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 실존에 이르는 삐삐 소녀와 열 살 즈음
박용진
ㅡ 최정란, 『독거소녀 삐삐』 상상인2022.
ㅡ 김광숙, 『동인동 분꽃 골목』 만인사2021.
우리는 실존하고 있다. 먹고 만지고 생각하는 실존의 상태가 분명하다. 그러면 실존이란 무엇인가. 사물의 본질이 아닌, 그 사물이 존재하는 그 자체를 실존이라 한다. 이전에는 실존이라는 말이 모든 것이 신에 의해 피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인간의 본질을 규정함에 있어서의 실존이란 인간이 언제나 스스로 자기의 존재를 규정하는 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의미한다. 존재의 실질적인 상태를 실존이라 하며 존재는 본질로서 규명이 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누구든지 충분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감각하는 이 모든 게 실제라고 규명 짓기에. 그러면 실존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스스로 인식하는 실존은 비실존을 포함한다. 실존은 비실존을 함께 인식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실존이 되지만 대칭구도의 비실존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함에 따라 삶은 늘 불완전하다고 여기며 이에 수반하는 불안의 원인이 된다.
우리는 실존함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인식 감각의 오류에 빠져 살고 있다.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뇌가 인식하기까지의 시간 차이만 보더라도 우리가 인식하는 실존은 현재가 아닌 과거인 것이다. 실제라고 여기면서 비실제의 동시성의 세계가 근본이 되는 이질적인 속성의 여기가 우리 세계인 것이다. 그렇기에 본인의 의사와 다른 시행착오는 늘 따르게 마련이어서 삶은 피폐해지기도 하며 과거에만 머무는 인식과 작용은 불완전한 실존이라 할 수 있다.
누구든지 나이가 들거나 경험과 현상에 대해 일정한 사유를 거치면 어느 정도의 '앎'을 가지게 된다. 특별한 교시가 없어도 나름 성찰에 가까운 행보를 보여준다.
시인은 실존과 비실존의 경계를 거니는 사람으로서 스스로를 탐구하는 속성이 강한 서정시나 만상의 근본을 찾는 사물시를 통해 일체 현상을 통찰하는 이들이다.
최정란 시인의 『독거소녀 삐삐』와 김광숙 시인의 『동인동 분꽃 골목』은 삶이 가져오는 의도와 의도하지 않은 경험의 불편에 대한 기록과 이를 바로잡았거나 바로잡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실존은 과거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과거에 근거를 둔 인식 작용으론 실존이라 부르기에 완전하지 못하다. 최정란 시인과 김광숙 시인의 시집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난 기억의 파편에 초점을 맞추지만 머물지 않는다. 이미 완결에 다다른 현재의 충일한 실존적 자기 확인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무수히 많은 거절로 이루어진다 내일 사과로 거절당하고, 오늘 오렌지로 거절당하고, 어제 레몬으로 거절할 것이다 거절이 관계를 우롱한다 거절이 관계를 개관한다 지속될지 끝날지, 거절 이후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삶을 거절해보기 전에는 삶을 모른다 꽃을 거절할 수 없어 열매를 거절한다 달을 거절하지 않을 예정이므로 나는 해를 모른다 삶도 나를 모를 테니, 비긴 걸까 너를 거절할 수 없어 오늘도 나는 나를 거절한다
ㅡ 「거절학 개론 ㅡ 이 필수 교양서의 목차를 지운다」 전문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삶의 외연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질세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요구에 대한 수용과 이해가 불가피하다고 하겠지만 개인의 잣대부터 공동의 성취를 향해서는 어쩔 수 없이 '예스'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일성을 내세운 자기희생이라고 여기는 것도 인식의 오류에 해당한다.
수잔 뉴먼은 『거절의 미학』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거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의하기는 쉽다. 대충 박자를 맞춰주면 어긋나기 쉬운 관계성도 잘 유지할 수 있고 불필요한 논쟁도 피할 수 있다.
1960년대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는 3계 미분방정식을 풀던 중 소수점 셋째 자리 미만을 생략했더니 엉뚱한 기상 예측이 나와서 이유를 찾아보니 초기의 조건을 다르게 입력 했을 때 예측되는 기상 상태가 아주 큰 차이가 난다고 했다. 미세한 오차는 다시 오차를 낳고 오차는 오차를 계속 낳는 식의 연쇄효과로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타자의 요구에 대한 대응은 물론 스스로도 길들여야 함을 「거절학 개론」은 분명히 요구하고 있다. 잘못된 의견에 대해 거절함을 온전하게 지켜내긴 어렵다. 정당한 거절을 하지 못하는 상태는 거절하지 못한 다음의 상황은 어떤 미래를 불러올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예측 바깥이 도래할 수 있음은 대충 알 수 있다. 나중에 다시 훼손과 정정의 과정을 거쳐도 숱한 파편을 치우긴 힘이 들고 작은 습관과 행동이 로렌츠의 나비효과처럼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니까.
이렇게 막살아도 좋을까요 이번 생은
아무도 웃긴 적 없는 거울 속 견습광대처럼 이를 물고 울게 돼요
일 막은 언제 지나갔을까요
이번 생은 몇 막으로 구성되어 있을까요
모르지만
내 배역은 막, 한 글자가 세로로 길게 쓰여진
막국수 간판처럼 막막해요
이번 생은 더 자주 막막해요
마치 여러 생을 살아본 것처럼
어느새 막막하고 거듭 적적하고 결국 막막해요
그림자는 적막한 그늘에서 고요히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을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암막이 드리워진 막막한 시간 속에서 태어났을까요
조금 더 어둡게, 조금 더 머뭇대며
길은 길로 통해있다는 것을 믿었을까요
방향만 맞추어 걸었는데 막다른 길이었을까요
스며들 것처럼 막연히 납작하게 바닥에 귀를 붙이고
아무와도 얼굴 마주치지 않아도
웃기게 될 것이라고 웃게 될 것이라고
막차에 올라타듯 배역을 맡기로 했을까요
사람들은 더 부지런히 떠나고
천막을 걷고 가축 떼를 몰고 사람들이 빠른 배경음악처럼 흘러가요
메마른 막이 올라요
거대한 벽을 따라 난 막다른 길을 오래 걷는 배역 얼마나 더 걸어야 할까요
이 막막한 길을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 맡은 배역의 무대, 사막이라는 막이 모두 내려갈까요
다른 배역이 있기나 할까요
웃기지만 않아도 된다면
이 역할은 정말 잘할 수 있어요,
눈 뜰 때마다 새로운 양막이 닫히고
잠든 사이 간신히 서막이 열려요
막과 막 사이에서 죽고
막과 막 사이에서 태어나기를 반복하다가
막과 막 사이에서 다시 깨어나지 않는 날이 오면,
아무도 웃지 않는 농담처럼
마침내 서러운 막막광대가 완성될까요
ㅡ 「막막광대」 전문
〈아르쉬투룩 대왕〉은 프랑스의 극작가 로베르 뺑쥐의1961년작으로 최근 대학가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삶이 무의미하다고 여긴 늙은 왕이 신하와 역할 놀이를 통해 죽음과 고독, 정치인에 대한 해학적 풍자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감을 표현하여 눈길을 끌고 있다. 마치 시인의 광대를 붙인 네 편의 시작품과 일치하는 거 같다.
때로는 막막해진 삶의 상황에 맞닥뜨리면 막살아오지 않았는데 왜 막에 부딪힌 동물처럼 막막해져 버렸나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하고 생각 없이 막 행동하는 게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생을 연극 무대에 오른 배우로 바라보라고 한다. 무대에 서 있는 우리를 배우이면서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관객의 입장으로 쳐다보라고 하는 게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제3자적 시선으로 바라보면 평소 알 수 없었던, 희미했던 앎이 선명해지며 냉정해진다.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일 막은 언제 지나갔을까요" 살아가면서 의지와 다른 타자의 반응과 이에 따르는 결과물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인생 배역을 맡은 화자는 일 막이 언제 지나갔냐고 묻지만 실은 이를 악 문 이 상황이 어서 지나가길 바라고 있다. 결국은 막막해진다는 니힐리즘적 언술에서 "막과 막 사이에서 다시 깨어나지 않는 날이 오면," 으로 장면 전환이 되고 있다. 때론 막장과 같거나 막에 부딪혀 좌절하는 이들을 보며 얻는 간접경험은 실제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효과를 얻는다. 막과 막 사이를 오가는 하루 중 감정 변화에 나 혹은 우리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다시 깨어나지 않는 날이라 함은 우리라는 공동이 낳는 막막해진 상황에서 나약하게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 깊은 화자의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광대에 대한 언급이 많다 눈물광대 회의광대 위임광대
"회의주의자답게 많은 회의에 참석하고 많은 회의를 회의한다" "사회는 왜 이렇게 많은 회의를 해야 굴러가는 것일까" "눈덩이처럼 굴려 눈사람에 도착할 것도 아니면서"(「회의광대」) 시제에서 짐작하듯이 '회의'라는 말은 많은 의미가 있다. 여러 사람이 모여 논의를 한다는 의미 외에 부정적인 의심과 판단을 보류, 중지한다는 의미가 있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논의와 논쟁으로 때로 이 사회는 어디까지 가버릴지 불안해지기도 한다. 다른 이데올로기와 다른 종교로 대립각을 세우는 현 세상에 깊은 회의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삶에 리허설은 없다는 진실을"(「눈물광대」)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차가운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가 사는 이 무대는 무너져 버릴 것 같다.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고 도와주지도 않는다. 정말 무대 같은 이 세상은 막막하기만 한 것일까.
"전체 의견에 따르겠어요" "의견 없는 것도 의견" "대세에 따르는 것으로 의사정족수를 채우지" (「위임광대」) 개인과 개인, 단체들과의 집단 갈등으로 우리 사회는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세대 간과 남자와 여자, 노사분규 등 모이기만 하면 다투는 기분이다. 논쟁은 벌여봐야 남는 것은 상한 감정 뿐이다. 시인은 광대에 대한 시를 네 편 썼다. 처음 「눈물광대」부터 무대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 회의감에 젖기 쉬운 사회를 지나 전체 의견에 따르겠다는 「위임광대」까지 순서대로 우리의 삶을 나열한 게 눈에 띈다. 유랑하면서 배우고 깨우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게 사람의 본모습이다. 디오라마 앞에서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배우처럼 때론 의도적으로 어리숙하게 웃기는 광대가 필요한 요즘이라는 전언이리라.
ㅡ 상략 ㅡ
망치질 소리 한 점 없이
어둠 속으로 희고 튼튼한 기둥을 박아 나가는
무를 믿은 일
ㅡ 중략 ㅡ
그 후로는 모두 무가 한 일
ㅡ 「무」 부분
"숱이 많은 갈기를 풀어놓고" "무는 고요하네" 무無는 쇠꼬리 같은 장식물을 들고 춤추는 모습을 나타낸 글자로 이후에 뜻이 바뀌어 ‘없다’를 뜻하게 되었는데 '없다'는 것은 있기 때문에 없다는 개념이 존재하게 된다. 숱이 많은 갈기에서 바쁜 일상, 해야 할 일이나 많은 업무처리에 따르는 갈기처럼 붙은 부담이리라. 삶의 외재적 자극에 반해 어둠 속으로 깊게 밀고 나가는 흰 무는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결실을 맺어나갈 뿐이다.
무無와 공空의 차이는 무엇일까. 시인은 먹는 무와 무無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공空의 개념도 떠올리게 한다. 무無와 공空은 '있음'에서 비롯하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있지 않고서는 없음과 비어 있음은 존재할 수가 없다. 무는 물질을 비롯해서 일체의 것이 완전히 없는 상태를 뜻하는 포괄적 개념임에 반해 공은 텅 비어 있음을 뜻하며 물질이 있는 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시인이 말하는 무는 밭작물의 무와 없는, 없어짐의 무無를 말한다. 부가적인 공空의 개념이 따르는 것은 "어둠 속으로 희고 튼튼한 기둥을 박아 나가는"에서 유추할 수 있다. 모두 비워야 차를 부어 채울 수 있는 찻잔처럼.
"그래도 무는 아무도 무어라 무어라 불평하지 않아요" 무희들 제대로 자리를 잡고 뿌리가 깊어지면 무청 머리채처럼 흔들리지 않고 불평도 없다. 어지간해서 뽑히지 않음은 탄탄한 자존감이리라.
'무'에 대한 이야기는 실존의 이유에 대한 선험적 제시가 된다. 무와 무無의 맛을 한입 먹어보자. 알싸하다.
고기의 꼬리라고 단정 짓는다면 가슴의 비늘일지도
네모의 공간에 삐죽이 내밀고 있는 이 빠진 세 개의 칼날 다른 방향을 향해 있다
우리는 서로의 일부를 보고 단정 짓지는 않는가
내가 본 너는 나의 일부
무디었으나 날카로운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고
너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했다고 믿은
물에 비치는 풍경만 본
ㅡ 「편견에 대하여」 부분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은 인식 오류의 대표적 생각이다.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해야 한다고 평생 배워왔지만 우리는 정말로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며 사는 것일까.
현대사회는 물질문명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나와 너라는 분별심도 커져왔다. 이에 따라 자신의 신념을 타자에게 강요하게끔 되는 확증편향과 편견도 심해진 게 사실이다. 모든 업무를 빠르게 처리해달라는 시간적 속성과 변화를 요구받는 시대에 경험의 축적과 감각기관의 작용은 더욱 간결해져 왔으며 줄임말의 확산과 사람들의 대화는 분절되기 쉬워져 삶의 궤적은 한정적으로 축소되었다. 적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이기도 하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생활은 편향과 편견의 남발로 시행착오와 오류가 넘쳐나서 갈등도 비례할 수밖에 없어졌다.
"우리는 서로의 일부를 보고 단정 짓지는 않는가" 넘쳐나는 미디어의 정보에서 서로의 진술과 입장에서 바라보고 판단하기보다 일방적 주장만으로 쉽게 물들어 사회의 혼란을 자주 야기해왔다. 그래서 기레기란 말이 생기기도 했지만 가짜 뉴스의 범람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려운 듯한 게 현실이다.
삶은 변화의 연속이다. 나이가 들든지 주변 환경이 바뀌더라도 변하지 않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공동체라는 명목 아래 대상에 대한 판단 주체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내적 봉합과 적응기를 가지게 되어 깊은 사유를 필요로 하는 결정력을 상실한 편견과 편향의 시각을 안타까워하는 시인이 떠오른다. 그 무엇에도 변하지 않는 자기 동일성을 견지할 것을 말하고 있다.
동인동 진골목 담벼락에
옥수수알 같이 붙어앉아
무서운 이야기며, 병원놀이며, 공기놀이며
진숙이, 말숙이, 명숙이
오금 저리던 숙이들이 있었어요
명숙이 엄마는 창백한 달빛 같았어요
그 애의 집은 빛이 적은 적산가옥
마당에 속좁은 분홍색 분꽃이 피어 있었어요
분을 내던 검은 씨앗 꽃의 멍울이었는지
분꽃 입술 오므리던 아침 명숙이 엄마는 떠났어요
난 서툰 편지를 쓰고 담벼락에 붙어 몰래 울었어요
진골목에 모여 놀던 숙이들은 흰 카라 소녀되어 떠나고
분홍꽃 필 아직 스무 살
엄마 있는 세상으로 떠났다는 전갈을 받았어요
흰 달빛이 진골목에 둥둥 떠다니고
분홍꽃이 담벼락에 붙어앉아 지고
우리들의 집은 진골목 분꽃 씨앗처럼 박혀 있었어요
ㅡ 「분꽃골목 ㅡ 동인동ㆍ1」 전문
시인은 대구 동인동 출신이다. 나고 자란 동네는 한국 전쟁 당시 비교적 폭격 피해가 적었으며 피란민들이 임시로 살았던 골목이 많은 동네다. 활동 반경이 제한적인 골목은 빛이 들기에도 한정적이어서 폐쇄와 은폐의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다니며 놀기에 좋을 수도 있는 공간이다. 다닥다닥 붙은 대문 앞에 서서 친구를 부르면 금세 달려 나와 병원놀이 공기놀이 무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니까.
명숙이네 집은 적산 가옥이다. 명숙이네 집에 빛이 덜 드는 느낌은8.15광복 이전까지 한국 내에 있던 일제나 일본인 소유의 재산이었다는 선입견과 몸이 좋지 않던 명숙이 어머니의 창백한 안색 때문이리라.
분꽃 골목은 시인에게 회한과 그리움의 다의적 공간으로 남았다. 담벼락에 붙어있던 분홍색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진분홍은 핏빛과 검은 빛이 혼합되어 슬픔과 우울감을 준다. 더군다나 일찍 떠난 친구의 기억은 분명 트라우마로 남아 시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좁은 골목에는 감각이 한정이 되어있기에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채송화 피던 집 ㅡ동인동ㆍ2」와 「나무의자 ㅡ동인동ㆍ8」에도 사라진 흰 얼굴의 소년과 돌아오지 않는 여덟 살 영이가 등장하고 있다. 골목과 안 집 정원에 핀 분꽃과 채송화가 시인의 기억에 자리 잡은 상징이 되는 것은 피었다가 지고 다시 피며 돌아오는 꽃에 반해 다시 만날 수 없는 아이들에 대한 아쉬움이 대비되기 때문이다.
골목은 좁은 공간이자 사이, 틈이 된다. 시인들은 이러한 경계에 늘 머물지만 골목은 벌어진 틈새와 현상에 대한 간극을 뜻하기도 한다. 김광숙 시인에게 있어 골목은 구조적 한계처럼 명확하게 자리 잡은 기억으로 시 세계 전반에 명멸하고 있다. 시인이 살던 시절의 골목엔 도로포장이 안된 곳이 많아 흙냄새와 비가 온 다음 질퍽한 바닥이었다. 담엔 유리조각과 철조망, 담벼락엔 낙서가 새겨져 있었으며 옆집 부부싸움 소리 누구네 집 합격 소식도 바로 들을 수가 있어서 골목 동네의 공간은 나름 다붓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친하게 지냈던지 그렇지 않았던지 아이들에 대한 기억은 수시로 출몰하고 있다.
“피에로가 공중 곡예를 했어요 줄을 놓고 허공으로 날아올랐지요 고요가 후 겨우 숨을 내쉴 때/"불이 났습니다" 안내 방송이 나왔어요/목공소는 까매져 있었지요” (「노을스케치 –동인동ㆍ5」) 재미있는 곡예를 구경하는 사이에 불이 나서 붉게 타오르다가 순식간에 검정 재만 남았다. 목공소는 화마와 함께 사라졌고 주변 아이들도 사라졌다. 사라졌기에 더욱 오래 남은 기억이 되었다. 불이나지 않고 이사를 하였다든지 잠깐 바쁜 세월 속에 멀어진 아이들이었으면 그다지 기억의 한편에 남지 않았으리라.
시의 세계는 기반이 되는 실재하는 세상과는 다르다. 사람마다 다양한 감각 체계와 대상이 되는 인식으로 구성되고 독자와 청자마다 해석이 다양하게 되기 때문이다.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보편적이고 외재적인 느낌 바깥에 있는 아플 수 있는 기억에 대해 멸실을 선택하기 대신에 시인은 분꽃과 채송화, 목공소의 화재는 개별성이 된 붉고 검은 이미지에 시 고유의 불멸성을 부여하며 실존적 층위에 머물게 한다.
안개가 바다처럼 깊어지며
길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길 위에 서 있는 모든 것이 홀로 갇혔다
흐린 하늘이 서서히 푸른 빛을 띠고
드러나는 비에 젖은 붉은 길
까마귀 떼 까아악 까아악
붉은 나무 위에 쌓이고
야윈 바람에 고사목은 생을 닮아간다
새소리가 멎고
사랑이 무게가 되고
숲은 깊어지고
ㅡ 「저물오름」 부분
평정심을 잃어가는 사회다. 분노와 만성적 화병으로 묻지 마 폭행과 방화, 목적 방향이 불분명한 비난과 항로를 잃은 향방과 도덕과 윤리를 상실할 것 같은 분위기의 확산은 불안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짙은 안갯 속 불길한 까마귀 떼에 길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실의 시대엔 타인의 소리를 잘 듣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완곡한 자기주장과 왜곡이 된 의사전달에 대한 지적도 귀에 담으려 하지 않는다.
시인은 평생을 교단에 서있었다. 타인을 가르친다는 것은 단순한 가리킴(안내)이 아니다. 딴지를 거는 행위에 대해 극한에 다다른 인내의 한계를 느꼈을 것이고 학생과 학부모, 상급 교육 관청의 시선을 견디며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여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고요에 머물기를 선택했다. 지난 감정의 부스러기인 쓸쓸함이 수반되는 적요에 비해 고요는 완결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밤의 장벽이 내리기까지" "고요의 저녁은 금방이다" 고요와 장벽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의 다음은 식어버린 탄 재와 해소하지 못한 장벽만이 남는다. 펄펄 끓는 현실 세계는 시인에게 있어서 고운 노을일 뿐이고 밤의 장벽이 둘러 쳐지더라도 고요에 머물 뿐이다.
"바다소리길 패이고 돌아갈 수 없는" "붉은 바다노을이 요동치고 있다" (「바다노을」) 시인의 시집 동인동 분꽃 골목에선 바다와 노을이라는 알레고리가 자주 등장한다. 바다는 쉼 없이 밀려오고 밀려가고 때론 거친 폭풍을 몰고 오기도 하는 예측하기 힘든 상황을 나타내고 있고 바다를 바라보는 시인의 뒤로는 물질세계의 파고가 몰아치지만 시인은 가운데 있음을 선언한다. 해변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것은 세파 사이로 위치한 골목에서 구김살 없이 뛰놀던 시절과 의미가 일치한다. 뜻하지 않은 일이 도래하더라도 마치 소녀시절의 골목과 경계를 거닐면서 관조하는 고요 그 자체가 된 시인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최정란 시인의 『독거소녀 삐삐』 와 김광숙 시인의 『동인동 분꽃 골목』 에는 흥미롭게도 만화를 보는 소녀가 공통으로 등장한다. 최정란 시인의 만화소녀시대와 김광숙 시인의 "여름비 오는 저녁이면 만화책 끼고 달리던 그 소녀가 보여요" (「초여름 ㅡ 동인동ㆍ4」) 어린 소녀에게 있어서 만화는 새로운 세상에의 접속이다. 가정과 학교만의 좁은 반경 안에서 만나는 등장인물들의 우아함과 익살스러움은 색종이가 거울에 비친 현란한 형상의 만화경萬華鏡을 들여다보고 감탄하는 소녀를 떠올리게 한다. 이 시절의 각인된 소중한 추억은 평생 함께 하리라.
실존은 현존재가 과거를 토대로 자기의 고유한 존재를 선택하는 식으로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 아닌 일상적 자기로서 살아가는데 반해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만화萬化에 흔들림 없이 자기 동일성을 지켜나가는 것을 참 실존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발랄한 삐삐 소녀와 열 살 즈음의 순수함을 본질로 하는 두 분 시인들은 참 실존의 시인이다.
첫댓글 박용진 시인님 문학지에서 읽고 오늘에사 문협방에 실린걸 알았습니다
동인동 골목에는 동화가 있었지요 그러나 웃다가 웃다가 끝내 타버린 노을로 끝난 동화
그 이별의 내면을 선생님은 울림의 철학으로 서평을 써 주셨습니다
영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