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는 중국으로부터 닭이 도입되었다고 하며, 도입연대는 알 수 없으나 경주의 계림에 관한 전설 등으로미루어 보아 그
이전에 이미 닭을 길러 왔다고 생각된다.
1.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우리 나라에서 닭이 처음 길러진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해져 내려오는 문헌을 보면, 삼국지 한전(韓傳)에
'세미계(細尾鷄)가 보여지는데, 그 꼬리는 5척이 넘는다'라고 하였다. 또 해동경사(海東經史)에서는 '한양(韓羊) 한토(韓兎)와
한계(韓鷄)는 본래 韓에서 산출된 것이다' 라고 기록된 것이 있고, 홍이섭은 '조선과학사'에서 조선에서는 닭을 부를 때 '구구'
라 하고 그 이름을 닭(Talk)이라고 한 것(Sir. M. Monier-Williams, A Sanskrit English Dictionary)을 보면, 삼국시대부터 우리
나라에서 닭이 길러졌다고 생각한다. 1973년에는 경주의 천마총에서 우리 나라 재래종 알과 꿩알의 중간 크기의 계란이 발견되었고, 원자력연구소에서 방사선 탄소 측정결과 계란이 생산된 연대는 서기 340년으로 측정되었던 결과로보아, 그 당시 닭이 길러졌을 뿐만 아니라 계란을 귀중한 음식으로 취급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고려시대
고려 태조 왕건이 왕위에 오은 후에 말(馬)의 사육에 큰 관심을 기울렸기 때문에 양계는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으리라 생각되나,
충숙왕 12년 2월에 '닭, 돼지 같은 것을 기르지 않고 소, 말을 잡으니 어질지 못하기 짝이 없다. 지금부터는 닭, 돼지, 오리, 거위 등을 길러 제사용으로 쓰도록 하고 소나 말을 잡는 행위를 엄벌하라'한 것을 보면, 이때부터 닭이 제사나 손님접대용으로 이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축산에 관한 많은 기록 중에서 양계에 관한 기록을 보면, 세조 7년(1642년)에 경외(京外)의 대소가에서 모두 닭과 돼지를 기르도록 하고, 한성부와 지방의 관찰사로 하여금 그 사항을 해마다 보고토록 하라고 한 조항을 보면, 이때부터 양계를
국가정책적으로 장려하였다고 믿어 진다. 또한 조선박물지 양계편에서는 부화, 육추 및 종계의 선택요령을 기술하고있으며, 1908년에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양계전문서적인 가정양계신편이 발간되었다.
조선 말엽에는 일본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양계 및 가금의 품종현황을 기록하였는데, 이 내용에는 우리 나라 재래종 닭의 체중은
암탉이 800g, 수탉은 1200g이며, 연간 산란수는 70개 정도라고 하였고, 1910년 닭의 사육수는 2,796,259수였다.
이 당시에는 품종개량이 행하여지지 않았으며 생산된 계란은 식용으로 이용하였고, 닭은 시보용(時報用)이나 약용(藥用)으로
이용되었다. 1429년에 국가에서 편찬한 '농사직설' 에서 ' 종계의 선택요령, 육추, 사양법, 닭의 비육법(肥育法)과 속비법(速肥法),
그리고 알을 계속 낳게 하는법, 병든 닭의 치료법'등을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 우리 나라 양계기술이 과학적인 기초위에서 발전되었다고생각된다.
4. 해방 이후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우리 나라 양계산업이 많은 발전을 하다가 1950년 6.25 동란으로 인해 닭의 사육수가 720,000수로 격감하였다가, 외국에서 조직적으로 개량된 닭이 수입되면서부터 우리 나라의 양계산업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였으며, 오늘날의
기업양계로 발전되었다. 이와 같은 양계 발전과정을 닭 사육수와 사육규모의 변천, 사육형태, 관련산업의 발달 등을 고려하여
다음 같이 5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 부업양계시대
1900년 이전에는 일반 농가에서 닭을 놓아 기르는 방사 양계 형태로서 토종 재래닭을 10여수씩 사육하고 있어서, 자가생산과 소비 중심의 원시적인 양계를 하였다. 1901년부터 1940년까지는 부업양계시대로서, 1910년부터 횡반 플림머스록종, 나고야종,
백색 레그혼종 등 개량종이 일본으로부터 도입되면서 부업 또는 겸업양계형태로 발전되었다. 도입된 개량종은 조선농회를 통하여
시범양계농가에 보급되었고,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인공부화에 의해 병아리를 생산 보급하게 되었다.
2) 수난기 및 겸업양계시대
1940년부터 1960년에는 우리 나라 양계산업의 수난과 복구기로서, 세계 제2차대전(1940-1945년)과 6.25동란(1950-1953년)으로
식량사정이 악화되어 양계업은 몰락하게 되었으며, 1945-1950년 간에는 전국 닭 사육수는 1,000,000수 정도로 격감되었다.
1952년부터 11960년까지는 전후(戰後) 복구기간으로, 원조기관인 ECA로부터 백색레그혼종, 뉴햄프셔종, 로드아일랜드 레드종 등 종란 200,000개를 지원받아서 이를 확대 보급하였고, 민간 종계업자들도 종란을 수입하여 병아리를 생산 보급하였다.
일반농가에서는 적은 자본으로 사육할 수 있는 100수 미만의 소규모로 사육하는 양계농가가 성행하여, 1960년에는 닭 사육수가
12,000,000수로 급격히 증가되었다. 한편 전후 축산복구사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1952년에 중앙축산기술원이 발족되었고, 이어서
1956년에는 가금의 개량 증식과 기술향상을 위해 대전에 가금시험관이 설치되었다.
3) 성장기 및 전업양계시대
1961년부터 1980년까지는 우리 나라에 양계업의 성장과 전업화가 정착되는 시기이다.
정부에서는 축사물의 수요증가를 충족시키기 위해 증식과 보급이 용이한 닭 사육을 적극 장려하였다. 우량종계의 도입, 보급을
비롯하여 부족한 곡물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배합사료공장의 설치를 유도하는 등 기반조성을 적극 지원하였다.
6.25동란 중에는 재래종 닭이 거의 소멸되었고, 전후 복구사업시기에 개량종이 일시에 대량으로 도입 보급되어 전국적으로 단시일에 개량종으로 대치되었다.
1962년에는 한국가금협회가 설립되었고, 거의 같은 시기에 부화협회도 창설되었다.
1963년부터는 미국과 카나다에서 개량된 상업용 병아리가 도입되고, 1965년에는 상업용 종계가 수입되면서 국내종계 개량사업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브로일러 양계는 1965년 상업용 초생추가 미국으로부터 수입되면서 시작되었으며, 1970년부터 부로일러 양계와 채란양계로 분리되었고, 통닭구이와 프라이드치킨 등 간이식품이 이때부터 시판되었다.
1968년부터 육계용 도계장이 설립 운영되었고, 1977년에는 도계유통법이 발효되어 도계처리된 닭고기가 유통되었다.
1970년 초부터는 채란양계부문에 케이지 사육이 보급되어 사육수가 크게 증가되었고 양계시설도 사료, 급수, 환기, 점등관리가
자동화되었다.
4) 현대화 양계시대
1980년부터 2000년까지는 현대화 양계시대로서 발전되어 기업양계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 자료출처 : 선륭가금연구소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정말 시대가 좋아 이런 정보도 알수 있군요 ^^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