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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학교 사회(Deschooling Society)》
-이반 일리치-
* 번역된 인문학책을 읽을 때 마다 쌍욕이 나오곤 합니다. 그래서, 대학시절 문장수사를 가르치던 어느 교수님도 학생들에게 문법적 직관이 오염될 수 있으니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번역서를 읽지 말라고 타이르곤 하셨나 봅니다.
차라리 '전업' 번역가가 '전문'번역가 (교수)보다 낫다고 강유원 선생이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저도 지난 모임에서 이건 우리 글자로 되어 있지만, 우리말이 아닌 글쓰레기라고 울분을 토했더랬습니다.
하지만, 워낙 영어가 짧아 요 텍스트가 일리치를 해석하는데 초벌 도움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공부모임 동안 우리가 공부한 분량을 (아주 낮은 이해수준이나마) '우리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해볼까 합니다.
바빠서 전체를 다 못했는데, 이만큼 하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많은 학생들, 특히 가난한 학생들은 그들에게 학교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안다. (당연히 학교는 사는 데 필요한 배움을 얻는 곳이랄지 등등) 하지만, 정작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할수록 껍데기와 알맹이를 혼동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substance 라면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는 일이 process임) 학교화 되는 것이다. 일단 이처럼 껍데기와 알맹이가 뒤섞이게 되면, 새로운 가정법이 탄생한다.
열심히 노력할수록 좋은 결과가 생긴다!
단계적으로 밟아 올라가면 성공을 거둘 수 있다!
‘학교화된’ 학생들은 선생이 열심히 설명하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이 배우는 것이라고, 한 학년씩 올라가는 것이 배움이 늘어난 것이라고, 졸업장이 자신의 능력이라고, 뭔가 새로운 용어를 섞어 쓸 줄 알게 되면 그것이 유창한 언어능력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학교화된 학생들은 A가 B라고 착각하게 되는데, A가 process라면, B가 substance임).
그들의 상상력은 학교화된 탓에 (특정 가치를 추구하려고 생긴) 서비스를 가치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된다. (가령,) 병원에서 진료 받는 것이 건강을 돌보는 일이 되고, 사회 제도가 정비되는 일이 공동체가 발전하는 일이 되며, 철통같은 경찰제도가 사회 구성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 되며, 군대제도가 국가 안보를 지키는 일이 된다. 무한 경쟁이 생산적 노동이 된다. 제도적 장치들은 건강, 배움, 인간의 존엄, 독립심, 창조적 열정과 같은 가치들을 추구하기 위해 생긴 것일 터인데, 제도가 가치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건강, 배움 등 기타 가치들을 드높이는 길은 병원, 학교, 기타 시설 등의 제도에 얼마나 많은 자원을 투자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글에서 나는 ‘가치의 제도화’가 환경 오염을 유발하고, 사회적 양극화를 일으키며, 삶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근원임을 논증할 것이다. 이 세 가지 악영향이야말로 세계 문명을 퇴보시키고, (현대적 의미의) 비참한 삶을 일으키는 주범이다. 나는 물질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소박한 삶의 욕구가 제도적으로 생산된 상품에 대한 욕구로 뒤바뀔 때, 이러한 퇴보의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더욱 가속도를 내는지 설명할 것이다. 예컨대, 건강, 배움, 마음대로 걷는 일, 편안한 삶, 정서적 위안 등이 제도적 서비스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가치 인양 뒤집힐 때 (우리의 삶이 어떤 식으로 뒷걸음질치게 되는지 설명할 것이다.)
현재 횡행하는 미래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가 ‘가치의 제도화’가 가져다 줄 장밋빛 미래를 찬양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기에 (그들의 믿음과 달리) 정반대의 상황이 일어나는 상황을 철저하게 검증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러한 논증을 할 필요성을 더욱 느끼는 것이다. 우리에겐 삶을 더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고, 창조성이 넘치게 만들며, 건강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이끄는 지혜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것은 제도를 기획하는 전문기술자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끌어 낼 수 없는 가치를 일구어가는 지혜여야 한다. 우리에겐 현재 유행하는 미래학의 흐름을 뒤집을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나는 먼저, 가치관과 언어를 형상화하는 현대제도의 본성과 인간 본성이 서로 영향을 주며 규정된다는 과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학교’담론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국가의 전형적 관료기구들인 소비형 가정, 정당, 군대, 교회, 언론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만 다룰 것이다.
나는 학교의 ‘숨은 교육과정’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비학교화(사회를 학교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가 교육의 공공성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이는 비학교화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참다운) 가정생활, 정치, 안전, 신앙, 의사소통을 회복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분석을 위해 먼저, 1장에서 학교화된 사회를 비학교화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힐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파악한다면, 이어지는 다음 장들에서 하필 그 다섯 가지의 특별한 측면을 선택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교육 뿐만 아니라, 사회 현실 그 자체가 학교화 되었다.
잘사는 집 아이들이나 못사는 집 아이들이나 그들이 기대어 마지않는 학교에 다니는 돈은 대체로 비슷하다. 미국 20개 도시 중 못사는 지역이든 부유한 지역이든 학생 1인당 연간 교육비는 같은 수준이고, 못사는 학생에게 더 많은 돈이 지출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부유한 자든 가난한 자든, 학교와 병원은 그들의 삶을 이끌고, 그들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해주며, 무엇이 합법이고, 무엇이 불법인지 판단하도록 기준을 정해 준다. 이런 기구들은 모두 ‘(전문적인 학교의 도움없이) 혼자 스스로 공부하는 건 쓸모가 없어’, ‘스스로 치료하는 건 정말 무책임한 짓이야.’ ‘정부당국의 허락없이 조직된 공동체 조직은 반사회적인 것이야’ 라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이들은 모두 제도적 조치로 만들어진 기구들인 탓에 제도적 영향 없이 이루어낸 자율적인 성취들을 모두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개인 또는 공동체가 스스로 발전할 수 없는 정도는 브라질의 동북부 같은 (제도가 덜 발달한) 지역보다 웨스트체스터 같은 (제도가 발달한) 번화한 도시에서 더 두드러진다. 따라서, 나는 교육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비학교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2
사회복지 제도를 운영하는 관료들은 무엇이 우리 사회를 위해 가치 있는지,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일을 할 수 없는지 오직 자신들만이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 있다. 그들은 그들만이 사회적 상상력에 대한 전문적 역량, 정치적 권력, 재정적 능력을 갖추고 있는 양 행동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오만함 때문에 근대적 의미의 빈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전에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소되었을) 소박한 수요가 생길 때마다 이를 일일이 제도적으로 해결하려다 보면 예전에는 가난으로 인식되지 않았던 일이 새로운 ‘가난’이 되며, 어떤 제도의 도움을 못 받는다고 해서 ‘빈자’로 규정되지 않았던 이들이 새로운 ‘빈자’가 된다.
(예를 들자면,) 불과 10년전까지만 하더라도, Mexico에서는 자기 집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삶을 마감하고, 죽었을 때, 이웃들이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삶이었다. 제도적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있을 때를 꼽으라면, 망자(亡者)의 영혼을 축복하기 위해 교회의 도움을 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죽음이 제도적으로 해결되고 있는 지금, 자기 집에서 태어나 죽는 사람은 아주 가난해서이거나, 아주 부자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오늘날, 의사(병원)는 죽어가는 과정을, 장의사(장례식장)은 죽은 후의 과정을 제도적으로 관리한다.
기본적인 일상의 욕구(필요)조차 제도적으로 생산된 상품을 소비하는 일로 바뀌어 가기 시작하면, 상품을 만드는 전문인들이 만든 기준에 따라 제멋대로 ‘가난’이 정의된다. 이런 정의가 성립하고 나면, ‘가난’이란 ‘이것이 이상적인 소비의 기준이야. 최소한 이거하고 요거는 갖추고 살아야지’라고 광고에서 떠들어대는 수준을 따라갈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2010년 갓 결혼한 부부의 ‘가난’은 ‘드럼 세탁기를 구입하지 못하는 일’이 된다.) (in some important respect 中 for example in educational respect) 멕시코에서 빈민이란 3년간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 정도지만, 뉴욕에서 빈민이란 12년간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빈민은 항상 사회적으로 힘이 없는 존재였다. (제도적인 도움을 보완하여 이들의 힘을 키워 줄 수 있을 것 같지만,) 제도적 보호가 강화될수록 그들은 더욱 의존적인 존재가 된다. 심지어는 단지 가난할 뿐이었던 그들이 제도적 도움으로 인해 오히려 정신적으로 무기력해지고, 자립 능력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안데스 산맥의 고원에 사는(궁벽한 곳에 사는) 농민은 보통 지주나 상인들에 의해 착취 당하는 사회적 약자로 사는데, 그들이 리마(대도시)로 이사하면 또다시 학력이 짧다는 이유로 정치적 보스에게 의존하는 약자가 된다.
이처럼 삶의 조건에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무력함에다가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의지조차 꺾인 무기력함이 겹쳐 근대화된 빈곤이 나타난다. 이러한 근대화된 빈곤은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현상이며, 시대 발전을 거스르는 원인이 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각국의 빈부격차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빈곤의 근대화는 대체로 미국의 도시들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미국의 도시만큼 빈곤을 제도적으로 해결하는 데 큰돈이 드는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큰 돈을 들이고도,)
미국의 도시만큼 그런 노력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사회제도에 의존하게 만들고, 그 노력이 부족해서 더욱 분노를 일으키며, 그런 도움을 받지 못해 더욱 좌절하게 하고, ‘좀더! 좀더! 좀더!’ 요구하게 만드는 곳도 없을 것이다.
미국의 도시만큼 ‘아! 돈만으로는 가난을 감당할 수 없구나!’하고 확실하게 느끼게 하고, 결국 ‘제도를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해!’라고 결심하게 만드는 곳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흑인은 물론 이민자들까지도 세심한 정책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지원은 불과 2세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준이다. 제 3세계 사람들이 볼 때, 이러한 지원은 기괴해 보일 정도로 대단한 것들이다. 예를 들자면, 미국의 빈민은 자녀가 17살이 될 때까지 전문 지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로 복귀할 수 있게 해 주는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다. 몸이 아플 때, 병원에서 하루에 60달러가 넘는 병실을 배정받아 치료를 받을 수도 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3개월 정도 일해야 간신히 60달러를 받을 수 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제도적 지원인가!)
그러나 이러한 보호가 더 세심해질수록 사람들은 제도에 더욱 기대게 될 뿐이며, 그들 자신의 공동체 속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와 자원을 밑천삼아 그들 자신만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기회를 더욱 잃게 만들 뿐이다.
(점점) 근대화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빈민들을 궁지로 모는 곤경에 대해 말할라치면, 미국의 빈민들이 겪는 처지는 매우 독특하다. 일단, 제도적인 위계를 전문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빈민에 대한 도덕적 원조가 절실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생기면, 미국의 빈민들은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 부어도 복지제도의 파괴적인 속성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미국의 도시 중심부에 사는 빈민은 고유의 경험덕분에 학교화된 사회에서 사회복지법이 어떤 결함을 일으키는지 밝혀낼 수 있다.
대법원판사 윌리엄 더글러스는 ‘제도를 수립하는 유일한 방법은 재정을 지출하는 일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명제가 참이라면, 다음의 추론도 참이다. 지금처럼 건강, 교육, 복지에 쏟는 재정 지출을 멈춰야만, 멍청한 제도적 처방으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 - 빈곤의 확산 -을 막을 수 있다.
이제, 위와 같은 명제를 마음에 깊이 새겨두고, 연방 정부의 원조 프로그램을 평가해 보자. 가장 적절한 경우가 1965년부터 1968년 사이에 약 600만명 아이들의 불우한 처지를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30억 달러가 넘는 돈이 학교에서 집행된 사업이다. ‘타이틀 1’으로 알려진 이 프로그램은 교육 분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거액의 돈이 투자되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중산층의 동급생들과 견주어 보면 오히려 정책 목표 집단의 수준이 뒤떨어지기 까지 했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중에 담당 관료들은 (애초 정책 대상이었던 600만명 이외에도) 1천만 명의 아이들이 경제적, 교육적 애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도 했다. (연방재정으로 소기의 목적조차 달성하지 못했으면서) 앞으로 (이런 목적의 프로그램을 위해) 더 많은 연방재정을 집행할 이유만 늘어나게 된 것이다.
빈민을 위한 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조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이 총체적으로 실패한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의미 있는 성과로 인정받을 만큼 600만명의 학업성취도를 개선하기에 30억 달러조차 충분하지 않았다.
2. 재정이 부적절하게 집행되었다. 즉, 차별화된 교육과정, 더 나은 집행체계, 빈민아동에 대한 보다 효율적인 집행, 더 많은 연구를 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렇게 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학교 교육을 통해 교육적 불이익을 구제하려는 노력은 성공할 수 없다.
학교 예산으로 모든 비용이 지출되었으므로, ‘1’번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 돈이 정말 ‘불우한’ 아이들이 많은 학교에 배정되긴 했지만, 그 돈이 오로지 바로 그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서만 집행되지는 않았다. 그 돈의 혜택을 받아야 할 아이들은 (고유예산에 연방재정을 추가 지원받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자금은 (불우한 처지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뿐 아니라, 그 학교 모든 아이들을 양육하고, 계몽하고, 진로지도하는 비용 등으로도 쓰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기능들을 수행하기 위해 (연방 재정은) 학교 예산 안에서 복잡하게 뒤섞여 학교 시설을 갖추는 데도 집행하고, 교육과정을 편성하는 데도 쓰고, 교사와 행정업무 종사자들의 수당 챙겨주는 데도 쓰는 등 기타 학교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부분들이 기능하는 데 사용된 것이다.
(이 지원금은 애초에 기획했던 바대로, ‘불우한’ 학생들을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불우한’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녀야해서 ‘불우한’ 부유한 아이들이 만족할 때까지 불합리하게 돈을 조달한 것이다. (진짜 불우한 학생이 아닌 가짜 불우한 학생에게 돈이 집행되었다는 재담인 것 같음) 정작 학습 부진 상태에 있는 빈민 아동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돌아간 몫은 지원금 중 소액에 불과했다.
‘이유 2’처럼 재정이 부적절하게 집행되었다는 것도 진실이다. 그런데, 학교는 특히 그러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학교는 그 속성상 보다 특별한 도움을 쏟아야만 뒤처지지 않는 아이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 학생을 위해) 특별한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반을 나누어 수업하고, 더 많은 시간 수업 받도록 하는 것은 비싼 돈을 들여 차별을 키우는 짓이라 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국방부도 아니고, 교육부나 보건복지부(HEW)가 30억달러나 되는 소중한 세금을 날려버리는 꼴을 너그럽게 덮어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렇다고 현 정부가 (이런 프로그램을 중단하자니) 교육자들의 원성을 듣게 될 것이 뻔하다는 걸 알고 있다. 미국 중산층은 그런 프로그램이 중단된다 해도 손해 볼 것이 없다. 그러나 가난한 부모들은 잃을 것이 많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 자금이 그들의 자녀를 위해 보다 목적의식적으로 집행되었으면 좋겠다고 요구하게 될 것이다. 예산을 줄이면서도,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혜택을 늘릴 수 있는 가장 논리적인 방법은 밀턴 프리드먼 등이 제안하는 수업료 보조금 제도이다. 프로그램 자금을 수익자에게 전달하면, 그 수익자는 배우는 데 필요한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구입증서를 교육과정에 적합한 것만 살 수 있도록 제한한다면, 그 제도는 훨씬 나은 제도적 평등을 보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사회적 권리의 불평등이 더 개선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학교가 질적으로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해도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설령 그들이 같은 나이 때 같은 학교에서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중산층 아이들에게는 흔한 교육적 기회를 빈민층 아이들이 경험하기는 힘들다. 중산층 아이들이 누리는 유리함은 가정에서의 대화, 책읽기, 방학 중 여행, 남다른 자존감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걸쳐서 생겨난 것이며, 이런 것을 누리는 아이는 학교 안팎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적으로 학교에 의존해서, 학업성취도를 높이려는 학생들은 뒤쳐질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스스로 배움을 일구어 갈 자원이 필요한 것이지, ‘당신은 너무 뒤쳐져 있어서 제도적 혜택이 필요하군요’하고 증명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다.
이상에서 말한 것들은 가난한 나라에서든 부유한 나라에서든 모두 참이다. 다만, (빈부에 따라 문제점이) 다른 모습을 띄고 드러날 뿐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근대화된 가난’은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다 눈에 띄게 영향을 끼치지만, 아직 깊이 있게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라틴 아메리카에 사는 아이들의 3분의 2는 5학년을 마치기도 전에 학교를 떠난다. 하지만, 이 ‘탈영병들’은 미국에서 탈락한 아이들에 비해 그렇게 형편없지 않다. (남미에서 학교를 그만 둔 아이들은 같은 선택을 한 미국아이들에 비해 훨씬 덜 의존적이고, 덜 무기력함)
고전적 가난은 (근대적 가난에 비해) 훨씬 안정적이며,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고전적 가난을 겪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은 경제 개발국가와 경쟁적 소비국가를 향해 비약하는 단계에 도달했으며, 따라서, 근대화된 빈곤을 향하고 있다. 이들 국가의 시민들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를 꿈꾸며 살게 되었다. 이들 국가는 6년에서 10년을 의무교육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멕시코나 브라질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조차 교양있는 시민이 되기 위해 적절한 교육기간을 ‘미국 기준’으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학교에서 배울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국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학교에 넋을 잃은 나머지, 자기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을 보면 열등감을 느낄 만큼 학교화 되었다. 학교에 대한 이들의 신앙이 열렬해질 수록 사람들은 이중의 늪에 빠지게 된다. (자신은 제외될 것이 뻔한) 소수를 위한 교육에 공공자금을 쏟아 붓는 현실을 살게되며, 사회적 통제를 더욱 잘 받아들이며 살게 된다.
역설적으로, 보편교육이 절대적이라는 믿음은 학교교육을 소수만이 받을 수 있는 나라, 앞으로도 그럴 나라에서 더욱 확고하다. 아직까지 라틴 아메리카의 대다수의 학부모와 아이들은 (학교에 진학하는 길이외에) 다른 길을 선택하고 있다. 분명히 후진국은 선진국에 비해 국민소득 중 학교와 교사에 투자하는 비중이 더 높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투자총액은 국민들이 4년 동안 학교다닐 수 있는 만큼을 보장하기에도 충분하지 못하다. Fidel Castro는 쿠바에서의 모든 삶 그 자체가 배움이 될 것이므로, 1980년이 되면 모든 대학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하는 등 쿠바를 ‘비학교화’라도 할 것처럼 말하곤 했었다. 하지만, 남미의 여느 나라들처럼, 쿠바 역시 법적으로 학교 다니도록 정해진 기간에 학교 다니는 일은 모두에게 의심할 여지없이 중요한 삶의 목표가 되고 있다. 이런 삶의 목표가 실현되지 않는 것은 단지 이 목표를 실현할 자원이 충분하지 않은 탓일 뿐이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다.)
제도적 조치를 늘려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발상은 그것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모두 기만이다. 미국처럼 제도의 혜택을 받았건, 남미처럼 제도의 혜택이 아직 약속으로만 존재하건, 하나의 기만이 다른 기만을 보완하며, 삶을 왜곡하게 된다. 예를 들면, 미국의 빈민들은 12년간의 교육을 받는 동안 점점 무능해지고, 남미의 빈민들은 12년간의 교육을 받을 수 없어서 희망을 가질 길도 없이 뒤처지는 것이다. 미국이든 남미든 빈민이 의무교육제도의 혜택으로 평등해질 순 없다. 어느 쪽에서든 학교제도가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빈민은 배움을 스스로 일구어갈 의욕을 잃게 되거나,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회에 반교육적 영향을 끼치지 않는 학교는 없다. (학교가 있는 사회에 사는 구성원들은) 학교만이 ‘교육’을 다룰 수 있는 전문적인 제도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에서) 학교조차 교육에 실패할 경우, 사람들은 ‘아, 교육은 정말 돈이 많이 들고, 복잡하고,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구나, 이렇게 해도 안 될 때 조차 있다니.’하는 생각만 굳혀 가게 된다.
학교는 교육을 위해 그 사회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금, 인재, 좋은 뜻을 죄다 독점하며, 다른 제도들은 교육에 관여하지 못하게 한다. 노동, 여가, 정치, 도시에서의 삶, 심지어 가족의 삶 등 이 분야들이 전제하는 관습과 지식마저 학교에 의존하게 된다. (가령, 어떤 직업을 갖기 위한 준비는 학교에서 직업전문과정을 6주동안 이수하는 일이 된다든지) 동시에 학교와 이에 기생하는 다른 제도들을 유지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게 된다.
미국에서 1인당 학교교육비는 1인당 병원치료비만큼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그러나, 교사와 의사가 더 많이 증원되고, 더욱 그들의 전문성이 신장될수록, 그 성과는 점점 떨어졌다. 45세 이상에게 집중된 병원치료비는 지난 40년 동안 몇 차례나 두 배씩 뛰어 올랐지만, 그 성과는 고작 평균수명을 3% 증가시키는 데 그쳤다. 교육비 증가로 생긴 결과는 더욱 형편없었다. 오죽하면 올 봄, 닉슨 대통령이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기 전 꼭 읽기는 마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겠는가.
미국에서 중고등학생 전원에게 교육자들이 평등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수준까지 제도적 혜택을 주려면 연간 800억 달러가 필요하다. 이는 현재 지출되고 있는 360억 달러의 두 배를 훨씬 넘는다. 보건 교육 복지부와 플로리다 대학이 뽑은 독자적 집계에 의하면, 1974년에는 이 수치가 현재 450억 달러 정도인 견적을 넘어서 107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끊임없이 늘고 있는데, 여기에 드는 어마어마한 비용은 이 수치에서는 완전히 빠져 있다. 미국은 1969년에 베트남에 군대를 배치하는 돈을 포함해 국방비로 800억 달러를 쓴 바 있는데, (대표적인 부국인) 미국조차 평등 교육을 실현할 만한 예산을 대기에는 분명 너무나 가난하다. 대통령 직속 학교재정연구회는 증가하는 (교육)비용을 지원하는 방법, 이런 비용을 줄이는 방법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으면서, 이리 저리 회피할 궁리만 한다.
평등한 기회를 주는 의무 교육은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실현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남미에서 대학졸업생 1인당 공교육비 지원액은 중간 정도 되는 시민에게 쏟는 돈의 350배에서 1500배에 달한다. (여기서 중간 정도 되는 시민이란 가장 가난한 시민과 부유한 시민의 중간 쯤 되는 사람이다.) 미국에서는 그 정도로 차이가 나진 않지만, 차별은 더욱 심각하다. 상위 약 10% 정도 되는 가장 부유한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내는데, 그 학교에 재정적으로 도움을 줌으로써, 그 돈이 아이들을 위해 쓰이게 한다. 게다가 그들은 하위 10% 가정의 아이 1인에게 쏟아 붓는 공공자금에 비해 10배도 넘는 돈을 확보하고 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부유한 집 아이들이 더 오래 학교에 다니기 때문이며, 대학에서 1년 공부하는 비용은 고등학교에서 1년 공부하는 비용보다 터무니없이 비싸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립대학은 적어도 간접적으로 세금에서 나온 돈으로 재정에 도움을 받고 있다.
의무교육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양극화한다. 게다가 범국가적인 카스트 제도에 따라 세계의 각 나라에 등급을 매긴다. 각 국가가 지닌 교육적 권위에 따라 범국가적인 카스트가 생기며, 그 교육적 권위는 각 국가의 시민이 평균적으로 얼마나 더 많이 학교에서 의무교육을 받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순위매기기는 1인당 국민총생산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다른 이유의 순위매기기보다) 훨씬 끔찍한 것이다.
학교의 역설은 분명하다. 학교에 쏟아 붓는 돈이 많아질수록 온 세상이 더욱 황폐해지는 것이다! 이 역설은 반드시 공식적으로 의제가 되어야 한다. 물질문명이 끊임없이 상품들을 쏟아내는 흐름을 되돌리지 않으면, 생화학적 오염에 의해 물질 세계가 곧 파괴될 것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동일한 논리로, 개인과 공동체의 생활세계가 보건, 교육 복지부의 (제도적) 오염으로 위협받고 있음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은 복지제도를 의무적으로, 경쟁적으로 소비하는 풍토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부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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