘든 일을 하고 있다. 참으로 그 땀방울 하나하나가 바로 생산으로 이어지니 근로자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아무튼 작년보다 금년이 더 무더워지는 느낌이 들고 봄과 가을은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이 길어지는 기후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그 한 예로 과거 제주도에서만 생산되는 귤이 육지부 남해안지방에서 재배되고 제주바다의 특산이었던 자리돔도 경북 독도부근까지 북상하였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도 어느날에는 대만이나 오키나와 같은 아열대지방이 되어버릴 것 같다.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된 것 원인은 우리가 주연료로 사용하고 있는 석탄·석유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가 지구를 이불처럼 둘러싸 온난화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구의 온난화는 결국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려 바닷물의 수위가 상승되고 있다
미항공우주국(NASA)과 미국립설빙자료센터(NSIDC)가 2005년 9월 28일 발표한 바에 의하면 북극의 빙하는 이르면 55년뒤 사라진다고 하였다.(2005. 9. 30 동아일보)
빙하가 녹아내리면 그곳에서 서식하던 북극곰과 바다표범이 서식지을 잃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보다도 더 심각한 재앙은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남태평양의 작은 섬인 ‘투발루’와 인도양의 ‘몰디브’ 섬이 물에 잠기며 점점 가라앉고 있다. 그리고 노르웨이 ‘할뵈위아’반도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한쪽은 육지와 연결되었으나 이제는 방하가 녹으면서 섬으로 변하고 말았다.(2014. 7. 7 조선일보)
또한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하치한 베네치아(Venezia)는 영어로는 베니스(Venice)라고 부른다. 이 도시는 베니스 국제영화제와 세익스피어 작품인 베니스의 상인으로 널리 알려진 도시다. 이 도시는 118개의 섬을 400여개의 다리로 연결한 항구인데 역시 해수면 상승으로 침수위협을 받고 있다.(2015. 2. 9 동아일보)
이렇게 온도가 높아져 지구는 지금 몸살을 앓고 있으므로 각자 생활을 해 나가면서 에너지절약을 생활화하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각설하고 나는 최고 기온이 50도까지 오르고 연평균강수량은 20~30㎜에 불과하여 거의 비를 구경 못하는 이집트의 룩소르(Luxor)에서 찜통같은 더위를 맛본 일이 있었다. 룩소르라는 도시는 고대 유적이 많이 남아있으며 옛이름은 테베(Thebes)라고 칭하였다. 나일강변에 있고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730㎞ 떨어진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며, 거기서 더 남쪽으로 200여㎞를 내려가면 홍수를 조절하는 거대한 댐인 아스완(Asuan)에 이른다. 룩소르는 나일강 동쪽에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카르나크신전, 룩소신전 등이 있었다. 나일강 서쪽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고 죽은 자의 땅으로서 파라오(Pharaoh)의 무덤인 피라미드가 62개나 모여 있는 왕들의 계곡이 있었다.
파라오는 대궐 또는 큰집이라는 뜻으로 왕을 지칭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전하(殿下), 각하(閣下)라는 호칭을 사용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아멘호테프 3세의 석상, 귀족들의 공동묘지인인 테이르 알바하리계곡, 하트셉슈트의 장제전(葬祭殿) 등이 있었다.
나는 일행을 따라 약 2㎞의 사막길을 걸어 올라갔다.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쨍쨍 내리 쬐이는 햇볕을 받으며 노란색 석회암으로 형성된 능선이 빙 둘러있었다. 그 밑을 뚫고 들어간 투탕카아문(Tutakamun, BC 1370~BC 1352, 재위 BC 1361~BC 1352)왕의 피라미드 속으로 한발한발 내디뎠다. 연도(羨道)를 따라 드러가 현실(玄室)내의 관(棺)과 황금마스크, 그리고 의자, 전차, 항아리, 장신구 등 왕의 생존시 궁정에서 사용했던 물품들을 꼼꼼하게 살피다보니 거기에 정신이 팔려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투캉카아문왕의 재위연대가 기원전 1,350년대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단군기원이 기원전 2,333년이고, 기자조선 건국이 기원전 1,122년이므로 단군조선 후반기에 이런 찬란한 문화유산을 만들어 내었다.
나는 그것을 상상하며 크게 감탄을 하였다. 그렇게 관람을 마치고 나와 보니 우리일행은 간곳이 없고 나 홀로였다. 햇볕은 살결을 태울 정도로 강렬한데 그 날은 40도 정도로 기온이 오른 것 같았다. 나는 오던 길을 뜀 반 걸음 반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남녀 모두 반바지에 색안경을 낀 간소복 차림의 백인들을 헤치며 내달려 2㎞ 가까이 다다르니 우리일행이 보였다. 이제는 안심이다 하고 후~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옷은 전신에 흐른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불볕속에 폭서를 실감하였다. 그 후에는 왜만한 혹서는 룩소르에서 겪었던 더위를 회상하며 참아낼 수 있는 인내력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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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수현 선생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전북 신문학 제8집에 실어드리겠습니다.
네^^* 수필만 실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